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꼼지락 거린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답했다. 운동을 눈치챘단건 내 추레한 몰골을 보았단거겠지. 보기에 난폭한 성정이 아니고, 관찰력이 뛰어난걸 보니....아마도 서포터일까? 헉.
나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청천이도 서포터다. 청천이는 신이다. 눈 앞에 이 애도 서포터(추정)이다. 그리고 신(추정)이다. 서포터를 하기 위해선 훌륭한 인격과 성실함, 그리고 상냥함이 기본 덕목인걸까? 앞으로 서포터를 보면 정말 잘해줘야겠다. 훌륭한 포지션이다. 만약 내 추론에 신빙성이 있다면....나는 이 뒤에 의뢰 권유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 같은거 일반적이라면 절대 없겠지만, 신들은 기적을 일으킨다.
"헉......"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이럴수가. 내게 두명에게나 의뢰를 같이 가자는 소리를 듣다니. 광장 벤치만 아니었어도 팔짝 팔짝 뛰면서 환호하고 감격에 울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진정해라. 이미 많이 꼴사나운데 알아서 더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다.
"응, 응, 응! 얼마든지!!"
깎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럼 자기소개랑, 서로의 의념과 의념기 등을 간단히 보여줄까? 아, 원하지 않는다면 나만 보여줘도 상관 없어! 호, 혹시 이것도 괜한 제안이었으면 무시해도 되구! 관찰을 좋아한다길래 혹시나..."
허선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구나... 허수아비.. 나는 실전주의라 허수아비 상대는 거의 안 했는데.. 나도 언제 함 허수아비랑 놀아볼까... 이래저래 할 게 많아서 허수아비와는 놀지 않아 허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방 이해해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흠, 이래저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있는 그. 그리고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신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기뻐하시네요? 하하... 그러면~ 나중에 가고 싶은 의뢰가 생겼을 때 불러주세요. 정석적인 조합은 1워리어, 1랜스, 1서포터니까... 저 말고 다른 서포터가 있다면~~~ 그 분이랑 가셔도 돼요. 나중에 어땠는지만 알려주시면 되니까."
엄맛... 자기소개랑 의념이랑 의념기까지? 이 사람.. 망념 괜찮은가? 잠깐 고민은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
"자기소개만 하죠~ 괜찮다면 의념도? 하지만, 의념기는! 게이트에서 보고 싶어요. 그 편이 좀 더... 멋지니까. 두근거린다? 그 말이 맞겠네요. 음~ 먼저 제 소개부터 하자면! 저는 제노시아 1학년 이 화현이라고 합니다. 서포터예요. 의념은~ 회화. 미술계를 생각하면 편해요."
"아, 아! 미안해, 이상한 별명으로 불러서. 실은 요즘 계속 상대하는데, 생각보다 엄청 세더라구....조언도 딱딱 해주고. 그래서 내안에선 나름대로 감사를 느끼고 있어서 지은 별명이야. 혹시 관련 소문 들었어? 의념기를 3번 쓰면 성장한다는거."
거기에 도전하고 있어. 라고 나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처음에 형편없이 두드려 맞고 뻗었던 것과는 달리, 요 근래에는 비교적 잘 대응하게 된 것이 느껴진다. 내 실력도 아마 조금은 올랐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허선생.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수아비일 뿐, 실전에서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아, 응...그치만 너랑도 꼭 같이 가보고 싶네. 은혜를 갚고 싶어!"
음료수 한캔의 은혜는 크다. 단순히 음료수 한캔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호의의 값이 크다고 해야겠지. 나는 눈 앞의 이 소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순하고 선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소중히 여기자.
"아차, 미안해. 아까 말한대로 그 소문에 도전하느라 의념기를 쓰는데 익숙해졌나봐."
하긴 청천이가 착했던거지, 생각해보면 의념기는 망념을 장난아니게 올린다. 보여주고 싶다고 휙휙 보여줄게 아니란 것이다. ....여기서 이미 나의 교류 관계 짧음과 몰상식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와아 부끄러워. 죽고 싶다.
"응. 나는 유 진화.........성 아프락시아 2학년이야."
자기소개를 받아 이름을 말하고, 학교 이름을 말하려다 잠깐 멈칫 했다. 그래. 나는 이제 청월 고교가 아니다. 어쩐지 입안에서 쓰게 남는 울림을 굴리면서, 뒤이어 의념도 같이 소개했다.
조금은 좀 더 당당해져도 될텐데... 어쨌든,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감사를 느끼고 있다며 붙인 별명이 선생님. 그거, 감사가 아니라 존경.. 아닐까? "아, 그 소문 들었어요. 하지만, 망념 장난 아닐텐데..." 소문을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감상이 들지만, 그래도 그런 소문이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거나 의욕을 불태울 원동력이 되어 준다면 꽤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법 정열적으로 나서는 그에게 킥킥 웃으며 "일단 시험준비부터 해요. 곧 시험이잖아요?" 라며 그의 열정에 약간의 찬물을 끼얹어준다. 내가 분석한 캐릭터 성격이.. 대충 맞는 거 같네? 그냥 넘어갈법한 일도 이렇게 나서는 거 보면 말이야. 흠흠, 기대가 아주 커. 이윽고, 그가 자신을 소개하자 "저보다 선배시네요?" 라며 반응을 해주고는 뒤이어 오는 그의 의념에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며 그 단어의 되새긴다. 영웅.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과 내가 생각하는 영웅은 다르겠지. 모두를 집결시키고 하나로 모아주는 존재. 인자한 성품, 강함, 카리스마, 등등의 다양한 요소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존재. 혹은... 공포, 두려움, 경외와 같은 감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고는 "아, 죄송해요." 라며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비웃은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냥~~ 조금 기대했을 뿐이에요.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 예고편의 커밍순~ 같은 그런 거."
망념 얘기는 죽은눈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여기에 쏟을 망념으로 공부를 했다면, 2/3 정도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창 바쁠 시험기간에 이렇게 미련한 소문에 매달리면서 허수아비를 선생으로 부르며 상대하는건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어지간한 멍청이였다. 다만 뭔가 잡힐듯 말듯, 알듯, 말듯, 하는 그 감각이 내게 공부로의 전환을 쉽사리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윽. 그렇지....공부는 잘 안했는데, 역시 조금은 봐야겠지....너는 많이 해뒀어?"
시원하게 끼얹어진 찬물에 어깨를 떨어트렸다. 위에 말한 현실은 아주 외면하고 있던건 아니지만, 남에게 찔리면 아픈 법이다. 역시 서포터가 아니라 랜서인거 아닐까. 어쩐지 화술에 능한 아이다.
"사실 아직 막 정확한 응용법이라던가 특수능력이라던가는 잘 모르고.....그냥 노력하면 힘이 나는? 그,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너무 거창한 인물이랑 비교해서 부담스러워진 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홍왕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갔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조차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의념일 뿐이다.
"기, 기대....라.....나는 그렇게 특별하거나 화려한 것은 못해. 그런건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게 낫지 않을까....."
붉어진 얼굴로 손가라을 꼼질꼼질 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대를 실망시키는건 무서운 일이다. 나에게 화려하고 멋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멋진 공격 성능도, 날렵함도 없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런걸 기대해도 곤란하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미리 전해두도록 하자. 내가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나는 그냥."
미소짓는 화현을 덤덤히 마주본다. 어색함도, 부끄러움도, 수줍음도, 주눅감도, 눈치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 이건 당연하면서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철칙.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의념. 웃던, 조롱하던, 신뢰하지 않던, 아무래도 좋다. 이것만은 그 누구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리 할 것이고, 그렇기에 아무 감정 없이 선언 한다.
머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닿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더구나 얼굴을 파묻듯이 더욱 끌어안아지며 그가 장난스레 중얼거릴 때마다 머리칼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드는 따듯한 날숨이, 가뜩이나 자신의 열띤 체취가 신경 쓰이던 춘심의 당혹감을 키워놓았다.
"아...!"
크게 당황해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을 때에도 목소리가 나긋하고 나른하기만 하던 춘심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다급하게 그의 팔을 끌어내리려 해보지만, 그가 그다지 강하게 끌어안지 않았음에도, 몸에 힘이 빠져버린 춘심은 무력감을 느끼고 곧 저항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냄새... 맡지 마."
춘심이는 밀려드는 수치심에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바르르- 떤다. 지훈이 말하는 장난은 이런 게 아니었겠지만, 방금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상황이었다면 지금과는 반응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덧붙이자면, 그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을 체취를 맡아지는 것에 부끄러움과 조바심을 느끼는 춘심이었다. 심지어 아직 향긋한 샴푸 냄새도 진하게 남아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