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은 그녀의 의심하는 태도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낸다. 이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에 대한 주원의 말에 슬혜가 대답하자
"말에도 색이 스며들어 있다라. 그거 좋다! 내 말엔 어떤 색이 스며들어 있을까. 스스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좋아하는 색이었으면 좋겠다."
하곤 천진난만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마지막 한 마디엔 굳이 주어를 붙이진 않고서.
봄비 냄새 남은 거리를 둘이서 말 없이 걸어가는 시간. 그러던 와중 그녀의 입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슬혜는 작게. 그리고 점점 크게 웃기 시작했다. 주원은 고개를 돌려 점차 크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다 점차 크게 웃고, 이내 배를 부여잡고 웃는 모습까지 보이자 걱정이 되었는지 손을 뻗으려다, 그 손을 거둔다. 이내 그녀가 침착해지자 갈 곳 잃은 손을 다시 완전히 자기쪽으로 거둔다.
"꿰뚫어보다니. 난 그런거 못해. 그저 내가 하고 싶은걸 할 뿐인걸. 그리고 내가 가능한 만큼 상처주지 않는 선에서. 하지만 상처란건, 스스로 입는 것이기도 하니까.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
하고 자신은 그런걸 할 줄 모른다며, 겸손을 떠는 것인지 정말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태도로 대답한다.
"그래? 나도 슬혜에게 흥미 있어. 반대로 지금까지 흥미 없었단거야? 그건 조금 상처인걸."
모든 사람에게 흥미를 갖고 대하는 주원으로서는, 어쩌면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말하는 흥미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까. 애초에 흥미의 의미를. 슬혜와 주원이 말하는 흥미의 의미를 깊게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 각자밖에 없겠지.
이어 그녀는 손을 입가에 가져대고 얇게 뜬 눈으로 주원을 주시하며 말했다. 주원은 그런 슬혜의 말을 전부 듣고, 잠시 제자리에 멈춰선다.
"보듬으려고 한 적 없어."
라고. 차분하면서도 확실한 말투로. 그녀가 그것의 의미를 파악할 시간을 채 주지 않고 말을 잇는다.
"내가 중1때, 작은 야생고양이가 지하실에 숨어든 적이 있어. 처음엔 뭣모르고 가까이 갔다가 엄청 할퀴어서 피가 났거든. 그래서 문 열어두고 빨리 나가길 바랬는데, 나가지 않더라구. 조금은 안타까워서 고양이 음식을 사서 갖다줬지. 내가 볼 땐 먹지 않다가, 나가면 먹더라? 그게 조금씩 이어지다, 어느새 내가 오면 울더라구. 중간중간 조금 친해졌다 싶었을 때 만지려고 했는 데 그 때마다 도망치더라. 어쩔 수 없이 기다렸지. 처음엠 밥만, 그 다음엔 조금 옆에 같이 있다가.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몸을 비비더라구."
주원은 갑자기 전혀 상관도 없는, 맥락도 이어지지 않는 중1때의 고양이와의 이야기를 슬혜에게 해주었다. 과연,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일지는. 그리곤
포크를 문 채로 샐쭉 웃었다. 포크를 내어줄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은 좀체 거리감 조절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이쪽에서 적절히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안 된다. 주원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면서도 암냠냠 먹었을 것이다.
“ 좋지요~ 겨울 딸기도 맛있지만, 봄 딸기도 맛있으니까요. ”
단 걸 좋아하니까, 딸기 뷔페도 좋아하겠지. 입맛을 다시면 따라 외치는 소리에 키득키득 웃었다. 이럴 때의 선배는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지도. 잠에서 막 깬 모습은 좀... 낯선 늑대 같았는데. 이제는 좀 알고 있는 강아지 같다. 뭐, 실체는 강아지가 아니라 청소년기의 늑대겠지만.
...? 철저한 포크 구분에 실망했나?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로맨틱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게 더 위생적이잖아요. 선배. 포크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게 더 합리적이란 거예요.
“ 으응, 그럼 오늘은 만화책 읽기는 더 안 하려나요~ ”
왜 자고 있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완전히 비어있다는 말에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둘이서 생각할까라는 말에는 씨익 웃었다.
“ 날 좋은 봄날이니까 돗자리가 있으면 꽃구경하기 딱이겠네요~ 여기에 돗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오. ”
어느 한쪽이 몸을 기대지 않는 한 닿지 않는, 그러나 적당히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별사탕 같은 목소리로 재잘댔다. 없으면 신문지라도 깔고 앉을까요~? 라고 물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문지는 없겠지만, 설문지라도 있다면. 그것을 깔고 앉아야 할까? 적당히 깔고 앉을만한 담요가 있는 게 현재로선 베스트일 것 같은데.
천장을 보던 눈이 맞은편으로 돌아온다. 질문에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낙서가 뭐라고, 미적지근하게 신중한 반응이다. 솔직한 대답이긴 했다. 하고 싶은지는 아직 스스로에게 안 물어봤다. 찾아보면 제 글씨로 쓰인 것도 있겠지만, 거의 친구들이 신이 나 먼저 적던 것에 몇 글자 보탠 게 전부였다.
"근데 너 저기까지 닿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심지어 민규가 한 물음에 대답이 되지도 않는 것이다. 뱉고 난 뒤에야 깨닫고선 실실 웃는다. 뜬금 없음을 대충 웃음으로 무마해 볼 셈이다.
민규가 마저 채워나가는 주문서를 빤히 쳐다봤다. 직원이 와서 후식 볶음밥 볶아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집중이다. 그러다 날아온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으음……, 응."
얄팍한 양심이 이겼다. 다 적은 주문서를 가져다내려고 집어들다 민규가 적은 제 몫을 봤다.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장난스레 흘겼다.
"다섯 개 먹을 것처럼 굴더니!"
<나 이거 드리고 올게.> 장난은 짧았다. 금세 일어나 주문하고 온 사하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야무지게 물도 떠와 각자 앞에 놓아두었다.
산들고등학교. 그곳의 교정에는 큰 벚꽃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곳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그런 전설이 있다. 그리고 벚꽃이 필때쯔음 되면 많은 학생들이 소원을 빌러 벚꽃나무를 들르곤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학생회실에 들렀다 가려고 문을 열었더니 1학년 학생들이 들떠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보나마나 벚꽃나무에 관한 이야기겠지. 인사를 받아주고서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하니 그들 중 한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 해인 선배, 벚꽃나무에 소원 안비세요? "
역시나 벚꽃나무에 대한 소원을 처음 들어보는 1학년들이 가장 들떠보였다. 나야 이제 세번째니까 별 감흥도 없기는 했지만. 손에 분홍색의 작은 메모지를 들고서 어떤 소원을 빌까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겠지.
" 나 두번이나 빌어봤는데, 역시 안들어주더라. 간절함이 부족했나봐. "
물론 벚꽃나무에 소원 따위 빌어본 적이 없지만. 적당한 말로 대답하고서 필요한 것만 챙겨서 다시 나가려고 몸을 옮기려하는 내 앞으로 손이 쑤욱 들어왔다. 그리고 작은 분홍색 메모지 한장을 내민채로 나에게 말했다.
" 이번엔 꼭 이루어질꺼에요! 해인 선배도 한번 빌어보는게 어때요? "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쌓아놓은 이미지도 있으니 나는 웃으면서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벚꽃나무라, 앞을 지나다닌적은 많지만 소원을 빌어볼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전설은 전설일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입장을 바꿀 생각은 없어서 받은 메모지를 주머니에 쑤셔놓고 그대로 학교를 나섰다. 하지만 한번 의식해버리고 난 뒤라서 그럴까, 크게 솟아있는 벚꽃나무가 자꾸 시선을 앗아간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은 벚꽃나무 앞으로 향하고, 그 앞에 서서 메모지를 만지작거렸다.
' ...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켠에서는 정말일까? 라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선배들 말에 의하면 정말 이루어진적도 있다고하던데. 이젠 그 선배들 입장이 되었지만 주변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들로도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니까.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슬며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서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손을 콱 움켜쥐었다.
" 소원 같은건 옛날에도 많이 빌었어. "
나지막히 중얼거리고 구겨진 메모지를 던져버린다. 단 한번도 이루어준적 없는 소원을 이제와서 이루어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교내에 꽃구경할만한 데가 있을까요, 지구주...? 😅 (역시 정원?) 정원 쪽으로 가면 소원벚꽃나무가 있을 것 같은데... 🤔 일상에서 소원비는 게 되는 거신가.. ? (지구주 보고 계신다면 제게 정답을 알려줘88) 주원주는 같이 꽃구경 가서 소원비는 전개가 좋으신가요, 아님 소원은 빌지 않고 꽃구경만 하시는 전개가 좋으신가요?
아랑이 포크와 솜사탕을 건네주지 않자 주원은 온 몸으로 소파에서 난동을 부리며 아이가 칭얼거리듯 울먹이며 말한다. 소파에서 몸부림을 치다 이젠 데굴데굴 소파에서 구르며 "나아아도오오 '앙'하고 싶었는데에에" 하고 그녀가 먹을동안 계속 난동을 피웠다.
"언젠가 딸기 뷔페도 같이 가자. 지금은 아니더라도. 꼭."
주원은 아쉽다는 말투로,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지나가는, 언젠가 잊어버릴 약속으로 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펴 내민다.
"약속. 도장까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듯 하다.
"오늘은 만화책 읽기는 끝. 읽고 있다고 해도 아랑이 있는데 만화책을 읽고 있을 순 없지."
주원은 그렇게 하는게 당연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음,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그녀가 날 좋은 봄날이니 꽃구경이 어떻겠냐며 묻자 그대로 일어나 부실의 구석의 색바랜 락커로 걸어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락커를 열자 그 곳에는 군용 담요(!!!)가 하나 돌돌 말려있었다.
"원래는 내가 낮잠잘 때 쓰던거지만, 오늘은 부실 들어오자마자 쓰러져서 자서 못 썼거든. 평소에 내가 쓰던거라 냄새는 조금 날지 몰라도 이거라면 쓸 수 있을거야. 어때?"
하곤 돌돌말린 담요를 세로로 들곤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 담요에 가려진 얼굴을 옆으로 쏙 내밀어 그녀를 향해 "헤헷." 하고 기대 가득찬 반짝이는 눈을 하고 응시했다.
>>327 일상에서 소원 빌기.... 아랑주는 천재인가....?! 하지만 주원이라면 분명 무슨 소원을 빌었냐며 엄청 물어보겠지.... 함께 소원! 이런 전개를 놓칠순 없죠. 😋 주원이라면 어어어어엄청 물어보겠지만 왠지 아랑이라면 "안돼요." 하고 거절할 것 같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아랑이니까 결국 주원은 "궁금한데에에에에" 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겠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갑시다!! 소원 비는 벚나무로!! 레츠고!!
사하의 질문에 천장을 한참 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사실 가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 눈이 줄자도 아니고.
"글쎄다.. 그래도 점프하면 닿지 않을까?"
퍽 솔직한 대답이다. 키도 작은 편이 아니고, 농구를 하니까 점프력도 나쁘지 않다. 분식집 천장도 높은 편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곤 부엌 쪽을 흘깃 바라봤다. 아무래도 지금 시도하면 주인 아주머니가 뭐라 할 것 같다.
"나중에 내 거 달라고 해도 안 준다."
능청스레 답하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마 사하가 달라고 하면 줄 게 분명했다. 그거 오뎅 하나 더 먹는 게 뭐라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도 사람이야, 사람."
양 손을 들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장난인 걸 아니 이러는 행동이기도 했다. 사하가 다녀오는 동안 식탁 위에 티슈 두 개를 깔고, 그 위에 수저와 젓가락을 놨을까. 티슈는 영 어색하게 접혔지만 못본 척 해주자. 사하가 돌아왔다. 최민규는 물을 받으며 고맙다 인사했다.
점프하면 닿는다는 말에 입술을 동글게 모았다. <오.> 짧은 감탄사를 위한 것이다. 점프해서 하나씩 글씨 쓰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이나 콕, 혹은 선 하나 찍 긋고 내려오는 것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면 아예 펜촉이 들어가버리거나. 현실에 발 붙인 상상력은 역시 영 재미가 없다.
"역시 뭘 쓸 거면 벽에다 쓰는 게 낫겠어."
결국 재미없는 결론이 난다. 포기가 빠르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원래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 성격이 못됐다.
"고작 하나 더 먹는 애 거 뺏어먹을 생각 없다."
말투가 마치 <아빠 안 잔다––.>의 그것이다. 말투대로라면 입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게 뺏어먹는 게 맞지만, 내용만큼은 진실됐다. 사실 지금 시킨 것도 다 들어갈까 모르겠다. 혼자보다 둘이 먹을 때 훨씬 많이 먹게 되는 건 맞는데… 요즘 양이 좀 줄어서. 나이 먹어서 그런가. 누가 들으면 코웃음 칠 생각도 했다.
"밥 엄청 먹었지. 또… 엄청 누워있었지. 공부 좀 해볼까 싶기도 했는데, 장수하고 싶어서 안 했어."
안 하던 짓 하다가 갑자기 저승사자 와서 당신 갈때 됐소, 하면 어떻게 해. 어처구니 없는 핑계 같다고? 아주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