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웃으려고 했냐는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싱긋 미소지었다. 글쎄, 따지고 보면 울기보다는 웃을 뻔했다는 것에 더 가깝기야 하겠지. 이건 비밀이지만, 릴리는 가쉬가 바라는 대로 그의 감정을 나누어 받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걸 표현해 주지 않을 정도로만 딱 짓궂었을 뿐이다. 자, 여기서 오렐리 샤르티에 씨의 자기변호를 들어 보자.
‘나는 원래 이만큼 장난기가 심하지는 않지만…… 가쉬 씨가 먼저 장난 걸었으니까.’
그렇단다.
돌부리에 걸린 문어처럼 배배 꼬여 가는 가쉬를 지켜보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폴짝 뛰어 기품 있게 일어났다. 머리를 옆으로 넘겨 튕기자 분홍색 커튼이 팔랑이는 것처럼 빛이 일렁였다. 승리는 언제나 기분이 좋은 것이다. 때로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승리는 명예와 품위의 귀중한 자산이니까.
“그래! 2:0. 내가 이긴 거지? 이럴 거면 뭔가 걸 걸 그랬네. 5만 GP라거나, 바이올렛 코스트 한 개 구해다 달라거나. 안 그래?” “하지만 다음엔.”
릴리도 따라서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사실, 지금의 기분이라면 승부 따위 어찌 되어도 좋아. 중요한 대발견을 했으니까.
“제대로 들려줄 테니까. 승부 없이.”
바람이 불어서 춤추는 치마폭처럼 릴리의 머릿결이 흔들린다. 릴리는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조금은 놀란 것처럼.
“…… 아하하하하항! 하하항, 하항─ 푸하하항─!”
이내 배를 잡은 릴리에게서 그 특유의 비음 섞인 웃음이 섞여나온다. 그대로 배를 잡은 채 허리를 구부리고, 아까 웃지 못한 웃음까지 모두 웃어 버리려는 듯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고개를 숙인 릴리의 왕관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온 말은 장난기도 콧소리도 없는 사뭇 진지한 한 마디였다.
나는 고개를 돌린 탓에 그녀가 일어서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어서서 먼지를 터는 소리가 들릴 뿐. 고개를 돌리고 싶진 않았다. 이 표정을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패배자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거기에 지금 그녀의 모습을 봤다간, 나는.
이어 나의 승부 없이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그녀는 ...엄청난 폭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폭소를 하시는건 마음에 금이 가는데 말이지. 그렇게 웃을만한 것이었나? 내 연주?"
어디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셈이냐 저 애늙은 꼬맹이는.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웃게 냅둔다. 저렇게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솔직히, 단순하게 비웃는 것 만으로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를 잡고 허리까지 숙이며 끄윽거리면서 웃다니. 저 왕관은 떨어지지도 않나. 아아, 웃어라 웃어. 이제 어찌되든 상관 없게 되어버렸다. 짜증나긴 하는데, 왠지 그렇게 화나는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 감정이 복잡하다.
실컷 대폭소를 한 뒤,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실컷 웃으셨나,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어 그녀는-
“─기대하고 있을게.”
라며, 지금까지는 본 적 없는, 어른스러움을 가장한 표정이 아닌,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는 그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날 막은 것도 아니고, 시간이 멈춘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정신을 빼앗긴 채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대폭소로 인해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등으로 스윽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건 전번의 복수."
복수치곤 소소하지만 말이다. 더이상은 한계다.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더 얼굴을 보고 있다간 기계가 과열로 터지는 것 마냥 '푸슈슈'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홱 돌린 뒤
"이번 승부는 내 패배지만, 다음엔 지지 않는다고! 오, 오늘은 이정도로 해두마. 기억해두라고오오!"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걸까. 사실은 릴리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웃음은 기적의 부산물이라는데,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다. 아니면, 마치 읽던 중에 덮어 놓은 책처럼, 지금은 대답을 멈추기로 한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숨을 고르는 데도 꽤나 시간이 걸릴 만했지만, 강가에 부는 산들바람 덕분에 몇 호흡 거치지 않고도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손등으로 자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릴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있다가,
“…… 복수?”
그런 다음에 아, 하고 짤막하게 소리를 낸다. 설마했지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니, 릴리는 이제야 깨달았다. 평소라면 명석한 두뇌를 이용해서 이 순간에도 가쉬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만한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겠으나,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그저 상냥한 손길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 두기로 했다.
뭐랄까, 굉장히 기품 있는 여인 같은걸! 에스코트를 받는다니 말이야! 자신감에 찬 헤헹─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문 모를 조바심까지 느껴지는 가쉬의 태도와 정반대로 릴리는 완전히 여유를 회복한 모양새였다.
“응. 기억해 둘게, 가쉬 씨.”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기억력이 몹시 좋은 릴리는,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절대.
오버히트 직전의 기계처럼 묘하게 오작동하고 있는 가쉬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눈웃음지었다. 그리고 서코트의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미면서, 바람을 모로 맞으며 선 채, 그를 향해 시선을 살짝 비껴 돌리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나를 꼭 이겨 줘. 기억하고 있잖아? 승부의 내용.”
가쉬가 회복할 시간을 주려는 듯 주위를 사뿐사뿐 어슬렁대다가, 큰 나무 쪽으로 다가가 나무껍질에 손을 얹어 그 촉감을 느꼈다. ‘경기장’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역시나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이런 장소를 미리 알아 두었다는 거겠지. 그가 없을 때 몰래 와서 쉬기나 할까, 라고 릴리는 생각한다.
그녀의 기억해두겠다는 말은, 절대 허투로 들리지 않았다. 마치 스스로에게 언령을 거는 것처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약속의 말처럼 들려왔다. 이어 그녀는 나에게 승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기억하고 있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승부의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계속 지기만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최후에이기게 되는 것은 나일테니까. 정의는 언제나 마지막엔 이기는 법이다. 이어 그녀가 큰 나무쪽으로 다가가 나무에 손을 대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강 눈치챈 나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