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봄날의 오후.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마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인생이 송두리째 멈춰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 그 무엇도 할 마음도 들지 않아, 그저 벤치에 앉아 봄날 풍경을 바라보았다. 딱히 할 것도 없었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를 시선으로 쫓는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며 천천히 떨어져간다. 호를 그리며 흔들흔들 떨어지던 그 나뭇잎은 땅바닥에 닿기 직전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맑은 하늘과 포근한 햇살. 꽃내음을 살짝 품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봄은 계절의 여왕이라는데 그 말이 은근 공감 간다니까. 오늘 같은 날은 오타쿠질을 하고 싶어서 야외로 나온 게 정답. 쇼핑백 한 가득하게 소설과 만화책을 살 수 있어서 기쁘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지은 채 공원에 잠시 들려 책이라도 조금 읽고 갈까 싶어 공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갑작스레 불어온 돌풍. 미쳐 행동하기도 전에 머리에 올려둔 모자가 바람에 날려 공원 안 쪽으로 날아갔다. 아아...
"쩝.."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모자를 줍기 위해 공원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서 쪼그려 앉아 모자를 줍는다. 모자를 탈탈 털어내고 머리에 쓰고 바닥에 놔둔 쇼핑백을 들어 올리는 순간...
[툭!]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쇼핑백의 내용물이 와장창 흘러나왔다.
"아..."
누가 보더라도 만화와 라노벨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표지가... 드러났다. 멍 때리며 구멍이 뚫린 쇼핑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벤치에 앉은 사람을 쳐다봤다.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모자가 날아 들어온다. 그 모자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어떤 남자가 달려온다. 아무래도 저 남자의 모자인 모양이었다. 그는 달려와 모자를 줍곤 털털 털어내었다. 그러다 그가 가져온 쇼핑백의 줄이 끊어지더니 그만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잘 모를 만화와 소설책들. 요컨데 그쪽 사람이란건가. 나도 만화는 읽는 편이고, 여러 책을 읽고 있으니 거부감은 없었다. 그저 말 없이 흘러나온 내용물들을 주워 쇼핑백에 담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크윽.... 네놈!!! 네이놈!!!! 아, 저 사람보고 한 건 아니야. 네이놈!!!!!!! 무엇인 분한지 애써 웃는 얼굴을 짓고 있지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손에도 약간 힘이 들어가 있지만, 그가 책을 주워다 쇼핑백에 담아 건네주자 "하하..." 하며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좀 불편한데.. 어쩔 수 없이 펜을 들어 쇼핑백을 그리고.. 그것을 구현해서 새로운 쇼핑백을 장만! 그리고 내용물을 옮겨 담았다. 의념의 힘으로 더욱 튼튼하다구~~
"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물은... 그 뭐냐... 치, 친구가 사달라고 부탁해서요...!"
그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자 나도 가볍게 목례로 답해주었다. 그리 어려운걸 한 것도 아니고. 그는 의념으로 쇼핑백을 만들더니 그 쇼핑백에 옮겨담았다. 뭐 이 학원도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또래들이 그렇겠지만. 옮겨담은 뒤 그 남학생은 나에게 감사하다며, 내용물은 친구가 부탁했다고 말한다. 음, 아무리 봐도 본인 물건 같은데 말이다. 모르는 척을 해야하나? 굳이 후벼 파고 들었다간 상처가 될지도 모르니, 나는 적당히 "그렇구만." 하고 대꾸했다.
이 사람.. 엄청 과묵하네... 음... 금방 둘 사이에서 오가던 대화가 동이나버려 무거운 침묵만이 화창한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감돌 뿐이었다.. 음... 앓는 소리를 내며 이 침묵을 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저번에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주머니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포장된 시즈닝을 꺼냈다. 더블치즈엑스트라어니언 시즈닝!! 팝콘, 과자, 사탕, 스테이크! 어디에 뿌려도 맛있는 시즈닝!!! 을 왜 사은품으로 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물건을 주워준 후로도 그는 가려 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가기 마련일텐데. 그가 사라지길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더 볼일이 남았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직 가지 않는 것은, 뭔가 더 볼 일이 남았다는 것이겠지. 그는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포장된 봉투를 몇 개 꺼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팝콘의 시즈닝이다. ...이걸 어디에 쓰라는거지.
"집에 팝콘 없어."
나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사다 먹을 정도의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탕에 찍어 먹어도 맛있어요. 아, 사탕 있는데 드실래요? 아니면 2,000GP짜리 초콜릿이라도?"
참고로 2,000GP는 신한국의 통화 기준으로 환산하면 얼마였지... 한.. 2십만원? 그 정도의 가격! 그보다 왜 이렇게 답례하는 것에 목숨을 거는지 설명하자면!!!!! 부끄러워서!!!!! 돌아가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는지 자리를 잡아서 아예 그냥 벤치에 앉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