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당당히 약자를 위해 덤벼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배운것이 있다. 소리지를 힘 조차 없는 무고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절대 정의가 아니라는 것, 어린 시절 그 모습은 그녀에게 횃불이 되어주었고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중학생 3학년 시절 사온 법전은 아직도 집에 꽃혀 있었고, 한 부분이 움푹 패일 정도로 그녀는 법전을 넘겨가며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원인 불명, 이라기 보다는 아직 밝혀 내지 못한게 아닐까, 언제든지 드러낼수 있는게 더 무서운 법이거든."
그렇게 대꾸하던 그녀는 별 생각 없다는 듯이 자신의 카드를 대서 결제 준비를 해놓은 뒤, 무가당 블랙 커피 캔 하나를 꺼내 마셨다. 아무래도 따뜻한 음료를 뺀 탓인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캔커피는 찬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커피를 들이키며 그녀는 중얼거리는 말에 별 문제 없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무슨 해프닝이 있던 간에 못 움직이는 것도 참 우습지만, 결국은 도망가지 않는게 정답일지도 몰라. 응."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이번주 토요일이었나, 약속이.
"부모님이랑 집에서 고지라 파이널워즈 보기로 했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괴수영화 매니아라서 말이야."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다는 그 말에 윤재는 순수하게 의문을 표했다. 물론 그 이상은 그녀의 삶일테니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은 역시 좋지 않을까 싶어 그는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그런 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열심히 할테니, 그 관련으로 너무 캐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지진에 대한 그녀의 가설은 그에게 있어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허나 원인불명과 밝혀내지 못한 것이 대체 무슨 차이일까 그런 의문을 살짝 품을 뿐이었다. 괜히 그의 고개가 땅 아래로 향했고 다시 하늘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요 근래 계속 있는 지진이란 마치 헛소리인것처럼 평화로운 풍경만이 그의 눈에 비쳤다.
"...그때는 지진이 없길 바랄게. 영화를 볼 때 실제로 지진이 나면 무섭잖아. 물론 요즘 있는 것은 그냥 가볍게 흔들리고 마는 거니까."
별 일이 있겠나라는 생각 속에서도 문뜩 떠오르는 것은 이유모를 불안함이었다. 대체 무엇이 자신을 이리도 불안하게 생각하게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별 일 없겠거니 혼자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는 것 뿐이었다.
아, 역시 자기소개 시간때 너무 얼버부리고 넘어갔나봐.... 역시 소극적인 그녀의 성격 탓에 자기 소개 시간에 제대로 못한게 화근이었는지 그녀를 1학년때부터 알고 지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가족 상황조차 모르는 이들이 분명히 많았다. 이 소극적인 성격을 못 고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거라 생각하며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네, 외가쪽에서 자기네들한테 피난 오라고 난리긴 하거든."
그 외가가 미국이라는건 죽었다 깨도 말 못하지만 말이야. 나름 안전한 대책은 있지만 도망갈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라면 도망가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야한다는게 지론이었으니까. 그게 지진한테도 통용되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확실히 새학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데 지각은 좀 그렇지? 먼저 들어가, 괜히 이상한 소문 나겠다."
왜 그런거 있잖아, 젊은 남녀 두명이서 아침부터 얼레리꼴레리 그런거 말이야, 그렇게 장난스레 덧붙인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가 걸어가던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아직 시간 여유는 분명히 있었다. 잠도 좀더 깰 겸, 아침 산보를 즐길려는 심산이리라.
"황송합니다. 허나 이 전함이 통과할 정도로 커다란 구멍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혼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며칠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황좌에 앉아있는 이의 불평에 오른편에 서 있는 사내가 꾸벅 고개를 내리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설명에 납득했는지 황좌에 앉아있는 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불평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는지 황좌에 앉아있는 이는 잔에 담겨있는 보라색인 무언가를 마셨다.
"그래. 그것은 지금 제대로 일하고 있는거겠지?"
"물론입니다. 지구인들은 며칠 후,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겁니다. 애초에 이건 지구인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ㅡ비싸기만 겁나 비싸네. 확 무너져내리라지. ㅡ아주 좋은 곳에 산다고 잘난척하는거 봐라. 진짜 붕괴되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황좌에 앉아있는 이가 바라보는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었다. 땅 속을 파해치면서 나아가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무언가는 두 손을 높게 들어 지면을 있는 힘껏 강타했다. 동시에 화면이 우르르 흔들렸고 아주 작게 비명소리와 당황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래. 만족스럽게 활동하고 있구나. 그럼 이후는 암흑 전사에게 맡기는데 지구인들이 대항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애초에 지구인들의 그 어떤 병기도 암흑 전사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며칠 후, 지구인들이 혼란과 혼돈 속에서 소멸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만족스럽구나."
상당히 유쾌한 웃음소리가 그 근방을 가득 채웠고, 그 웃음소리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땅속을 파해치면서 다니는 그 무언가는 정말 빠르게 여기저기로 돌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