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보다 주어진게 적으니 평균에 맞추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사는 것뿐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좀 더 여유롭게 살듯이. 평균은 항상 일정하고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살아갈 뿐이다, 라고 말하면 너무 삭막한 느낌이긴 하지만. 부족한 사람이 더 일해서 맞추는건 원래 당연한 얘기지.
" 항상 하는 일인데 과로까지야. 오늘은 쉬니까 바로 집으로 가려고. "
학교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10시까지 하고나서 집에 도착해 씻으면 11시 정도가 되어있는게 보통이다. 다음날 등교를 위해서 적어도 한시까지는 자야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시간 남짓. 점주님이 챙겨주시는 폐기도시락을 먹고 그날 배운 것들을 몇번 훑어보고나면 주어진 시간은 다 지나있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학교를 갈 시간. 정신없이 하루를 사는지라 시간도 굉장히 빠르다.
" 또 그 신상품 먹여볼라는거지? 얼마전에 나온 그거. 그거 절대 안먹어. 절대! "
하굣길에 편의점에 가자는 제안에 나는 질색팔색하면서 얘기했다. 이미 그것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 나는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는데. 물론 진정 음료를 사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완벽한 거절의 의사를 표한 나는 교정에 일렬로 죽 늘어선 벚꽃나무들을 보았다. 신학기라서 그럴까 중앙의 큰 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 너도 저 벚꽃나무에 대한 전설 알지? 소원 빌어본적 있어? "
사라라면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실없는 소리라고 하면서 안빌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끌고가서 빌었으려나. 물론 나는 소원을 빌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고 있었다.
반박할 수가 없는 논리다.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누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면 저 말 해야지, 하고 가슴 속에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말하면서 웃으면 멋없어요."
그리고 자기도 웃어버린다. 이 말 하기 직전까지 웃음을 꾹 참았던 모양이다. 소리내서 웃는다 해도 퍽 작은 웃음소리다. 오히려 소리없이 웃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 때 학교 빠지는 건 결석도 아니래."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다. 애초에 교칙이 엄한 편도 아니다. 수능 끝나고 빠지는 것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주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게다가 아주 건전한 활동 아닌가. 체력 단련, 우정 도모, 자연과의 공감... 최민규마저도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 있는 수식어를 찾아낼 지경이니 말 다 했다. 겨울 산행이라 해도 낮은 산이면 덜 위험하고.
아참 해인주! 답레를 쓰다가 "중학교 때 철모르고 내가 받는 용돈을 반 나눠주겠다고 했다가, 해인한테 꿀밤을 얻어맞고 며칠 정도 해인이 말을 받아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라는 문장을 쓰게 됐는데 이 부분 피드백 괜찮을까..? 적폐캐해라 매우 긴장됩니다... 캐붕/관계붕괴 등의 위험이 있다면 꼭 말해줘, 수정할게!
선생님 흉내는 처참하게 망했는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따라온다. 조금 놀란 눈이 됐다. 곧 그럴 필요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칭은 이 공격을 위해 추진력을 얻으려는 목적이었군. 말이 공격이지 유쾌하기만 했다.
민규의 말에 불편하지도 않았던 마음이 더 편해졌다. 생존확인 겸 학교에서 연락을 돌리는 일은 있다던데, 그때 연락만 잘 받으면 되는 것 같았다. 친구랑 등산하고 있다고 하면 오히려 칭찬 받는 거 아닐까.
"좋아, 그럼 빠지자."
굳은 결심이 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하진 않았지만, 인생 첫 무단결석을 할 생각에 조금은 두근거렸다. 좋은 쪽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정작 일탈 같은 일탈은 기를 쓰고 막는 어른들이니까. 그렇게 말리는 일을 할 정도로 의욕이 있지는 않아서 여태 안 했는데, 무의식 중에 원하고 있었나?
"─…" 사라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철모르고 내가 받는 용돈을 반 나눠주겠다고 했다가, 해인이 한 달 동안이나 삐져버리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그땐 속모르고 해인이 마냥 원망스러웠는데, 고등학생이 됐다고 어설프게 머리가 굵어서 그때 해인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이젠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해인이 아둥바둥 사는 것에 별 코멘트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어설픈 이해의 한 맥락이었다.
"아둥바둥하다가 앓아눕거나 다치지 마시고. 병원비 나간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것은 걱정되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쉰다니 다행이네."
해인이 철벽을 치자, 사라는 들으란 듯이 혀를 쯧 하고 찼다.
"고추튀김맛 프라이칩을 먹여보려고 했는데 거 참 아깝게 됐네."
그 무슨 끔찍한 혼종! 그러나 사라는 끝끝내 그 끔찍한 혼종을 먹일 심산인지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 편의점은 꼭 들리자구."
하고 발걸음을 떼려던 사라는, 떼어놓던 발을 원위치시켰다. 해인이 자신을 따라 발을 움직일 기색이 없이 어딘가로 시선을 두고 있었던 탓이다. 사라 역시도 발걸음을 멈추고는 시선을 돌린다. 교정에 만발한 벚꽃이 참 아름답다. 1학기에서도 며칠 정도만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이다. 예쁘다- 하고 무심결에 중얼거리던 사라는, 해인이 툭 꺼낸 말에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엥? 어... 그런 게 있었어?"
...그러나 이것은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라 작년 이맘때에도 거의 똑같이 나눴던 대화다. 구구단을 25단까지 외워뒀다면서 뭐지 이 바보는?
물론 얼마전에 몸이 아팠던건 비밀이다. 아무리 학생이라 팔팔하다지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보면 몸이 축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게 아프지 않게 관리는 하고 있지만 하루 정도 몸살이 나는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집에 가서 약 먹고 푹 자면 낫는 것은 역시나 팔팔한 고등학생이라 가능한 일이다.
" 절 . 대 . 안 . 먹 . 어 . "
강경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지만 그걸 끝내 먹일 심산인것 같았다. 그리고 이 밀당의 결과물은 결국 내가 져서 한입 먹게 될 것이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였으니까.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사라의 눈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듯 깜빡인다. 이것 봐라?
" 허어? 내가 작년에도 말해줬는데 그걸 까먹었단 말이야? "
맨날 구구단을 25단까지 외웠냐느니 다음엔 더 외워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배사라씨. 그럼에도 이런 쪽에는 영 기억력이 없는듯했다. 아니 기억력이 없는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머리에서 지웠다는게 더 정확하겠지. 이미 학교에서 배울게 없는 수준인데 기억력을 논하는게 무의미한 수준이다. 나는 벚꽃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 저기 저 큰 벚꽃나무 보이지? 저기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거기에 소원이 담긴 쪽지를 넣고 간절히 빌면 이루어준다는, 그런 전설이 있다고 하더라. 주변 친구들이 들떠서 얘기해주고 그러지 않아? "
아마 말해줬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거나 그런 것이겠지. 나는 벚꽃나무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세인은 오늘따라 날씨가 좋은 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되도 않는 소리로 답지도 않게 낮잠도 자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교실에서 나와, 아예 본관 건물 밖으로 나와 어슬렁 어슬렁 산책을 시작한 것을 막심이 후회했다. 저에게도 좋은 날씨는 남에게도 좋은 날씨인 것을, 반찬투정을 하는 아홉 살 꼬맹이나 반려견을 데리고 걷는 노인 남녀노소 그러니까... 제 눈앞의 대한민국 수도권 산들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에게도 날씨는 좋았을 것이다. 그래, 빌어먹을 담배 피우기 좋은 날씨지.
아아, 들리나요? 하느님 부처님 옥황상제 제우스 오딘 브라흐마 ... 들리십니까 똑똑? 신은 계십니까? 벚나무 안에 계신 겁니까?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에 거주 중인 열여덟 살 한세인은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무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뒤뜰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회장과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적어도 다 피우고 난 후나 막 피우려던 참이면 모른척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지금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갈 수도 있겠으나 곤란하게도 담배를 문 학생회장과 눈을 마주친 동시에 마치 영화처럼 거센 바람이 한번 불었고, 자유를 원하는 담요가 힘 빠진 팔에서 벗어나 펄렁하고 학교에서 담배 피우는 양아ㅊ... 아니 학생회장의 쪽으로 스트라이크! 정확한 조준이었습니다!
"..... 아니, 저, 그, 때리지 말, 아니, 일부러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니 담요는 여기서 왜 날아간 것이며 학생회장은 왜 뒤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류은(동생)이가 좋아하는 담요인데 담배 냄새 배는 거 아냐? 동시에 서브컬처 중독인 한세인의 뇌에서는 수십 개의 담배를 문 양아치가 뒤뜰에서 학생을 폭행하는 수십개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사라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엄마를 축소복붙한 스타일인 잔소리꾼 여동생 사라한테 그런 종류의 일을 눈치채이는 것은 퍽 피곤한 것이었다. 어찌됐건 간만에 쉬는 날이 돌아왔으니 뭔가를 더 하려고 하기보단 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라였기에, 아마 오늘 귀갓길에도 사라는 부득불 진정음료 한 캔을 사서 해인에게 쥐어줄 것이다.
"논 자유에 모미 아냐."
라는 말로, 사라가 사주려는 것이 진정음료가 아니라 고추튀김맛 과자일 것이라는 해인의 오해에 장난스레 기름을 부으면서 말이다. 사라는 해인의 추궁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랬던가아─…"
어쩌면 그렇게 관심사에 없는 화제를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것도 저 놀라운 두뇌가 갖춘 고급 편의기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것이 사라를 멍청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지만. 여하간, 이렇게 지목이 되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 2년에 걸쳐 두 차례 강조되는 이벤트라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