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할 줄 알아서 다행이다. 수면 위로 나오지 못했더라면 더 큰 부끄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허우적 거리면서 다시 뺩을 외치는 일을 겪는다면 남은 자존심마저 부서졌을 것이고,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는 물살에 둥둥 떠밀렸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잠시 물살이 얼굴을 때려 얼굴이 다시 젖으면 젖은 손을 탈탈 털어 얼굴을 쓱 닦았다.
당신은 놀란 표정이다. 그가 체면도, 예의도 던질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몰랐다. 절벽에서 떨어질 거라도 생각도 못했고, 떨어질 땐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지금 이게 변장한 추종자는 아니겠지? 의뢰를 받고 날 암살하러 온건가? 저승길에 혼자 가기 힘들었나? 그렇지만 웃음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 당신은 명백히 그에게 장난을 친 것이다. 조금, 아니, 많이 도가 지나치고 심장을 곤두박질 치게 하는 장난을.
"그야 절벽에서 떨어졌으니까… 젠장!"
욕짓거리를 내뱉고 그는 발을 굴러 뒤로 물러났다. 뽈뽈뽈 돌아다니던 당신이 그의 눈을 감상한지 오래다. 그는 당신의 행동을 주시한다. 또 물귀신처럼 끌고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고, 다른 생각도 불쑥 고개를 치밀고 온다. 오, 그래. 그의 인식이 조금 바뀌는 날이다. 바로 '여자는 아주 무서운 존재다' 라는 지론이다. 어머니도 그렇고, 타니아도 그렇고, 그의 주변 여성들만 좀 독특하나 싶었는데 이젠 이 여자까지 그런다.
"기숙사 점수가 두렵지도 않나보군 그래?"
그는 바닷물이 얼굴을 때리자 고개를 잠시 파드득 도리질 쳤다. 어푸풉... 그는 다시금 바닷물에 뺨을 맞고나서야 당신을 뚱하니 노려본다.
자세를 잡고선 레오는 후 - 하고 심호흡을했다. 세게 쳐봐, 얼른. 하고 말했을때 지팡이를 집는 것을 보았고 무슨 생각인지도 대충 알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일종의 트라우마 라는 것이었지. '크루시오'라는 네 글자 단어가 들렸고 레오는 '으극,'하고 이빨을 꽉 깨물고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나서는, 아.
" 이.. 개..같은..게.. "
주문이 끝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레오는 지팡이를 뽑았다.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려면 자신도 고통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고통받았을까.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서였다. 그게 좋은 의미던, 좋지 않은 의미던. 레오는 화를 느꼈다. 분노를 느꼈고 증오를 느꼈다. 싸울때의 그 기분. 죽을만큼 아프지만 동시에 아드레날린이 돌고 흥분되는 기분. 레오는 지팡이를 뽑아들고 니플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크루시오는 이전보다 머리가 개운해지고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헛구역질도 나지 않았고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레오는 주문을 끊고 버니를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의 휴가는 달콤했다. 몇가지 소동이 있긴 했지만 교내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불운이 여러가지 겹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청궁의 미친개에게 안기고 MC대작의 팔에 상처를 남긴 사람으로 남지 않았는가. 1학년들의 시선이 따갑다. 열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시선을 피한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관심은 금방 식는다. 그가 첫날부터 점수를 호되게 깎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는 날이다. 달링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부탁하면서도, 청궁에 들러 타니아가 부탁한 소포도 같이 쥐어준다. 타니아는 어머니께 이번에 섬에서 산 기념품을 보내달라 부탁했다. 청궁의 봄내음 물씬 나는 길에서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현궁으로 가던 길이었다.
"…?"
그는 순간 휘청, 크게 몸을 기우뚱 거렸다. 술을 마신 사람보다 더 꼬인 발걸음이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날이라 생각했건만. 참을만 했던 두통이 갑자기 심해졌다. 이러기는 또 처음이다. 고작 며칠 컨디션이 좋았다고 이렇게 최악으로 치닫는 일이 온다고? 그는 처음엔 당황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전의 컨디션 좋던 날이 그리워졌고, 또 10초만에 생각이 훅 바뀌었다. 두통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세상이 아찔했다. 결국 몇 걸음 채 내딛지 못하고 기둥에 몸을 기대며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 괜찮을 것이다. 쓰잘데기 없는 민간요법이지만 잠깐의 틈을 벌어다준다. 조금만 버티면 될 것이다. 코로 숨을 쉬고 눈을 뜨자 눈앞이 희뿌옇다. 곧 암전될 것 같이 위태롭다. 결국 등을 기댄 기둥에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아...씨발. 짧은 욕설이 혀를 타고 저도 모르게 스쳐나온다.
머리가 아프다. 입학식 때도, 그 이전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두통이지만 오늘은 유독 참을 수가 없다.
타니아를 부를까? 아니다. 그녀를 귀찮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백정은? 그가 부른다고 올 사람인가? 들키면 끝이다. 달링은 본가로 날아갔는데. 또 세상이 아찔하다. 급작스레 마른 손가락이 모노클이 있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마른 세수를 하듯 얼굴을 파고든다. 모노클이 바닥에 떨어진다. 얼굴을 덮은 손 틈 사이로 숨결이 점점 거칠어진다. 손바닥이 점점 위로 올라가 눈두덩이를 짓누른다. 이윽고 앞머리를 꽉 쥔다. 지끈거리는 통증을 참을 수 없다. 아, 지금이라도 이 빌어먹을 머리 뚜껑을 열고 욱신거리는 부분을 도려내고 싶다. 뇌를 긁어내고, 앞이마를 죄다 칼로 도려내 신체에서 떼어내고 싶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고통이 멎을 기미가 없다. 이런 젠장할. 그가 또 욕설을 내뱉는다. 고개를 든다.
툭.
코를 타고 흐르는 피에 그의 몸이 멈춘다. 원치 않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고통이 멈출줄 몰라 잠깐 허공을 향했던 손이 방황한다. 아아, 기어서라도 이 장소를 벗어나야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인데.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을 들킨다고? 차라리 죽을 것이다. 그가 얼굴에 손을 파묻고 고통에 겨운 신음을 참았다. 그 순간, 그가 숨을 멈춘다. 손을 뻗어 허공에 그어낸다.
다행히 당신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기둥에 생채기가 남는다. 절단 저주, 섹튬셈프라다.
"…뭘 봐."
사람이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둠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그는 추했다. 주저앉은 모습, 피와 눈물로 범벅져 산발이 된 머리카락, 손과 얼굴에 범벅인 피, 벗겨진 모노클과 야생의 짐승같이 예민하고 부산스럽게 떨리는 눈. 가려졌던 눈이 이렇게 드러나니, 조금 더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다. 그가 낮고, 단호하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당신에게 고한다.
"꺼져."
혹, 추한 모습을 들킬 수 없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미 들켰지만. 씨근대는 숨은 그가 상태가 별로 좋지 아니함을 시사했으리라.
그녀 나이 12세 무렵. 갑작스럽게 집을 떠난 파이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잠시 어수선했었다.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이 없는게 스피델리 가의 분위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마디 전언도 없이 떠나버리면 동요가 일고도 남는다. 특히나 아직 어린 그녀의 상심은 일가 중 가장 컸기 때문에 이를 어찌 달래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더해졌더란다.
얼마 후에 짧은 외출을 나온 두 남매도 이를 듣고 잠깐은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곧 나온 헬리의 의견으로 가족들의 고민은 해결되었다.
"아~ 그럼~ 막내도 건강해졌겠다, 다같이 여행 한번 가는게 어때요? 마침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었는데~" "네가? 별일이네. 어딘데?" "여~기~"
헬리가 지도를 펼쳐 짚은 곳은 동쪽의 작은 섬나라였다. 뜬금없긴 했지만 가보고싶다는 헬리의 말과 다른 가족들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니 그 자리에서 그 나라로 정해졌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준비도 출발도 신속했다. 어린 그녀에겐 첫 장거리 장기간 외출이라 준비할 때부터 들뜬 기색이 상심을 밀어낸 듯 했다. 그러나 너무 들떠서일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 숙소를 잡은 후엔 피로로 인해 반나절을 쉬어야 했다.
"에구 우리 쁘띠첼~ 녹네 녹아~ 그런 쁘띠도 귀엽지만? 한입에 먹어버릴까보다~" "애 지쳤는데 자꾸 건드리지 마. 뭐, 이래서야 해진 후에나 나갈 수 있겠지만." "후,후,후. 내가 그것도 다~ 생각했지! 브리, 잠깐 이리 와봐." "뭐? 왜, 야, 뭔데?"
먼저 관광을 나간 부모님과 델피를 대신해, 숙소에 남아 지쳐서 잠든 그녀를 돌보던 브리와 헬리. 작게 대화를 나누던 중 헬리가 히죽 웃으며 브리를 방 한구석으로 데려가 소곤소곤 뭔가 말을 주고받았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벌이냐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브리였지만 헬리의 얘기를 들으며 표정이 점점 바뀐다. 얘기가 끝난 후에는 둘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얘기의 방향이 어찌 흘러갔는지는 두말 할 것도 없겠지.
몇시간 뒤, 먼저 나갔던 가족들도 일찍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어린 그녀도 나갈 수 있을만큼 체력을 회복했을 쯤, 이제 어린 그녀의 관광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클로에가 현지에 맞춘 옷을 요령 좋게 입혀주는 동안 얌전히 있던 그녀는 어쩐지 주변이 허전해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마망, 브리는? 헬리는?" "브리랑 헬리는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단다. 리체도 어서 준비하고 가자?" "으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클로에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옷을 마저 입혀주었다. 유카타, 라고 불리는 그 나라의 옷은 더위를 잘 타는 그녀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흰 바탕에 푸른 꽃무늬가 들어간 것도 물론 잘 어울렸고 말이다.
꽃단장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북소리를 향해서 걷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아직은 낯가림이 있던 어린 그녀를 필립과 클로에가 양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해주었다. 조심조심 걸어가는 그녀에게 필립이 여기는 마츠리를 하는 중이라고 말해주자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작게 반짝였다.
"마-츠리? 카니발?" "오, 리체는 똑똑하기도 하지. 그렇단다. 이 나라의 카니발이야.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지. 자. 보렴."
필립이 어린 그녀를 안아올려 그 앞을 보여주자 작은 금안이 동그랗게 떠지며 놀람을 표현한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형형색색의 조명들은 늘 집에만 있던 그녀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장소만으로도 그런데, 그곳에서 먹고 노는 건 또 어땠을까. 몇군데의 노점을 지나며 이것저것 경험한 그녀는, 중간에 경품으로 딴 물풍선 요요를 흔들며 꺄르륵 웃어대었다. 다른 손엔 구운 옥수수를 들고 잊었나 싶을 때쯤 한입씩 먹으면서 말이다. 최근 시무룩하게 인형놀이를 하는 모습만 봐온 부모로써는 정말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적당히 기분 좋아진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필립과 클로에에게 델피가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그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클로에는 옆에서 델피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가족들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필립이 웃으며 말해주었다.
"브리랑 헬리를 보러 갈 거란다. 저기서 리체를 기다리고 있어."
저기, 라며 필립이 고개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여기서 가장 환한 조명이 비추는 장소가 그녀의 눈에 들었다. 높은 단상과 여러 악기와 마이크, 그것들을 이용해 공연을 하는 사람들. 그녀에게 그런 무대는 이 축제가 처음인 만큼 당연히 생경할 수 밖에 없었다. 무대 앞 관객의 환호나 전신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낯설고 무서워, 노는 것도 잊고 필립에게 꼭 안겨있던 그녀였지만, 앞선 공연이 끝나고 다음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보았을 때는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대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마망... 브리가 왜 저기 있어? 왜에? 헬리는? 응?" "글쎄? 브리랑 헬리가 뭘 하려는지 같이 볼까?"
왜 그리 놀랐는가 하면, 한 밴드와 함께 나오는 사람들 중에 한껏 꾸민 브리와 헬리가 섞여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치장이 있긴 했지만 특유의 은발이 눈에 띄는 둘이었기에 어린 그녀도 금방 알아보았다. 놀란 눈으로 무대와 클로에, 필립을 번갈아 보는 어린 그녀를 보고 미리 알고 있던 가족들은 작게 웃었다. 무대에서 유창한 회화로 짧은 인사를 한 헬리가 관객 속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한 손을 들어 크게 흔들어주었다. 그에 또 깜짝 놀라는 그녀를 두고, 시작된 반주에 맞춰 헬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언제나와 같은 어느 날의 이야기. 너는 갑자기 일어나 말했지. 오늘 밤, 별을 보러 가자.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자아낸 멜로디에 이어 경쾌한 밴드의 음악이 이어졌다. 마이크 대신 일렉기타를 잡은 브리가 무심한 표정과 다르게 수준급의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처음인 무대 공연에서 남매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된 어린 그녀는 언제 낯설어하고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이 꺄악거리며 즐거워했다. 무대에 선 둘은 자신들의 막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 열정을 불태웠다.
한 곡이 끝난 후 무수한 앵콜 요청으로 인해 즉석에서 두 곡을 더 부른 뒤에야 무대에서 내려와 잔뜩 상기된 그들의 막내를 받아줄 수 있었더란다. 너무 과한게 신난 탓에 그 날 밤 미열로 앓긴 했지만, 그녀를 포함한 일가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밝디 밝은 무대의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던 둘의 모습은 어린 그녀가 처음으로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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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 네가 가리키던 여름의 대삼각형..." "오, 그거 그 때 그 노래 아냐? 막내랑 처음 여행 갔을 때." "맞아~ 마침 오늘이 딱 그 날이길래, 생각나서~" "그 때 재밌었지. 막내가 그렇게 신나하는 건 처음 봤었어." "너무 신나서 밤에 열 났잖아~ 그렇지만 아픈데도 웃고 있는 건 처음이었지?" "그만큼 즐거웠다는거니까. 야. 말만 하기 심심하다. 한잔 하자." "좋지~ 이럴 줄 알고 다이긴조 공수해놨다?" "뭐? 허 참. 한잔 할 각을 이미 잡아놨었구만?" "후후. 당연한 소릴~"
어느 칠석날 밤. 추억을 되새기는 스피델리 남매의 술잔은 몇번이고 술이 차올랐다고 한다. 밤이 기울어 날이 밝아올 때까지.
주막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바람에 오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몸이 비틀거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단태는 균형을 잡으려하며 시선을 들어서 자신과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를 하려다가 사과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걸 느꼈다. 대신 "세상에.."하는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사람이지? 사람 맞지? 감 선생님의 인간 찬가가 이런 기분일까. 생기있게 빛나면 더 예쁠텐데. 그렇다고 잘생김이 어디가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만.
"자기 잘생겼다."
미안하다라던가 하는 말이 아닌 주단태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듬뿍 담긴 중얼거림이 감탄사의 뒤를 이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웃길 정도로. 단태는 냉큼 내밀어진 그의 손을 낼름 붙잡고 만지작거리려했다. "안경 쓴 게 너무너무 잘어울리네요? 나 학생 맞아요. 왜? 뭔가 할 말이 있어요? 아! 혹시 나처럼 첫눈에 반했다던가?" 주단태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면서 윙크를 해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뻔뻔스러운 태도로 단태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줬을 것이다. 반짝반짝거리는 암적색 눈동자가 기민하게 남자를 살피다가 갓에 머물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초연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방송부 아이들에게 최근의 콘서트 때문에 다들 힘들었을테니 자그마한 휴식이라도 취하라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자유시간을 허가하고 자신 또한 정처없이 거닐 뿐이었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의 모습은 마치 대지를 거니는 용어(龍魚)와도 같았다. 그렇가 잠시간 걸음을 옮기던 그가 천천히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옮긴다.
"..... 발렌타인 형님(アニキ)."
가만히 내려다 보는 순간 그의 손길이 허공을 가른다. 섹튬셈프라, 그 또한 상당히 잘 쓰고 있는 마법중 하나였다. 아주 자그마한 차이로 옷깃을 잘라냈을 뿐이지만 그는 조용히 그의 으르렁 거림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오히려 당당하고 거릴꺼 없다는 듯이 천천히 그를 내려다 본채 가만히 침묵을 지킬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도 달랐다. 어둠속에 가만히 버려진 그의 모습은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와도 같았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그렇게 들키기 싫단 말인가, 지금의 그는 발렌타인이 아니었기에, 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걸 일부러 이해하고 감싸안을 필요도 없다.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실껍니까."
아주 정중하고, 평소의 그와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항상 생기를 안고 대지를 향해 그 영광을 떨치며, 햇살과도 같이 기쁨을 전하던 목소리가 아닌, 낮게 용틀임을 하는 천둥과 같이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누군가 그랬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르는 용은, 그 자체가 하늘의 의지라고, 아직 그 정도의 그릇까지는 되지 못한 그였지만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리라.
레오는 맞은 볼을 문질렀다. 멍이 들지는 않겠지만 홍조가 띄워진마냥 볼이 빨갛게 되었다. 이빨이 빠지지도 않았고 그냥 딱 싸울때 맞은 정도. 레오는 주먹 좀 맵다? 하고 지나가듯 말했다. 니플러, 미안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듯 레오는 그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지팡이를 허리춤에 매어놓고 레오는 버니를 바라보았다.
" 끔찍한 소리 하지마. 지금만 필요했을 뿐이야. 말해줘도 이해못하겠지만.. 그런게 있어. 싸우는거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아프게 하려면 나도 아파야하는게 맞거든. 조금 익숙해지면 그냥 막 쓸 수 있을거야. "
과연 그게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익숙해져야하는 것이 맞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머리를 복잡하게 한들 좋을 것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