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미리 약속장소에서 비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검은색 오버핏 맨투맨에 흰색 셔츠를 넣어입고, 청바지를 입은... 정말 정석적이라는 느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차려입은 횟수가 많진 않았기에 언제나 이런 일이 있을 때면 걱정이 앞섰다. 특히나 이번 경우에는, 단순히 옷을 잘 입었느냐가 문제가 아닌 상대가 마음에 들어하냐가 문제였으니 더더욱. 어울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고 걱정하던 찰나, 저 멀리에서 아는 얼굴이 보여 지훈은 반가운듯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왔어? "
"오랜만이네." 라며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실 저번에 고백한 이후로 말을 건네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려나.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곁에 다가가려고도 했겠지.
미나즈키는 뜨거운 음료에 약했다. 여태까지 17년을 살면서 커피를 마셔본 적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이 말은 즉, 미나즈키는 자기 앞에 있는 거대한 기계를 조금도 조작할 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음."
오늘 하루만 일해달라고 부탁받아서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다행히도 기계 앞에 설명서가 붙어있긴 하지만... 버튼을 쿡쿡 누르고 손잡이를 돌리며 알지도 못하는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미나즈키는 겨우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커피라기엔 색이 밝았기 때문에 미나즈키는 지금 나온 게 커피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를 뽑았지만, 이걸 바로 손님에게 내줬다가 몽블랑을 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주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홀에 있을 다림을 먼저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이 빈 몽블랑에 대타로 하쿠야 씨를 불러왔습니다. 사실 홀 잠깐 보는 동안 커피 두어잔 정도 뽑을 순 있겠..지요? 라는 것보다는 망가뜨리지만 않는다면 아직은 괜찮을 겁니다.
"하쿠야 씨. 커피는 괜찮나요..?" "일단 아직 주문을 받지는 않았지만요." 정 무리라면 홀이나(어쩌면 홀에서 청소를 하거나 손님들을 통제하는 게 나을지도) 카운터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서 하쿠야가 들고 나온 액체를 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빤히 봅니다. 냄새나. 성상으로 보았을 때.. 음...
.dice 1 4. = 3 1. 커피이긴 함. 청소버튼을 눌러서 청소하는 물에 섞인 거라 그렇지. 2. 이건.. 윤활유..? 3. 반의 반샷. 4. 기계 위에 있던 우동스프가 떨어져 섞인 것..
무엇이라고 해도 다림은. 결심한 것처럼 하쿠야에게 일단 제가 커피 내리는 법..가장 간단한 것만 알려드릴게요. 라고 말합니다. 에스프레소만 잘 내려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라고 말하면서 카페인을 갈구하는 사람(=청월교생)을 바라봅니다.
이건, 전투다. 갑옷을 차려입고 전장으로 나가는 기사처럼 나 역시도 알맞은 차림을 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깨 라인을 따라 파란 포인트컬러가 들어간 검은 티셔츠를 입고 왔을 뿐이다. 흠흠, 절대 '어필'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그렇단 거지.
" 오랜만이라 할 만큼 오래 지나지도 않았잖아. ...안녕. "
기분이 약간 어색해지려고 한다. 고백받고 애매한 여지를 남겨버린지 며칠, 성대하게 신경써버리고, 진화나 다림이한테 애매하게 밝혀지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폭풍같이 지나가서 다시 만났다. 분명 너도 어색할 텐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살며시 맞추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도 한 걸음 다가간다.
" 그보다, 이번의 데이트란 건... 그, 뭐야? "
알아차리라고 입은 거긴 하지만, 괜히 상대방의 색에 맞춘 것을 입고 왔단 생각이 들어서, 괜히 포인트컬러가 지나가는 어깨가 화끈한 느낌이었다. 눈치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그냥 넘어가주길 하는 마음도 있고. 다림이가 말했을 땐 은근슬쩍 눈 색으로 포인트컬러를 잡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지훈이를 만나러 오는 데 까만색에 파란색으로 포인트 컬러는 은근슬쩍이 아니라 200km/s 회전없는 돌직구 아니야?! 아뿔싸! 프로의 실력이 아니면 섣불리 스스로 코디네이트를 해선 안되었던 걸까. 그렇지만 보라색 포인트컬러였으니까 그건.
먹을 것을 만드는 일이니 확실히 배워두긴 해야겠지. 미나즈키는 다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싱크대에 버렸다. (미나즈키는 샷을 실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게 반의 반 샷이라는 사실을 버릴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요리를 못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남에게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드는 건 물론 우동 뿐이었지만, 간단한 반찬 정도는 혼자 해먹을 수 있었는데. 거기다 커피는 원두를 잘 간 다음에 물을 잘 부으면 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이런 기계를 조작해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요리를 그다지 잘하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샷 비슷한 걸 만들기는 하셨으니까.. 생각보다 재능있는 걸지도요? 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는 커피에 관해서 가볍게 설명합니다.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원두를 간 다음에 물을 잘 부으면 커피가 되긴 하지만, 그러면 추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압력을 넣어 빨리 추출해내는 거에요. 라는 야매지식을 말하면서 (물론 압력을 가해서 추출해내면 크레마나 타이거스킨같은 게 있다고도 한다..) 정말로 곤란하다면 의념각성자의 악력을 이용한 수동 머신을 써도.라는 농담을 합니다.
"이걸(필터)를 끼우고요, 여기에 원두 가루를 담고 꾹 눌러준 뒤 여기에 끼워요" 그리고 여기로 샷이 흘러나올 거니까요. 라며 가리킨 주둥이에 샷 잔을 두 개 놓고는 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추출해준다고 하네요.
"그리고 남은 찌꺼기는 여기 버리고요.. 필터를 빼서 여기 버린 뒤 뜨거운 물로 가볍게 세척해서 여기 얹어두면 한 사이클이 완성이에요.." 라고 하긴 하는데. 이런 귀찮은 과정은 건너뛰고 대충 에스프레소 내리기를 배웠습니다! 일상 한정 스킬입니다! 라고 하면 될 것...
"보고싶었어-" 라며, 비아 역시 어색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어색함을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능청스러운 흉내를 냈으려나?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시야 바깥에 들어온 비아의 옷을 본다. 자신의 눈 색과 같은 푸른색 라인이 그려진 티셔츠... 흐응 흐응. 비아를 보던 지훈의 눈이 살짝 휘었을까.
" 혹시, 데이트 기대하고 있어? "
직설적으로 묻고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른척도 하고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내민 답은 은근히 말하는 것이었나. 비아의 어깨에 있는 푸른 선을 가볍게 매만지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능청스레 물었다. 기대하고 있어서, 자신을 생각해서 이런 옷을 입고 온 거냐고.
" 응. 같이 영화 보고싶어서. 영화관으로 갈까 싶네. "
데이트가 뭔지 묻는 비아를 향해 가디언칩을 이용한 채팅으로 영화표를 하나 보여준다. 정확히는 쿠폰...이었지. 커플석 쿠폰.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설명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그 쿠폰, 아직 예매도 안 한 쿠폰에 불과하니까. 자리 어쩌고 얘기하는 것은 거짓말이었을까. 비아가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프레소 내리기(F) 에스프레소 머신의 조작법을 알고 있다, 같은 이상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잠깐 들었다. 다림이 설명을 잘 해준 덕분에 기계를 어떻게 다루는 건지는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와 실전은 별개의 일이겠지만. 필터를 끼우고, 원두를 갈아서 넣고, 기계를 작동시키고, 찌꺼기를 버리고, 필터를 씻고. 미나즈키는 기계에서 또르륵 떨어지는 에스프레소를 보고 있다가 다림을 돌아봤다.
보고 싶었어, 란 말에 또 드는 어색함을 속으로 꾹꾹 씹었다. 아주 잠깐 못 본 동안에도 보고 싶었다란 말은 흔한 너스레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꽤나 부끄러운 말 아니던가. 그리고 평소 무표정만 짓던 후배의 얼굴에 미소의 끄트머리나마 스쳐 지나간 순간, 정말 한결같이 당했단 걸 깨달았다.
" 딱히, 그렇진... 않았던, 건 아니지만. "
기대했던가. 오늘 너를 만나기 전까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긴 했지만, 잘 모르겠다. 친구이자 후배를 만나서 옷을 추천받고 아프란시아에 가까운 쪽 서점에 들러서 흑역사까지 만들어 가며 지냈던 최근의 일은 모두 너와의 관계를 위해서 했던 일들이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데이트까지 나왔으면서 '싫다'란 대답을 할 수도 없단 걸 알았기에, 너의 함정에 어김없이 빠져서 부정만은 아닌 대답을 하고 말았다.
" ...커플석 티켓? "
또, 또 함정이다! 지훈이가 나를 빠트리려는 함정을 파고 있어! 정말 미워! 얘기로는 자리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딱 커플석만 빼고 자리가 다 차버리는 일이 하필 이럴 때 일어날리가. 하지만 끙끙대면서도 들은 이상 믿을 수밖에 없다. 주먹쥔 손을 바닥으로 쭉 뻗으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지훈이를 바라봤다.
" ...그래, 가자. 가면 되잖아. 무슨 영화야? "
손과 발이 같이 나가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방향도 모르는데 아무 방향으로든 앞질러 나가려고 한다. 조급함의 표시로 보일 수 있다는 건 부정하진 않겠다.
하는 것을 보면 초보자인 티가 나긴 하지만 다림도 초보자였던 시절이 있었고. 초보자라고 해도 꾸준히 정석대로 하니까 기계가 잘 뽑아줍니다. 그렇게 잠깐동안 하쿠야가 뽑은 샷으로 1차 주문러시를 끝내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내리면 제가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등등을 만들어서 내겠네요. 다행히도..." 진동벨로 주문을 받는 만큼 지연이 심각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정말 힘들다면 단순노동인 주방보조로 갈 수도 있어요" 머랭을 하루종일 치고 하루종일 과일손질을 하시겠지만요.라는 농담같지만 진실인 말을 합니다. 그래도 논커피류가 적어서 다행이지만요.라고 말하는데. 스무디나 과일 주스 같은 게 들어오면 보이는 정식 레시피가 붙은 걸 볼 수 있으려나요? 커피는 양반입니다. 커피는 그냥 뽑고 넣고 화상주의..인데.
슬쩍 보았을 때 간단해보이는 모 레시피도 얼음과 과일청과 휘핑크림과 위에 뿌리는 드리즐과 중간에 들어가는 생과일과 데코레이션용 치즈케이크 개수와 아이스크림과 믹서기와 기타등등이니까요.
그녀의 행동에서 이미 어느정도 마음을 눈치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을, 굳이 한번 더 물어보는 것은, 비아를 놀리는 것이었던가. 그는 가끔씩 이렇게 눈치채지 못 했다는 듯이 행동하고는 했다. 단순히 재미있어서. 놀리고 싶어서. 라는 것이 이유라는 점에서, 꽤나 성격이 나쁘기는 했지만.
" 상관은 없지? "
비아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일부러 재확인했다. 그런데, 믿는 건가? 진짜? 그 어설픈 거짓말을 믿는다고? 억누르지 않아도 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억누른다. 어차피 그의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했다. 그야, 귀여웠으니까. 순진하게 자신의 말을 믿고 속아넘어가는 모습이, 거절하지 못 하는 그 모습이 귀여웠으니까. 괜히 입가를 한번 매만지며 비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로맨스 영화. 이쪽이야. "
먼저 앞질러나가려고 하는 것에 비아의 손을 붙잡고는 앞장서서 이끌려고 했다. 조급함을 제지하려는 의도임과 동시에, 은근슬쩍 손을 맞잡으려는 시도였다. 비아가 피했다면 소매로 만족했겠지만. 그렇게 앞장서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영화관 입구에 도착했을까? 지훈은 비아를 상영중인 로맨스 영화들의 포스터가 모여져있는 곳으로 비아를 데려갔다.
" 어떤 영화가 좋으려나. "
달달해보이는 영화가 하나, 슬픈 분위기의 영화가 하나, 조금 코믹스러움이 섞인 영화가 하나... 그리고 조금 수위가 있어보이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네가지 중 어떤게 좋을까. 비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라고 물어보았다.
오늘 하루만 특별 메뉴로 우동을 팔면 안 될까? 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우동이라면 정말 자신 있는데. 하지만 대체 누가 카페에서 우동을 주문한단 말인가. 그런 짓을 했다간 춘덕이가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미나즈키는 묵묵히 에스프레소 샷만 뽑았다.
"계속 하니까 할만한 것 같긴 해."
적어도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머랭을 치거나, 과일을 깎거나, 믹서기를 돌리거나, 얼음을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사실 제일 나은 건 하루만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긴 했지만, 슬프게도 미나즈키는 그럴 정도로 성격이 단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