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자리에 앉아있던 레오는 잠깐 의식을 잃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동안 어쩌면 잠깐동안 정말 죽었다 살아났는지도 모르지.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부분이 멀쩡한 부분인지를 알 수 없었다. 오른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팔을 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상처부위가 벌어져 피가 주르륵 흐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양 다리는 의외로 멀쩡했다. 굴러서 생긴 조그마한 상처들 뿐이었다. 가슴께에도 상처가 생겼고, 배에도 생겼으며 멀쩡한 줄 알았던 등에도 마구 긁혀버렸다. 완전히 걸레짝이 되었네. 레오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 아- 아- "
오, 이제 말할 수 있네. 레오는 시험삼아 목소리를 내보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지팡이를 잡았다. 질문같은 소리하고있네. 방심하고 있을때 공격해야지. 비굴하더라도 어쩔 수 없으니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할미탈을 겨눴다.
" 이, 이, 이... 인센... "
말을 마치지 못하고 툭, 하고 팔을 떨어트렸다. 팔을 들고있을 힘도, 제대로 조준할 힘도 없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의 모든 힘을 쓰는 기분이었으니까. 추웠다. 몸이 약하게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피딱지가 굳어 눈이 잘 떠지지 않는 모양이다.
" Scheiße... "
그만두고싶다고 생각했다. 이제 끝내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사치일 수도 있으니 지금은 그냥 전부 다 끝내고 싶다. 더 이상 아픈것도, 압도적인 실력차에 손도 못쓰고 나뒹구는 것도 그만두고 싶다. 그런 생각만이 들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싶은대로 하게 두어야겠지.
그 사실을 인지하자, 두 탈들에게 포커스가 집중되어 주변을 돌아보지 않던 단태는 그제서야 주변을 제대로, 천천히 살필 수 있었다. 주변에 모여든 독사와, 돌아가는 두명의 탈. 그리고 - 돌아오는 사람들. 임페리오 한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주단태는 지팡이의 끝을 아래로 내리고 눈을 굴렸다. 암적색의 눈동자에 다시 반짝거리는 빛이 감돌았다.
할미탈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온후한 태도에 단태는 눈썹 한쪽을 치켜올려서 의문을 표했다. 이제까지 내 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탈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기에 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다만, 주단태는 뭔가를 물어보는 것에 명백히 약했다. 질문 하는 것보다 익숙한 것은 따로 있었고. 어찌되었든, 단태는 레오에게 다가가서 샐쭉- 가늘게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추다가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려하며 "괜찮아, 달링?" 하는 질문을 던진 뒤 조금 있다가 병동에 데려다줄게. 상처가 심하다. 하는 말을 덧붙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단짝에게 다가섰다.
"자기야~ "
임페리오에 걸렸다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법한 남학생에게 목이 잡히고, 그 남학생의 복부를 걷어차버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태도로 단태는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잡혔던 목에는 손자욱이 흐릿하다.
양반탈의 적안을 매섭게 쏘아보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승기를 잡았다면 그 것을 마음껏 휘두르는게 인지상정.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려한 몸짓이 이어지며, 지팡이는 허공을 부드럽게 갈랐다. 봄바르다 막시마. 다음 주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주양 역시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한 뱀 떼를 눈치채고는 일단 지팡이를 거두고 제 라이벌을 앉혀놓았던 쪽으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아무리 들끓는 화산 속 용암이라고 한들, 분출될 때를 가려야 마땅한 법. 행여나 독사가 그 아이를 해하기라도 할 것이 염려되었다. 오래 살아서. 영원한 라이벌로 남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 어머나. 친절하기도 해라. 너. 다른 애들이랑은 조금 다르구나?"
임페리오 주문을 걸었다는 말에 표정이 살짝 구겨지기는 했다만, 놀랍게도 그 저주 마법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데 쓰였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무슨 생각일까, 저 사람은. 일단 그런 의문은 뒤로 미루고 주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안심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저쪽으로 간 사람들이 무사하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질문~ 질문이라. 거짓이 아니라면, 순순히 보내줄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너가 뻥을 입에 담는다면 그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만."
자. 이제 질문은 뭐가 좋을까. 설마하니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를 질문으로 간주하고 안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고. 문득. 전에 들었던 주작의 신탁이 떠올랐다. 학원에 숨어든 쥐새끼는 한둘이 아니라는 신탁. 물론 주양이 떠올린것처럼 과격한 어조의 신탁은 아니었으나, 지금 주양에게는 그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학원에는. 너희 탈들이 얼마나 숨어들어왔지?"
쥐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걸리는 대로 내뱉었다. 하나만 질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쉬웠다.
거짓이어도 좋으니 깔끔한 확답을 주었더라면, 아니지, 그녀는 어차피 어느 쪽이든 완전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애매한 대답이 현재로서는 나았다. 아직은, 이라는 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의미니까.
그녀의 조건이 통했는지 상황 정리는 정말 한순간이었다. 발밑으로 뭔가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내려다보자 왠 뱀들이 한가득이다. 고개를 들어 탈들 쪽을 보니 새로운 탈이 등장했다. 할미탈이던가. 저거. 남성으로 보이는 그 탈은 양반탈의 탈을 고쳐주고 짐승들과 함께 그녀들을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안쪽으로 사라졌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가게 해주었다. 적어도 반수는 죽었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죽었다는 말에 그녀는 되려 의문이 들었다.
아무도 안 죽었는데 그는 이걸로 되었다고 판단한건가? 단순히... 죽이는게 목적만은 아니라는 걸까.
"...고마워요. 선배."
이제는 저주의 여파가 많이 가셨기에 더이상 떨리는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떨어지긴 싫으니까 그에게 몸을 푹 맡긴 채로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뒤에선 할미탈이 질문을 받아주겠다고 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조금이라도 그와 같이 있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쥐어잡은 목의 형태감이 선명하니 이제야 그 염원이 이루어지는 것만 같아 웃음이 난다. 현실감이 흐렸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언젠가의 기억이 현실을 침범하여 겹쳐진다. 그거 알아? 난 가끔 네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정신이 막연하게 부유하는 듯했다. …지금 밑에 있는 네가 누구였지?
"윽."
그리 고차원적인 사고는 하지 못했던 중이라, 공격에만 집중한 몸은 우스울만치 쉽게 일격에 당해버리고 말았다. 묵직한 충격에 멀어졌던 의식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 역재생을 하듯 느리게, 기억을 되짚다…….
드디어 현실에 닿는다. 가장 먼저 깨달은 상황은.
"……."
그는 아무런 말도 떠올리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순수한 당혹 뒤엔 형언하기 힘든 절망이 닥친다. 사과도 무엇도 건넬 수 없었다. 상황이 끝났음에도 제자리에서, 여전히 아래로 박힌 시선만 잘게 떨린다. 아, 널 죽이고 싶다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할미탈에게 질문을 던진 주양은 당신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놀란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맙소사. 크루시오를 듣고 다시 이성을 놔버린 탓에 임페리오가 다시 날아갔고, 임페리오를 맞았던 학생과 당신의 접전이 있었다는 것은 차마 주양이 신경쓰지 못했던 점이었다. 당신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면서 입술을 자근 씹었다.
".. 저 탈들. 다음에는 절대 그냥 보내지 않겠어.. 전에는 우리 여보야가 날 병동까지 데려다줬으니까, 이젠 내가 데려다줄 차례겠는걸!"
그는 붉은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세로동공. 대체 어떤 특징을 가졌길래 추종자는 동공이 세로의 형태로 길게 찢어져있는가. 그는 잠시 백정을 향해 시선을 데굴 굴린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것 참 무섭군."
툭하면 죽여버린단다. 이래서 죽은 사람은 무섭지 않은 거다. 그 죽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산 사람이 무서운 법이지. 그는 지팡이를 겨누자 혀를 쯧 찼다. 그의 나이는 열아홉으로, 오래 산 사람도 아니고 이제 막 10대의 끝을 보는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본 세상은 두렵지 않았다. 눈앞의 추종자가 두렵다기 보단 짜증이 치밀었고, 그가 생각하는 어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을 수 있었다.
"운 좋게 교배가 잘 된 고급 품종이면서 그게 권력인 줄 아는게지."
그 품종 중에서도 어중이 떠중이는 널렸는데도 본인이 제법 우월하다 생각하고. 심취해 휘두르고, 결국 불리해지면 뭘 하겠나.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추해지고 싶은 건가? 그까짓 피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차피 관에 들어가면 똑같은 시체면서 경중을 재고 자신의 품종이 우월하다는 양 행동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교배 당하는 입장이면서 순혈이니 뭐니 말이 많지 않은가. 그는 주인의 명이라는 말과 함께 나타난 남성을 바라본다.
"이것 참."
두 탈과 동물은 소란을 피워놓고 휙 가버리고, 임페리오 주문을 걸어 돌아가게 하질 않나, 아무도 안 죽었다는 둥 그런 말도 내뱉질 않나.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목숨을 위협해놓고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닌가. 금지된 마법을 썼어도 나는 좋은 쪽으로 썼으니 용인해달라 이 말인가? 오! 그는 진심으로 자퇴를 해야하나 고민을 했다. 학교에서 난데없이 습격에, 목숨의 위협을 받은 학생이 수십에,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전투가 끝나니 물밀듯 치고오는 여러 생각을 갈무리하며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양심이 있소? 혹 질문 하나로 이런 일을 당연히 넘기는 것이 교배 잘된 머저리 모임의 기본 규칙이오?"
젠장! 그가 씹어뱉듯 욕설을 뱉었다. "내가 순혈이라는 것도 이젠 진절머리가 나는 군 그래." 하는 눈은 환멸로 가득 차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간싫어 점수는 차곡차곡 올라 100점 만점에 218점을 찍었다. 웃음만 나왔다. 뭔 질문이란 말인가. 그는 골머리를 앓듯 머리를 쓸어넘기곤 한숨을 쉬었다. 백정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그가 질문을 뱉는다.
"그래, 하나 묻겠소. 왜 하필 이 학교의 학생과 교수를 위협하는 지, 그게 궁금하오.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