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동전은 하나.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한 청이 삐진건지 다시 어깨로 돌아와서 그냥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하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조금 곤란한데. 만약의 경우가 생기면, 산에서 뜀박질이라는 버거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주양,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듯 청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시 이럴 땐 승리의 주문이 직빵이지.
".. 할 수 없겠네~.."
"너네 형제는 내가 내깃돈으로 팔아넘겼어!"
순간 희번득해진 청이 니플러가 동전에 다가오기도 전에 맹렬한 기세로 어깨를 박차고 날아올라서 니플러를 움켜쥐고 옥신각신 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역시 효과 좋구만. 주양은 호탕하게 웃으며 청이 쥔 니플러를 뺏어서, 탈탈 털었다. 진작 이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편하고 간단한 방법인것을. 자신이 붙잡든 청이 붙잡든, 터는 맛은 동일하니 더더욱. 니플러의 뒷다리를 꽉 붙잡고서 이불에 있는 먼지 털듯이 털기 시작했다. 뭔가 가사 능력이 조금 더 상향된것 같은 건 기분탓일 것이다.
막판에 청이 잡아둔 니플러의 영혼까지 탈곡기에 넣은 곡식마냥 탈탈 털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멀리 떨어진 수풀에다가 니플러를 대강 던졌다. 이쯤 되면 꽤 짭짤한 수확이겠거니 하는 기분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니플러 짤짤이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어깨에 내려앉은 청을 쓰다듬으며 경박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자주 호흡을 맞춰봐야겠는걸. 슬슬 돌아가야지.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교수님, 돌아왔어요!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챙긴 물건들을 교수님에게 보여주며 찾던 물건이 있나 확인했다. 없었다면 다음에 또 털러 가면 되는거니까, 설령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방을 쓰고 혼자 잔다는게 얼마나 쾌적한 건지 알아버리니까 집에서도 도저히 남매들 사이에 껴서 잘 수가 없겠더라구. 뭐,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다들 각자의 집이 있거나 집에 없거나 해서 못 하게 되었지만. 나로서는 그게 좋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래서인지 옆에 누군가 있다는게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쉽게 잠들지 못 했던 거 같아. 겉보기엔 완벽하게 잠든 듯 보여도 옅게 잠든 채로 줄곧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심박 소리 같은 걸 듣고 있었거든. 듣다보면 잠들겠거니 하고.
그런데 말야, 이게 잠이 오기는 커녕 주변 소리만 점점 더 잘 들려오게 되는거야. 청각만이 점점 범위를 넓혀가는 것처럼.
침대가 눌릴 때의 소리, 천천히 걷는 듯 느릿하게 울리는 복도 바닥 소리, 저멀리 누군가 문을 열고 닫는 소리 등등등. 내 청각은 지치거나 쉴 줄도 모르고 계속 범위를 늘려서 기어코 저택 바깥에까지 뻗쳤어. 실은 가장 먼저 들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그 때서야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멀지 않은 해안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
아.
파도 소리에 눈을 뜨자 내 앞엔 밤하늘과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어. 내가 언제 나왔는지 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검푸른 바다 앞에 서서 멀고 먼 수평선을 바라봤어. 가만히, 가만히, 그대로 있다가, 문득 시선을 내리니까 내가 책 한 권을 들고 있는게 보이더라구. 맞아. 그 책이야. 두껍고 낡은 가죽 표지 속 낡은 종이에 오래된 잉크로 글씨가 잔뜩 적힌 책. 아직 반도 못 봤지만, 사실 펼쳐본 적도 없는 그 책.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다음은 뭘 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책을 들어 펼쳤어. 내용을 보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 하지만 지금 책을 열면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어. 그런 거 같아. 낡은 페이지들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찢겨 바다로 전부 날아가게 될 거란 걸.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줍기 위해 바다로 들어갈 거란 걸.
이제 비어버린 표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앞으로 나아가. 발끝만 간질이던 물결에 스스로 발을 들이고 한걸음 두걸음 물 속으로 들어가는거야. 나는 살아있기에 물 위를 걷는 기교 따위는 할 줄 모르니까. 물 위에 뜬 종이를 줍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모순을 일으켜.
신기하게도 내 발은 수중에 뜨지 않고 계속 바닥만을 밟아서, 종이들이 일렁이는 수면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물 속에서도 똑바로 서서 위를 바라볼 수 있었어. 제법 멀리 뜬 종이들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이더라구. 너무 멀어서 올라가보면 내가 찾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 때서야 바닥을 박차고 위를 향했어. 천천히, 천천히, 닿지 않을 듯한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데.
부그르륵. 올라오는 기포. 수중의 내 발목을 잡는 차가운 손. 익숙하지만 낯선 그 손이 나를 잡아당겨. 얼마간 올라갔던 수중을 그대로 되돌려놔. 날 다시 바닥에 닿게 해. 나는 어째서인지 반항하지 않았어. 해봤자 의미가 없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이걸 기다렸던 걸까. 이젠 발만이 아니라 완전히 바닥에 짓눌린 채로 천천히 타고 올라오는 손의 주인을 봐.
아. '너'는 여전히.
손의 주인은 목 위가 부족한 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어. 그야 그렇겠지. 목 위는 그 날 떨어뜨렸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되었던거야. '나'는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억울했겠지. 원망스러웠겠지. 어째서냐고 한탄했겠지.
이제는 없는 시선이 맞을 만큼 올라온 그녀를 봐. 너덜너덜한 단면이 나를 향해 기울어있어. 부그륵. 단면으로부터 새어나가는 기포 속에 들리지 않는 말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아, 잡으려 손을 뻗지만 그녀의 손이 내 손을 막았어. 차가운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짓누르고 차가운 왼손으로 내 몸을 더듬어 올라와. 얄팍한 옷 따위는 그녀의 손이 주는 한기를 막아내지 못 해.
손끝이 닿고 손바닥이 쓸어내는 부분부분이 그 한기로 인해 얼어가는 것 같아. 전신이 동시에 무력해지는게 아닌, 조금씩 감각을 잃고 사라져가는 걸 느끼는게 더 최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대로라면 숨마저 얼어버리겠다 싶을 쯤. 그녀의 손끝이 고동을 띄는 지점에 다다랐어.
한기와 달리 상냥한 손길이 느려져가는 고동을 음미하듯 살결 위를 쓸어내리는 것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 눈을 감고, 다음 순간,
푸욱.
둔탁하며 날카롭게 꽂히는 소리와 동시에 내 안에 남아있던 숨을 전부 뱉어내. 새빨간 기포를 내뱉으며 가장 뜨거워야 할 곳이 가장 차갑게 변해버린 그 순간을 생생하게 체감해.
그래. 그녀의 손에 짓이겨진 생이 꺼지는 순간을.
수중은 내가 내뱉은 붉은 기포가 터져 검푸른 물을 더욱 검게 물들어가지만 나는 이미 눈을 감았기에 볼 수 없었지.
그저 희미하게 흐려져가는 정신에,
누군가...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
같았
어...
-
한쪽의 정신이 완전히 끊김과 동시에 그녀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밤이라 해도 한여름이라 이 정도의 추위를 느낄 일이 없는데도 그녀의 몸은 식은땀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추워..."
가늘게 말을 흘리는 순간, 숨결이 희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현실의 온도는 변하지 않았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체감만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를 느끼는 것이었기에.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을 그를 붙잡는다. 자꾸 떨려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손을 몇번이고 재차 쥐면서 눈을 감았다. 냉기와 함께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날 수 있길 바라며.
>>191 아니 맙소사 첼이 독백에 잠깐동안 안 그래도 없었던 어휘력을 완전 빼앗겨버렸어 흑흑.. 근네 뭐라고 그 날 떨어트렸는데 자신은 안 떨어졌다고..? 나 지금 뭔가 파이가 첼이 처음으로 본 날 반응이랑 맛물려서 뭔가 막 뇌피셜이 하나 번뜩 하고 떠올랐는데 오.. 맙소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