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혼이 나간 체로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어. 청월고교에서 도망쳐 성 아프락시아로 전학한 나는 지금, 한창 수련장 허수아비와의 대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허선생이었다. 의념기 세번 쓰면 성장한다던가 무성한 소문은 사실 먹이를 낚기 위한 그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배고프다."
벤치에 앉아 쪼그려 앉은체 고개를 떨궜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실력도 없는 나는, 음료수에서 가장 열량 높은 음료를 뽑아 아껴서 홀짝거리는 수 밖에 없는거야. 얼마전 비아랑 레스토랑에 갔을 때 지불한 값이 아팠다. 열등생은 괴로운 법이다. 꼬르륵 소리가 울리지만 무시했다. 이 음료수를 마시면 다시 수련장에 가서 허선생님과 대련해야 된다. 아껴 마시자.
"..........."
내 시선은 자연스레 카페에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던 아이에게 멍하니 향했다. 와. 여유있다. 그림이 된다. 저런게 흔히들 말하는 '인기 있는 사람' 같은걸까. 벤치에 앉아 주접이나 떠는 내 모습과 비교하니, 어쩐지 울적해졌다.
".....부럽다...."
학교 생활도 분명 잘하겠지. 친구도 많을거고. 의뢰도 잘 갈거고. 돈도 많을거고.......허수아비에게 5분동안 두드려 맞지도 않을거다.
춘심이는 종일 작은 공방에 틀어박혀 뜨거운 화로 앞에서 쇳덩이를 때리고 날붙이를 벼리니까. 머뭇거리는 목소리엔 앞말이 꽤나 생략됐다.
몸짓이나 행동이 나른한 춘심이에겐 느리게 걷는 일이 꽤나 편안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목에 둘러진 팔의 압박감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는 춘심이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춘심이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이건 간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똑같이 되읊었다. 여전히 느리게 걸으면서, 두 손을 들어 턱 밑에 있는 지훈의 팔을 가만히 받쳐 올린다. 그리고 입을 약간 벌리고 고개를 숙여 그의 살갗에 가볍게 이를 가져다 댄다. 마치 옥수수를 들고 한입 베어 무는 것처럼.
가디언 칩을 만지작거리며 더는 동전 소리를 듣기 싫어졌는지 동전 소리 재생을 끄고 툭툭 메신저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무려!! 찬후 선배에게 온 게 끝. 그마저도 내가 먼저 보낸 거. 이래서~~ 친구 많은 사람이란~ 바쁜 법이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료를 쭈욱 빨아마시고는 기지개를 켠다. 계속 시선이 느껴지지만 애써 무시.. 무시... 하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
음... 벤치에 앉아있네. 머리카락이 꽤 길지만... 환쟁이의 눈은 속일 수 없어 크크크.. 그보다, 왜 계속 바라보지..? 시선을 거두고 가디언 칩으로 퓨어퓨어보이스나 볼까... 싶지만 계속 신경쓰인다.. 음~! 할 수 없이 쟁반을 들고 컵과 쟁반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카페 바깥으로 나와 벤치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리고 그에게
아련한 눈매로 소년을 계속 본다. 가디언 칩을 만지작 거리던 소년은 나와 달리 시원스레 음료를 다 마시곤, 느긋하게 기지개까지 피고 있었다. 와. 정말 행복해보여. 달디단 음료를 한모금 더 홀짝인다. 씁쓸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달달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면 내가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긴 마실걸 다 마셨으니 더 앉아있을 이유는 없겠지. 이후엔 어디에 가려나.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쳐갈 생각이보다.
뭔가 시선이 날 보고 있는것만 같다. 착각이겠지.
이상하다 왜 이 벤치로 오는 것 같지? 앉으려고 그러나?
.......
"히에에에에에엑.....!!!"
나는 화들짝 놀라선 비명을 질렀다. 눈, 눈치 채였어!? 큰일났다. '날 봤으니 관람료를 내.' 라던가 말하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줄 수 밖에 없어...!! 그럼 다음 도전 이후엔 에너지 드링크 한캔도 못마시는 처지가 된다. 이럴 수가. 멋져보이는 소년을 바라본 대가는 비싸닷...!! 여기서 어설프게 변명을 했다간, 소년이 친구를 불러 '야, 너가 내 친구에게 직접거렸냐?' 같은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 이제 내 운명은 더더욱 고달파질 것이다. 우우....최대한 용서를 빌자. 어깨를 움츠리곤,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 미, 미안해! 굉장히 멋있게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그만. 나도 그 카페는 가본적 있어서, 조, 좋아했거든."
앞에가 꽤나 생략된 말에, 지훈은 굳이 이유를 물었지. 춘심이가 하는 일이 대강 뭔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유를 직접 입으로 듣길 원해서였나.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느껴지는 자극이라던가, 편한 팔의 위치라던가... 잠시 후, 춘심이 혼자 읊조리자 고개를 갸웃거렸으려나.
" 그게 왜ㅡ "
뭔가를 물어보려는 순간 팔에 낯선, 어쩌면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살짝 느껴지는 통증.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 역시 친애의 표시로 이따금씩 비슷한 것을 했으니. 오히려 빠르게 진정하고는 살짝 가라앉은 기색을 내비쳤다.
" ...순간 목소리가 나올 뻔 했잖아. "
"경고도 없이 물다니, 짓궂기는." 살짝 투덜거리듯, 하지만 어딘가 짓궂은 구석이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 위에 입술을 살짝 갖다대더니, "더 세게 물면, 나도 장난칠 거다?" 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물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라기보단... 자신도 똑같이 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에 가까웠으려나.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나처럼 힘 없고 연약한 서포터가... 사람을 패는 것처럼 보이나...? 어째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제 미간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내 그가 하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경청... 하다가 그만 한숨을 팍 내쉬고 말았다. 호탕하거나 이상하거나 귀찮음이 많거나..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꽤 많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대놓고 소심한 사람은 처음이다. 아니, 뭐... 소심한 게 나쁜 건 아니지... 캐릭터 파악이 힘들어서 그렇지만. 어디보자.. 곰곰... 이런 캐릭터의 성격은.. 보통... 정에 약하다. 거절을 잘 못한다. 남들은 사소한 일이라며 넘어갈 일에 신경을 많이 써서 사려심이 깊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안 좋은 경우에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기에 뒤끝이 있다. 흠, 그러면...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으음~!! 신음을 흘리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답을 내렸는지 생긋 웃으며
"그래요? 우연히 들린 카페인데 꽤 좋은 카페였네요.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적당히 사람 좋아보이는 모습으로 코스프레를 하자!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은은한 웃음. 약간의 미소로 나는 즐겁다. 하는 것을 살짝 어필하며 벤치에 앉는다.
"제가 멋지다는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실례라구요."
어, 어라, 화 안내나? 돈 달라고 안하나? 아냐, 방심하지마 진화야! 웃는 얼굴로 괴롭히는 사람은 이미 많았다. 긴장을 놓기엔 이르다. 나는 아직 심문 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힐끔 힐끔 소년을 경계하면서 본다. 누군가 말하길 이러는 나는 움츠린 병아리 같다던데. 그건 칭찬일까 욕일까.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으음....소년의 미소는 그래도 공격성이 없어보였다. 날 위협할 생각은 아닌가보다. 그 이전에, 의심한게 미안해질 정도로 착한애처럼 보였다. 이런 애를 불량배로 오해하다니......일단 지금이라도 경계를 줄이고, 나도 애써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아냐, 여유가 있어보여서 참 멋졌어. 계속 쳐다본건 미안.....실은 조금 피곤한 상태여서, 멍했거든..."
잘 차려입은 소년의 옆에 앉아있는 나는, 머리는 부스스하고 운동복은 흙투성이. 어깨는 축 처지고 표정은 피로. 응. 비교가 안된다.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 나름대로는 억울하다. 허선생에게 쉴 새 없이 두드려 맞다보면 체면과 격식을 차릴 순 없게 되는 법이다. 무기는 자존심보다 가까웠다.
아직, 방심하기엔 이르다. 이런 타입을 수록 방어는 더욱 견고한 법. 수비는 억지로 내리려고 하면 더욱 견고해진다. 스스로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고로, 그가 하는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피곤한 상태면 그럴 수 있죠. 저도 피곤할 땐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서 한숨 쉬고 그러는 걸요." 그렇게 말을 하다가
"하하, 저는 지금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여유로워 보이는 거 뿐이에요. 오히려, 그쪽은 피곤할 때까지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 편이 더 멋진 거예요."
라며 칭찬의 말도 한 마디.
슬쩍... 그의 몸 상태를 관찰해본다. 부스스한 머리와 운동복 차림. 시내에 나온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태. 흠, 어디서 운동하고 왔나본데? 하지만 저렇게 흙이 묻어있고... 땀 흘린 자국까지 있어. 격렬한 운동?
춘심이는, 몸에 열이 쌓인 이유에 대해서 답하지도, 순간 목소리가 나올 뻔했다는 그의 말에 장난스레 대꾸하지도 못했다. 머리카락을 사이에 두고서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는 동시에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고, 무의식적으로 주둥이에 힘이 들어간 탓에 그의 팔을 세게 깨물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떼고서 그의 팔을 찰싹찰싹 두드린다.
"하, 하지 마...! 나. 땀 나서... 아니, 아침에 머리 감았는데, 일하느라..."
목소리가 격정적이거나 말을 빠르게 쏟아놓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굉장히 당황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춘심이 부끄러운 것은 열띤 체취 탓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소년은 엉망인 꼴에 실례까지 한 나를 인정해주긴 커녕, 오히려 역으로 칭찬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착해야 저럴 수 있는걸까? 소년이 너무 눈부셔서 차마 직접 바라보지 못할 것만 같다. 이렇게 천사 같은 후배를 요 근래 한명 만났는데. 이럴 수가. 나는 결국 죽어버린걸까? 여기는 혹시 천국 같은걸까?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천사를 둘이나 만나다니. 도대체 무슨 운명인가.
"지....진짜? 바, 방금 만났는데....? 내가 사라는게 아니, 라....?"
그러나 천사는 내 안일한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음료수를 사준....다고...? 내가 사라는게 아니고....? 눈이 팽팽 돈다. 이런 순수한 호의를 받게 되다니, 감격스럽다. 마음만 같아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 응!' 하고 싶다. 그렇지만 딱봐도 후배처럼 보이는 이 소년에게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받아먹자니 가슴이 너무 찔린다. 소년은 혹시 랜서인걸까. 내 양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그러나 허선생을 통해 자존심보다 체력이 우선이란걸 배워버린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사주면, 응, 기쁘지이....."
.....아냐 아냐 아냐! 역시 그냥 맨입으로 얻어먹는건 아니야! 천사의 호의를 그렇게 등쳐먹었다간, 분명 벼락맞는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곤 내 나름대로의 의지 표명을 했다.
잘 생각해보면, 답은 나온다. 서포터 중에서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없다. 있을..수야 있긴 한데, 서포터가 아닐 것 같은? 그런 직감. 그렇다면 답은 랜스 혹은 워리어인데... 난 워리어 라는 쪽에 한 표. 내가 알고 있는 랜스나 서포터는 있어도 워리어는 별로 없으니, 워리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 나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 이렇게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다는 계략. 쿠하하하하!!
"사양하실 거 없어요. 방금까지 운동하다 오신 것 같은데, 땀 흘리고 난 뒤엔 수분을 섭취해야 하는 법이에요. 약간의.. 나트륨도."
벤치에서 일어나 방금 자신이 나온 카페를 가리켰다.
"음~ 그러면... 저는 보는 걸 참 좋아해요. 사람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구도를 익히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서, 나중에 저랑 의뢰라도 한 번 같이 가는 건 어때요? 저는 그걸로 족해요~"
이런 캐릭터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상상하는 것이 '재미' 란 말이지...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발휘해 맞서 싸울 것인가... 유약한 성격일 수록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법이다. 마음이 여릴 수록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한 번 보고 싶군... 키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