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수습하면...😧 내 걸작을 네가 망치다니! 그런 느낌일지도 모르겠어요. 괴팍한 예술가 친구들인걸까요..🙄 아가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러면 안돼, 아프면 말해, 먹고싶은 거 있어? 하고 대화라도 할 텐데...그래도 캡틴이 예뻐하시는 걸 알면 다행일 것 같아요. 문다고 해도 일방적인 너 미워!가 아닐테니까요..😂
아, 여기에서 가설이 하나 더. 그동안 직접 대면한 경험은 얼마 없었지만 구성원 간 결속력이 그리 좋아 보이는 집단은 아니라는 인상은 충분히 느꼈다. 그것이 곧 분열이나 배신으로 연결될지는 미지수고, 처음부터 역을 둘로 나누어 투입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쪽을 돕는 쥐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무기가 공인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이다.
"제 쪽에서도 실망하시지 않도록 노력해볼게요. 당신도 그래주셔야 해요."
이것 역시 시시한 농담이다. 애초부터 거대한 음모와는 연관이 없으니 쉽게 꺼낼 수 있는. 주양의 말을 듣고 그도 조금 생각해본다. 실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에게 일말의 신뢰와 기대를 가졌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추종자와 음모, 이런 일이 아니고서도 자신은 언젠가 주양에게 실망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람에게 기대하는 일은 더는 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는 쉽게 마음 주어버리는 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그간 그 습관을 떨쳐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지만 그것이 과연 결실을 맺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 어떤 상처마저 감내하고 상대에게 동조할 수 있다면 영영 실망하지 않게 될 수야 있겠지만……. 개와 장난질을 하느라 사색은 거기에서 그친다.
라쉬는 여전히 으득으득 이를 갈아대고, 주양이 주변을 모조리 물려낸 덕에 한적해진 해변가는 한낮의 잔잔한 풍치가 있다. 한순간이나마 일상이 온전한 평화를 되찾은 듯한 반가운 착각. 그 순간의 혼동을 깨어내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사실 고민은 오래 했는데요,"라는 말로 운이 떨어졌다.
"저도 비슷하겠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고민해봤자 일개 학생 하나가 이런 상황을 해결 못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걱정하는 걸 못 멈추고 있었거든요."
그는 무릎 위에 손깍지를 끼어 몸을 뒤로 당긴다. 무력한 채 당하는 일은 여전히 두렵지만, 그것을 선고가 아닌 대비의 시간으로 삼자면 활로는 어떻게든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동안 바라왔듯이.
"그래도 주양이 네가, …………이야기 상대가 되어줘서 그런지 마음이 좀 나아졌어요. 나름대로 진전도 있었고. 주작님도 선생님도 저희가 머리 싸매고 불안해하라고 그걸 알려주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하니까?"
또 시시하게 한 소리를 덧붙이는 걸 보아하니 나아졌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제 이름 앞에 붙은 수식에 어쭙잖게 눈총을 주었지만, 그도 결국은 어정쩡하게나마 주양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와중에도 '너'라고 부르라던 말까지 꼬박꼬박 지키려니 문장이 영 이상해서 말이 멈칫한다.
"그러니까 고마워요. 의도하셨든 아니든 간에 저한텐 꽤 도움이 됐거든요. 먼저 장난치신 것도 재미있었으니까 고맙다고 할게요."
조금을 더 머뭇거리다 입 안에 도는 말을 모두 뱉어내자, 뒤늦게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바다로 눈길을 돌리다 눈꺼풀을 꾹 내려버린다. 눈을 내리감고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제법 숫저웠다.
기숙사 창밖으로 펼쳐진 초여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에도 소복하게 쌓인 눈은 녹지 않아서 창을 열면 더운 바람이 한 번, 찬 바람이 한 번 번갈아 들어온다. 창가에 서서 눈을 감으면 더운 바람이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가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지고, 따스함이 뺨을 간지럽힌다. 뺨이 온기를 머금을 때가 되면 그 뒤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뒤로 펼쳐진다. 목을 스치고 뺨의 열감을 스쳐주는 바람결을 넘실거리며 타고 들어오는 것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다. 그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의 근원은 입학은 제법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노는 것은 새롭고 즐거운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는 이런 날을 완벽한 주말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날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푹 쉴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에 단 한 번, 이런 완벽한 주말이 잠깐 흔들릴뻔한 경우가 있었다. 바로 당신을 거둔 날이다. 그날도 이렇게 완벽한 주말이었다. 사건은 그에게 성큼 다가왔고,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간의 시행착오였을 뿐이다. 그는 더는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완벽한 주말일 것이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라 믿었다.
그는 찬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뒤, 몸을 작게 웅크렸다. 창틀에 한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로 입을 막자 짧은 기침이 흘렀다. 기침 소리를 뒤로 침묵이 오갔다. 고요한 바람도 멈춰버린 정적 뒤로 그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마른 입술을 혀로 훑은 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창문을 닫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불어와야 할 바람도, 들어올 햇살도 드높은 벽이 서듯 희미해진다.
그는 소음이 잦아들자 뒤로 돌았다. 당신을 보기 위해서다. 당신은 별의 맛인 Mars를 먹고 있을까, 아니면 선택의 순간인 Oreo를 먹고 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만히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당신은 행복하면 된다. 그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을 거두고 나서 오랜 시간 홀로 마음 앓이를 했다. 밤잠을 설치고 악몽을 꾸며 수도 없이 과거를 곱씹고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다시 한번 상처를 주는 존재를 믿어도 되는 걸까, 내 선택이 앞으로의 큰 파문을 불러오면 어쩌나, 이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여러 날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지팡이가 부러졌던 날, 당신이 떠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길로 굳혀졌다.
"아가, 이리 온. 할 말이 있단다."
그는 당신만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은 천천히 마음이 열릴지도 모르지만, 아직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이 마음을 열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불렀다. 그는 당신이 오기 전에 손을 등 뒤로 숨긴다. 손바닥에 선명하게 묻은 피를 소맷단의 안감에 닦아내 빠르게 지운다. 당신은 조종 계획이 잘 짜인 임페리우스 마법에 당한 사람처럼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다. 오늘도 대꾸 하나 없이 그의 앞으로 온다. 이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어느 날은 싫을 거고, 귀찮을 것인데. 차라리 그런 날엔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한다. 그는 생각보다 친절하기만 한 사람이고, 당신에게 직접 가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의 손을 그는 조심스럽게 쥐었다. 여전히 살이 붙지 못한 앙상한 손가락의 끝에는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있다. 먹는다고 했지만, 평소에 먹던 양에서 조금만 늘어도 속이 받쳐주지 못해 게워내기 일쑤다. 노력하겠다 했건만 줄어든 위가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손을 쓸어내린다. 온기가 거의 없는 창백한 손에 당신의 온기가 전해진다. 잠깐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당신의 곧게 뻗은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를 검은 손톱으로 살포시 눌렀다.
"아가, 자네는 내가 왜 반지를 주었는지 아는가?"
그는 짧게 질문했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이라 대답하든 간에 그는 네 말이 옳다고 답했다. 당신의 대답은 신뢰의 증표였을 수도 있었고, 같이 있어 줘야 한다는 종속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라도 들었으니 족하다. 그는 당신의 손을 살포시 들어 올린다. 반지 낀 손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뗀다. 당신의 살갗이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다이아몬드 부분에 잠깐의 예의를 표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입술은 손등으로 갔을 것이고, 손가락과 손바닥을 이어주는 마디로 갔을 것이며, 끝내 손가락과 손바닥까지 입을 맞췄을 것이다. 그는 눈만 들어 당신을 올려다본다. 183센치미터인 그는 당신과 얼마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시선은 아주 조금이나마 올려야 한다.
"이전에도 말했듯 이 육신은 머잖았기에 너와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할 것이지. 나는 졸업 후 세상을 유랑할 생각이네. 이 몸이 결국 쓰러질 때까지."
그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죽음을 예고하는 목소리에는 외로움도, 쓸쓸함도 없다. 한치의 후회도 없었고, 애환도 없었다. 그는 죽음에 초연했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그러려니 받아들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손을 어루만진다. 창백한 손등이 지난날의 악행을, 누군가를 수도 없이 죽였을 손을 덮어가렸다.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어. 내가 네 곁에 있을 시간은 적단 소리네. 자네를 지켜줄 시간은 적고, 이후 내가 사라진다면 자네는 매구의 추종자란 명성 때문에 영영 떠돌지도 모르지."
그래서 반지를 주었네. 그는 덤덤하게 당신의 처지도 언급한다. 당신은 매구의 추종자다. 그가 아무리 네 자유를 찾아 떠나라고 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그가 없어지면 그나마 당신을 덮어 가렸던 가림막이 사라진다. 비극은 한순간에 청천벽력처럼 찾아올 것이며, 당신은 세상에 던져질 것이고, 마법부는 끝까지 추격해 당신을 아즈카반에 밀어 넣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암약해서 당신을 빛으로 내몰고 싶었지, 같은 곳으로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는 반지를 엄지로 매만지며 당신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을 마주했다.
"그러니 아가. 내가 떠나면, 나를 두고 가게. 부디 날 데려가지 말아. 나를 두고, 홀로 반지와 함께 라온으로 가면 되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마법부 직원을 찾게. 자네를 해치지 않을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고. 입에 실을 꿰고 있으니 쉬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야."
이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실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발악해봤자 삶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여생 동안 이뤄야 할 것을 모두 이루고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상 중엔 당신이 있다. 당신을 빛으로 올리고 자유롭게 날려 보내고 싶다. 이미 떠나보낸 카나리아처럼 상처를 주고 떠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창공으로 안온히 보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담담해지기로 했다.
"그를 만난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반지를 보여주렴. 그러면 그가 널 안내할 거란다. 그를 따라가. 그러면 너는 마법부의 추격에서도 도망칠 수 있을 게야."
그는 가문원을 떠올렸다. 우두머리가 없어도 가문은 괜찮을 것이다. 누군가 죽거나 다친다고 해도 슬픔은 잠시뿐일 사람들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금세 잊고 살아갈 것이다. 본인 살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혼자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면, 그것마저 덮어가리고 제 갈 길 갈 사람들이다. 대가 끊겨 새 가주는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름은 이어질 것이며, 당신 또한 그곳에서 안온한 여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너른 숲이 있고, 호수가 있단다. 멀리 가면 드넓은 바다가 있는 곳이지. 숲길 깊이 들어가면 오두막이 있단다. 해가 뜨는 날엔 넘실거리는 햇살과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탐스러운 사과가 열린단다. 비가 오는 날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렴. 작은 오두막 속의 안식이 있을 것이야. 저택 안은 조금 소란스럽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운 곳이란다. 다들 네게 친절할 것이야. 금지된 마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테지."
아가. 그가 운을 뗀다. 창 너머의 햇살이 넘실거리며 그의 뒤를 비췄다. 검은 머리카락이 쨍한 햇살에 하얗게 보이고, 검은 소맷단에 숨겨 묻힌 피가 햇살에 투명하게 윤곽을 비췄다.
"마노, 나의 신도야, 한순간도 스러져선 안 될 생명아, 시체 쫓는 까마귀가 절애(切愛)하는 아가야."
부디 너만큼은, 그곳에서 자유를 찾으려무나. 그는 햇살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더없이 덧없고 한치 후회 없는 미소가 햇빛의 역광에 가려져 입매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마치 우리의, 나의 앞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