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라, 화 안내나? 돈 달라고 안하나? 아냐, 방심하지마 진화야! 웃는 얼굴로 괴롭히는 사람은 이미 많았다. 긴장을 놓기엔 이르다. 나는 아직 심문 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힐끔 힐끔 소년을 경계하면서 본다. 누군가 말하길 이러는 나는 움츠린 병아리 같다던데. 그건 칭찬일까 욕일까.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으음....소년의 미소는 그래도 공격성이 없어보였다. 날 위협할 생각은 아닌가보다. 그 이전에, 의심한게 미안해질 정도로 착한애처럼 보였다. 이런 애를 불량배로 오해하다니......일단 지금이라도 경계를 줄이고, 나도 애써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아냐, 여유가 있어보여서 참 멋졌어. 계속 쳐다본건 미안.....실은 조금 피곤한 상태여서, 멍했거든..."
잘 차려입은 소년의 옆에 앉아있는 나는, 머리는 부스스하고 운동복은 흙투성이. 어깨는 축 처지고 표정은 피로. 응. 비교가 안된다.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 나름대로는 억울하다. 허선생에게 쉴 새 없이 두드려 맞다보면 체면과 격식을 차릴 순 없게 되는 법이다. 무기는 자존심보다 가까웠다.
아직, 방심하기엔 이르다. 이런 타입을 수록 방어는 더욱 견고한 법. 수비는 억지로 내리려고 하면 더욱 견고해진다. 스스로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고로, 그가 하는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피곤한 상태면 그럴 수 있죠. 저도 피곤할 땐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서 한숨 쉬고 그러는 걸요." 그렇게 말을 하다가
"하하, 저는 지금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여유로워 보이는 거 뿐이에요. 오히려, 그쪽은 피곤할 때까지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 편이 더 멋진 거예요."
라며 칭찬의 말도 한 마디.
슬쩍... 그의 몸 상태를 관찰해본다. 부스스한 머리와 운동복 차림. 시내에 나온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태. 흠, 어디서 운동하고 왔나본데? 하지만 저렇게 흙이 묻어있고... 땀 흘린 자국까지 있어. 격렬한 운동?
춘심이는, 몸에 열이 쌓인 이유에 대해서 답하지도, 순간 목소리가 나올 뻔했다는 그의 말에 장난스레 대꾸하지도 못했다. 머리카락을 사이에 두고서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는 동시에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고, 무의식적으로 주둥이에 힘이 들어간 탓에 그의 팔을 세게 깨물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떼고서 그의 팔을 찰싹찰싹 두드린다.
"하, 하지 마...! 나. 땀 나서... 아니, 아침에 머리 감았는데, 일하느라..."
목소리가 격정적이거나 말을 빠르게 쏟아놓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굉장히 당황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춘심이 부끄러운 것은 열띤 체취 탓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소년은 엉망인 꼴에 실례까지 한 나를 인정해주긴 커녕, 오히려 역으로 칭찬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착해야 저럴 수 있는걸까? 소년이 너무 눈부셔서 차마 직접 바라보지 못할 것만 같다. 이렇게 천사 같은 후배를 요 근래 한명 만났는데. 이럴 수가. 나는 결국 죽어버린걸까? 여기는 혹시 천국 같은걸까?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천사를 둘이나 만나다니. 도대체 무슨 운명인가.
"지....진짜? 바, 방금 만났는데....? 내가 사라는게 아니, 라....?"
그러나 천사는 내 안일한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음료수를 사준....다고...? 내가 사라는게 아니고....? 눈이 팽팽 돈다. 이런 순수한 호의를 받게 되다니, 감격스럽다. 마음만 같아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 응!' 하고 싶다. 그렇지만 딱봐도 후배처럼 보이는 이 소년에게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받아먹자니 가슴이 너무 찔린다. 소년은 혹시 랜서인걸까. 내 양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그러나 허선생을 통해 자존심보다 체력이 우선이란걸 배워버린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사주면, 응, 기쁘지이....."
.....아냐 아냐 아냐! 역시 그냥 맨입으로 얻어먹는건 아니야! 천사의 호의를 그렇게 등쳐먹었다간, 분명 벼락맞는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곤 내 나름대로의 의지 표명을 했다.
잘 생각해보면, 답은 나온다. 서포터 중에서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없다. 있을..수야 있긴 한데, 서포터가 아닐 것 같은? 그런 직감. 그렇다면 답은 랜스 혹은 워리어인데... 난 워리어 라는 쪽에 한 표. 내가 알고 있는 랜스나 서포터는 있어도 워리어는 별로 없으니, 워리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 나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 이렇게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다는 계략. 쿠하하하하!!
"사양하실 거 없어요. 방금까지 운동하다 오신 것 같은데, 땀 흘리고 난 뒤엔 수분을 섭취해야 하는 법이에요. 약간의.. 나트륨도."
벤치에서 일어나 방금 자신이 나온 카페를 가리켰다.
"음~ 그러면... 저는 보는 걸 참 좋아해요. 사람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구도를 익히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서, 나중에 저랑 의뢰라도 한 번 같이 가는 건 어때요? 저는 그걸로 족해요~"
이런 캐릭터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상상하는 것이 '재미' 란 말이지...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발휘해 맞서 싸울 것인가... 유약한 성격일 수록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법이다. 마음이 여릴 수록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한 번 보고 싶군... 키히히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답했다. 운동을 눈치챘단건 내 추레한 몰골을 보았단거겠지. 보기에 난폭한 성정이 아니고, 관찰력이 뛰어난걸 보니....아마도 서포터일까? 헉.
나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청천이도 서포터다. 청천이는 신이다. 눈 앞에 이 애도 서포터(추정)이다. 그리고 신(추정)이다. 서포터를 하기 위해선 훌륭한 인격과 성실함, 그리고 상냥함이 기본 덕목인걸까? 앞으로 서포터를 보면 정말 잘해줘야겠다. 훌륭한 포지션이다. 만약 내 추론에 신빙성이 있다면....나는 이 뒤에 의뢰 권유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 같은거 일반적이라면 절대 없겠지만, 신들은 기적을 일으킨다.
"헉......"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이럴수가. 내게 두명에게나 의뢰를 같이 가자는 소리를 듣다니. 광장 벤치만 아니었어도 팔짝 팔짝 뛰면서 환호하고 감격에 울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진정해라. 이미 많이 꼴사나운데 알아서 더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다.
"응, 응, 응! 얼마든지!!"
깎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럼 자기소개랑, 서로의 의념과 의념기 등을 간단히 보여줄까? 아, 원하지 않는다면 나만 보여줘도 상관 없어! 호, 혹시 이것도 괜한 제안이었으면 무시해도 되구! 관찰을 좋아한다길래 혹시나..."
허선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구나... 허수아비.. 나는 실전주의라 허수아비 상대는 거의 안 했는데.. 나도 언제 함 허수아비랑 놀아볼까... 이래저래 할 게 많아서 허수아비와는 놀지 않아 허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방 이해해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흠, 이래저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있는 그. 그리고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신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기뻐하시네요? 하하... 그러면~ 나중에 가고 싶은 의뢰가 생겼을 때 불러주세요. 정석적인 조합은 1워리어, 1랜스, 1서포터니까... 저 말고 다른 서포터가 있다면~~~ 그 분이랑 가셔도 돼요. 나중에 어땠는지만 알려주시면 되니까."
엄맛... 자기소개랑 의념이랑 의념기까지? 이 사람.. 망념 괜찮은가? 잠깐 고민은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
"자기소개만 하죠~ 괜찮다면 의념도? 하지만, 의념기는! 게이트에서 보고 싶어요. 그 편이 좀 더... 멋지니까. 두근거린다? 그 말이 맞겠네요. 음~ 먼저 제 소개부터 하자면! 저는 제노시아 1학년 이 화현이라고 합니다. 서포터예요. 의념은~ 회화. 미술계를 생각하면 편해요."
"아, 아! 미안해, 이상한 별명으로 불러서. 실은 요즘 계속 상대하는데, 생각보다 엄청 세더라구....조언도 딱딱 해주고. 그래서 내안에선 나름대로 감사를 느끼고 있어서 지은 별명이야. 혹시 관련 소문 들었어? 의념기를 3번 쓰면 성장한다는거."
거기에 도전하고 있어. 라고 나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처음에 형편없이 두드려 맞고 뻗었던 것과는 달리, 요 근래에는 비교적 잘 대응하게 된 것이 느껴진다. 내 실력도 아마 조금은 올랐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허선생.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수아비일 뿐, 실전에서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아, 응...그치만 너랑도 꼭 같이 가보고 싶네. 은혜를 갚고 싶어!"
음료수 한캔의 은혜는 크다. 단순히 음료수 한캔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호의의 값이 크다고 해야겠지. 나는 눈 앞의 이 소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순하고 선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소중히 여기자.
"아차, 미안해. 아까 말한대로 그 소문에 도전하느라 의념기를 쓰는데 익숙해졌나봐."
하긴 청천이가 착했던거지, 생각해보면 의념기는 망념을 장난아니게 올린다. 보여주고 싶다고 휙휙 보여줄게 아니란 것이다. ....여기서 이미 나의 교류 관계 짧음과 몰상식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와아 부끄러워. 죽고 싶다.
"응. 나는 유 진화.........성 아프락시아 2학년이야."
자기소개를 받아 이름을 말하고, 학교 이름을 말하려다 잠깐 멈칫 했다. 그래. 나는 이제 청월 고교가 아니다. 어쩐지 입안에서 쓰게 남는 울림을 굴리면서, 뒤이어 의념도 같이 소개했다.
조금은 좀 더 당당해져도 될텐데... 어쨌든,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감사를 느끼고 있다며 붙인 별명이 선생님. 그거, 감사가 아니라 존경.. 아닐까? "아, 그 소문 들었어요. 하지만, 망념 장난 아닐텐데..." 소문을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감상이 들지만, 그래도 그런 소문이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거나 의욕을 불태울 원동력이 되어 준다면 꽤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법 정열적으로 나서는 그에게 킥킥 웃으며 "일단 시험준비부터 해요. 곧 시험이잖아요?" 라며 그의 열정에 약간의 찬물을 끼얹어준다. 내가 분석한 캐릭터 성격이.. 대충 맞는 거 같네? 그냥 넘어갈법한 일도 이렇게 나서는 거 보면 말이야. 흠흠, 기대가 아주 커. 이윽고, 그가 자신을 소개하자 "저보다 선배시네요?" 라며 반응을 해주고는 뒤이어 오는 그의 의념에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며 그 단어의 되새긴다. 영웅.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과 내가 생각하는 영웅은 다르겠지. 모두를 집결시키고 하나로 모아주는 존재. 인자한 성품, 강함, 카리스마, 등등의 다양한 요소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존재. 혹은... 공포, 두려움, 경외와 같은 감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고는 "아, 죄송해요." 라며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비웃은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냥~~ 조금 기대했을 뿐이에요.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 예고편의 커밍순~ 같은 그런 거."
망념 얘기는 죽은눈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여기에 쏟을 망념으로 공부를 했다면, 2/3 정도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창 바쁠 시험기간에 이렇게 미련한 소문에 매달리면서 허수아비를 선생으로 부르며 상대하는건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어지간한 멍청이였다. 다만 뭔가 잡힐듯 말듯, 알듯, 말듯, 하는 그 감각이 내게 공부로의 전환을 쉽사리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윽. 그렇지....공부는 잘 안했는데, 역시 조금은 봐야겠지....너는 많이 해뒀어?"
시원하게 끼얹어진 찬물에 어깨를 떨어트렸다. 위에 말한 현실은 아주 외면하고 있던건 아니지만, 남에게 찔리면 아픈 법이다. 역시 서포터가 아니라 랜서인거 아닐까. 어쩐지 화술에 능한 아이다.
"사실 아직 막 정확한 응용법이라던가 특수능력이라던가는 잘 모르고.....그냥 노력하면 힘이 나는? 그,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너무 거창한 인물이랑 비교해서 부담스러워진 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홍왕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갔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조차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의념일 뿐이다.
"기, 기대....라.....나는 그렇게 특별하거나 화려한 것은 못해. 그런건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게 낫지 않을까....."
붉어진 얼굴로 손가라을 꼼질꼼질 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대를 실망시키는건 무서운 일이다. 나에게 화려하고 멋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멋진 공격 성능도, 날렵함도 없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런걸 기대해도 곤란하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미리 전해두도록 하자. 내가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나는 그냥."
미소짓는 화현을 덤덤히 마주본다. 어색함도, 부끄러움도, 수줍음도, 주눅감도, 눈치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 이건 당연하면서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철칙.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의념. 웃던, 조롱하던, 신뢰하지 않던, 아무래도 좋다. 이것만은 그 누구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리 할 것이고, 그렇기에 아무 감정 없이 선언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