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써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관심이 없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방송인으로서의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능숙하게 그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리고는 별 상관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차피 이야기 주제를 찾자면 많은게 사실이니까. 보통의 가문과 다르게 에스카마리 가문은 말그대로 많은것을 탐식해온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머글들의 문화를 갈망해왔고 그들과 섞임으로서 그들만의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적대감을 가져왔지만 그들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아왔고 그들의 핏줄은 리안에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탐식을 이뤄왔다.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그녀의 답을 정정해주었다.
"정확히는 성입니다, 저희 어머니의 성, 다이사쿠가 저희 어머니의 성입니다."
보통 그러한 가문이라면 가족간의 번목이 심할텐데 그는 그러한 기색도 없어보였다. 어느 일반인 가정과 같은 가족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줬지만 오히려 그게 더욱 더 자연스러운 가족이란 것을 떠올리는것인지 바로 알 수 있을것이리라. 동시에 그녀가 꺼낸 쿠키를 손에 쥐고 어쩔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착실하신 분이군요? 그래도 뭐 이정도라도 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민의 곁에 따라붙는다, 어차피 방송시간까지는 충분히 시간도 있겠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재차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제가 할수 있는게 이정도뿐인것도 사실이니까요. 땀냄새 많이 심한가요?"
아까전까지 스파링을 하던게 떠오른 것일까. 땀은 식었고, 밤 바람에 많은게 씻겨 내려갔다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 뱀의 혓바닥이 문제다. 이 시간에 찾아와서 담력훈련이니 뭐니같은 이야기를 할 때 레오는 이상한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일축했으면 되었을 터인데 쫄았냐고 물어보는통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덤벼!!! 하고 소리치고 밖으로 따라나서고 말았다. 레오는 주먹으로 때릴 수 있는 것들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그런것들은 무서웠다. 자신이 어떻게해도 힘을 쓸 수 없는 그런것들. 그리고 그런것들이 풍기는 분위기. 예를 듣자면 '거기 누구 있어요?' 라고 했을때 정말 누군가 있다거나, 침대 밑에 숨어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것이라거나, 머리를 감을 때 느껴지는 시선따위의 것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평생의 숙적같은 녀석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었다.
" 아무일도 없을거야. 아무일도 없을거야.. 괜찮아.. 괜찮아.. "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떨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것같이 무서웠다. 낮에는 그렇게 활기차던 곳이 밤이 되고나니 모든 빛이 사라지고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조용했고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아 복도를 비췄다. 공기마저 서늘했고 입김이 나오진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복도 끝에서 한 손은 벽을 짚고 꾸물꾸물 앞으로 나오던 레오는 저 앞에 주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 울상과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 가,가,가,갔다와,와,왔..다.. "
내기의 내용이라면 복도 끝까지 다녀오기. 그것도 지팡이 없이 순전히 자신의 눈만을 의지해서. 내기의 내용대로 다녀왔고 다녀오는 내내 레오는 무서워 죽을뻔했지만 앞에서는 티내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자신의 위신이 서질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숨기기는 불가능했기에 레오는 몸을 덜덜 떨면서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서서 말했다.
" 아,아,아무렇지도 않네.. 별 거 없네..! "
거짓말입니다. 두 번 갔다오라고 했다간 바로 잘못했다고 빌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 얼굴을 보니까 조금은 괜찮아진 기분이다. 레오는 후 - 하고 심호흡을 하곤 자세를 고쳐잡았다. 팔짱을 끼고 제법 앙칼지게 올려다보면서 이제야 제대로 된 미소를 띌 수 있었다.
"부장" "응?" "귀신 같은거 진짜 있나요?" "흠, 왜?" "아뇨, 담력시험 같은게 진짜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그말에 리안이 책을 덮고 숨을 고른뒤 천천히 입을 연다. 갑작스러운 강습 상황에 방안에서 룸메이트로 있던 루인과 아현이 그의 말에 귀기울이기라도 하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한다.
"자 두번 설명 안한다. 잘 들어, 너희 혼백(魂魄)이라는 말 들어 봤어?" "지나가다 한두번쯤?" "저도 조금은 들어본거 같아요." "그래, 이야기하는게 더 빨라지겠네. 혼백은 사실 영, 즉 너희 정신을 뜻해, 사람은 태어나면 백이 먼저 활동을 시작해 양기를 모으고, 이 양기의 결집형태가 혼이라고 하고." "그러면...." "가끔 머글들이 분신사바나 혼자서 숨바꼭질 같은거 하지? 그거 사실 진짜 위험한거다. 사람의 양기는 계속 백이 끌어와서 혼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그런 놈들은 그 양기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있는 놈들을 습격하는거거든." "어.... 음.... 그거 학교 수업에서 배워요?" "배울수도 있겠지. 다만 난 선행학습으로 우리 가문에서 좀 배운거고,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 식이라 이정도 밖에 몰라." "부장 결론은 뭔데요,"
맙소사. 세상에. 기어코 다녀왔단 말인가. 주양은 자신이 귀신을 보고 있는것이 아닌가 살짝 의심이 들었다. 눈을 두 손으로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귀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첫번째 타자로 당신이 다녀왔고, 무사히 잘 다녀온 것에 대해서 주양은 꽤 안심하는 눈치였다. 당신이 아무 일 없이 다녀왔다면 분명 자신도 무사할것이다. 당신을 기다리면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불안함은 싹 날려버린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당신을 내려다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올려 입을 살짝 가렸다. Hoxy.. 하는 짤의 모습과 얼추 비슷한 그 표정이었다.
"어.. 어머나~ 잘 다녀왔어? 하도 안 오길래 중간에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지 뭐야! 내가 찾으러 가야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서 다행인걸~?"
어떻게든 능청스러움을 유지하며 다음 타자는 자신이라는 불안함을 감추려 애를 썼다. 자신은 겜블러다. 겜블러는 포커페이스다. 표정에 일말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는 얼어죽을. 그 표정을 풀게 된다면 두려움이 내비쳐지는건 시간 문제였다. 당신과 동등하게 겨루려면 역시 청을 두고 가야할테니. 오롯이 자신 혼자서만 저 길고 컴컴한 복도를 걸어갔다 와야 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늘상 하던대로 뻔뻔하고 당당하게 반칙을 쓰기로 했다. 자신이 누군가. 승부의 정정당당함보다는 자신이 유리해지고 이기게 되는 데에 더 신경쓰는 사람이었다. 어깨에 올라앉은 청을 내려놓지도 않고 당당하게 올린 채로 주양은 슬쩍 한 걸음 내딛었다. 지팡이 없이라는 말을 했지, 패밀리어 없이 다녀오는 건 내기 조건에 없었으니 반칙이 아니라는 상당히 얍삽한 태도였다.
"분~명 우리 꼬맹이라면 중간에 울면서 달려올 것 같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잘 다녀온 그 용기만큼은 인정해줄게! 하지만 너가 했는데 나라고 못 할건... 어. 그치. 없잖아..?"
중간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린 것은 분명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불빛이라도 남아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과, 그 어둠 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는 건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청이 있다고 한들 어두운 곳에서라면 보이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청의 머리가 아닌 귀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을 자신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 젠장. 집에 가고 싶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그거지~ 나도 분명 아무 일 잘 다녀올거고, 그렇게 된다면 이번 내기는 무승부가 되잖아? 꼬맹이나 나나 무승부로 애매하게 남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이번에 내가 잘 다녀오면. 그땐 결승이라는 느낌으로 같이 저택 여기저기 싹 돌기. 콜?"
마음에도 없던 새로운 내기 내용을 급조해내며 주양은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조금이나마 더 출발을 늦게 끊으려고 부린 꼼수가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수도 없었다. 지금 빌 것은 당신이 거기까지는 못 하겠다며 백기를 흔드는 것이었으나, 만약 당신이 그렇게 쉬운 상대였다면 이 사이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주양은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순순히 백기를 흔들 생각이 없었다.
"조건은.. 그래. 먼저 도망치는 사람이 지는걸로! 내. 내가 이긴다는 데 청이를 걸겠어! 만약 거절하거나 하면.. 알지?"
더 이상 돌이킬수 없었다. 어깨에 앉은 청이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는 눈빛으로 주양을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풉키풉키 하고 충실하게 입으로 그 대사를 따라 말한 이상 더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다. 주양 역시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너무나 늦은 상태였다.
>>966 앞으로 갈 길이 멀겠구나. 하지만 힘내서 호감도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지! :D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호감도작에 도움을 주는 이벤트는 언제나 최고야~! 룸메 구할때 손 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걸! :) 앗.. 첼주가.. 도망쳤어...? (빠르게 쫓아감)(?)
>>96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불안한걸..! 찐 귀신체험같은 느낌으로 사실 밖에 나온건 레오의 모습을 한 무언가였던 것인가..? (아니다) 좋아! 재밌게 잘 즐겨보자 :D
" 왜, 내가 뺄 줄 알았어? 후우.. 뭐든지 튀어나오면 쳐죽여버리면 된다- 이거야. 알아들어? "
사람이 있고 불빛이 있자 레오는 금새 살아날 수 있었다. 혼자서 저 어둠을 헤치고 돌아왔다. 복도의 끝에 있는 여자의 그림과 눈을 마주치고 느린 걸음이긴 했지만 돌아왔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평생 놀림감으로 살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에게 지는 것은 죽는것만큼 싫었으니 어쩔 도리가 있었을까. 식은땀이 났던건 비밀이다. 레오는 슬쩍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작은 빛 만이 남아있었고 레오는 그 빛의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걸 알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빛 안에 있으면 더 안전하다고 느꼈으니까. 두 사람이 들어가있기엔 조금 좁았을지 모르지만 레오는 개의치않고 조금더 들러붙었다.
" 아- 그런데 아까부터 말투가 조금 거슬리네.. 야. 너 내가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라고하지 않았어? 오늘따라 또 짜증나게 하네 이게.. 어떻게, 여기서 쳐죽여줘? "
레오는 주먹을 쥐었다. 키 차이가 머리 하나는 더 났기 때문에 쥔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 주양의 가슴팍을 두 번 정도 툭툭 치고는 '조심해라?' 하고 덧붙였다. 이러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주변의 상황이 생각보다 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는 주양이 하는말을 팔짱을 끼고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어.. "
복도 끝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의 그림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깨달았다. 더 이상 이 저택안을 밤에 돌아다니는 것만은 그만두고 싶다고. 하지만 여기서 물러선다면 어떻게 될지 레오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할까. 어떻게하면 좋을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건 말도 안돼니 너도 어서 복도 끝까지 다녀오라고. 복도 끝에 가서 있는 그림이 어떤 건지 보고오면 다음 내기를 하겠다고. 하지만 레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 햐~ 씨.. 좋아! 걸어! 해! 내가 이기면 청이는 내가 갖는거다? 또 다른말하면 진짜 쳐죽여버릴거야. "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뭔가 더 유리한 조건을 걸 순 없을까. 레오는 어깨에 패밀리어가 올라가 있다면 그걸 만지거나 존재를 인지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순전히 혼자서 복도끝까지 다녀온 레오는 정말 중간에 울고싶었고 못하겠다고 소리치며 뛰어서 돌아오고 싶었으니까. 레오는 '잠깐만'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척 세웠다.
" 너, 패밀리어 놓고와. 정정당당하게 너랑 나. 딱 둘이서만 승부 보자고! "
적어도 방까지는 같이 가주겠다고 레오는 말했다. 절대로 혼자서 기다리는게 무서웠기 때문은 아니다. 레오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혼자가면 무서울테니 조금 도와주는것이지 혼자서 기다리는게 무서워서 그런것은 절대 아니라고. 레오는 청이를 바라보며 '너도 피곤하지?' 하고 이히히, 하고 웃었다. 곧 내가 주인이 될테니 내 얼굴 잘 봐둬야한다? 하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을 줍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건지. 그의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고개를 여전히 당신의 손에 맞춘 채 눈만 든 모습은 제법 어둡다. 그럼에도 그 사이의 분홍빛 일렁임은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모순적이다. 당신의 옥빛 머리, 금빛 눈, 그리고 다시금 반지를 낀 손. 그렇게 시선을 훑어내린 그는 손을 놓아주며 작게 속삭인다.
"네 주인과 달리 나는 무언가 제재할 수도 있지. 감당하게."
제일 먼저 용서 받지 못할 저주를 막든가 해야겠다. 여생을 오러와 함께 하는 술래잡기로 채울 수 없었다. 제 몸 가누기도 힘든데 도주까지 한다고? 사양이다. 차라리 머리에 살인 저주를 써서 빠르게 생을 마감하는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눈을 내리감는다. 자신의 두 손을 깍지를 끼고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둔다.
"이제 자네의 것이 될 지도 모르지."
여생을 마치면 주인 없는 반지가 될 것이다. 어머니도 자신의 나이만 해도 후대를 이을 생각은 없었다 하였으나 애정의 힘은 불가항력이라 했다. 그 또한 언젠가 두고보자 하였지만 어머니는 그가 열넷 될 적에 나직히 말씀하셨다.
- 네 모습을 보니 우리 대가 끊기겠구나. 이것 참..내 입장에서는 경사인데 어머니의 입장에선 곤란하네. 예. 곤란해하십시오. - 싸가지 없는 것. 지 애비를 똑 닮았지. 예. 전 아버지 얼굴도 모릅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만담이었나. 그는 눈을 느릿하게 떴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어쩔까 고민하듯 고개를 느릿하게 모로 기울인다. 그나마 먹기는 하지만. 이대로 더 커버리면 저번에 봤던 현궁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후배처럼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식습관을 되돌아본다. 어머니와 만났을 때 스테이크도 고작 한조각이 정량이었고, 이후의 식사를 떠올리면 미음 정도나 먹었던 것 같다. 어릴적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식사를 제때 하지 아니하여 위가 도통 늘어나질 않으니 조금만 먹어도 금세 차는 것이었다.
"그래, 아가가 여러번이나 했던 말이니 노력해보지."
그래도 이번부터 좀, 노력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타니아가 안다면 땅을 치며 울 것이다. 도련님은 제 말을 듣지도 않더니 추종자 놈 말은 듣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하며 아예 드러눕지 않을까. 물론 그래봤자 그는 발로 툭 건드리며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갈 길을 가버리겠지만.
"실?"
무슨 뜻인지. 그는 당신을 바라본다. 실. 실이라. 귀의 실을 말하는 것인가. 그는 잠시 당신의 귀를 쳐다보다, 당신의 시선을 따라 내려간다. 오른쪽 어깨.
불빛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자 공간이 좁게 느껴졌으나, 주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저 미지의 어둠을 앞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을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까. 자신이 곧 저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것에 대한 부담감은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는 것에 대한 적대심마저도 충분히 눌러둔 상태였다. 아까의 자신만만함은 어디 갔냐고? 청한테 줘버린 것 같다. 아무래도.
"꼬맹이를 꼬맹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오호라, 그래서 한판 붙어 보시겠다, 응? 거절 안 할테지만, 아까 터트리지 못한 눈물이 지금 실컷 터져버릴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상체에 힘을 빡 주어 밀려나지 않도록 하며 주양은 기세등등한 모습을 내비쳤다. 허나 그것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소란을 피운다는건 조금 개의치 않았을 뿐더러, 언제 무엇의 이목을 끌지 몰랐으니까. 차라리 날아가던 날벌레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면 다행일지 몰라도 그 이상의 것의 이목을 끌어버리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 다른 기숙사였다면 귀신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을 텐데. 귀신 없는 기숙사의 5년 짬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영적 존재에 대한 적응을 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결국 그렇게 한치의 양보조차 없는 내기에 불이 붙었다. 늘 시작은 주양이었다. 만약 청이 인간이었다면 당장 미간을 짚고 말았을 것이다. 당신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주양은 다시 기세 좋은 미소를 걸쳤다. 웃음을 터트린다면 분명 앞서 말한것과 같이 이목을 잔뜩 끌어버릴테니. 딱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나오셔야지! 좋아. 내가 진다면 청이는 미련 없이 떠나보내겠어~ 하지만 내가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니까, 역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청. 나 믿지? 하고 슥 웃어보이는 주양을 못 봐주겠다는듯 외면해버리는 청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잠깐만 하고 말하는 모습에 주양은 걸음을 멈춰섰다. 차라리 이 때라도 애써 무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으면 몰라도, 결국 멈춰버린 것은 주양에게는 큰 디메리트로 다가올 일이었다.
"정정당당? 하!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지, 우리 꼬맹이씨~? 잘 들어. '어른'의 싸움은, '꼬마'의 싸움처럼 정정당당에 목을 매지 않는다구~ 룰 따위는. 그저 한낯 종이쪼가리일 뿐인걸?"
일부러 어른과 꼬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게 어떻게든 당신의 이야기주제를 돌려서 기어코 청을 데리고 저 복도로 가려는 의도가 아주 잘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허나 지렁이 젤리에 억지로 끌려나온 청이 주양에게 더 호의적일지, 당신에게 더 호의적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타이밍 좋게 꾸벅꾸벅 조는 척을 하면서 하품까지 하며, 그 뒤에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는게 당신의 이야기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양은 이를 빠득 갈았다. 두고 봐. 앞으로 지렁이젤리 반은 내가 먹고 반만 줄거니까. 그런 시선으로 청을 쏘아보아도 자는 연기가 일품인 청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사실 거기까지만 했어도 끝내 청을 두고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다음 이야기는 충분히 주양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충분한 내용이었다.
".. 그럴 리가 있겠냐! 청, 시간도 늦었으니까 얼른 푹 자자! 감히 날 얕봤겠다. 제대로 각오하는 게 좋을거야, 너..!"
무시. 주양이 절대 그냥 넘어갈수 없는 것이었다. 투쟁심에 불을 지피며 다시 두려움을 몰아내고, 청이 푹 잘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처럼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방까지 같이 가주겠다는 그 한 마디를 그냥 넘겨버리지 않는 것. 그리고 말도 안 했는데 당신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은 역시 몰아내지 못한 두려움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청을 방 한 켠에 고이 내려놓으며, 다시 당신의 손을 홱 잡고서 아까의 그 불 켜진 복도 한 켠으로 향했다.
"자. 그럼. 간다? 나 간다? 진짜로? 잘 봐두라고.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갔다 올테니까! .. 이. 이제 출발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