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 했던가? 아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테다. 그가 항상 입에 달고사는 말이었으니까. 그는 지루함을 싫어했다. 혐오하는것 까지야 아니더라도, 지루함을 느끼면 곧잘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여느때처럼 지루하게 앉아서, 지루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루한 책을 펴고, 지루한 샤프를 움직여 필기를 한다. 하지만 오늘의 지루함은 도를 넘었다. 이래선 안돼.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는 끄적이던 샤프를 필통 속에 고이 집어넣고서 벌떡 일어났다.
" ...? "
열심히 수업을 하던 선생님은 잠시 그를 놀란 눈초리로 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수업 도중에 지루함을 느끼고 도망가는거야 일상다반사였다. 그의 신체능력을 따라잡기란 힘든 일이었으니, 모두 괜한 힘 빼지 말고 그가 나가는 것이나 기다리는 거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평범하게 나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문이 있는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의 지루함은 오늘 도를 넘었다. 그래. 지루하다는 말이 벌써 몇번이나 나왔던가.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을 테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없이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겠지.
드르륵,
하며, 미닫이로 된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다들 별 생각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저 '아, 쟤가 더웠나보구나' 라며 아무 일 아닌 것 처럼 넘기려고 했을 테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일어난 일은, 선생님의 입장에서 볼 때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 하하하!! 굿바이, 아듀, 사요나라다!! "
어딘가의 명대사를 읊으며 그는 창문을 넘어 위로 사라졌다. 다행히 뛰어내리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아무튼 창문을 넘었다는 것 자체가 뒤집어질 일이었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멍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몇몇 행동력이 투철한 아이들은 이미 창문에 달라붙어서 그가 벽을 잘 타고있는지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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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옥상까지 벽을 타고 올라가는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옥상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마자 보이는, 하얀 머리의 여자아이를 확인하고는 난간에 위태롭게 올라섰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더니, 머리부분을 그녀에게로 겨누었다.
그로부터 한참, 고요하기만 했던 옥상의 공기에 자그마한 이변이 생겼다. 창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저 아래에서 무언가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뒤이어 따르는 호쾌하게 웃음소리, 굿바이, 아듀, 사요나라다ㅡ!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다. 대탈출극이라도 찍기 시작한 걸까? 그게 아니면 누군가 드디어 괴도가 될 결심을 굳혔나. 숨을 삼키는 누군가의 음성이 경악에 가까운 것을 보아,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했나 보다. 뛰어내리는 건 재미있지만, 어딘가 하나라도 부러지면 썩 즐겁지 않던데.
여전히 드러누운 자세로 귀로만 상황을 파악하던 새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의 난간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도 고양이나 새가 아닌 틀림없는 사람의 기척이!
“아앗ㅡ, 살려주세요, 저는 억울합니다~.”
전혀 긴급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아 보이는 느릿한 말소리. 새슬이 나른한 웃음을 실실 흘리며 허공에 두 손을 내밀어 뻗는 시늉을 하고는, 냉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네, 아무래도 운이 좋은 날이었나 봐.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이 오늘따라 유독 반가운 이유는 왜일까. 헤, 하고 헤벌레 웃는 얼굴로 연호를 응시한다.
“호야, 오늘은 대담하네에ㅡ. 나도 다음엔 창문으로 올라와 봐야지.”
오늘은 무슨 수업이었어? 시덥잖은 이야기를 키득거리며 주고받는 땡땡이 동지에게 자, 내려와~ 하며 손바닥을 뻗는 모습이 퍽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딱 좋은 시간에 왔네. 봐봐ㅡ. 저기에 귀여운 구름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면,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는 몽글한 구름이 한 덩이. 뭐가 귀엽다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새를은 구름을 가지고 이것저것 상상하며 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민규도 덩달아 점프하며 글 쓰는 제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퍽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여기 떡볶이 맛있어요'가 아닌 'ㅇ• _\ ㄱ ㅣ ••'. 천장 위에 의미없는 펜자국이 쿡쿡쿡. 닳아버리는 펜촉까지 다다른 최민규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5년만 어렸다면 진짜 점프해서 천장에 글을 쓰려 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다시 벽에 시선을 짧게 두었다.
"벽에 아무거나 써볼래?"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그저 미련에 불과하다. 아무리 1년이 한참 남았다 해도, 1년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조금은 아쉬워지기 마련이었다.
"세상에, 자비로우셔라.."
옅게 웃으며 주인집 아주머니가 떡볶이며 순대, 오뎅, 튀김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떡볶이는 당연히 식탁 정 중앙에 자리잡았다. 사하 앞에 앞접시를 놔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부하면 뇌세포 죽는대."
시덥잖고 근거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하면 오히려 똑똑해지지 않을까- 하는 괴상한 논리도 함께 펼쳤다. 결국엔 그래도 잘 지냈다니 다행이네, 하며 결론맺었다. 종종 잘 못 지냈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동급생들도 몇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가 꺼내들고있는 그 사탕은 아무래도 민트초코맛인 모양이다. 참고로 필자는 민초와 연을 끊고 산지 벌써 몇년째다. 아무튼.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뻗어주는 손을 붙잡고 난간 아래로 폴짝 내려왔다. 원래라면 이 정도 높이는 내려가는데에 있어 문제가 아니다. 혼자 내려가는 거여도 점프해서 공중제비를 3바퀴 정도는 돌고 착지까지 할 수 있울 정도다. 하지만 오는 호의는 거절하지 않는 주의로써, 기꺼의 그녀가 내밀어준 손을 잡고 내려온 것이다.
" 안 돼. 안전장치가 없어서 위험하다고? "
내로남불이란 이런걸 두고 이야기 하는걸까. 하지만 위험한 것도 맞는 말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안낼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서 이리 태연한건 배짱 덕분일까.
" 역사. 덕분에 수업중에 지루하다고만 100번은 생각한것 같아. "
사실 역사가 아니었어도 그는 지루해했을거다. 어떤 수업이든 지루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였지만, 어째 날에 따라, 기분에 따라 지루함의 정도도 달랐다. 참고 버틸 수 있는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다면, 오늘처럼 못참고 뛰쳐나오는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느 구름을 정확히 짚고있는진 모르겠지만....
가방을 열어 한참 뒤적거리더니 책 사이에서 굴러다니는 네임펜을 꺼냈다.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자랑스러운 듯 웃는다.
"이걸로 쓰면 어디에 써도 잘 보일걸."
이미 낙서로 빼곡한 자리는 조금 힘들겠지만, 구석자리를 공략해 잘만 쓰면 나중에 와서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졸업하고도 남아있으면 재밌겠다.>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마음은 2학년인 것 같은데, 어쩌다 3학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시간 지나면 먹는 게 나이라곤 하지만.
"그치, 머리 너무 많이 쓰면 안 돼."
선생님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에 더한 말로 맞장구쳤다. <땡큐.> 앞접시에 가볍게 인사하고 포크를 들었다. 제일 먼저 먹는 건 떡볶이다. 역시 청소하고 난 다음엔 떡볶이지. 고개를 끄덕이다 민규를 빤히 쳐다본다.
"…너 은근히 부지런한 거 배신감 느껴지는 거 알아?"
민규가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꽤 잘 하는 것도 알지만, 제게 운동이란 다분히 생산적으로 느껴지는 행위였기에. 난 방학동안 최선을 다해 숨쉬는 것 말곤 안 했는데! –반쯤은 장난인– 배신감을 표출하며 김말이 하나를 먹었다. 떡볶이 국물에 콕 찍어서.
"겨울산이면 눈 쌓인 것도 봤어?"
눈 쌓인 풍경을 꽤 좋아했다. 높은 데서 보는 눈 쌓인 풍경이라, 상상하니 꽤 낭만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