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울림인가. 그리고 이 얼마나 묵직한 울림인가. 이 두 어절 뒤에는 항상 '그러니까 너도 슬슬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니?'하는 기나긴 문장이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최민규는 최선을 다해 그 문장을 회피해왔다. 분명 그랬다. 분명 그랬지만, 그런 민규도 어쩔 수 없이 벚꽃의 개화와 동시에 '아, 나도 공부하는 시늉을 하긴 해야 하는구나...' 하는 슬픈 체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민규는 독서실에 와 있다. 제 동네친구한테 연락해서 야, 나도 독서실이란 걸 좀 가 보자, 하고 말했다. 그리고 독서실을 들어오자마자 급속도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어.
격렬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파도 밀려오듯이 든 생각이다. 하기 싫다. 이게 뭔 소린지도 모르겠다. 제 옆의 친구를 흘깃 쳐다보았다. 분명 같이 운동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심지어 저번에는 자전거 타고 당일치기로 바다까지 다녀왔을텐데. (그러니까 대차게 놀았단 소리다.) 공부하는 건 처음 보는 장면이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하다. 최민규가 공부를 안 하니까.)
결국 최민규는 오늘 문방구에서 산 포스트잇을 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포스트잇에 꾹꾹 눌러서 두 문장을 썼다.
2학년 3반의 학생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수업시간의 사라는 휴식시간의 사라와는 그 인상이 퍽 달라. 눈이 가늘어지며 교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집중을 하는 사라의 모습은 평소의 그 조그만 포메라니안 같은 모양과는 퍽 다른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이 되곤 해. 그리고, 오전 수업 시간 동안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만큼이나 점심 휴식시간에 그 표정이 풀어져버리고 마는 거야.
평소에 개구지게 치켜세우고 있던 역팔자 눈썹도 축 처지고, 조금 지친 듯한 웃음을 지은 채로 눈꺼풀에 잠이 한 모금 내려앉은 모습. 점심시간의 사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
"나 무릎베개 해주라.."
풀어진 얼굴로 적은 양의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옆자리 친구인 시아의 옷소매를 꾹 잡으며 바보같은 땡깡을 부리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야.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어린 여동생이 하는 소리에 웃음치던 순간이 있었다. 벚꽃의 꽃말은 그게 아니잖아, 벚꽃의 꽃말은....
툭, 샤프심은 부러졌고 습관적으로 샤프심의 뒷부분을 꾹꾹 눌러대었다. 평소처럼의 활용 문제였다. 이젠 밥먹다가도 뒤통수를 누군가 팍 치면 풀이가 눈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몰라서 푸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날의 할당량일 뿐이었다. 샤프심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성실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었는데, 웬일로 동네친구- 아니 이젠 같은 학교의 친한녀석이 평생 뱉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을 뱉기에 어디 아픈가 따라 나와주었을 뿐이었다. 혹여 나쁜 생각을 한다면 피자가 좋을까, 아니 치킨? 그 녀석은 뭐든 가리진 않긴 했다. 그래서 저보다 더 쑥쑥 큰 건지. 이미 끝난 승패는 어쩔 수 없으니 쥐어진 샤프심이나 마저 굴리며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집중했다.
그러길 몇 분, 부산스럽던 옆의 그가 이번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노란색의 구깃한 무언가를 던져온다. '농구하고 피시방 가자. 아이스크림빵 ㄱ?' 왼손으로 쓴 건지 확인하기 위해 옆을 흘깃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이미 싫증이 난 듯한 그를 확인하고 그가 보낸 포스트잇 뒤에 정갈한 글씨체를 사각였다.
'받고 형대접 해주기'
작고 바른 글씨엔 고민이 묻어있지 않았다. 녀석과 있으면 항상 그랬다. 샤프심을 꾹 눌러 바닥에 찍어내어 심을 숨겨버렸다.
>>163 깔끔한 글씨체로 되돌아온 답변을 보았다. 거절이라도 하면 아마 책상에 늘어져 한숨 자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가 좋다고 말한 이상, 최민규는 자유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미련없이 가방을 쌌다. 맨 앞 페이지만 조금 구깃거리는 문제집들이 가방 밖으로 다시 나올 가능성은 아주 모호하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대충 걸치고 독서실 밖으로 나왔다.
"힘들다..."
하늘을 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앉아있었는데 온 몸이 뻐근하다. 동네 농구장은 멀지 않다. 조금만 걸으면 도착한다. 가는 동안에는 아마 시덥잖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나잇대에 걸맞는 이야기들. 조금 선선해지는 오후였다. 한숨을 쉬며 올려다본 하늘 또한 맑았다. 운동하기 좋은 날씨네, 막연하게 생각했다.
"공부 안 힘드냐?"
농구장에 도착해, 벤치에 가방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리고 농구공을 집어들었다.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형님 대접할 준비 잘 해놔라."
그리고 다짜고짜 저 혼자 드리블을 시작하는 것이다. 제 친구라면 이 정도는 받아쳐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상하게 뭐든 잘하는 놈이니까.
비장한 표정으로 말한 사하가 젤리와 과자봉지로 가득 차 부스럭대는 후드집업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여기가 아니지. 교복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열쇠가 잡힌다.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이미 열어놓고선 뒤늦게 눈치도 본다. 사실 눈치보는 척이다. 들키면 당장 무릎 꿇을 생각이다. 고3이 싹싹 비는데 안 넘어가고 배겨? 대범함이 이상한 쪽으로 튀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쏙 들어갔다. 뒤를 보고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열쇠 꽂힌 자물쇠는 빈 책상에 올려놓고, 창가를 가린 커튼을 꼼꼼히 확인한다. 문의 자물쇠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동아리실을 무단점거한 무리가 있다는 건 모를 것 같았다. 들키면 같이 공부하는 척 할까. 책 없지만. 지나가는 생각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책상을 네 개쯤 붙이고 그 위로 주머니에 있던 간식을 와르르 쏟아놓는다. 아주 빵빵하다 싶더니 구성품이 알찼다. 그 와중에 음료수도 두 캔 있다. 굴러가는 캔을 뒤로 두고 영화를 틀러 컴퓨터 앞으로 간다.
"이 영화 엄청 웃기대."
영화 재생 전, 주원을 보며 씩 웃는다. 사실 사하는 보다가 졸았던 영화다. 남들 얘기 빌려 말하는 이유는 그때문이다. 어둡고 적당히 쾌적하며, 숨 막히는 정적이 없는 공간. 잠은 잘도 왔다. 비록 다른 부원들은 눈물 쏙 빼고 말았는지, 죄다 퉁퉁 불어있었지만… 드문드문 웃기도 했으니까 웃긴 영화라는 게 아주 클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