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너머의 괴물들이 가디언들에게 미안해하는 걸 본 적이 있어? 마찬가지야. 숙청여제는 당신을 지배해서 꼭두각시로 삼은 데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내가 그 녀석하고 개인적으로 내밀한 대화를 나눠 봤거든……. 그 녀석도 뻔뻔하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다 휘말린 당신이 미안하게 느낄 이유는 없어.”
그리고, 여전히 같은 병실에 누워서 자고 있는 환자들을 돌아본다.
“실패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지. 인간이 아니면 위대해질 수도 없고.”
다시, 다림을 본다.
“…… 당신이 미안하게 여겨야 하는 건 당신 친구들을 걱정하게 만든 거야. 그리고…… 나까지도.”
티아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채 쓰러지는 순간, 그녀가 아주 오랜 인연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챈 릴리는 이 기묘한 인연을 자신에게 닥쳐 오는 도전으로 여겼다. 이 얼마나 기구하고 잔인한가! 그리고 이 얼마나 기쁜 재회인가.
“당신 친구들은 엄청 걱정했을 거라고! 알아? 그게 첫 번째 잘못이야! 그리고, 나는 말이야, 누구 팔다리 두세 개가 날아가거나 심장을 저당잡히거나 그런 걸로 걱정하지 않아! 하지만…… 스스로 해치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거기서 끝장이었던 거야! 인간으로서 끝이라구. 그래서는…… 안 됐어.”
내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데에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뜹니다. 다림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찍어눌리긴 했으니까 당연히 바라봤겠지만요.. 내밀한 대화가 숙청여제의 패배로 끝났으니까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정도도 못해서야 어떻게 영성 S겠어! 하지만.. 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지만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말이었으므로 가만히 입을 다뭅니다. 휘말리기는 했지만 굴복한 거니까..같은 것만 하다가는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 뿐이겠지.
"걱정인가요..."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물론 학원도에서 받는 것이랑 저 멀리에서 받는 것은 질이 다르기는 하지만요. 걱정시킨 게 잘못이라던가. 해치면 안된다는 것을 들으면 기묘한 감정이 듭니다. 지금은 그것이 미약한 안도감이라는 걸 모르기에 불안감으로밖에 치부하지 못하고는 릴리를 바라봅니다.
"...걱정시켜서 죄송...미안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갑니다. 그래도 금방 나을 거니까.. 그리고.. 오랜만이에요.. 라고 말하면서 다치지 않은 쪽 팔에 달린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거립니다. 릴리가 특이했으니까 다림도 기억에서 끄집어올릴 수 있었던 거겠죠. 그렇지만 차마 릴리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인형의 형체라던가 그런 건 기억해도 실물을 가지지 못하게 된 지 얼마나 지났기 때문일까요? 조심스럽게 앉는 것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려 시도할까요. 뭔가 문제가 있다면 살펴주려는 것이겠지.
"그치만... 공격한 게 아직 손에 남은 것 같아서.." 눈을 내리깝니다. 사과할 분이 많아요.. 라고 중얼거립니다.
" [분실]이라는 의념은 개념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도 사용하여 아군이나 적을 혼란시키는 형태로도 이용할 수 있단 것을 알려줄 필요는 있어보이네요. 적에게서 '두려움'을 훔쳐 광분하게 만들거나 '친밀감'을 훔쳐 아군끼리 싸우게 만드는 등. 이런 식으로의 의념 방향을 잡는다면 바바 야가가 가장 어울리겠군요. "
다림주: 미안하다. 내가 이해력이 좀 딸린다...이걸 어떻게 올릴 수 없는 게 이해력 저하엿나 대충 그 떨어짐이 먹는 약 부작용이라...(그래서 문장도 몇 번 읽어야 겨우 이해함) 다림: 그럼 차라리 딜노예를 하시던가요.. 왜 서포터를 해서.. 다림주: 큿.. 그치만 하고 싶었는걸(?)
저 얼굴에 솔직한 마음을 뱉었다가는 빛보다 빠르게 속물이 된다. 아무튼 최선을 다하는 릴리였다. 입 안에 남은 카페오레가 제법 향긋하고 달콤해서 마음에 든다.
“빚…….”
릴리는 머릿속에서 돌돌 말려 있는 새하얀 양피지를 펼친다. 철필으로 그 위에 선을 그어 시약의 레시피를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진사, 염초, 질산염, 그리고 유황 조금을 모방범죄 예방을 위해 적절하게 가공하고 배합하면……. ※ 세 번 불지옥 대폭발 물약! (가칭) ※ …… 아무리 그래도 하루의 직장을 불태워 버리는 것은 죄책감이 너무 심하다. 일단 생각해 둔 레시피를 돌돌 말아 다시 기억의 궁전에 보관하기로 한다.
“…… 하하하, 그렇구나. 빚을 갚으려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여유 있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우아한 자태로 잔받침에 컵을 내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어쩌다가 빚을 진 건데?!?! 영끌했어!? 사기 당한 거야?! 아니면 그, 좀, 잃었어?! 그…… 게임으로?! 카이지처럼 된 거야!?”
하고 벌떡 일어나서 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빚이라니! 집과 빚이라니! 이게 무슨 『곰이 물구나무 서면 문』 같은 농담도 아니고!
하루는 의아한 눈을 지으면서도, 릴리의 말에 일단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하루였다. 릴리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한데, 좀처럼 그게 무엇인지 감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갑자기 자신의 말을 들은 릴리가 양피지를 펼쳐선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커졌다.
" 그렇죠, 빚은 생긴 이상 갚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
릴리는 역시 바른 말을 하네요, 하는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답한 하루였다. 누구의 속도 모르고 태평해보일 정도였으니, 릴리가 속으로 고민하는게 무엇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물론 태평하게 웃고 있던 미소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릴리의 모습에 흐트러졌지만.
" 에...? "
하루는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릴리의 입에서 나열되는 것들을 듣고 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풋 하고 터진 웃음은 맑은 웃음소리로 이어졌다.
" 아하..아하하.. 진정, 진정해요, 릴리. 그런 빚은 아니니까요.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 빚이 있는거라서요. 친구끼리 빚을 지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일을 도우려고 한거에요. "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하루가 차분하게 대답을 들려준다. 그리곤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어선 환하게 웃으며 릴리와 눈을 마주합니다.
누군가를 걱정시키는 것은 릴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탈구된 관절의 재활에 도움이 되는 치료제를 만들어 먹고 퇴원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래서는 아버지에게 과로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끼쳐 버린다. 릴리와 성격이 일치하는 수준으로 비슷한 샤르티에 부인은 이해해 주겠지만, 딸바보인 샤르티에 씨는 애석하게도 그런 성격이 아니다…….
“다 낫고 나서 사과해. 붕대 둘둘 두르고 링거 단 채로 사과하러 다녀 봤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사과는…… 동정받을 만한 행색으로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본래 하고 싶은 말이 ‘지금은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낫는 데만 집중해, 이 바보야’였다면 ‘바보’라는 말을 문장 전체에 넓게 펴바른 결과가 저것이었을 것이다. 릴리는 병상에 걸터앉은 채로 무거운 것이 들러붙은 오른쪽 다리를 살랑거려 본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 몰래 진통제를 만들어 마셨으니까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 뭐, 나는 사과를 받았으니까 이쯤으로 해 두겠어! 푸헤헹. 당신이랑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처음 듣는 말이 ‘미안해요’라니. 기분 묘하네.”
그러면서 릴리는 머리맡의 협탁에 놓인 컵을 흔든다. 담겨 있던 물이 백색의 불투명한 액체로 변한다.
※ 우유! ※
한 모금 마시면서 시선을 다림 쪽으로 옮겼다. 그건 그렇고 정말 호되게 당했군. 그렇게 공격 세례를 받았으니 저렇게 다치는 것도 당연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