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하기야 그의 입장에서 민초라는 것은 치약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이 사탕을 건네버리면 그녀에겐 포상이 되어버릴 테다. 애초에 새슬은 아무것도 안했으니 포상이고 뭐고 할것도 없지만, 아무튼 그는 초조해졌다. 그래서 실수를 저질렀다.
" 그, 그, 그럼 불닭맛 소스는 어떨까?! "
사탕을 까고는 그 위에 불닭소스를 들이붓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죄질이 무거운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음식으로 장난치기! 그는 훗날 지옥에서 저 끔찍함 음식을 직접 맛봐야하는 고통에 몸부릴칠 것이다.
본인도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 새슬과 사탕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번갈아가면서 봤다.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새슬의 입장에선, 그대로 방관하고 있다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 안 돼. 적어도 내가 있는곳에서 해. 삐끗하기라도 하면 내가 구해줄 수 있을거야. "
그는 본인이 다치는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남이 다치는 것엔 민감해했다. 이 무슨 모순인가 싶지만 그는 이유같은건 설명하려 들지 않고 '아무튼 그럼!' 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올라 걸터앉았다. 그녀만큼 위태한 모양새였지만 서로간에 그런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건 일상다반사였다.
" 토끼랑 선인장이라... 공통점이 많으니까 그런걸로 하자! "
과연 어떤 공통점이 둘 사이에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갈까마귀와 책상만큼은 공통점이 있겠지.
" 그건 맞지! 탁 트인곳이 훨씬 좋기는 해. "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야외수업을 해도 좋을텐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이 중얼거리며 난간에 눕듯이 했다. 하늘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하는 몸짓이었다.
" 오늘은 뭐할래? 멍때리기? 구름 수 세기?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학교가 부숴지지 않도록 누가 안전하게 던지나 내기하기? "
어째 마지막에 정신나간 내기가 튀어나온 것 같ㅈ만 무시하도록 하자. 안전하게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방법이 개발된다면 노벨상을 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건 지나가는 돌멩이도 알 사실이다.
얼굴에 담요를 뒤집어쓴 게 제법 웃겨서 잠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는 것은 생략하고, 저를 '후배'라고 부르는 것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 이래도 되나? 만 19세 이하 청소년이 재학 중인 학교 교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선배고 학생회장인데. 한세인의 안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유교 보이가 눈을 뜨고 있었다. 아니 학생회장이고 뭐고 알게 뭐람. 학생회장 그러니까 3학년 붉은 명찰을 달고 계신 온지구 선배님을 쳐다보며 한세인의 뇌는 빠르게 그리고 정신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담배를 피고 있는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아니 그 전 어제 일본 양키 영화를 보았을 때부터 문제였을 지도. 한세인은 최근에 본 영화와 지금 상황을 겹쳐서 보고 있었으니까. 담배를 끄는 장면은 조금 클로즈업 하고, 불쌍한 어린 양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카메라를 조금 멀리해서...
"아, 옙."
그런 도중 불려오는 제 이름에 정신을 차렸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떨떠름해 뵈는 목소리가 나왔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학생회장의 표정과 목소리에 분노는 없다는 점? 그리고 그 한치의 흔들림 없는 차분함이 한세인을 더 두렵게 하는 데 있었다. 보통 화를 더 안내는 놈이 무섭고 잔인한 최종 보스 같은 거 아니었나, 그래 어제 본 영화에서 그랬지.
"아니 거 자국 좀 난거 가지고 수선 맞기면 되는 걸 새로 사라는... ..."
젠장. 담요 그거 얼마 한다고 발끈해서 생활감 넘치는 말이 튀어나간 거냐고. 사실 얼마 피우지도 않은 장초를 짓밟을 때부터 신발 바닥의 상태까지 온갖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한세인은 넘쳐흐르는 자괴감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와중에도 한편에서 만화 속 제벌 3세가 재수 없는 대사와 함께 돈을 뿌리고 쌩 가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꼭 여기서 주인공은 돈은 됐으니 사과하라며 붙잡지... 한세인은 딴색각들을 떨쳐내려 애쓰며 할 수 있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집에 담요가 많아서요, 별로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학생회장 선배님."
아~, 뭐라 할 틈도 없이 민트색 막대사탕 위에 붉은 소스가 흩뿌려졌다. 아주 잠깐의 정적, 흘러내리는 소스를 응시하는 나른한 눈빛.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경악보다 호기심에 가까운 것을 담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에 맞지 않는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두어 번 눈을 끔뻑이며 당황한 연호와 사탕(이제 저걸 사탕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을 번갈아 보더니 씩 눈웃음짓는 것이다.
“호야는 대담한 시도를 하네~, 아직 입에 안 대봤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의외로 맛있을지도 모르지이.”
먹을 거야? 호야가 먹을 거야? 호야가 안 먹으면 내가 먹을래. 연호의 공작은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간 듯, 여전히 새슬의 시선은 막대사탕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본다면 쟤는 불닭소스라는 걸 애초에 접해 본 적은 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지나치게 태평한 얼굴이었다.
“치사하다아~.”
한 층밖에 안 되는데. 평소에 오르는 나무보다도 어쩌면 간단할 것 같은데! 작게 툴툴대며 난간 밖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당겨오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느끼는가 싶더니, 금방 난간 위로 훌쩍 뛰어올라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럼 지금은 호야가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배시시 웃어 주고는, 두 팔을 양 옆으로 벌린 채 두어 걸음을 걸었다. 그닥 위태로운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안 좋아서 떨어진다고 해도 잘 구르면 어떻게, 괜찮지 않을까? 운동장을 바라보며 터무니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삼킨다.
“오늘은ㅡ 글쎄, 호야는 뭐 하고 싶어?”
난 여기서 계속 구름을 봐도 좋고, 그냥 이야기를 해도 좋고, 다른 곳으로 가도 좋은데. 아, 다이너마이트가 진짜 있으면 호야가 이야기한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실패하면 조금 슬프겠지만. 한 발짝, 두 발짝, 좁은 난간 폭을 내딛는 자신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아, 그러고보니 싸가지 없어 보이니 같은 반의 한 여자아이가 후배들한테 함부로 반말을 쓰지 말라고 했던 게 뒤늦게 머리를 스치듯 지나간다. 지구는 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이다 그의 입이 떨이지길 가만 기다렸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인상이 찍혔으려나. 2학년 사이에 안좋은 소문이 돌으려나. 그다지 상관은 없었고 새삼스러운 사실이었으니 헛수고라고 미리 말을 해주어야 할까. 무정한 얼굴에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 아이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떨떠름해 보이는 그의 대답 덕에 지구는 죄책감을 느끼며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내 탓인가.
보통은 새로 사준다고 한다면 냉큼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은데 이 아이는 좀 달랐다. 왠지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가 쏘아붙이자 지구는 입을 꾹 닫고 가만 경청했다. 그렇구나. 이 정도는 조금 수선하면 괜찮아지는구나. 평소에 옷에 담배빵이 생겨도 그저 신경쓰지 않고 산 탓에 무지했다. 지갑은 도로 넣고 어깨에 들쳐 메었던 담요를 펼쳐보며 자국이 난 자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런 담요 뒤에는 앓는 소리를 내는 세인이 있었지.
"그러면 내가 가지면 될까요, 한세인 후배님."
자국을 살펴보고 다시 담요를 손에 쥐었더니 사양하고 있는 세인이 보인다. 목소리는 온화한데, 보기엔 무언가 감정을 꾹 누르고 있는 듯한. 소년. 지구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건지 공감하기 어려워 뒷머리를 긁적였다가 그런 말을 지껄였다. 나 준다는 얘기 아니었나. 더럽혔으니 너나 가져 같은. 지구는 입이 무거웠으니(정확히는 입술끼리 떨어지는 게) 세인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며
"미안."
그러고보니 어느 쪽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에. 이런 쪽에서도 눈치가 없을 만큼 사회생활에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인간관계가 힘들었지, 어른들은 단순했으니까.. 아무튼 담요를 맞은 건 이쪽이지만. 누가 담요를 맞추던 배구공을 때리던 학교에서 담배나 피고 있던 쪽이 잘못이겠지. 반박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허리를 약간 숙였다.
"죄송하니까 보상하겠습니다."
무정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사과에 낯선 사람같진 않아보였다. 뭐든 그런 일이 잦았는지 알 바는 아니겠지만. 일단 신분을 떠나서 일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었으니까 확답을 듣기 전까진 담요를 건네주고 싶진 않았다. 지구의 어두운 눈이 깜박인다.
주원이 난동을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에 아랑이 안 된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것을 멈추고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훌쩍거린다. "아랑은 되지만 나는 안 된다니. 쿨쩍." 그 이유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원으로서는 그저 아쉬울 뿐이었나보다.
아랑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해줄까.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어주자 주원은 환히 미소지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으, 윽. 물론이지.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나중에 혼자 읽을 수 있지만, 아랑이랑 함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있는게 아니니까."
좀 더 길게 있었으면 좋겠지만. 하고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했다간, 너무 속내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이다! 주원은 이 귀여운 후배를 언제까지도 끌어안고 쓰다듬은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스스로는 거기까지는 들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미 훤히 드러났을지 몰라도. 이어 군용담요를 갖고 온 주원을 보고 아랑이 까치발을 들자 주원은 익숙한 듯 상체를 숙이고 그녀가 쓰다듬을 수 있는 높이로 머리를 낮춰주었다. 아랑의 작은 손이 주원의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자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것이 기뻐서인지 주원은 "으헤헤." 하곤 헤벌죽 웃음짓는다.
그녀와 함께 부실을 나와 학교 정원쪽으로 향하니,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원은 벚나무들이 줄지어 잘 보이면서도 시선 정 가운데에 커다란 벚나무가 보이는 곳에 돗자리(가 아닌 군용담요)@ 를 반으로 접어 깔아둔다. 크기가 왠만큼 되니 반으로 접어도 둘이서 앉기엔 충분했다. 주원은 좀 더 접어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좁히게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굳이 왜 더 접었냐며 혼날 것 같아 적당히, 양심적으로, 두 번만 접어 펼쳐둔 것이었다. 접지 안고 폈다간 엉덩이가 아플지도 모르니까.
주원은 앉아 봄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벚꽂 가득 매달린 벚나무들을 응시했다.
"좋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린다. 스스로 의식하고 말한 것이 아닌, 그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겠지. 이어 아랑이가 소원에 관해 묻자
"응. 1학년 때 한 번. 2학년 때 한 번. 두 번 다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빌었어. 아랑이와 만난덕에 2학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말한다. 또, 아랑이의 폭신하고 귀여운 분홍 머리를 쓰다듬으려 오른손을 뻗다 안 된다고 혼날까봐 "으으!" 하고 아쉽다는 듯 괴로운 신음을 흘리곤 손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