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가 영업 준비를 하는 동안, 윤재는 학교에 가기 위해 문 밖으로 나섰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새학기 첫 달인만큼 바람이 약하게 불자 그는 절로 몸을 살며시 떨었다. 추위에 약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추위를 태연하게 받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입가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어, 카페 오픈 준비를 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며 윤재는 바로 오른쪽으러 꺾어 학교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평범한 아침이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차량이 돌아다니고 있고, 자신처럼 학교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들, 그저 걸어가는 이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앞으로 걸었다.
허나 그 발걸음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린 탓이었다. 오늘은 바로 전날보다 조금 더 거센 느낌이었다. 건물이 아주 약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고, 유리창마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윤재는 근처에 있는 나무를 반사적으로 잡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당황하며 근처에 붙잡을 것을 붙잡았고, 운전하는 차들은 모두 일제히 멈췄다.
"...!"
근처 2층 집 창가에 놓여있는 작은 화분 하나가 흔들림을 이기지 못했는지 밖으로 떨어졌고 경쾌하게 쨍그랑 소리를 냈다. 다행히 머리를 다친 이는 없었으나 소름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이내 흔들림은 천천히 멈췄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진동이 사라졌다.
"...대체 뭐야."
요 근래 하루에 2~3번은 이렇게 약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인을 전혀 알 수 없으며, 언제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지진의 연속에 평범한 일상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에 찝찝함을 느끼며 윤재는 다시 학교를 향해 이동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것은 그녀의 습관 아닌 습관이었다. 다른 곳보다 체육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샤워실을 아침 일찍 쓸수 있기에 정신을 깨울겸 등교하자마자 가볍게 운동장 몇바퀴와 유산소 운동, 그리고 가벼운 몸풀기등만 하고서 샤워를 하고 교실에서 자습을 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이렇게 하면 개운한 상태 그대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게 장점이었지만..... 너무 개운한 나머지 잠이 솔솔 온다는 것도 문제 아닌 문제였다는게 함정이리라.
"으으.... 너무 개운해서 잠이 온다....."
운동부들이랑 협의해서 운동부가 안쓰는 타이밍에 샤워를 한다는건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완벽한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뒤통수 맞고 X되기 전까지는 말이다.'란 말이 있다는걸 그녀는 뒤늦게 떠올리고는 자신 눈앞에 놓여진 사법고시용 문제집들의 문자배열이 어느순간 프로그래밍용 언어로 바뀌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침에 지진을 경험한 그는 또 다시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금 우려하며 학교에 도착했으나 다행히 지진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지진의 빈도와 세기가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벌써부터 어딘가에선 피난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한편 그것은 그거고 이건 이것이었다. 일단 그는 바로 자신의 교실로 향했고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졸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급생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졸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으로 천천히 앞으로 향해 자신의 자리로 가려고 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의 책가방이 근처의 책상을 아주 가볍게 툭 건드렸고 그 때문에 그렇게 거슬리진 않으나, 그래도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작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당황하며 윤재는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아."
깬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과할 생각으로 그는 그녀가 있는 곳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위치에선 자고 있는지, 아니면 깬 것인지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근처까지 다가가며.
그렇게 한참을 꾸벅이던 그녀의 움직임이 커져 꾸벅이는 강도가 커졌고 이내 그대로 머리를 책상에 쾅! 박으며 굉음과 함께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크고 아름다운 혹을 하나 만들어 내었다.
"아파라....."
자신의 자업자득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마를 문지르며 솟아오른 혹을 쓰다듬는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느껴지는것인지 그녀는 살짝 바보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히도 아침일찍 나왔기에 이런 추태를 보는 사람은 없겠지, 하고 안심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
".....엥?"
있다, 누군가 있다. 이 추태를 본 누군가 있다. 그렇게 상대를 확인하자마나 그녀는 순식간에 아주 볼만한 표정이 되었고, 그 표정은 마침내 울먹임 반, 쪽팔림 반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마침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그는 살며시 눈동자만 회피했다. 설마 저렇게 제대로 머리를 박는 모습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거 괜찮나?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울먹이자 그는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정말 제대로 박아서 많이 아프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곧 입을 열었다.
"괜찮아? 보건실...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는데 일단 가볼래?"
물론 지금 시간에 보건실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그로서도 말을 꺼내면서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교무실에 가면 교사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기도 하면서 그는 살며시 고개를 교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많이 아프면 얘기해. ...선생님 계시면 불러올테니까."
말을 마치며 그는 우선 책가방을 자신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허나 의자에 앉진 않으며, 일단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는 듯,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서 머리를 박은 부분을 가만히 바라보려고 했다.
아픈게 아니라 쪽팔려서 부끄러운게 더 크다는 것일까, 그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윤재의 행동에 부끄러운듯이 반쯤 울먹이는 표정을 억지로 감춰가면서 자신이 먹으려던 날달걀을 이마에 문지르며 선생님을 부른다는 윤재의 행동을 만류한다. 이러한 꼴을 누구에게 보여주는건 단 한명으로 족했다.
"그냥 조용히만 해주세요.....다른 분들에게 이야기 하지 말아주시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윤재를 진정시키며 자신은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해보인뒤 사법고시 문제집을 덮고는 그대로 숨을 돌리려는 찰나, 자신의 시선 안으로 윤재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렇게 가까이 남성이 있는건 아버지를 제외하고 처음인건지 그대로 뒤로 빠지려고 하였고....
조용히 해달라는 그 말에 윤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당사자가 그것을 원한다고 하니 그로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허나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는지 그녀가 방금 부딪친 부위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리를 띄웠다.
"...그래? 미안."
이성에 대한 면역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경험이 없는 것인지. 얼굴이 붉게 변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스스로 혼자 납득을 하며 살며시 거리를 띄웠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자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그 때문에 같은 반이라고는 하나 그다지 교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2학년이 되고 나서 며칠 안 지나기도 했었으니까.
자리에 앉은 윤재는 이어 핸드폰을 꺼냈다. 별 생각 없이 메신저를 켠 후에, 들어온 것이 있는지 확인을 하지만 딱히 자신이 보내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말 없이 메신저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살며시 그녀에게 향했고 그는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살며시 가져가며 이야기했따.
"아까 일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 ...그건 그렇다고 쳐도 공부 열심히 하나 봐. 잘 못 봤지만 공부했던 것 같은데."
이런 아침 시간부터 공부라니. 정말로 열심히 하는구나 라고 혼자서 생각하다 살며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조용히 해달라는게 여기서 조용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는데 아마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게 화근이었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급히 머리 앞부분을 잘 골라내 이마의 혹을 감추면서도 이내 오해를 풀기 위해서 서둘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그대로 이어지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남부끄러운 행동을 보인건 역시....."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으리라, 학기 초인데 이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인거 자체가 상당히 쇼크일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 그러면서 그녀는 사법고시 문제집을 책상 서랍에 집어 넣은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 걱정해줘서 정말 고맙지만 사실 저.... 음, 그냥 말 놓을께요. 내가 존건 사실 책피고 얼마 안되서인걸....."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졸았던 것일까.
"사실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운동을 하는데..... 운동 끝나고 운동부 샤워실을 내가 쓰거든. 근데..... 그거 있잖아. 샤워 끝나고 몸이 노곤노곤해지는거."
..... 이제야 머리에 상황이 그려질 것이다. 가장 황당하지만, 가장 납득이 가는 부분,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게 당연한 것이겠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윤재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일찍 나온 것일까.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부지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대단하네."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짧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는 슬쩍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거나 학생들이 등교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물론 이미 등교한 학생들도 있을테고, 이곳으로 오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교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조금 자는게 어때? 노곤노곤하면 쉬는게 제일이잖아."
이어 다시 한 번 시계를 힐끗 바라보던 윤재는 깍지를 낀 후에 두 팔을 위로 쭈욱 뻗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 쪽으로 천천히 나갔다. 그러다가 잠시 멈춰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커피 좋아해? ...음료수 하나 뽑는 김에 좋아하면 하나 뽑아오게."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을 뽑는 김에 하나 더. 그런 느낌을 살려 이야기를 하며 그는 그녀의 답을 조용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