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벙글 웃는 그녀에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리 말했다. 물론 솔직하게 정말 싫은 것은 아니었다. 놀림거리가 되는 것도, 친한 사람에게서라면 그럭저럭 즐거운 대화 소재가 될 수 있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날 놀리는 그녀는 요 근래 봤던 모습 중에선 특히나 즐거워 보여서, 그녀를 친구로써 소중히 여기는 나로썬 따라 웃게 되는 것이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게 아니야! 애초에 연인 있다구!"
심지어 이렇게 굴게 만든게 처음인 것도 아니다. 처음은 에릭이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무엇보다 연인이 있는 상태에서 이런일로 다른 누군가에게 흔들리면 그건 순정 만화가 아니라 이미 질척한 어른의 드라마지 않은가. 시청률은 확보될지 몰라도 현실에선 그런건 사양이다.
"음....그렇네. 그러고 보면 최근에 어떻게 지내?"
나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그녀의 근황을 물어봤다. 그러고 보면 일하면서 종종 마주치긴 해도, 그 외에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보는 경우는 잘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를 겪었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녀에게 변화를 주었던 것일지, 개인적으론 흥미가 있었다.
"....참고로 그 애는 나한테 손을 강하게 잡힌 후에 명치를 맞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방패로 두들겨 맞았어."
장난스럽게 웃는 하루에게, 나는 웃으면서도 어깨를 으쓱이곤 그 때의 호신술(?)에 대해서 말해준다. 조심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뭘 해도 그녀에게 손댈 생각은 없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다. 그가 알면 괘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심 '얼마나 잘그리는지 한번 보자!' 라는 감정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본 그림은, 말 그대로 장인의 작품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서로를 좋아하고 위하면서도 아직 솔직하게 이어지지 않은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 관계가....그림속에 완벽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연인과 함께 보러올 걸.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그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어째 아는 사람 같은데...."
....장인의 작품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봐도 내 근처에 있는 커플인 에릭 하르트만과 하나미치야 이카나씨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나도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인 탓에, 근처에서 가장 비슷한 커플을 연상해서 보게 만드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기엔, 너무 생생하게 그 둘의 광경이 그려지는 것만 같은데......
"아, 고마워."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도, 그가 건낸 사탕을 고맙다고 대답한 뒤 받아서 입에 물었다. 새콤달콤한게 꽤나 맛있다.
하루는 너무 짓궂게 굴지는 않겠다는 듯 상냥하게 대답한다. 장난도 정도를 넘어서면 기분이 나빠지는 법이니까, 그리 많이 할 생각은 없었다.
" 아하하, 알죠, 알죠. 그런데 정말 궁금하네요. 우리 진화군이 사귀는 사람 말이에요. "
진화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하루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몇번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역시 누군지 들은 적이 없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하루였다. 혹여 진화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사람이라면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물론 진화가 그런 것도 걸러내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친구로서의 걱정이었다.
"그렇게 해석하면 그렇게 볼 수 있고... 누군가와 비슷해 보이더라도 그 사람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고..."
애매모호한 답변. 휴우... 위험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면 꽤 위험해질지도 몰라. 네놈!! 하면서 검으로 날 죽이려고 할지도 호들호들 연약한 서포타는 무서운 거시와요. 이럴때는 빠르세 화제를 돌려야 하지. 그림을 무서운 속도로 통에 집에넣고, 다음 그림을 꺼낸다. 이번에는 나의 영웅의 형상 시리즈. 태양왕 게이트에서 본 것을 그려서 형상 시리즈를 갱신할 예정이었지만... 너무 오래 됐어...
"이것은 제가 본 것을 그린 거예요. 솔직히.. 이걸 처음 봤을 때... 진짜 끝내줬어요. 제가 원하는 그 느낌, 그 분위기... 최악의 상황에서 등장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모두를 살리고 꺼져버린 불꽃처럼 사라져버린 그... 한 번 더 보고 싶네요."
그 풍경을... 그 광경을... 히히. 태양왕때에도 꽤 좋았지... 게이트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은 건 안 좋았지만. 아무튼, 이 그림을 보면 뭔갈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진화 씨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녀가 다시금 사귀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내비치자, 나는 얼굴을 붉히고 볼을 긁적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가 카사랑 사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한번 부끄럽다고 거절한 이유, 한번 더 한사코 거절하려니까 어쩐지 그녀를 신뢰하지 못하고 따돌리는 듯한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결국 말하고 만 것이다. 사실 최근 청천이에겐 밝혔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청천이에겐 말해줬으나 자신에겐 철저히 비밀로 한다면, 상처받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엑. 검술? 하루는 치료사 아니었어?"
평범하게 들리던 일상 속에서 갑자기 의외의 말이 나왔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하루는 어딜봐도 치료에 철저히 집중한, 뭐라고 할까. 전형적인 메딕이었는데. 검술을 배웠다니.......정말 의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걸까? 싶어서 나는 놀란 얼굴로 하루를 봤다.
"그렇게 말해주면 기쁘지만, 오늘 같은 일이 자주 있진 않았으면 좋겠네.......그리고 변화라. 그러고 보면 아까전 양갈래 머리는 확실히 귀여워서 좋았다고 생각해."
매력은 연인에게 어필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다른 사람....더불어 동성에게 어필되어도 곤란해. 진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까전 양갈래 머리를 한 하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평소엔 조금 어른스럽다는 이미지인데, 어쩐지 그렇게 하고 귀여운 복장을 입어도 어울린다. 사실 아마 뭘 해도 어울릴 것이다. 미모란 최고의 옷걸이니까.
에릭 아니야? 라고 말하려던 나는 그의 재빠른 말에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예술의 장인이 담은 의도는 그러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예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왈가부가 하는 것은 멋이 없다. 일단 감탄하기로 했다. 이 그림을 본 것만으로도 여심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들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헤에. 누군진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네."
그게 그가 바라는 영웅의 상인가. 하긴 지난번에도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다. 최악의 상황에서 등장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를 살린 뒤에 사라진 인물.....인가. 하긴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영웅이라 불려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좀 더 흥미로운 눈으로 그림을 지켜본다. 보지만.....으음. 뭐라고 해야할까. 분명히 멋진 그림인 것은 확실했지만, 나에게 확 꽂히는....그런 무언가는 없었다. 그 때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는 영웅의 상과는 달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감탄은 했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거 에릭 아니야?"
거기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아까전에 연인들의 그림에서부터 이어져서, 나는 고개를 기울이곤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