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에서 멘토와 마주쳤다. 오늘은 함께 다니던 그 무리는... 없나? 그 친구들이 없다 하더라도 시원은 령의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를 비켜주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언제 보더라도 무서움을 떨쳐낼 수 없는...
"...... 아, 맞다..."
... 저번에 령과 만났던 때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때 깜박하고 유인물 하나를 못 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큰일이다, 말 걸어야 해...? 그냥 지나가길 바랐으나, 어쩔 수 없이, 늦게 무섭든 빨리 무섭든 똑같이 무서운 거니까 시원은 빨리 무서운 길을 택했다.
>>670 시원스쿨...? 내 이름 가지고 놀리는 거야? 짜증나는 마음에 무어라 대거리하고 싶었으나, 못 한다. 무섭다. 아랫입술을 내밀고 불퉁하니 표정을 잠깐 짓는 걸로 시원 나름의 반항을 해본다. 그것마저 금방 끝나버렸을 테지만. 들키면... 무섭잖아.
"선글라스..."
그리고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쓴 당신이 신기해 잠깐 중얼거렸다. 정말 무의식 중으로 한 행동이라 본인이 그런 말을 한 것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금세 정신을 차리고, 령한테 용건을 말하기 시작한다.
"...... 그, 그게. 유인물 한 장이..."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심지어 있는 일을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 하고, 어떻게 하면 당신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꼴이 누가 보아도 선명할 것이다. ... 아무리 이 사람이라도 학교 복도 한가운데에서 사람을 때리진 않겠지? 그렇게 믿으면서 시원은 한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 혹시 만약 지금 안 바쁘시다면... 싸인하셔야 할 게 하나 있는데... 잠깐 제 반에 들러주실 수 있을까요......"
계속 시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령은 시원의 표정이 불퉁하게 변한 것을 보고 픽, 웃었다. 겉으로 보면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순전히 즐거움으로 지은 웃음도 비웃음처럼 보이는 그였으니 당연했다.
"이 **들은 지 이름 가지고도 저러는 놈들인데 슬슬 적응하지 그래. 애칭이라고 생각해봐." "나 그럼 너도 애칭으로 불러도 돼?" "**, 뒤지게 처맞고 싶나 버러지가." "크억, 이, 크엑, 이미 때리, 꺅! 고 있잖아! 악!"
퍽퍽 등을 두들기지만 나름대로 장난인듯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진심으로 때리고 진심으로 죽어가는 중이지만 진짜다. 옆에서 한 양아치가 '꺄, 복도에서 sm플이라니 대담하긴!'이라고 깐족거렸다가 같이 처맞는 것도 문제 없다. ........아마도?
"선글라스? 선글라스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스윽, 한참을 두들기던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빼낸 그가 잠시 눈부신 듯 눈을 찌푸치며 깜박였다. 맞고 있던 두 양아치는 '역시 진령이 멘티님! 우릴 구원해줄 거라 믿고 있었다구, 5252!'따위를 외치고 있었지만 무시하는 게 좋다. 적응한 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장난치듯 선글라스를 돌려보던 그가 햇빛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썼다. 아무런 이상 없는데 설마 갖고 싶은 거야? 시시껄렁한 농담을 툭 던진다.
"......유인물?"
한 장 때문이라니 귀찮네. 확연히 음침해진 기운을 내뿜던 그는 옆에서 양아치가 검지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자 마지못해 옆을 돌아보았다. 뭔ㄷ..봐봐, 너 때문에 멍 들었어! ......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등의 셔츠까지 걷어올려 등짝까지 보여주자 다시 한 번 그 위를 세게 내려친 그가 들리는 비명소리를 부시하고 손을 털며 시원을 바라보았다.
"한 장을 빼먹다니 귀찮게. 그런 사소한 것도 까먹다니 바보야? 난 엄청 바쁜 사람이라고. ...하아, 어쩔 수 없지. 안내해."
>>689 ......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은 걸 들켰나? 황급히 웃으며 무마해보려고 했지만... 장난스럽게 때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변명이 영 통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저 양아치들도 맞고 죽어가는 sm플(?)에 자신이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시원은 그냥 하하 웃는다.
앞으로는 열심히 자기세뇌를 해야겠다. 저렇게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즐거운 애정표현이겠지. 응. 그럴거야. 절대 학교폭력이 아닐 거야.
"아, 아뇨. 문제는... 없고요. 네. 문제는 없죠. 새삼스럽게 잘 어울리신다 싶기도 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아부의 말을 흘리던 시원이 고개를 슬 기울인다. '역시 선배님은 선생님들도 안 건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라는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표정이 당신 눈에도 보였을지 모르겠다. 결국 말은 안 하고 웃으면서 얼버무리긴 했지만. 하하, 제가 어떻게 멘토님 선글라스를 뺏겠어요. 제가 상납하면 또 몰라도...
"...... 그, 저, 죄송합니다."
확연히 안 좋아진 분위기에 시원이 더 위축되었다. 그래도 혀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는 건 시원 나름의 엄청난 용기일지도 모른다. ... 자신의 어깨 위에 령의 팔이 얹히자 몸이 굳는다. 마치 사자 앞에 놓인 토끼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는다. 장하다 나 자신.
지가 말했으면서! 약간의 즐거움이 포함된 비웃음이 사라지고, 이제는 완전히 비뚜름한 미소를 그 사라진 자리 위로 그려낸다. 분명히 키가 더 작은 사람은 진령이었지만 삐딱하게 서 있어서 더 키가 줄어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려다보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였다.
"그래? 그것 참 고맙네."
나오는 모든 말이 비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렇다면 진령은 그 분야에서 천재가 틀림없었겠지. 낑낑거리는 강아지-순화되었다-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며 그는 낄낄거리며 곧게 서서 허리를 앞으로 가까이 내밀고 입을 뗐다. 누가 내 꺼 준대? 내 말은 어디서 샀냐고 묻기라도 할 거냐는 뜻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니 무섭네, 멘티님아?
"죄송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건 알고 있지? 뭐, 네 경우에는 못한 거니까 이번만은 넘겨주도록 할까."
움츠러든 시원에 즐거워하면서 열심히 놀리는 진령을 보는 양아치들은 시원을 동정했다. 곧 잊고 같이 동참했지만. 하여튼 유유상종이었다. 벌벌 떨지도 못하고 굳어버린 토끼를 보며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게 먹어치웠다고 전국에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자는 결국 입을 귀쪽에 가까이 대고 아래서 바람을 훅 불어넣으며 가볍게 장난쳤다.
"자,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우와, 너무하네! 우리가 멘티님을 얼마나 잘 챙겨드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무래도 진령이가 협박한 게 아닐까?" "그렇네! 분명 그럴 거야! 자, 걱정말라고, 우리가 너를 령이한테서 지켜줄게!" "분명 진심이 아니었지? 저 빙구 말대로 걱정 마.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멘티님 진심이야 당연히 알아챌 수 있지. 자, 가자!"
장난기가 다분한 어조로 포위하듯 다른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머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 둥 여러 포지션을 취한 양아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어서 가자고 외쳤다. 진짜로 유유상종이 이보다 어울릴 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만한 건, 진령이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휘젓자 다른 양아치들이 시원에게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쩌냐. 쟤네들은 저렇듯이 내 말을 잘 안 들어서 멘티님의 바람은 못 들어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