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 너머로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도 건 사감님이랑 곤 사감님이려나. 항상 쫓고 쫓기는 그 사이는 지켜보는 관전자의 입장에서는 꽤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오늘의 건 사감님은 과연 얼마만에 곤 사감님에게 잡혀 등짝을 맞게 될 것인가! 같은 내기를 걸어보는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그걸 아직도 안 걸고 있었다고? 학교 생활 절반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며 잠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듯 했다.
그렇게 소란이 조금 잦아드나 싶었을 때. 주양은 그 짧은 순간이나마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당신의 장난 대상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조금이나마 소란스러웠을 때 적당히 깨어나서 구경하고 갈 길을 갔어야만 했다는 것을. 정신이 맑았던 청은 당신의 기척을 느꼈으나 주양은 그럴수가 없었고, 결국 갑작스러운 놀래킴에 기겁을 하며 나자빠지는 것이다.
안 그래도 이런 갑툭튀 앞에서는 한참 무력한 게 주양이었던 데다가 어제의 그 경험 때문인지 이런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취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전의 휘영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깜짝 놀래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것으로 보아 청궁 사람들에게는 절대 등 뒤를 내어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겠냐만은. 미친듯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피히히 웃는다. 그래. 적어도 아까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상태보다, 훨씬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썩 찝찝한 짜릿함이었지만 그 대상이 귀신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그런 찝찝함 따위는 금새 사라지기 쉬웠다.
"어머나. 역시 사감님도 저와 청이를 아시는군요? 그럼요! 언제든 내깃돈으로 걸기 위해서 이렇게! 딱 준비하고 있답니다. 어때요? 참된 패밀리어 아닌가요~?"
내기 이야기에 주양의 눈이 순간 빛났다. 오호라. 역시 알아봐주시는 구나! 적어도 학교에서 여기저기 내기를 걸며 그 내깃돈으로 청을 건 것이 인생 낭비는 아니라는 생각에 내심 뿌듯해졌다. 마치 자신이 유명인사라도 된 양 잔뜩 뻐기며 손가락으로 청의 턱을 약올리듯이 살살 긁었다. 그 행동이 낳은 결과는 결국 손가락을 잔뜩 깨물리는 것이기는 했지만. 이젠 이 정도는 익숙해졌기에 어느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
"야야야, 아파. 아프다구..! 크흠. 아무튼! 제 행동을 예측하신 김에. 내기 하나 안 하실래요? 마침 조금 심심했던 참이었거든요! 놀래키면서 등장하신것만 빼면 딱 좋은 타이밍이었달까요~"
손가락을 깨무는 강도가 조금 더 세지자 주양은 얼른 손을 빼고서 후후 불었다. 역시 진심으로 깨물면 꽤 아팠다. 부리로 꼬집는 쪽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손의 얼얼함이 조금 가시는 듯 하자 주양은 다시 씩 웃어보이며 당당하게 내기를 제안했다. 남의 이야기에서 내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으며 충분히 내기를 걸어봄직한 판이 깔렸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대단히 난해하고 이상한 판단을 내려버린 것이다. 마침 심심하기도 했으니. 당신을 그냥 보낼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음. 뭐가 좋으려나~ 아. 곤 쌤한테 장난치고 누가 더 빨리 잡히나 한번 해보실래요? 저희 기숙사 사감님이라서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염통 쫄깃할것 같기도 하니까요!"
기숙사 점수를 꽤 많이 쌓은 사람의 여유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주궁 내에서의 점수 기여도도 자신이 높겠다, 무서울게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기숙사 사람들의 기숙사 점수를 알게 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으나, 지금은 그것만큼 좋은 배팅도 더 없겠지 싶었다. 물론 다른 내깃거리가 나온다면 언제든지 찬성할 의향이 있는 모습이었다. 내기에 대한 당당함은 사감님들도 이길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뭐든 괜찮답니다! 어느 쪽이든지 제 내깃돈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어때요, 청을 걸고 하는 내기 안 하실래요? 안 하신다면.. 히히. 여기까지!"
그래도 차마 어른한테까지 Hoxy.. 를 쓰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사감님은 사감님. 그 정도는 지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주양은 손을 올리려다 말고 그냥 평범하게 웃었다. 그래봐야 자신만만한 모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는 하지만.
고맙다는 말에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덩달아 담배 연기를 흡입하고 있는데 그것을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다. 바람이 제 쪽으로 불지 않아서 그런가. 무기의 물음에 그는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몇 번이고 있었던 배정식의 일, 그동안 한 번도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를.
"어…. 제 경우엔 큰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지금까지 익숙하게 지내온 장소랑, 배워온 마법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아서요."
정말로 그것이 전부였던 탓에 달리 거창하게 말할 방법이 없었다. 1학년 때도 그냥 현궁이 좋겠다 싶어 현궁으로 갔을 뿐이고. 억지로 나쁘게 깎아내린다면 안주형 인간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지적당해 마땅한 자세인 것도 아니다. 그러다 그는 무언갈 깨닫고 아,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검지를 척 올리고 진지하게 눈썹을 좁히는데.
"그리고 이 이유가 제일 중요한데요, 저는 현궁 날씨가 좋아요."
반절은 농담이지만 나머지 반절 이상이 진심이었다. 기숙사 바깥 기준으로는 가끔은 봄 날씨도 더울 지경이라. 하늘도 맑고, 눈도 과하지 않고, 가끔은 바람이 찰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저녁 6시가 되어야 해가 지는 겨울은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천기다. 그것이 1년 내내 유지된다면 더더욱.
진심으로 방송 소재로 쓸 수 있다면 쓸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간 쥐어진 과자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름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천천히 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현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방송부가 있지 않은 곳이지만 자신의 방송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에 그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멋진 원칙이지요. 그렇기에 우리 가문은, 간판에 목숨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저와 제 형제들이죠."
이미 멀어진 민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조용히 읆조린다. 어차피 그녀는 들을일 없겠지, 그는 천천히 트레이닝 복의 후드를 뒤집어 쓴뒤 껌을 하나 입에 베어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궁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나가는 그의 걸음에는 모든것을 내려 놓은 듯한 일말의 편안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이겨야 함이니, 짊어져야 한다면 기꺼이 짊어져야 함이라. 살면서 그 무게를 정하는 것은 자신일지니, 교만함을 경계하라, 교만함은 무게를 무겁게 하고, 경건함은 그 무게를 덜어줄지니, 스스로의 발걸음을 걸어나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던지고 믿는 바를 행하라, 그로서 스스로의 간판이 완성될지니."
수도승마냥 쉴새없이 걸음을 옮기며 찬 공기를 받아들인다. 감기에 걸릴 만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탓에, 그녀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금방 눈치채지 못 했다. 딱히 생각에 잠겨있던 건 아니라 저멀리 울리는 백설의 울음소리를 듣고 곧 깨닫긴 했지만. 윤을 볼 때마다 들었던 소리이니 다른 소리와 착각할 일도 없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이쪽으로 오는 윤이 보이길래 그녀는 싱긋 미소지었다.
"안녕, 선배. 그냥 좀 걷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아무 목적 없이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 나와 걷는 동안은 그에 대한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만큼 무아지경이었을지, 그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건지. 아무튼 혼자 걷고 있던거니 같이 걷자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 사뿐사뿐 걸어서 윤의 옆에 선다. 어디로 갈지는 윤에게 맡기겠다는 듯, 그의 걸음을 따라간다.
걷는 사람이 한명에서 둘이 된들 여전히 발소리보다 드넓은 바다의 물결소리가 더 크다. 그래도 혼자일 때와 누군가 같이 있는 건 느낌이 다르다. 그 누군가가 윤이면, 그라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오늘은 왠일인지 얌전히 옆에서 걷기만 하다가 말을 꺼내본다.
"오늘은 백설이가 안 보이네요? 방금 같이 있던 사람이 데려간 거에요?"
때마침 백설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생각나기도 해서, 좀전까지 같이 있던 사람에게 맡겼느냐고 묻는다. 백설의 울음소리가 들리던 쪽으로 가는 사람을 보기도 했고. 누군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