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손이 올라온다. 먼젓번에는 양뺨을 잡히는 곤욕을 치렀음에도, 성헌은 보름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보름의 손이 이번에는 무엇을 하나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러다 보름의 손이 자기 머리를 도닥이자, 그는 물먹은 것 같은 푸른 눈으로 보름을 가만히 보다가 얼굴에 서툴고 자그만한 웃는 표정을 올려놓았다.
"뭐, 나머진 내가 만들라는 거ㅇ..." 눈앞에 갑자기 쑥 등장한 문어 비엔나에, 성헌의 반문이 나오다가 말았다. 아기 문어 성헌... "영문을 모르겠네." 하면서도, 성헌의 얼굴에는 보름이 내보인 장난기와 비슷한 기색의 웃음이 다시금 번졌다.
"그래? 기다려지네."
보름이 그런 단어들에 버릇이 된 만큼이나 성헌도 보름의 그런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성헌은 별 반감없이- 보름의 또다른 오누이라도 된 마냥 보름의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오늘 밤에도 거실에서 영화나 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여자 방에 들어갈 수야 없고, 거실에서 자면 또 거실에서 자는 대로, 베란다를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잠들 수 있는 그럭저럭 운치있는 잠자리일 테니까.
"요즘에 딱히 뭔가 거짓말한 기억은 없지만 말야."
나무로 된 코가 가늘고 길쭉하게 길어지는 모습에서 길다란 과자를 연상한 건 사실이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김에 마트에 가서 장도 좀 봐오고. 어제는 정말 당장 먹을 것밖에 못 샀잖아. 그래- 하진이가 수박 이야길 하던데 수박 한두 통 사오면 좋겠네."
서툴고 자그만한 웃음과, 장난기가 어린 듯한 웃음. 두 웃음을 본 보름은 두번이나 웃게 만들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스스했던 보름의 머리카락을 보고 웃은 것까지 세면 벌써 세번입니다. 제일 피우기 힘든 꽃이 무엇이냐고 하면 분명 웃음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름은 성헌에게 보여주었던 아기 문어를 내려놓았습니다.
ㅤ“달한테 일찍 일어나라고 해봐.”
달이 떠있는 시간이 잠을 청하는 시간이니, 달이 일찍 뜨면 뜰수록 성헌의 기다림이 짧아질 것입니다. 해가 떠있는 지금 달은 자고 있는 것이지요. 혹은 보름 자신을 그대로 달에 빗댄 것이기도 했습니다. 보름이라는 이름은 달을 떠올리기 너무나 쉬운 것이었고, 그 동생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면 누가 보아도 달이었으니까요.
ㅤ“응. 그래보여.”
거짓말한 기억이 없다는 성헌의 말에, 그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코와는 영 다른 모습인 당신의 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름의 손은 바게트를 어슷난 모양으로 썰고 있습니다.
"달도 잘 시간이 필요할 텐데 일찍 깨우면 미안하잖냐. 그리고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해야 되는 일들도 있고. 해가 떠있을 때 해야 되는 일들을 차근차근 하다 보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아침밥도 먹어야 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마무리해야 되고, 장도 봐야 되고, 바닷가에 제대로 놀러도 나가야지... 그 동안 모기 연막탄도 집에 좀 터뜨려 놓고... 나 저녁에 또 저녁 로드워크 나갈 건데 갔다오면서 불꽃놀이나 좀 사와볼까."
하면서 오늘 할 일을 차근차근 꼽아보던 성헌은, 문득 외로이 텅 빈 방에 쭈그려앉아서 하릴없이 경기 영상이나 복기하면서 외로움을 곱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성헌은 문득 세 소꿉친구를 향한 애정이 왈칵 치솟는 것을 힘겹게 억눌러야 했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기 좀 낯간지럽지만, 내 삶에서 좋은 부분들은 전부 다 너희들로 쓰여있어. 물론 낯간지러우므로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러니까 채근하지 않고 기다리려고. 너도 느긋하게 와도 돼."
이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허겁지겁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바보같이 흐물흐물한 웃음이 얼굴에 나와버릴 것 같아서, 성헌은 최대한 평소의 그 짓궂게 웃는 얼굴을 꾸며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행히 눈치좋게도 냄비에 담긴 것이 때맞춰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성헌은 보름이 만들어둔 아기문어들이 가득한 보울을 집어들었다.
"아기문어들은 목욕을 시키도록 하겠다."
냄비에 담겨 그럴싸하게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어느새 꽤 그럴싸한 수프 국물이 되어 있었다.
>>782 아니, 양 손으로 데려다주는 건 보름이랑 설이가 현관에 드러누웠을 때 이야기고, 거실에 네 명이 드러누웠을 땐 여자방에 말없이 들어가기 거시기해서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성헌이가 가장 먼저 일어났고 보름이가 뒤따라 일어났으니 거실에는 하진이랑 설이가 남아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