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림이가 너구리 왕과도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그녀의 인맥이 넓다곤 생각했지만....그렇게 생각하면 너구리 춘덕이가 일하는 우리 카페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는 것도 어쩐지 신기한 시선으로 느껴진다. 너구리왕이라....나도 한번쯤 보고싶네.
"우리도 그런걸 메뉴로 내놓아볼까?"
요 근래 다른 차원 사람들을 위한 신메뉴는 꽤 호평이었다고 얘기하면서, 뭐 가진게 있냐는 말에 잠깐 가디언칩으로 확인해봤다. 개구리가 주었던 아이템들은 대체로 괴상하지만, 음료라면....은신 기능을 부여하는 블루 레모네이드 스무디가 있네. 라고 대답했다. 그 외 다른건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피자라서 영 애매하네. 라고 덧붙이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귀여운데. 몇개 정도는 건네주는게 차라리 편할지도?"
과일을 따는 그녀를 보곤, 나는 쌓인 바구니를 옮기는건 내게 맡기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들었다. 요즘 여자라는 오해를 부쩍 많이 받고 있지만 이래보여도 신체도 A 건강도 S 다. 과일 좀 쌓인 바구니 같은건 거뜬하게 들 수 있다.
진화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미나즈키는 진화가 생각만 하던 그 문장으로 말을 시작했다. 이렇게 가쉬에 이어서(물론 미나즈키는 가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 질문'을 하는 두 명째 인간이...
"에릭이 선배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죠?"
...나오지는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금 미나즈키가 한 질문도 꽤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배, 혹시 여자인 건 아니죠?' 보다는 낫지 않은가. 미나즈키는 물론 시험공부도 중요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게 제대로 수업도 못 듣고(진화가 수업을 '안' 들을 순 있지만 '못' 듣고 있지는 않았다), 몽블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이건 사실일 수도 있다), 다림과 함께 자유를 되찾을 날만을 꿈꾸는(이건 정말로 사실이 아니다) 진화의 일을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넋을 빼고 있었던 탓에 누군가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을 물음표로 채워 넣으며 눈가를 덮은 손등을 연신 더듬었다. 짓궂은 장난에 태연한 체를 하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소리를 기억하냐 물어도 이전에 알던 이를 학원도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아니어서, 역시 당혹감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학원도에서 사귄 친구 중에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이 진화나 지훈이 말고 더 있던가 싶다. 그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흉내 내지만 은근히 장난기가 묻어나서 그다지 나쁜 상황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뭐야... 누군데."
눈가를 덮은 손을 겨우 붙들고, 잡아내리려 하며 고개를 비틀어 뒤쪽에 섰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망설이는 그를 보며, 나는 아. 무언가 학업에 고민이 있는걸까. 시험 공부라던가, 연애라던가. 혹은 전투법이나 인간 관계에 대해서 물으려는 걸까. 선배로써 후배의 고민에 나름대로 멋있게 대답해줄 방법을 열심히 고민했다.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진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의지해준다면 무언가 멋진 대답을....
"응응??"
응응????
대화의 흐름을 전혀 못따라가겠다. 한가롭게 디저트를 먹고 있는데 어째서 에릭의 괴롭힘이 언급되는거지? 물론 에릭이 날 괴롭히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요즈음에는 내가 반격하는 일이 많달까 사실 따지자면 내가 그를 잔소리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쭈글쭈글 하다가 요 근래 카페에 얼굴을 잘 비추질 않는데 혹시....
"가, 갑자기 그건 왜....??"
어쨌거나 나는 무언가 오해가 있음을 직감하고, 당황하면서도 거기까지 도달한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친구가 데려간 카페가 너구리 왕님이 운영하는 카페였거든요." 거기에서 너무 맛있는 것들을 먹어버린 탓인지 입만 높아졌다고요. 라고 말하면서 요리라도 배워서 해야죠.. 라고 말하면서 그런 걸 메뉴로 내놓는다는 말에 그래도 괜찮을지도요... 라고 말하다가 역시 공급이 불안정하니까 완전 한정판이 되겠네요. 라고 말합니다. 스페셜 후르츠 파르페 같은 느낌이 되려나?
"블루 레모네이드가 2개쯤이라면 하나.. 교환하실래요?" 1개만 있으면 교환하기엔 그러니 물어보는 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랑 케이크는 저도 있으니까요. 라고 덧붙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난폭해진다네요." "많이 먹으면 랜스를 데리고 와서 토벌 쪽이 되려나요.." 한두개 정도는 되지만요. 라고 덧붙이다가 들고 가는 걸 봅니다. 돌아오는 동안에 쌓아둬야겠다면서 부지런히 다람쥐마냥 과일을 똑똑 땁니다. 색으로 익은 게 구분이 가서 다행일까요. 그러다가 잠깐 쉬다 보면 나무 밑에서 반짝거리는 풀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이 책을 당장 놓으라는 영혼의 지시와 당장 도망치는 진화를 쫓으라는 뇌의 판단이 부딪쳤다. 이럴 때 사람은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냥 책 놓고 쫓아가자 vs 책을 던져놓을 순 없다, 정중히 놓고 가자 <- 그럴 시간이 어딨냐! 라는 공방전이 먼저 뛰기 시작한 후에야 시작되고 말았고, 결국 나는 책을 들고 달렸다. 서점 문을 통과하는 순간, 삑- 하고 가디언칩 결제 메세지가 날아왔다. 가격이 얼마인지도 확인 안 해봤는데... 몰라! 일단 이 오해를 풀어야만 한다!
" 당장 도주를 멈추고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
아니, 이게 아니잖아!
" 힘세고 강한 아침! "
이건 더 아니다! 일단 의념으로 신속을 강화하고 엄청 달린다─!! .dice 1 100. = 53
그대로 좀 더 장난을 쳐볼까 했지만 아까의 전화에서 목소리에 힘이 조금 없었던 것도 그렇고, 계속 장난쳐서 심기를 거스르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로 누구냐며 나의 손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굳이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반가움과 장난기 잔뜩 묻어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여어 백.춘.심. 잘 지냈냐?"
하고 그녀가 꺼려하는 본명을 하나 하나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오랜 친구를 만나듯 친근하게 인사했다. 이어 그녀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 세어번 쓰다듬곤 한쪽 팔로 벤치의 등받이를 잡은 뒤 가볍게 뛰어넘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땐 어쩐지 고독해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친해지고 나서 보면 굉장한 인맥이다. 외모나 매력과는 다른 신비한 분위기 같은게 있어서 그런걸까. 나는 조금 간탄하면서도, 너구리왕이 운영하는 카페의 음식은 어떤 메뉴에 어떤 맛이었는지 호기심에 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한정판이라....그런걸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도 있으니, 어쩌면 오히려 그게 더 잘 나갈지도.
"하나밖에 없기는 한데. 교환해도 상관은 없어."
왜냐면 블루 레모네이드의 효과는 원리는 모르겠지만 은신과 기척을 지우는데 특화 되있다. 실로 유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만. 내 역할상 의뢰에 가서 쓸 상황이 얼마나 있을지는.....음, 그건 또 모르는 일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외계인 제 음식 다른 목록을 말해줬다. 성별이 바뀌는 아이스크림, 어린 아이가 되는 케이크, 그리고 파인애플 피자. 이렇게 있네.
"그건 또 신기하네......그럼 사람은 먹어도 되는거야 이거?"
맛있어 보이는 과일 주제에 흥분제 작용이라도 하는건가. 메뉴로 정말 내놓아도 되는지 잠깐 의심하다가, 쉬는 시간에 문득 시선을 돌리면 반짝거리는 풀을 발견하는 것이다.
미안할 거 없으니까 도망치지마, 라는 외침에 순간 이성을 되찾고 잠깐 뛰는걸 망설인다. 생각해보니 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돌아가서 얘기를 하면 확실히 뭔가 알 수 있는게 아닐....
"히에에엑 - !!"
뒤돌아보니 그녀는 살벌한 기색으로, 당장 도주를 멈추고 투항하면 목숨만을 살려주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내가 봐온 만화 책에선 저런 말을 하고 살려주는 케이스는 한번도 없었다고 할까. 저런건 주로 악당의 대사이지 않은가. 그 무시무시한 기세를 본 나는 다시금 이성을 날려버리며, 묶어둔 머리가 찰랑거릴 정도로 열심히 뛰고 마는 것이다.
"....마, 맛이 갔어....!!"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며 달려오는 비아를 보고, 나는 그녀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 잡히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