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나중에 의뢰를 같이갈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까 도망친 고양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의념을 사용해 고양이들의 싸우고 싶다는 의지를 뺏는다. 투라는 속성을 다루니 이정도는 할 수 있다. 갑자기 싸울의지가 없어진 고양이들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다가 사라진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기계처럼 이야기했으나, 정말 꾸밈이나 거짓 없는 참마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진화가 내려놓은 음료를 냉큼 집어와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한 모금을 마셨다. 내 몫의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음료를 마신 나는 잔에서 입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앞니가 간질거려서 입에 댄 유리잔 테두리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틱, 팅.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인가 울렸다.
좌식으로 된 룸인지라 일단 다소곳이 무릎을 붙이고 앉긴 했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저려오는 느낌이다. 다리도, 몸도 평소 같지가 않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시야에 들어온 정보들을 차분히 정리해보자. 말끔한 검은색 정장 차림에 색스럽게 손질한 머리, 무언가가 포장된 상자, 그리고 커다란 방패. 내가 알던 그의 모습 중에서, 그대로인 것은 연홍색 눈동자와 상처 많은 방패뿐이다.
꽤나 긴장한 듯한 그의 태도에, 어째서 그가 이렇게나 꾸미고, 또 준비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가디언 넷 커뮤니티에 이것저것 물어봤겠지. 저번에 친구를 사귀는 방법 같은 걸 물어본 것처럼. 연애가 처음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리한 것은 갸륵하게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첫 데이트인데, 정장 차림에 머리도 손질하고 선물까지 준비한 모습이 약간 부담스럽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다. 가디언 넷... 끊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 줄이라고는 해봐야겠다. 이러다 연애하는 방법까지 아무한테나 물어보고 다닐지도 몰라. 지금처럼 멋진 모습이 싫다는 건 절대절대 아닌데, 나는 그냥 평소의 네 모습이 좋았단 말이야.
"그래서.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뭐야?"
나는, 여전히 유리잔에 입술을 붙인 채 겨우 그와 눈을 맞췄다. 아무래도 내가 분위기를 리드해야겠지 싶었는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고 싶었던 건데, 자꾸만 마음 같지 않게 말이 딱딱하게 나온다. 나, 화난 거 아니야. 정말.
아직도 그 때 전투가 생생히 떠오른다. 엄청나게 강했다. 사실 거기서 전멸했어도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
나는 팔짱을 끼며 진지한 자세로 그의 설명을 들었다. 칭찬 일색이다. 그는 에릭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잠깐 대화를 나눠본 바로는, 눈 앞의 사내는 그렇게 단순하고 얼빠진 인물상이 아니다. 요컨데 지금 저 감상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근거 없는 이야기 또한 아니라는 부분이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납득이 안가는거야. 그렇게 착한 녀석이 왜 미움 받을 짓을 하고 있는걸까.
"그럼 혹시, 그런 후배가 뭔가 자기가 나쁜놈으로 비춰질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면...이유가 뭘까요?"
Q : 이제 막 사귄 여자친구가 제 얼굴을 보더니 경직된 얼굴로 유리잔을 씹어요. 이거 무슨 신호인가요? A : 당신이 얼간이라는 신호입니다.
죽고 싶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손이 벌벌 떨린다. 온화해야 할 룸 카페가 어쩐지 서늘하다. 역시 괜한 폼을 잡는게 아니었다.....그녀의 무표정이 지금은 솔직히 무섭다. 결국 내 연약한 정신력은 한계를 맞이했다.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엉킨 분위기를 풀 수 있기를 바라며 머릿결을 적당히 손으로 흐트려 평소대로 되돌려놓고 느슨하게나마 착용중이던 넥타이를 자연스럽게 풀어서 근처에 벗었다. 결국 와이셔츠 차림에 평소랑 크게 다를바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좀 시무룩한 것 빼면. 다만 오히려 가시방석과도 같은 분위기에 아이처럼 울먹이지 않은 부분에서 나는 칭찬받고 싶다.
".......아, 음."
곧바로 본론을 따지듯 물어오는 그녀에게 잠깐 당황한다. 멋있는 멘트.....아니 됐다. 이미 그렇게 준비해서 실컷 망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서로 솔직하게 알아보고 싶다고 사귀기 시작한 관계다. 긴장해선 괜히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는게 오히려 더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든걸지도 모르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잘나간다고 기뻐해도, 역시 나는 이런 것에 참 서투르다. 어차피 그녀도 내가 서투른건 다 알고 있었을.....거다. 그러길 믿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사과하면서 설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말한대로 건네주고 싶은 물건도 있어."
이런 분위기에서 곰돌이 건을 설명했다간 그대로 차이는거 아닐까. 그런 불안도 솔직히 없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변명하거나 둘러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한 나는, 아. 하고 조금 민망해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내심 분위기가 이렇게 망가지기전에 품고 있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