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뒤로 이어진 첫 마디를 듣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 사람 청궁인가…?라는 기숙사 성격론에 입각한 편견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간단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깜짝 놀라서 지른 비명에도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읽힌 데다가, 곧바로 꺼낸 말 역시 당혹보다는 흥미의 비율이 더 컸던 탓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단하단 말부터 나오는 태연스러운 태도에 도리어 그가 더 얼떨떨해졌다.
"그랬었나요? 제가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편이라서…."
수업 때는 오고 가는 학생들이 많아 특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억하기가 어렵고, 추종자 때는… 워낙에 다급한 상황에 소음까지 강해 사람을 구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지난번 펠리체를 알아본 것은 목소리의 음색이 특이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남았다는 이유가 있었던 덕이고.
"그보다 패대기 잘 친다는 건 또 뭔지……."
황당하다는 듯 말하지만 그도 부정은 않는 눈치다. 그게 소문까지 날 일인가? 오늘 사람 몇을 물 먹이긴 했고, 첫날에도 비슷한 이유로 몇 명을 던져버리긴… 했지만. 음, 소문 날 만한가. 그에게 실책이 있다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잠깐 경계를 늦춰버린 것일 테다. 라쉬가 재개될 물싸움의 낌새를 알아채고 그의 팔을 앞발로 툭툭 쳐댔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전에 합의하지 못한 비언어적 신호까지는 알아듣지 못 했다. 응? 왜? 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라쉬는 경고를 포기하고 느긋하게 그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높이도 높고 너비도 넓겠다, 친구를 아늑한 생체 바리케이드 삼아버린 개는 순진한 얼굴로 모르는 척을 했다. 그만이 모르는 사이에 주양의 손이 물을 머금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윽고 물보라 공격.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진 일격에 그는 속절없이 물을 먹었다.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무어라 말을 하려 벌렸던 입 틈새로 자비 없는 짠맛이 짓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속절은 없었더라도 그에게는 무력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당황하거나 기침을 하는 대신, 그는 곧바로 숨을 참고 직선으로 돌진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물이 튀는 순간 시야가 차단당해 행동이 둔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엘로프 아델횔드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가히 맹진이나 쇄도 따위의 형용이 어울릴만치 저돌적인 속도로 거리를 좁혀간 그는 순식간에 주양의 앞까지 다다라 불쑥 걸음을 멈췄다. 양손을 낮게 들고 손바닥은 가볍게 펼친 채 힘을 빼고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준비 동작처럼 보였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슬며시 웃었다.
"메쳐지는 게 좋으세요, 아니면 뒤로 꽂히는 게 좋으세요?"
그러자 말을 하는 그의 건너편, 멀찍이 떨어진 모래사장 쪽에 일렬로 드러누워 상황을 구경하던 학생들이 일제히 주양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은 주양이 오기 전까지 그에게 'gentle persuasion'을 당하고 몸져누운 선학들이었다…….
타니아는 가끔 그가 미치도록 싫을 때가 있다. 그는 근사한 사람이고, 모든 면이 완벽하지만 가끔 성격이 발목을 잡는다. 공과 사가 뚜렷하면서도 사적인 일이 적다고들 하지만 그건 학교 안의 이야기다. 가문 내의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큰 틀은 달라지지 않지만, 유달리 기행을 자주 벌였다. 특히 밤이 되면 아주 많은 기행을 벌였다.
관에 들어가서 잠들거나 난데없이 먹던 식탁을 뒤집어 엎는 건 역대 가주 모두가 즐겨하던 행위니 뒤로하고, 그는 달밤에 난데없이 가문원을 붙잡아 왈츠를 추기도 했고, 심지어는 어머니께 동화를 읽어주질 않나, 보름달이 환히 뜬 날엔 밖으로 달려나가 정원에서 난데없이 옷자락을 휘날리고 빙글빙글 춤을 추며 머글의 노래를(대다수 BTS라 불리는 머글 그룹의 것이거나, Nami라는 여성의 round-and-round라는 노래였다.) 소리높여 부르고 깔깔 웃기도 했다.
흥이 많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가끔 어머니도 달려나가 같이 머글의 춤을 추는 걸 보면 집안내력이 맞는 것 같다.
아무튼, 학교 사람들에게 조금 언질을 주면 현궁의 사신인 그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해서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인가? 시체의 부패액이나 흙, 오물을 씻어내는 욕조에서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 그를 찾기 위해 30분을 내리 돌아다녔으니, 타니아는 욕조에서 자고있던 그의 배를 꽉 눌렀다. 그는 악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난다.
기지개를 켜는 그에게 중지를 치켜올렸다. 이런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뒤돌아 본다. 그는 손가락을 정확히 인지한다. 타니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 애써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짜잔, 반지 예쁘죠."
다행히 중지에 반지가 있어 다행이다. 이건 타니아가 아주 좋아하는 반지다. 이걸 끼고 주먹을 날리면 상대는 상처가 두 배가 된다. 그는 타니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가 두 손을 치켜올렸다. 양쪽 중지에 끼워진 실반지는 그가 16살 적 선물 받은 반지로, 지금도 가끔 차고 다니던 장신구다.
"그래, 예쁘구나. 나는 두 개나 있단다. 부럽지?"
아니, 왜 내 주인은 날 살살 놀릴 때 제일 기뻐하지? 타니아는 그가 환하게 웃어서 더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서 꽃이 피어날 법한 미소와 양쪽 손으로 선사하는 중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오늘도 만족했다는듯 넓은 망토를 크게 펄럭이며 뒤로 돌았다.
"자, 일하러 가야겠군!"
타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쉰다. 가는 길, 스스로 지팡이를 앞으로 집어 던지고 뛰어가는 그를 보며 완벽한 그의 일면을 자신만 알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거짓말이나 둘러대는 걸 귀찮아서 안 할 뿐이지, 미소의 그늘 쯤은 충분히 숨기고도 남을만큼의 재주가 있었다. 그럼에도 드러났다는 건 일부러 보여줬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저지를지도 모를 황당한 일에 대한 약간의 경고라고 해도 맞을까. 하지만 오늘따라 경계가 느슨해보이는 이 선배는 그걸 눈치 못 챈 듯 했다. 아, 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안타까워서 정말...
웃음을 멈출 수가 없네.
잠시 그에게 등을 보인 사이 표정을 정리한다. 미소를 가라앉히며 그늘을 지운다. 희미하게 선이 남은 입술은 그저 웃음의 여운이 자연스럽게 남은 듯이 보일 터. 표정을 갈무리한 뒤 그가 예정된 지점까지 오는 걸 기다렸다. 그 사이 의심을 사지 않게 태연히 대화를 이어가면서.
"기껏 놀러와서 너무 많은 걸 생각하시네요. 학생대표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잠깐은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적당히 대화를 잇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아주 빈 말도 아니었다. 매사 긴장만 하고 있으면 오히려 적절히 대응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가끔은 풀어져도 좋지 않겠느냐, 그런 취지의 말을 하며 그가 온 길을 되짚어 몇걸음 걸어간다. 자박자박. 샌들이 가볍게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에 섞여들었다.
"그런데 방금 예시로 들어주신거에 묘한게 섞여있네요. 선배. 추종자와의 독대라. 보통 습격을 얘기하지 않나요, 그럴 땐?"
지직. 샌들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절벽 쪽에 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동안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있다. 길 양옆의 나무들로 인해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히죽, 웃고 있는 그녀가 살짝 몸을 낮추며 말했다.
"대답은 내려가서 듣는걸로 하죠. 발렌타인 선배!"
곱게 접힌 금안이 순간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졀벽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 그의 허리를 낚아챈다. 단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타니아에게 안겨가는 걸 보며 체형을 대강 가늠하고 있었으니 어려울 것도, 실수할 것도 없었다. 그대로 절벽 끄트머리를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순간 휭, 하고 짧게 공기가 스친다 싶더니, 그녀와 그의 몸은 그대로 깊은 바닷물을 향해 낙하한다. 그리고 풍덩 소리를 내며 빠지는데까지는 고작 한 손을 꼽을만큼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겠지.
"흐, 하하!"
떨어지는 동안 그의 비명이나 고함 같은게 들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웃음소리는 확실히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습이란 생각보다 포괄적인 의미였다.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것 외에 그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껴본다거나, 입속에서 조용히 주문을 중얼거려본다거나 따위의 것들. 그렇기에 레오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이따금씩 새벽에 몰래 기숙사를 나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니곤했다. 허공에 대고 주문을 외워보거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있는지조차 모를 미물에 대고 주문을 사용해보거나. 주문을 연습하러 가는 길에도, 막상 연습하는 동안에도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막상 사용해보면 왜인지 모르게 뿌듯함과 개운함이 조금 느껴졌다-는 사정이랄까.
여하튼 뭐든 확실히 해두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남을 죽이고 조종하고 고통주기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키고 더 나아가서는 있을지도 모를 그 마법에 대한 방어체계까지 구축하고싶었으니까. 밤바람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레오는 잠깐 산책을 나갔다오겠다고 일러두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이해했다. 항상 그런식으로 밤산책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귀곡탑의 근처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레오는 오히려 아무도 없는 이 곳이 더 편하다고 느껴졌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를 배우고, 연습하고, 사용할수록 뭔가 잘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잘못된 일을 하고있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 그리고 동시에 으레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때 그러듯이 약간의 짜릿함과 흥분 따위의 것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질문이라도 하고싶었지만 이런 스스로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바람을 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만난것도 의외였다. 정말 만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고 만날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레오에겐 가끔 이런 날이 있었다. 이상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날. 레오는 그런 날을 '하늘이 낮아서 숨쉬기 힘든 날'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하늘이 낮아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했던 것은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아있던 때에 부네를 만나자 낮았던 하늘이 제법 높아져 금새 숨쉬기가 편해졌다. 이런걸로 고민을 하는 자신과 이런것은 고민 축에도 못 끼는 사람을 보게되니 그런 것일지도.
" 연습이야 뭐.. 평소에도 조금씩 조금씩은 하고있는데 잘 안되네. 그보다 후배님이 아니고 레오라니까. "
어째 만날때마다 하는 말인것같다. 레오는 심부름 하나만 해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어째서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는지 또한 알고있다.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선택권 따위는 없다는듯 얼른 받으라는 말에 레오는 편지를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고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