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남자가 있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였다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간의 물결에 부표와 같이 떠다니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 남자는 자신의 넘쳐나는 시간을 죽이는 것 외에는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 시간을 조각내어 토막내어 유기하는 것만이 남자의 일이었다 . 우연히 내가 남자와 만난 날에도 남자는 자신의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하루 분의 시간을 죽이느라 한가한 남자는 역설적으로 바빠보였다 . 내가 말을 걸어도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 한 번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성격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 나는 남자가 쓰러트린 시간의 시체를 보았다 .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시간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끔찍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 그것도 어찌나 다양한지 . 세 팔 달린 기형에서부터 시작해 심하게는 하나의 눈에 열 개의 입을 가진 것도 있었다 .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시간들을 한 자루의 삽만으로 해치웠다 . 끝이 붉게 물든 저 삽은 남자의 하나 뿐인 흉기임에 분명했다 . 시간이 흘린 체액으로 엉망진창 더럽혀진 그것은 이제는 자신이 해친 시간을 땅에 파묻기 위해 흙에 부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 어찌나 험하게 다뤄왔는지 이가 다 빠져 무른 땅에도 똑바로 박히지 않는 삽이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것처럼 힘이 아닌 요령으로 남자는 구덩이를 만들어갔다 . 저 자신조차도 파묻을 만큼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