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타로 꽂힌 처음 듣는 호칭의 여운이 가실 때 쯤에야 볼을 꼬집고 잡아당겼다가 놓는 일련의 과정이 멎어들었다. 아팠어? 하고 당신의 차가운 볼에 자신의 손도 추가로 얹고 살살 문질러주고 나서야 지금 이 감정 기복도 썩 만족스러웠다고 느끼며 씩 웃어보이는 것이다. 이런 만족은 과정 중에 있어도 좋겠지만 역시 오롯이 그 상황을 즐기고 나서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다. 자신에게 조금 더 그 만족감이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나. 그건 맞네~ 우리 여보야가 너무 슬퍼하는건 원치 않으니까, 좋아! 수업중엔 최대한 조심조심히 행동하도록 할게?"
물론 그게 가능했다면 비행술 수업부터 지극히 정상적으로 끝마쳤을 것이다. 여기저기 쏘다니지 않고 정확하고 빠르게 블러저만 쳐냈으면 파편이 튀고 사람이 다치는 혼돈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다친게 자신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꽤 이기적인 생각으로 그 사실을 대충 넘겨버렸다. 지금 포커스를 두고 이야기해야 할 것은 그런 사사로운 실책에 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관련 없는 생각은 빠르게 지워버리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까 말이야. 혹시 학생들은 알 수 없는 뭔가가 더 있으려나? 내가 알고있는 상식의 한계성으로는 아무리 짐작해도 살인 저주가 제일 지독한 저주라는게 이해가 안 가네~"
앞서 한참을 고민했듯이 지독한 것이라고 한다면 크루시오가 훨씬 위일 것이었으니. 살인 저주와는 다르게 크루시오는 한두대 맞더라도 죽지 않아서 그런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죽지 못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는 맞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대신 죽는것이 더 낫겠다 싶은 고통을 주었으니 그것조차 애매해졌다.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차이라고 대강 넘겨짚는 수밖에 없었다. 더 생각했다간 하루 종일 크루시오와 아바다 둘 중 무엇이 더 독한가에 대해서만 생각해버리고 말 테니까.
이윽고 심장이 철렁했다는 말에 꺄하핫 하며 경박스런 그 웃음을 다시 터트리고 마는 것이었다. 수업 내용도 거의 다 전달받은 듯 싶었으니 이제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켜도 좋을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늘 쉬는 시간이 함께했으니. 지금 이것도 그런 부류의 것이겠거니 하며 즐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으응~ 여기서 더 빠져들어버린다면 곤란한데! 내가 진짜로 여보야를 청 대신 내기에 걸어버릴지도 모른다구? 꽃은 꽃끼리 어울려야지, 호박하고 어울리면 큰일나, 여보야~"
물론 이것 역시도 그저 평소에 당신을 대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까전에 당한 게 있어서 조금 더 심화된 버전으로 되갚아주고 싶었는지, 얼핏얼핏 진심이라고 생각할만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러니 주변 사람들이 오해할대로 오해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주변에서 주는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적인 태도가 강한 사람 둘의 조합은 이리도 환상적인 것이었다.
"아하하. 역시 여보야한테도 나밖에 없지?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내가 더더욱 힘내야겠네! 여보를 지키고, 위험에 거리낌 없이 뛰어들면서~ 동시에 여보가 걱정하지 않도록 멀쩡하게 다시 곁으로 돌아올수 있을 때까지!"
물론 그러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제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 상황에서 남을 챙기기는 쉽지 않았다. 하물며, 스릴을 즐기는 와중이라면 더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래봐야 누누히 서술했던 일상적인 모습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기에 그 진실까지 이야기에서 다루지는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이미 볼만큼 봐왔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 것이었을수도 있고.
"그래도 역시 잘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어! 혹시 알아? 여보야의 그 간질간질한 호칭들을 자신에게만 향하게 만들고싶어할 사람이 있을지!"
근거나 증거라고는 없는, 추측 100%의 이야기였으나 아무렇지 않게 하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같은 사람이라면 어쩌면 정말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 한둘쯤은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만나고싶은 사람이 있다. 궁금한 것이 잔뜩 있는데 그걸 풀어줄 수 있는사람. 버니 립시츠. 선후배 놀이에 한 번 어울려줬던, 분명한 적이지만 엄청나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 그 사람. 레오는 그럼에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기에 기숙사의 자기방에서 가만히 침대에 앉아 고민만 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은 특히나 더 조용했다. 조용해서 좋은 새벽.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이따금씩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새벽. 하늘이 높아 숨쉬기가 편했고 구름 한 점 없는 짙은 파란색의 하늘에서 달빛이 쪼개져 내려와 새벽임에도 그리 어둡다는 느낌은 없었다. 레오는 옷을 주워입고 문을 열고 나섰다. 찾아가서 만날 수 없다면 우연에 기대야지.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니까.
레오는 밖으로 나섰다. 처음 만났던 장소는 학원이었고 그 다음 개인적으로 만난 장소는 라온이다. 밝은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아마도 가림빛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까지 들어가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가장 가까이 간다고 해봐야 귀곡탑이 전부겠지. 레오는 허리춤의 지팡이를 잘 확인하고 우선은 라온으로 향했다. 후미지고 어두운 길을 택해서 몰래몰래 귀곡탑에 가까이 다가갔다. 귀곡탑까지 들어가지만 않는다면야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후미진 라온에서도 더 조용한 장소. 레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달빛만이 비추는 장소.
" 흠. 좋아. "
기다려보지뭐. 귀곡탑의 근처에서 서성이던 레오는 넓직한 바위 하나를 찾아 그 위에 앉았다. 두 눈을 또릿하게 뜨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팡이가 자꾸 허리를 찔러 불편했는지 지팡이를 풀러 옆자리에 내려놓은 레오는 주변을 두어번인가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이 조용한 장소. 자세가 불편했는지 레오는 바위 아래로 내려와 자리를 적당히 정리하곤 바닥에 앉아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댔다. 기다려보자.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보자. 그리고 잠이 오기 시작했다. 달빛이 내려오고 적당히 촉촉한 공기에 풀벌레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무언가 평온해 언제부턴가 레오는 꾸벅꾸벅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해버렸다.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삐딱한 고개로 당신을 응시했다. 그는 젤리든 사탕이든 단 음식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다. 단지 사람을 잠시 의심할 뿐이다. 선한 의도에는 늘 뜻하지 않은 악의가 숨겨져있는 법이다. 그는 젤리 봉투에서 지렁이 젤리를 하나 꺼낸다. 젤리는 다행히 입으로 넘겨주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미새가 새끼에게 벌레를 물어다주는 장면을 떠올리고 눈을 감았다. 끔찍하다.
"그렇지, 복이 오는 법이지."
젤리를 입에 밀어넣고 손가락에 묻은 설탕 부스러기를 가볍게 핥는다. 정보를 주는 손님은 귀하다. 그는 입학식이란 말에 평온한 미소와 대비되는 교사 직전의 목소리로 질문한다.
"학교 관계자인가 보군. 학생인가."
더 캐기 어렵다면 체념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화하는 것은 그나마 덜 예민한 상황이긴 하지만, 돌고 도는 얘기를 하면서까지 정보를 캘 체력은 없었다. 그는 당신을 바라보다 뒤로 돌아 어딘가로 향한다.
"뭐, 손님을 서있게만 할 수는 없지. 이리 온."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는 협탁 근처에서 허리를 숙인다. 한 손으로 걸쇠를 풀고 서랍을 연다. 파란 포장지가 보인다. Oreo. 그렇게 써있는 기묘한 봉투를 꺼낸다.
"매가 아니더라도 이런 것은 충분히 줄 수 있긴 하고 말일세."
젤리를 더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매가 좋다니. 단순한 건지, 아니면 순수한 건지. 그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흘긴다. 오레오가 담긴 포장지를 주려다 멈칫 하더니, 눈빛이 잠시 어두워진다. …오늘 이후로 아무도 당신을 발렌타인이라 부르지 않을 겁니다. 애정이 비틀린다 하여도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일이지요. 우리는 이어지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 날 그 상황이 어떻게 끝났는지, 그녀는 잘 기억하지 못 했다. 마지막엔 어쩐지 흐지부지 되어버린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달려들고 마법을 난사한 가운데 넝마 같은 마법사가 쓰러졌다. 남은 건 상처입고 지친 학생들과 혜향 교수 뿐. 그 중에서도 교수 다음으로 크게 다쳤던게 그녀였던 듯 하지만, 그녀는 멀쩡히 제 발로 걸어서 보건실에 갔다. 피투성이 손으로 내던졌던 도포를 주워 찢어진 옆구리를 죄어매면서 말이다.
보건실에서 옷을 걷고 본 상처는 꽤 심했을거다. 디핀도도 아닌 섹툼셈프라를 맞고 힐 한번 없이 그렇게 움직여댔으니. 단면이 어떤 상태였을지 약간의 상상만으로도 가늠되지 않는가. 그래도 디터니 약이 열일해준 덕에 흉터는 남지 않을거란 말을 들었다. 피를 제법 흘렸으니 좀 쉬는게 좋겠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녀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제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녀의 사전에 휴식이란 단어는 없는 것처럼, 그녀는 피가 빠져 창백한 낯을 하고도 잘도 돌아다녔다. 그래도 평소보다 움직임이 굼뜨고 조심스러워졌지만 그만한 차이를 눈치챌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다행이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이상하리만치 잘 돌아다니는 만큼 요즘 뜸했던 곳에도 발을 들였다. 촌스런 교복이 아닌 고운 평상복 차림으로 느릿느릿 백궁의 별궁으로 들어가, 대청마루에 다다르자마자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아버리긴 했지만.
"...으.."
아파서인지 지쳐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인지. 의미불명의 소리를 내며 신발을 내던지듯 벗고 마루에 엎드렸다. 칠칠치 못한 행동으로 인해 치맛단이 기어올라가고 단정하던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신경쓰기 싫은지 가만히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말이다.
레오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잊고있었다.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마저 잊고있었다. 그저 분위기와 주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잠들어버렸으니까. 부네가 와서 말을 걸어도 레오는 잠꼬대아닌 잠꼬대를 하면서 웅얼거리고 있었다. 몸을 돌려 부네를 등지고는 조금 더 몸을 웅크리는 레오였다. 그리고 숨을 두어번인가 더 쉬었을까. 레오는 엇. 하는 소리와 함께 밍기적밍기적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눈을 꿈뻑인 레오는 지팡이를 들었다.
" 루모스.. "
잔뜩이나 졸린 목소리로 눈마저 감고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얕은 빛에 의지해 얼굴을 확인한 레오는 이히히, 하고 웃으며 '녹스' 하고 작게 말했다. 빛이 꺼지고 레오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말없이 눈을 감고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왜 왔더라. 누구를 만나고 뭘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왔더라. 공기가 여전히 적당히 촉촉했고 달빛이 예쁘게 내려와 땅을 비추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레오는 눈을 부비적 거리다가 천천히 눈을 뜨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오 - 버니.. "
이렇게 바로 만날줄은 몰랐네. 레오는 그렇게 덧붙이며 이히히, 하고 또 웃어보였다. 잠이 확실히 덜깼는지 몸은 어느정도 일어났음에도 정신은 단잠에 취해있었다. 두 팔을 벌려 끄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자 그제야 잠이 깼다는듯 눈이 조금 똘망해졌고 정신이 잠에서 깨어났다.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던 레오는 눈을 두어번정도 더 깜빡이곤 이게 정말 자기 눈앞에 벌어진 일인지 모르겠다는듯 조금 애매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차가운 체온은 따뜻한 게 문질러지고 나서야 조금 보통의 체온으로 올려졌다. 금새 다시 차가워지겠지만, 단태는 아팠냐는 물음과 함께 볼을 문지르는 주양의 손을 슬쩍 바라보다가 헤죽-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단태가 부정했다. 아프지도 않았는데 아픈 척했으니 당연스러운 반응이다.
"으흐흥~ 달링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걱정하는 건 자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수업 중에는 조심히 행동할거라고 믿을게~?"
웃는 건지 아니면 흥얼거리는건지 애매하지만, 아마 전자로 추정되는 소리를 내면서 단태가 대꾸하다가 잠깐 샐쭉- 하니 눈을 가늘게 뜬다. 주양의 의문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들었을 때는 티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듣자하니 확실히 의문스럽기는 했다. 왜. 어째서- 살인 저주가 고문 저주보다 더 악랄한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 때 질문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에반스 교수님을 만난다면 물어볼 것이 늘어난 건 확실했다. 지금은 자신과 밤산책을 같이 하고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자.
"자기야~ 달링~ 우리 작은 고양이. 꽃은 내가 아니라 자기인걸? 난 자기라는 꽃에 홀려서 날아온 꿀벌이고 말이야~"
청 대신 내기에 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지만 단태는 히죽- 하니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가 낄낄 웃었다. 진짜로 내기에 자신을 건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내기를 이겨버릴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였다. 단태가 아는 주양은 그런 사람이였으니까. 그 증거로 청이 정말로 다른 학생에게 넘겨졌던 적이 없기도 하고. 언뜻 언뜻 들리는 말 중에 진심처럼 느껴지는 게 있기는 했지만- 단태는 못들은 척 능글맞게 넘겨버렸다. "정작 진짜로 그런 상황이 됐을 때는 정말로 날 지켜줄 필요는 없지만~ 자기야~"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줘야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단태는 모두가 주궁에 갈거라고 예상한 만큼 자신을 지키는데 도가 튼 사람이였다.
"으응- 같은 기숙사 후배도 그런 소리하던데- 달링도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아니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불성실하고 경박해서 가볍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가진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 말이다. 게다가 아무리 자신이여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의문이 들기 마련이였다. 진짜? 설마. 에이. 신입생들이라면 모를까 재학생 중에는 전혀 없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