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이 가진 이해과 세계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일 뿐. 그렇기에 분명 주원은 슬혜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고, 슬혜의 이해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주원은 그런 사람들과는 구태여 교류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해'라는 재능은 곧 노력하기 전 '노력의 의미'를 예상할 수 있는 척도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빠른 주원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테지. 단순히 재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달리 무어라 생각하겠나요?"
주원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것 이외에 답이 있냐는 물음. 주원은 그저 미소지을 뿐,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둘의 대화는 맞물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빗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놓고 그저 봄비를 맞는 주원. 마치 자유를 찾아 감옥에서 도망쳐 자유의 비를 맞는 사람과 같이 해방감 가득한 미소를 띠고 떨어지는 봄비를 맞이한다. 이것이 주원의 대답인 것일까?
'두 사람이 우산 하나를 쓰고 간다는 것'에 대한?
빗속에서 자유를 즐기던 주원은 그녀가 못말리겠다는 듯 미소지으며 득이 될 것 없다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득? 이미 득 되고 있는걸. 푸하, 후아, 후우우우아아아아."
그는 봄비가 싣고 오는 봄 내음을 몸 가득 담으려는 듯 숨을 가득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코를 비에 실린 라벤더 향이 간지럽히고, 그는 행복을 주체할 수 없는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주원이 나아간 만큼 거리를 좁히자 그는 그 곳에서 가만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내리는 봄비에 머리가 다시 축 가라앉아 오른손으로 턱부터 머리 끝까지 빗물을 쓸어넘긴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즐거운걸? 행복해. 응. 나 지금 되게 행복해!"
주원은 슬혜에게 넘긴 우산에 들어가지 않고 굳이 우산의 바깥쪽에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충족감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주원에겐, 그저 이 시간과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할 뿐일 테니까.
과하게 무미건조한 사람, 또는 과하게 역동적인 사람.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데도 지금까지 이렇게 유지되어온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지속된 것일 수도 있으며 그에겐 이해할만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별 의미 없는 동정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며 작게나마 변해가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몇분씩 늦어지는 시계도, 반대로 빨라지는 시계도 언젠간 원래대로의 시간을 맞춰간다는 건지 미묘하게 틀어져있는 관계에서도 어디선가 맞물린점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정 반대인 사람 둘이 오히려 잘 맞아떨어진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있었는데, 정말 그런지는 알수 없었다. 아무렴, 그녀는 독심술사가 아니었으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금방 읽어낼수 있는 재능을 가진 늑대같은 것도 아닌데다 오히려 약하다면 약한 양에 불과했다.
"그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참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네요. 선배는..."
학교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특이점을 찾는 모습이나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나 어딜 봐도 얽매여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고리타분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지만,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아니면 별 의미 없어도 즐거운 것이 청춘이라 불리는 것인지, 너무 일찍 세상을 받아들인 눈에선 다소 황당한 인간군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그가 먼저 떨어져나가기 전에 그녀가 밀쳐냈을 수도 있으니,
"어련하실까요~"
살풋 웃어보인 표정은 그녀에게 있어 작위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었다. 나자신같이 느껴지지 않아도 웃고 있는 사람이 본인이란 명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영원한 안티테제는 없다고, 언젠간 합이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그녀는 그 말을 딱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정론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흔해빠졌고 유치한 행동이라 해도 진실된 행동이라면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듯, 마음 속의 공허함을 채울 수만 있다면...
기분 나쁘게 할 마음 없었다지만, 정말로 악의없이 투명한 의도로 한 말일 리 없다. 사하는 이제 해인이 하는 말 대부분을 믿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을 뱉은 사람에게 다시 신뢰를 건넬 만큼 단단하고 심지 굳은 사람이 못 되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깊어질수록 제 살만 깎아먹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너 웃게 하려고 한 말 아닌데."
아마 그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손이 붙잡히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다. 한 번 뿌리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금세 포기하고선 굳은 얼굴로 해인을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 이젠 낯설게 느끼면 안 되겠지.
"조심해야 하는 건 너지."
해인의 손이 떨어진 자리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냥 지금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바람 빠지듯 웃는다.
"내가 뭐라고 사람들이 나한테 신경을 써. 내가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고, 고작 부실 열쇠 잠깐 가져다 쓴 건데. 솔직히 이런 건 별거 아니잖아."
<소문감으론 좀 시시하지 않나.> 작게 중얼거렸다. 들키면 조금 혼나기야 하겠지만, 그게 다 아닌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귀엽게 미친 짓 한 번 저지른 셈 치면 그만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