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는 깨물 거야, 하고 엄포를 놓은 보름의 말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시점을 찾았다. 그러나 시점은 이내 조금 초라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보름이 입을 열어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분명히 찔리는 구석이 성헌에겐 있었다. 역시 쓸데없는 걱정에 바보같은 짓을 했을 뿐이었어. 하고, 성헌은 안도와 뉘우침이 섞인 혼잣말을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가라앉혔다. 성헌은 옆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보름에게로 돌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물리도록 할게."
사실 백 퍼센트 장담하진 못한다. 성헌은 「걸려오는 시비」라던가 「자존심의 상처」라던가 하는 것들이 생기면 갑절로 되갚아주지 않고는 배기질 못하는 고약한 기질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제 「먼저 시비를 건다」던가 하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둘 작정이지만... 그리고 보름도 설이도 그렇게 말하는데야, 얼마든지 조금 더 신사적으로 굴어줄 수 있었다. 하진도 분명히 그런 말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성헌은 소꿉친구들의 말을 외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희가 하는 말인데.
"말고는... 거기 바게트빵이 있는데, 그 중에서 2자루만 비스듬하게 썰어줘."
다시 불을 키우며 성헌은 대답했다. 과연 봉지에 담긴 바게트빵이 4자루 있었다. 아침 일찍 장이라도 봐온 걸까?
"오늘 아침 일찍 조깅하러 나갔는데, 가다 보니 수산시장이 있더라고. 가봤더니 대박이더라. 점심은 새우 감바스, 저녁은 연어 스테이크로 해볼 생각인데 어때?"
그러니까, 너희랑 같이 이렇게 조그맣고 소소한 일상이라도 같이 보낼 수 있다면, 나한테는 가장 좋은 일일 거라고.
좋은 것들은 항상 나를 너무 쉽게 떠나버리더라. 그러니까,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잘해야지.
흡혈귀, 뱀파이어가 박쥐로 변하는 모습이나 박쥐와 함께하는 모습은 꽤 흔한 것이었습니다. 보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성헌과는 다르게, 평소보다 살짝 높은 음에 단어를 옮겼습니다. 음이 올라가고 말을 맺을 때는 부러 새침하게 끝맺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를 따라 성헌이 가라앉게 된다면, 보름에게는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깨물어버릴 감이었습니다. 보름은 박쥐가 싫다고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은 없길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을 믿고 있고, 믿겠다는 의미로 답을 마치면서 입 모양을 바꾸었습니다. 한 입 깨어무는 입 모양이 아니라 하트 모양으로, 히 웃음을 그렸습니다.
바게트 2자루, 아기 문어. 보름은 대답 하지 않았지만 싱크대로 향해 손을 씻었습니다. 요리를 할 때 첫번째로 해야하는 행동이니, 성헌의 말대로 할 것이 분명합니다.
ㅤ“우리 고래야?”
지금도 조갯살이 쓰였고, 점심에는 새우, 저녁에는 연어. 바다에 온 만큼, 성헌이 수산시장에 갔다온 만큼 해산물을 많이 먹게 되는 것이 꼭 고래 같았습니다. 바다에서 크게 한 입 먹어버린다면 고래만큼 많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은 없을테니까요. 대답을 하는 보름의 손은 열심히 아기 문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ㅤ“그럼 후식은 피노키오.”
동생들한테 읽어준 동화책 피노키오 속에서,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와 함께 고래 뱃속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에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756 와. 그렇구나. 상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에서도 전부 고래로 나오고 글만 나오는 약간 소설 같은 느낌의 책에서도 고래로 서술되고 있었거든. 역시 원작을 알면 절로 놀라게 된다니까. 한번 정보를 살짝 찾아봤는데 귀뚜라미도 원본에선 바로 죽는구나. (동공지진) 지미니 크리켓은 정말 복받은 거였어.
애석하게도 채성헌이란 소년은 문학적 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지 못했기에, 물린다와 박쥐 사이에 놓여있는 드라큘라라는 징검다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빙긋, 하며 예쁘게 웃음을 그려보이는 보름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쓸어주며 정리할 뿐이다. 썩 거친 손인데 움직임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다.
"천천히 해도 돼. 소시지는 지금 넣는 이게 끓어야 넣을 거니까." 하며 성헌은 우유 팩을 찢어서는 세 컵 정도 되는 양의 우유를 냄비에 죽 붓고, 조그만 크림 곽도 하나 뜯어서 냄비에 붓고는 불을 줄였다. 그리곤 주걱으로 냄비를 한번 휘저어주고, 봉지로 손을 옮겨서 치즈들을 꺼내놓는다. 파마산 치즈가루와, 체다치즈 몇 장. 성헌은 너 치즈는 좋아하냐고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으나, 보름이 한 박자 빨리 말을 꺼냈다. 보름다운 질문에 성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고래인 게 좋다면 뭐 안될 거 없지."
아직도 보름의 그 두세 단계를 건너뛰는 화법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지내온 세월이 있기에 맞장구칠 말은 있다. 물론 보름이 거기서 한번 더 건너뛰어버리면 입이 막히곤 했지만.
"갑자기 웬 피노키오...?"
앞서 말했듯 채성헌이란 소년은 문학적 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딱히 어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준다거나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피노키오의 줄거리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어른들의 훈계에서나 언급되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못난이 목각인형 정도로만 피노키오를 알고 있을 뿐이다. 성헌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 다른 답을 찾았다.
성헌의 손이 다시 보름의 머리 위로 닿았을 때, 이번에는 반응이 하나 있었습니다. 눈을 깜박인 것보다는 크고, 흠칫 놀랐다기에는 작은 것이 있었습니다. 가관이었던 머리 모양새가, 까치집이 철거되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름의 머리 위로 다른 누군가의 손이 올라오는 적보다, 보름의 손이 다른 누군가의 머리 위로 올라가는 적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름은 자신의 손을 따라 머리 위로 올렸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있는 성헌의 손이 있는 머리 위로 올렸습니다. 피하지 않는다면 두드리다시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톡톡 두번 떨어질 것입니다.
ㅤ“넌 아기 문어 해.”
보름은 문어로 만들어버린 비엔나 소시지를 하나 집어 성헌에게 보여줍니다. 여태 칼집을 내고 있던 비엔나 소시지 중에 제일 길이가 긴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같이 놀러온 넷 중에서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성헌의 키는 큰 편입니다. 그래서 제일 길었던 소시지를 보여주며 장난기를 내보였습니다.
ㅤ“아기 문어 성헌.”
피노키오 이야기에 반문이 돌아오면 눈을 깜박거리기만 합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설명해주기에는 그 이야기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생들이 잠들기 전 읽어주던 것이니 그때 성헌도 같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 보름입니다.
ㅤ“코야 시간에 알려줄게.”
동생들 대하던 말투 그대로 말해버린 보름은, 이미 버릇으로 굳은 것이기에 의식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ㅤ“거짓말쟁이 코야?”
피노키오에서 빼빼로가 나오니, 기다란 빼빼로와 피노키오를 매듭 지으려다보니 생각난 것입니다. 거짓말을 많이 해서 길어져버린 피노키오의 코를 닮았을 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762 신발바닥은 현실에 붙어있는데 나머지가 조금 붕 떠있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름이가 이런 화법을 가진데는 동생들의 영향이 크지. 2살 어린 동생, 5살 어린 동생, 10살 어린 동생. 동생들의 향연에 어린 아이들 특유의 붕 떠 있는 대화를 꼬박꼬박 했다보니 @@ 보름이 본인도 동생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타고난 부분도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또다시 손이 올라온다. 먼젓번에는 양뺨을 잡히는 곤욕을 치렀음에도, 성헌은 보름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보름의 손이 이번에는 무엇을 하나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러다 보름의 손이 자기 머리를 도닥이자, 그는 물먹은 것 같은 푸른 눈으로 보름을 가만히 보다가 얼굴에 서툴고 자그만한 웃는 표정을 올려놓았다.
"뭐, 나머진 내가 만들라는 거ㅇ..." 눈앞에 갑자기 쑥 등장한 문어 비엔나에, 성헌의 반문이 나오다가 말았다. 아기 문어 성헌... "영문을 모르겠네." 하면서도, 성헌의 얼굴에는 보름이 내보인 장난기와 비슷한 기색의 웃음이 다시금 번졌다.
"그래? 기다려지네."
보름이 그런 단어들에 버릇이 된 만큼이나 성헌도 보름의 그런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성헌은 별 반감없이- 보름의 또다른 오누이라도 된 마냥 보름의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오늘 밤에도 거실에서 영화나 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여자 방에 들어갈 수야 없고, 거실에서 자면 또 거실에서 자는 대로, 베란다를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잠들 수 있는 그럭저럭 운치있는 잠자리일 테니까.
"요즘에 딱히 뭔가 거짓말한 기억은 없지만 말야."
나무로 된 코가 가늘고 길쭉하게 길어지는 모습에서 길다란 과자를 연상한 건 사실이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김에 마트에 가서 장도 좀 봐오고. 어제는 정말 당장 먹을 것밖에 못 샀잖아. 그래- 하진이가 수박 이야길 하던데 수박 한두 통 사오면 좋겠네."
서툴고 자그만한 웃음과, 장난기가 어린 듯한 웃음. 두 웃음을 본 보름은 두번이나 웃게 만들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스스했던 보름의 머리카락을 보고 웃은 것까지 세면 벌써 세번입니다. 제일 피우기 힘든 꽃이 무엇이냐고 하면 분명 웃음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름은 성헌에게 보여주었던 아기 문어를 내려놓았습니다.
ㅤ“달한테 일찍 일어나라고 해봐.”
달이 떠있는 시간이 잠을 청하는 시간이니, 달이 일찍 뜨면 뜰수록 성헌의 기다림이 짧아질 것입니다. 해가 떠있는 지금 달은 자고 있는 것이지요. 혹은 보름 자신을 그대로 달에 빗댄 것이기도 했습니다. 보름이라는 이름은 달을 떠올리기 너무나 쉬운 것이었고, 그 동생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면 누가 보아도 달이었으니까요.
ㅤ“응. 그래보여.”
거짓말한 기억이 없다는 성헌의 말에, 그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코와는 영 다른 모습인 당신의 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름의 손은 바게트를 어슷난 모양으로 썰고 있습니다.
"달도 잘 시간이 필요할 텐데 일찍 깨우면 미안하잖냐. 그리고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해야 되는 일들도 있고. 해가 떠있을 때 해야 되는 일들을 차근차근 하다 보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아침밥도 먹어야 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마무리해야 되고, 장도 봐야 되고, 바닷가에 제대로 놀러도 나가야지... 그 동안 모기 연막탄도 집에 좀 터뜨려 놓고... 나 저녁에 또 저녁 로드워크 나갈 건데 갔다오면서 불꽃놀이나 좀 사와볼까."
하면서 오늘 할 일을 차근차근 꼽아보던 성헌은, 문득 외로이 텅 빈 방에 쭈그려앉아서 하릴없이 경기 영상이나 복기하면서 외로움을 곱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성헌은 문득 세 소꿉친구를 향한 애정이 왈칵 치솟는 것을 힘겹게 억눌러야 했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기 좀 낯간지럽지만, 내 삶에서 좋은 부분들은 전부 다 너희들로 쓰여있어. 물론 낯간지러우므로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러니까 채근하지 않고 기다리려고. 너도 느긋하게 와도 돼."
이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허겁지겁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바보같이 흐물흐물한 웃음이 얼굴에 나와버릴 것 같아서, 성헌은 최대한 평소의 그 짓궂게 웃는 얼굴을 꾸며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행히 눈치좋게도 냄비에 담긴 것이 때맞춰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성헌은 보름이 만들어둔 아기문어들이 가득한 보울을 집어들었다.
"아기문어들은 목욕을 시키도록 하겠다."
냄비에 담겨 그럴싸하게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어느새 꽤 그럴싸한 수프 국물이 되어 있었다.
>>782 아니, 양 손으로 데려다주는 건 보름이랑 설이가 현관에 드러누웠을 때 이야기고, 거실에 네 명이 드러누웠을 땐 여자방에 말없이 들어가기 거시기해서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성헌이가 가장 먼저 일어났고 보름이가 뒤따라 일어났으니 거실에는 하진이랑 설이가 남아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