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때 전투가 생생히 떠오른다. 엄청나게 강했다. 사실 거기서 전멸했어도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
나는 팔짱을 끼며 진지한 자세로 그의 설명을 들었다. 칭찬 일색이다. 그는 에릭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잠깐 대화를 나눠본 바로는, 눈 앞의 사내는 그렇게 단순하고 얼빠진 인물상이 아니다. 요컨데 지금 저 감상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근거 없는 이야기 또한 아니라는 부분이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납득이 안가는거야. 그렇게 착한 녀석이 왜 미움 받을 짓을 하고 있는걸까.
"그럼 혹시, 그런 후배가 뭔가 자기가 나쁜놈으로 비춰질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면...이유가 뭘까요?"
Q : 이제 막 사귄 여자친구가 제 얼굴을 보더니 경직된 얼굴로 유리잔을 씹어요. 이거 무슨 신호인가요? A : 당신이 얼간이라는 신호입니다.
죽고 싶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손이 벌벌 떨린다. 온화해야 할 룸 카페가 어쩐지 서늘하다. 역시 괜한 폼을 잡는게 아니었다.....그녀의 무표정이 지금은 솔직히 무섭다. 결국 내 연약한 정신력은 한계를 맞이했다.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엉킨 분위기를 풀 수 있기를 바라며 머릿결을 적당히 손으로 흐트려 평소대로 되돌려놓고 느슨하게나마 착용중이던 넥타이를 자연스럽게 풀어서 근처에 벗었다. 결국 와이셔츠 차림에 평소랑 크게 다를바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좀 시무룩한 것 빼면. 다만 오히려 가시방석과도 같은 분위기에 아이처럼 울먹이지 않은 부분에서 나는 칭찬받고 싶다.
".......아, 음."
곧바로 본론을 따지듯 물어오는 그녀에게 잠깐 당황한다. 멋있는 멘트.....아니 됐다. 이미 그렇게 준비해서 실컷 망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서로 솔직하게 알아보고 싶다고 사귀기 시작한 관계다. 긴장해선 괜히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는게 오히려 더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든걸지도 모르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잘나간다고 기뻐해도, 역시 나는 이런 것에 참 서투르다. 어차피 그녀도 내가 서투른건 다 알고 있었을.....거다. 그러길 믿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사과하면서 설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말한대로 건네주고 싶은 물건도 있어."
이런 분위기에서 곰돌이 건을 설명했다간 그대로 차이는거 아닐까. 그런 불안도 솔직히 없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변명하거나 둘러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한 나는, 아. 하고 조금 민망해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내심 분위기가 이렇게 망가지기전에 품고 있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이다.
사과하면서 설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건네주고 싶은 물건도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보고 싶었다는 말만이 기쁘게 다가왔다. 나는, 이대로 앉아있으면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무릎을 끌어당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테이블을 빙 둘러 가는 대신, 과감히 테이블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원래대로 돌아온 남자친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포시 톡톡 두드렸다. 잘했어- 하고 칭찬하듯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테이블 위에 앉은 채로 진화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자연히 미끄러지듯 그의 옆자리로 내려앉으며, 그와 몸을 꼭 붙이고 나란히 앉아서, 우리가 사귀었던 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팔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를 비스듬히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제가 보기엔 중2병이거든요. 라고, 나는 신랄하게 덧붙였다. 악당은 그렇게 무른게 아니니까. 내가 영웅이 되고 싶다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인, 과거의 그 사고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비참하고, 끔찍해서, 지금도 나는 가끔 기숙사에서 구역질한다. 영웅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사상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그가 그렇게 상냥한 성격이라면.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참히 난도질 할 수 있을리가 없고, 그렇게 한다면 끔찍하게 후회하게 되겠지.
누군가가 상처입고 후회해야 만들어지는 영웅 같은건 절대로 납득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상처입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영웅이 되고자 하는 나에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
"과연, 이해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구나. 사실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면 의견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걸 말하기 위해선 하루의 자해까지 털어놓아야 한다. 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에게 충분히 고마웠으니까.
"그래도 아끼는 후배라면, 한번쯤은 대화를 나눠보세요. 요즘....힘들어 보이더라구요."
내가 아르바이트 하러 갔을 때, 사진 얘기를 꺼내자 그는 단박에 하루 팬클럽이냐고 반응했다. 그 말은 사진으로 인해 카페 평판이 떨어지거나 논란이 생기는데 나름대로 적잖이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겠지. 친한 선배가 달래주러 가면 그의 정신적 위안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나는 간단히 조언했다. 이걸로 본의 아니게 카페에 쳐들어가서 다툰 값은 조금 갚은거야, 에릭 점장. 남은 값은 사태가 다 해결되고 나서 아르바이트비로 갚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