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손을 거둔다.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몸서리를 칠 뻔 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는 자신의 것으로도 충분하다. 손을 털고 가려진 눈을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쉰다. 자주 놀러온다는 말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음은 보존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타니아가 떠나니 당신이 나타나지 않은가. 물론 타니아는 말이라도 통하는 아이라 애초에 비교할 것도 아니었지만.
"준다면 먹겠지만."
그는 고개를 기울인다. 예민한 눈빛을 치켜뜬다. 이어지는 말에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중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머리를 맴돈다. 당신을 데려왔다고 하면 교내에 추종자가 있단 뜻인가? 그의 분홍색 시선이 한참동안 고요히 당신을 응시한다.
"재밌는 사실이군. 기회가 된다면 소개시켜주게."
그가 웃는다. 미소가 입매에서 시작해 얼굴로 퍼져나간다. 죽기 직전 원없이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고요한 미소다. 타니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비명을 지르며 넙죽 엎드리거나 도망쳤을 것이 뻔하다. 그가 이렇게 미소를 짓는 일은 필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뜻이니.
"잠옷이네. 오늘은 나갈 일이나 손님을 받을 일도 없었거든. 그런데 자네가 들어왔지."
그렇다고 온 사람을 내쫓을 정도로 예민하진 않았다. 아마도. 저 멀리서 달링이 아가를 듣곤 빽 소리를 질렀다. 질투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달링을 돌아보며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적인다. 그리고는 당신을 응시했던가.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신반의였다. 몸에 벤투스를 걸고 바람의 흐름을 타며 달려나가는 지금도 이걸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면서 달려가는게 지금 그의 속 마음이었다. 어차피 속고 속는게 인생이라는 것일까, 어차피 '아이고, 또 속냐. 중생놈아.'라는 말을 듣는게 안가고 벌점 먹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것인지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10점이든가?"
저번에 건 사감님 돕고서 5점 벌어 놨더니, 방송 한번 잘못하고 커플 만들어준 댓가로 -15점을 얻어먹었다. 물론 방송부 애들이 자기네들도 벌점 나눠먹겠다고 아우성은 쳤지만 어차피 미운털 박힌 시점에서 그냥 자기가 다 지고 가는게 맞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금지된 숲으로 달려나갔다.
"보름달이라....."
보름달, 하면 보통은 음기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태양은 변함없는 강함을 의미 하지만 달은 그 모습을 변함으로서 흥망성쇠를 나타낸다고들 하였다. 그는 그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가장 음기가 성해지고 그 단계가 성함의 극치에 다다른 순간이 아니던가. 마치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를 보는것 마냥 말이다.
솔직한 기분을 말하자면,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불려나와서 영 좋지 못 했다. 얼마나 별로였냐면 실내용 돌핀팬츠와 나시 위에 교복인 도포를 달랑 한겹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나올 정도였다. 표정이 부루퉁한건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오늘이 보름날이라 다행이라고 할까. 달 밝은 밤은 그나마 기분이 좋은 날이었으니까.
기숙사의 상징인 노리개를 머리끈 삼아 묶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혜향 교수가 부른 곳으로 나간다. 가면서 주변을 살짝 돌아봐 누가 있는지, 아는 얼굴은 있는지 찾아본다. 그 중 붉은 머리가 보인다면 그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을지도 모르고.
주단태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잠자코 기숙사에 짱 박혀 있어야겠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주단태는 늘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기숙사에 처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혜향 교수님의 급한 부름은 단태를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놈의 호기심. 오늘따라 더 차갑게 느껴지는 체온이 주단태의 몸을 잠시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괜찮을테다. 괜찮기를 바란다.
금지된 숲에 도착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태는 샐쭉- 눈을 가늘게 뜨고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휘영청 뜬 보름달이 참, 예쁘기도 했다.
주행성 패밀리어를 데리고 다니는 주양의 로망 중 하나. 자신의 패밀리어와 같이 달을 구경하는 것은 오늘도 그렇게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나가기 귀찮다는 듯 자는척을 하며 한쪽 눈만 뜨고 주양을 보다가, 다시 감았다가 하는 모습을 보며 주양은 심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청 나빠. 못돼먹었어. 실망이야. 앞으로 내기에 안 걸어버릴거야. 진심은 아닌 이야기들을 진심처럼 말하며, 오늘도 주양 특유의 잔뜩 싸맨 테크웨어를 차려입은 채 밖으로 나섰다.
"달 진짜 밝다~"
이때 아니면 볼 수 없는 생물을 보는것보다 훨씬 흥미가 끌리는 것은 무려 그 금지된 숲으로 향하는 일. 지금이 처음이던가? 아니면 두 번째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주양은 한껏 들떴다. 이렇게 달이 밝은 밤에 들어가는 금지된 숲이라니.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자신을 아찔하게 만들어줄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아. 그래도 자신을 아찔하게 만드는게 게딱지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건 진짜로 오래 맞붙었다간 자신이 죽어야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게처럼 생긴 무언가의 관심을 최대한 덜 끌기 위해 내려앉은 은하수를 피해서 금지된 숲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던 중 제 쪽으로 쪼르르 다가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주양은 고개를 갸웃였다. 아. 누군가 했는데, 전에 추종자를 맛깔나게 때리던 후배. 우리 주궁으로 오지 않은게 후회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부드럽게 손을 살랑여 가벼운 반가움의 뜻을 전했다.
보름달이 뜬 날이다. 생물의 광기가 극에 달한다는 날이 아닌가. 그는 창문 너머로 뜬 달을 본다.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달은 아니다. 그는 보름달이 뜬 날마다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닌지라 누가 치이든 말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달렸다. 관을 운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음, 지금은 그렇게 질주본능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달링. 오늘은 혼자 있어야겠구나." "No." "안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니." "No." "사랑스러운 달링, 누구에게서 그런 심통나는 말을 배웠니." "You?"
그는 잠시 입을 다문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이다. 자기도 구관조라고 의견을 표출할 줄 알지 않나! 이렇게 예쁜 천재를 데려오다니 세상 운도 좋아라. 그는 달링을 한참동안 어르고 달래서야 밖에 나올 수 있었다. 금지된 숲은 현궁과 가깝다. 그가 로브 주머니 속의 지팡이와 성냥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 본다면 소맷단을 정리하는 듯 싶었다.
급히 찾아온 교수님에겐 미안하게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희귀한 생물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직접 자리에 죽치고 그 생물이 출몰하걸 기다리는 데 성공하더라도 저 자신이 그것을 감상하기란 불가능할 테니. 기껏 제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다 해도 발소리 몇, 울음소리(만약에 그것이 우는 생물이라면) 조금, 그 정도의 상황만 파악하는 게 끝이리라. 발소리나 흔적 몇 개만 발견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생물이든 길 가던 고양이든 그에게는 똑같이 느껴질 뿐이다. 관심 가지 않는 무언가엔 여전히 아무런 호기심도 들지 않는다. 그 생각은 금지된 숲까지 몸소 걸어나온 지금에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런 주제에 결국 왜 밖으로 따라나왔느냐 하면… …. 심심한데 밤 산책이나 할까 해서? 이유야 어찌됐든간에 늦은 시간에 홀로 다니는 것보다야 금지된 숲이라도 교수의 허락을 받고 단체로 나와 있는 쪽은 안심이 된다. 그래서였다.
라는 말이 목구녕 넘어까지 넘어오기 직전에 겨우 삼킨 그였다. 아직 벌점 변제도 안끝났는데 여기서 또 벌점을 먹고 철퇴를 맞기는 싫었기에 그는 조용히 하기로 하였다. 최근들어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진짜로 문제를 터트렸다간 더 곤란해지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캠코더 같은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녹화 장비같은게 있다면 실시간으로 녹화를 한 다음 동화 옥음때 대형 스크린 같은걸로다가 투영해서 곳곳에 마법으로 상영하면 재밌을거 같은데 말이지, 라고 실없는 상상을 하면서 걸음을 마저 옮긴다. 물론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고 싶다는 것일까, 그는 조용히 기척을 죽인다음 천천히 다른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