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죽는다면 제 어린 시절의 꿈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싱싱한 녹색보단 노란색이 많이 섞인 부드러운 연두색의 무늬 없는 클로버가 가득 핀 언덕, 한 사람을 묻고 나서도 큰 언덕 하나와 작은 집이 올라있는 언덕 하나가 남아있는 작은 세상. 나의 천국. 그런 한 뼘의 땅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아픔도... 고생도... 아무도... 없는... 달콤한 비가 내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꾼 아프지 않은 꿈, 다섯 살의 꿈 속에...
죽음을 상정해본 적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느 한 사람은 문득 그렇게 말했더란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던 말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옷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할 달의 침묵 속에서.
3월. 이미 겨울은 다 지나갔다며 풀이 돋아난지도 한참 지난 완벽한 봄. 따뜻하진 않지만 겨울의 추위는 한결 씻겨나간 바람 속에 생명냄새가 섞여있었다. 무덤 앞에 선 사람을 보며 비아는 부드러운 풀과 달라붙지 않는 흙 속에 발소리를 살짝 감춰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추기를 택했다.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았고, 추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목에 맨 금속 줄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려, 안식처들이 많이 보이는 곳을 바라보다가 두 손 사이에 작은 은빛 십자가를 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다. 너무 큰 비극이었다. 죽음을 상정하고 있어도 견디기 힘들 만한 그런 일이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그렇다면 이 희극에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언제라도 여신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고통이란 걸 가진 인간의 잘못일 것이다. 침묵을 지새고, 침묵을 지새고, 읊조림이 끝났을 때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미련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엉켜있는 사람을 위한 곳이다. 바스락거릴 만큼 마른 잎이 없는 싱싱한 녹색들은 듣기 힘든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연기 없이 냄새만 남아 어른거리는 옅은 탄내와 차갑게 황홀하게 녹아가는 철냄새. 그 옆자리의 무덤 앞에 섰을 땐 그런 냄새가 나는듯했다. 무얼, 아마 유령은 아닐 것이다. 죽은 사람은 멈춰있기에, 그 바람도 더는 불지 않으니까.
" 잘 지냈어요? "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
당신이 저 세상에서 듣고 있을라 꾸며내기 힘든 미소를 만드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좋은 친구, 당신이 나 걱정할까 봐 나는 걱정을 해요. 비아는 꽃을 여러 색 모아 묶고 종이로 감싸 자홍색 스피넬을 붙인 꽃다발을 앞에 내려놓고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추모하러 온 사람은 다르지만, 추모하러 온 것은 같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