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역시 꼬맹이가 그렇게 나와줘야 이 내기가 좀 더 심장 쫄깃해지는게 되는 거 아니겠어? 우리 청이도 아랫공기보단 윗공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낫다고는 못 해주겠네! 이거 미안한걸!"
손을 곧게 펴고, 아랫공기라는 말에 당신의 실제 키보다도 한참 밑바닥을. 윗공기라는 말에 자신의 머리 위를 각각 손으로 짚으면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매번 이러는 것이 일상이 된 터라, 이 모습에 익숙해진 누군가는 이야기할 것이다. 주양의 저 과한 도발마저도 받아주면서(?) 손절하지 않고 쭉 지내는 당신의 멘탈이 부처라고.
당신이 자신에게서 아주 잠깐이나마 고개를 돌리자 주양은 이때다 싶었는지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했다. 차라리 여기서 미친 척 비명을 지르면서 헛게 보인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면 사감님이나 누군가가 깨어나 이 내기를 말려주지 않을까. 차라리 무승부로 할 걸. 한참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격하게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언제나 말하지만 언니는 우리 꼬맹이가 겁없이 대드는 걸 좋아한다구? 그리고.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명령조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 못 들었나봐, 응? 말이 안 통하니까 역시 적당한 다른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겠는걸?"
이번에도 일부러 몸에 힘을 주고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역으로 당신의 어깨를 살살 밀었다. 자신이 먼저 도발한 주제에, 속이 꽤 답답했다. 차라리 한판 시원하게 붙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켠으로는 이것마저도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항상 평온한 상태보단, 지금 이렇게 감정기복을 크게 느끼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었으니. 아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그 관계의 연장선이었다.
"ㅁ, 뭐..? 이번에는 같이 안 걸어...? 하. 뭐, 나야 편하고 좋네! 위. 위험할때 나 혼자 냅다 내뺄수 있으니까.. 그. 음. ㄷ, 당연히 불만 없지..! 불만을 가질 거였다면, 나오지도 부르지도 않았어!"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상황이 닥쳤을 때. 아까의 그 기세등등함은 다시 자신의 방에 잠들어있는 청에게나 줘버린 듯 괜히 불안해하며 당신과 잡았던 손을 몇번 꼼지락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양 손을 쓸수 있어서 편하기는 했으나 손이 하나 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어둠 속에서 이 손을 홱 낚아챌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심리적 불안함은 충분한 상태다. 주양은 몇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순간 화색이 도는 표정을 짓고 양 손을 주머니 안에 쿡 찔러넣었다. 이 방법이 있었지.
".. 으. 내 눈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만. 돌아보고.. 앞으로 좀 가면 아. 안돼? 도, 도망 안 가! 내가 지는 선택지인데 그걸 고르는 건.. 멍청한, 짓, 이니까..!"
끝까지 악을 부리며 재앙만을 불러오고 있었다. 당신이 한 걸음을 걷고 돌아보고 하는 것이 반복될수록 더 불안했다. 공포 영화에서 나올법한 장면이 주양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는 짧은 순간, 당신이 평소 저와 티격태격하던 레오파르트 로아나가 아니라 다른 뭔가가 되어 섬짓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양은 당신에게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이대로 가다가 멈춰선다면. 갑자기 아무말도 안 하고 그렇게 마냥 서 있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랐다.
"어... 그치만. 조금은.. 돌아봐도 괜찮을.. 지도?"
괜히 소극적인 한 마디를 덧붙이며 애써 그 기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불안함이란 쉬이 지워지는 게 아니었으니, 영 소용 없는 일이었지만.
현궁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뭔 꽃게란 말인가. 그는 골머리를 앓았다. 안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거대한 게의 난동 때문에 금지된 숲으로 남발되는 주문 소리, 학생대표니까 이런 건 해결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1학년 학생들의 삐약거림까지 겹쳤다. 그는 서랍을 열어 오레오를 꺼낸다.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 나가진 말거라, 아가."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심정을 뒤로하며 그는 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금지된 숲과 얼음호수 근처인 방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고, 그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은하수가 여기로 내려오냔 말이다. 그는 예민한 눈으로 게....를 훑었다. 저게 무슨 게란 말인가, 게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는 냅다 지팡이를 휘둘렀다.
"혀 씹으면 얼마나 아픈데요. 피 나면 큰일이고, 밥 먹을 때에도 조심해야, 음, 됐어요."
허가 찔린듯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여놓는다. 이내 자신이 하는 말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안을 흘겨보다 말았다. 뒤끝이 있다고 하나 이런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둘 정도로 속이 좁지 않은 민이 말했다.
"아, 그래요? 화목한 집안 같네요. 부러워요. 그런데 그 기개는 어디갔고 혀 깨물었을까봐 걱정한 사람을 놀리는 사람만 남았나요?"
결코 째째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민 자신은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에 질문한 것이었다. 매우 속 좁은 사람이 생각했다. 방금까지 하하호호 말 잘 하다가, 뚝 웃음을 끊는게 고장난 카세트처럼 오싹했다. 웃을 때에는 덜했지만 무표정을 짓고 있으니 사람이 배로 음울해보였다.
"하하, 농담이에요."
민은 다시 활짝 웃으며 덧붙인다. 서늘한 얼굴에 그제서야 볕이 들었다. 농담을 할 때에는 조금 어설프게 굴었으면 좋겠다만 단 한번도 지적을 듣지 않았거나 고칠 의지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제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부리지만 굳이굳이 농담으로 꼽을 준 것을 보아 주관적인 생각일 소지가 다분했다.
"...독립이요? 결혼도 안하고 동거를 한다고요?"
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누그러졌던 꼰대 감성이 다시 불타오른다.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구먼! 민이 빠르게 중얼거린다. 본인도 요즘 애들이라는 자각은 없나보다. 말투도 어딘가 옛스러운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당분간 장신구는 사지 마세요. 혹시 몰라요. 운이 좋아 장신구 선물이 올지."
민은 동거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떨떠름한 얼굴로 사실을 전했다.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후배가 선물로 줄거라는 노골적인 암시였다.
그는 혀를 차며 지팡이를 거둔다. 저 게같은 것에게 화풀이를 해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저건 단단하고,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고 나서야 껍질에 금이 가는 걸 봤으니까. 속살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뒤로 돌아 다시 기숙사 방으로 향한다. 방의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창문의 커튼까지 모조리 친 뒤 서랍 속에서 아끼고 아끼던 막대에 꽂힌 토끼모양 마시멜로를 꺼내든다.
"이번 칠석이 두려워지는군 그래."
…그는 토끼 마시멜로의 귀를 퐁신퐁신 씹었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나름의 분노 해결법이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다는 듯 단태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불성실하고 경박하며 가벼운 태도였다.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히죽이는 웃음과 가벼운 태도가 뻔뻔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타박타박 모래를 밝으면서 걷다가 들려오는 말에 헤죽-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 달링- 인연과 운명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생각하거든. 물론 자기와 내가 만난 건 인연이 아니라 운명이겠지만 말이야~ 와닿지 않아도 괜찮아. 나한테 엄청나게 와닿으니까!"
그날, 그 보름달 아래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는 게 뻔뻔했다. 자신이 시체처럼 움직이던 마법사를 상대하면서 보였던 모습을 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단태는 여전히 평소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였다. 선글라스를 썼으니 자신이 펠리체를 슬쩍 바라보는 게 들키지는 않을테니까.
"어차피 같은 학원인데 굳이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자기야~ 싫은 건 아니지만 새삼스럽잖아? - 나도 잘부탁해. 달링! 앞으로 학원에서 만나면 아는 척 해줄거지? 달링이 아는 척 안해줘도 내가 아는 척 해버릴거지만~"
고개를 꾸벅이는 펠리체를 향해 단태가 느물한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며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서 바라보고는 슬쩍 윙크를 해보였다. 앞장서서 걷는 펠리체의 옆에서 걷는 자세는 변함없었다. 묘하게 자신감이 섞여있다. 원래 그런 걸음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건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이쪽으로 가면 뭐가 있었나? 가본 적이 있어야지. 오, 수풀이 있네? 디핀도로 길을 만드는 펠리체를 잠시 단태가 바라봤다.
정확히는 펠리체의 질문 때문에 바라본 것이었다. 단태의 암적색 눈동자가 샐쭉- 가늘어졌다.
"그걸 아는거 보니 우리 자기, 날 관찰했나 보구나? 세상에 그렇게까지 관찰하다니 나 좀 부끄러울지도 몰라? 물놀이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같이 노는 것보다 그냥 노는 걸 보는 게 더 즐거워서 말이야~"
전혀 부끄럽지 않아보이는 표정으로 단태가 대답을 해왔다. 길이 만들어지다가 만 수풀을 발견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펠리체처럼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닌 샌들을 신은 다리를 움직여서 콱 밟아서 짓뭉개서 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물놀이를 하다말고 다른 곳으로 가는 자기랑 동행할 수도 있고, 좋잖아? 수풀을 뭉개는 꼴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집안의 오점, 근사하고도 알 만한 이름이다. 어느 집안이나 제각기 박산 나고 콩가루 빻아진 정도야 다르고, 알고보면 사람 하나를 집안의 수치로 몬 다른 일원들이 더욱 수치스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는 반전도 제법 많지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비밀들은 차치하고서 사실만을 따져보자. 자기네 가정사와 관련된 물건을 학생들에게 찾아달라 부탁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점이라는 그가 마지막으로 '손 댄' 이후로 찾을 수 없게 된 상태는 아니었던 걸까? 물건에 '관련 없는 학생이 찾아야 한다'는 조건이라도 붙어 있기라도 한가, 그게 아니고서는 사건 뒷수습 겸 겸사겸사로 부탁할 이유가 없을 텐데. 아니, 애초부터 그 물건이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하게 잃은 것이 확실하다면 다시 찾고자 하지 않아야 마땅하니.
……이리저리 의심해봐도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을지 모를 수상한 물건과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었다. 그러니 찾는 척만 하고 끝내야지. 그는 탐색보다는 집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는 장식품, 여기는 창문, 문 열고 잠깐 바깥 바람 쐬기.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 결국은 농땡이만 잔뜩 부리고 방으로 들어간 게 끝이었을 테다.
괜히 앞장선다고 했나. 레오는 후 - 하고 심호흡을 했다. 복도는 어두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코앞까지만이 보이고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깊고 짙은 어둠 그 자체와 발소리뿐. 레오는 걸어가면서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 때마다 잘 쫓아오고 있지? 라거나 도망치면 쳐죽인다 따위의 소리를 하면서 벽을 짚고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가는동안 노크소리가 들린다거나, 그림과 눈이 마주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 허으.. 10년은 늙은 것 같네.. "
복도 끝에 도착하자 계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와 계단통을 비추고 있었고 그나마 빛이 조금 있으니 미지에 대한 공포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레오는 식은땀을 닦으며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내기의 내용대로라면 윗층으로 올라가서 마지막 층의 복도부터 시작해 맨 아래층으로 가는 것. 뒤를 돌아 주양을 보던 레오는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하자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는지 킥킥대고 웃었다.
" 별 거 아니네! 딱 봐도 겁먹은거 같은데? 그래도 이 쯤에서 그만두진 않겠지? "
빛이 비추는 곳은 딱 여기 서있는 자리 뿐이었다. 계단 위쪽은 어두웠고 아래쪽도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자체. 레오는 발목을 돌려 풀어주고 손목을 풀었고 어깨를 풀어주었다. 도망친다면 쳐죽인다거나, 겁먹었다면 슬슬 항복하라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킥킥, 하고 한 번더 웃은 레오는 겁먹은 것같은 표정이 맘에 든다며 가까이 다가서선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으니까.
" ..뭐! 너가 도망칠까봐 그런거 아니야! 도망치기만해 진짜 가만안둬! "
레오는 조금 강하게 손을 잡았다. 빛이 애매하게 비추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정도까지가 되자 공포감이 배가되는 느낌. 레오는 잡은 손을 이끌고 계단으로 향했다.
" 올라가면 4층이야. 가자. "
레오는 조금 강하게 손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려했다. 신체적인 스펙에서 오는 힘차이인지 한 차례 멈칫했지만 레오는 고개를 돌려 주양을 바라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으로 내기의 승패가 가려질테니까. 그리고 미지로의 모험은 언제나 가슴 떨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더욱 긴장되었으니까. 레오가 이히히, 하고 웃었다. 한 차례 더 손목을 잡아 끌었다. 조금 더 힘이 거세어진것이 느껴질 정도로.
" 빨리 가자고. 짜증나게 하지말고. 4층으로 가기로 약속했잖아. "
위화감이 느껴질지도 모르는 목소리. 그러고보니, 저택은 3층이 끝이 아니었던가.
" 서주양!!!!!!!!! "
뒤에서 들리는 쨍 하고 울리는 높은 목소리. 레오는 복도를 달려왔다. 어느정도 거리가 있었는지 어둠속에서 달려나온 레오는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주양에게 도착해선 손목을 확 잡아챘다. 울먹이는 촉촉한 목소리의 레오는 헉-헉- 하고 숨을 고르면서 가만히 주양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너 맞지? 하고 물어보던 레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