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렇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사라진다' 라면 성장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지켜보는 경지가 되는거 아닐까? 특수한 공격이 아닌 이상 전부 흘러나가버리도록. 접촉도 할 수 없고."
멋진걸 봐서일까, 조금 신나선 나름대로의 추론을 내놓았다. '사라지게 한다' 의 극의라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는 것.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공격해도, 아무것도 없을 뿐....그렇게 생각하면 무시무시한데. 청천이의 성장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건 나의 괜한 참견일까?
"이 갑옷? 응, 아마 그럴거야. 일단....효과는 방어력이 '크게' 올라. 그게 전부야."
자신의 손을 들어 갑옷을 가볍게 두드린다. 텅, 텅, 하는 금속의 울림이 공원에 퍼진다. 내 의념기로 만들어진 이 갑옷의 정체에 대해선 솔직히 나도 정확하지 않으나, 확실한건 갑옷은 확실한 실체를 가지고 굉장한 방어력을 나에게 제공했다. 설명중에 '크게' 라는 표현이 적혀있는 의념기 자체가 많지 않은 만큼, 다른 부가 효과가 일절 없는 만큼, 적어도 갑옷을 걸친 나는 그것만큼은 뛰어났다. 사실 그러지 않으면 곤란해.
"그게....응. 그만큼 무거운건지, 아니면 효과 자체가 그런식인지. 내 신체는 A....인데. 그래도 착용중엔 신속이 감소해. B에서 한단계 내려가니까 C가 될까."
생각해보니 신속에 자신이 있는 청천이와는 그런 부분도 정 반대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래서 빠른 신속으로 포지션을 잡을 수 있는 청천이와는 반대야. 자세를 잡고 막는데 집중하면 나보다 격상인 상대의 공격도 받아낼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기동성은 좋지 않네."
"그렇다면 혹시 상대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을까? 사실 오히려 그 쪽이 청천이가 생각하는 '괴도' 와 어울릴지도 몰라. 자신의 요소를 지우는게 아니라, 상대의 요소를 훔치거나 없애버리는 것..."
그렇게 되면 전투에서도 얼마든지 응용할 방법들이 생긴다. '잃어버린다' 라. 처음 들었을 땐 제대로 감이오지 않았지만, 얘기할 수록 수 많은 상상력이 자극되는 느낌.....부럽다.
"응. 감소되서 크게 떨어진 신속을 유용할 정도로 강화시키려면, 오히려 코스트가 안맞을 것 같아."
다가오는 청천이가 방패에도 관심을 가지기에, 나는 가볍게 들어서 보여주었다. 내 의념기는 사실 갑옷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하게는 방패도 포함된다. 청천이도 아마 익숙하게 봤을 내 지급용 방패 넓데데는, 순백의 의념에 둘러쌓인 거대한 대방패가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방어력이 증가되어있겠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건, 말한 것 처럼 공격을 나한테 유도하는 기술. 혹은 누군가의 곁에서 붙어 지킬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해. 나는....솔직히 공격 능력은 거의 없거든. 그런데 포지션 조정도 능숙하게 하기 어렵다면, 결국 상대가 날 공격하게 만드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고 그저 혼자 단단할 뿐인 방패는, 의미가 없다. 그건 그저 멍청한 깡통벽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 나는 뭔가를 알아차리고 멋쩍게 고개를 긁적였다.
"에이, 특정한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지만 클로징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거 트롤링이죠! 하지만 디버프를 그런 방향으로 해보려고 생각은 했어요. 저한테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은신이나 디버프 해제 쪽이 되겠고...상대의 것을 잃어버린다면 디버프, 더 나아가면 기술 봉인까지 갈 수도 있겠네요."
꽤 즐거운 듯이 생각난 것을 이야기해보고는 진화의 방패를 살핍니다. 방패 또한 순백색의 대방패로 변한 것을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 확실히 방패도 달라졌네요. 같이 영향을 받은 거로군요...!"
역시 세상엔 별별 의념기가 다 있군요! 청천은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는 얼굴로 진화의 이야기를 듣고는, 계속 떠듭니다. 많이 신난 것 같습니다.
"오히려...시선을 끄는 건 랜스와 같이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형의 보호를 받으려면 진화 형님의 등 뒤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랜서 - 진화 형님 - 상대 같은 구도가 되겠네요. 그렇다면...랜스는 원거리 견제가 가능한 타입이 좋을까요."
아, 원거리 견제하니 때마침 생각나는 얼굴이 있습니다. 부스스한 흑발과 안경, 그리고 소총. 역시 그일까요.
"때마침 제가 그런 선배님을 한 분 알고 있답니다. 많이 친하다기보다는 친해지고 싶은 쪽이지만요. 의념 속성이 '폭발'이고, 냉병기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분이시지요. 지금은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쿡쿡. 그러게, 그런 경우는 나도 생각지도 못했네. 그래도 디버프는 상당히 유용할 것 같아. 몇몇 강력한 게이트들은 고유의 패턴이나 기술이 있으니까. 그걸 견제할 수 있다면 상당히 공략이 쉬워지지 않을까. 여러모로 응용할 여지들이 떠오르는 의념이구나."
즐거워보이는 청천이를 상대로 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대결해서 쓰러트려야 되는 상대를 미아로 만들어 클로징도 못하고 서로서로 헤메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트롤링이라고 말할만도 하다.
"응. 방패와 갑옷이 동시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이 정도면 충분히 구경한 것 같으니, 나도 조심스럽게 의념기를 해제했다. 순백의 갑주와 방패는 해제되고, 다시 가느다란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 무게와 반동에 몇번 정도 호흡을 갈무리하는데 집중해야 했지만. 여기까지 전력질주로도 멀쩡했는데, 역시 의념기가 반동이 무겁긴 무겁다.
"오....그런 발상은 해본적 없었어! 과연...!"
청천이의 의견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나 혼자 이목을 끌거나 지킬 생각만 가득했지만. 그런 발상도 가능하구나. 과연 시선이 넓다. 청천이는 신이다.
"확실히 원거리 랜서와 궁합이 잘 맞을지도 몰라. 내가 포지션을 고정하기도 좋고, 랜서가 공격하는데 방해도 덜 될테고, 랜서는 랜서대로 원거리에서 계속해서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을테니까."
아군 랜서가 근거리라면 휘두르는 검이나 무기에 앞에 나서있는 내가 공격 받지 않도록 서로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한다. 또한 계속해서 움직이는 위치에 맞춰 나도 따라 움직여야만 한다. 다만 원거리라면, 고정 포대라면, 나는 오로지 막는 것에만, 랜서는 오로지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게 서포터의 관점일까?
"성함이 혹시 어떻게 돼? 그럼 그 분에게도 권유드려볼까. 나도 한번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