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바라봅니다. 유독 힘없이 쳐진 자신의 팔과, 온 몸에 전해지는 탄력감은.. 지금의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검은 무겁고, 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괴하며, 이제는 어지러운 정신은 곧 무너질 것만 같았고, 결국 무너지고 있었으니까요.
치열한 공방입니다. 자신이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를, 전투 속에서 서로가 나누는 공격 하나하나들이.. 마치 춤처럼. 지훈의 눈을 괴롭힙니다. 지훈은 묻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이라도 벨 수 있는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지.
다시금 기억해봅니다. 그 날의 추억을, 그 날의 기억을. 힘없이 쓰러졌던 어린 한지훈이 찾았던 길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길은 이것이 맞는 것인지. 보십시오. 수많은 '수단'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가짜'는 이들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위선'은 이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지훈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끝없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말하자면 끝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곳에 있는가, 나는 어떤 길을 걷는가. 나는, 나는, 나는! 그 수많은 질문 속에서 지훈은 떠올려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라는 한지훈은 어떤 사람입니까? 결국 '나'는 소모품이자 도구들보다 못한, 말하자면 쓰레기가 아닙니까? 그 추악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 그럴싸한 포장지를 둘러싼 쓰레기가 아니냔 말입니까!
보십시오. 치열하게 검을 나누면서도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휘두르고 있는 에릭은 아직 자신의 재능을 믿진 못할지언정,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릅니다. 가람 역시도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뇌전을 내뿜고, 검로를 다듬으며, 일격을 내지릅니다. 나이젤은 아군을 보조하며 때때론 공격을, 때때론 방어를 도맡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군을 보조하며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그러면서도 친구들을 향해 안절부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지훈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이 존재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행합니다. 당신에게선 언젠가의 희망따윈 필요가 없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수단따위로 다다르기 위해선 너무나도 먼 길이고, 가짜로는 이들에게서 이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며, 위선으론 이들을 이해하지도, 알아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훈은 자신의 검을 쥐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나에게 '검'을 둔다면 무엇이 남는지. 나에게서 '의념 각성자'라는 특이점을 놓는다면 무엇이 남는지. 나에게 '친구'라는 것들을 놓는다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지.
그러나 한지훈은 무엇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검 외에는 길을 생각한 적도 없으며, 의념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지훈은 존재하기 않았을 것이고,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전장에 있을 수 없을테니까요. 그렇기에 자훈은 책을 꺼내듭니다. 펼칩니다. 소망합니다.
나에게 '가치'라는 것을 물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책에게 묻고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나에게, 길을 알려달라는 듯이.
책장은 빠르게 넘어갑니다. 지훈의 삶, 지훈의 생각, 지훈의 마음, 지훈이 남겼던 것들. 그 모든 것을 지난 채.. 지훈을 한 장면으로 끌어올립니다.
지훈은 검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 검은 어느 곳에나 닿습니다. 공간, 시간, 개념, 그 모든 길을 너머 마침내 한 점을 향해 검을 휘두릅니다. 그 불가능마저 베어버리는 일격은, 한 남자의 검이 섬광을 발하자 곧 무너지고 맙니다. 지훈은 자신의 검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아득히 멀기만 한 길입니다. 에반 보르도쵸브는 지훈을 바라보고, 다시금 평범한 철검을 집어듭니다. 이걸로 백 번의 대련에서 모두 패배하였습니다. 모든 수를 읽히고, 모든 길을 읽히며, 모든 방향을 읽히고, 모든 마음을 읽히고 있기에 지훈의 검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반은 모든 것을 비우고, 발 닿는 곳을 향하며, 마음이 끄는 곳으로 이끌고, 마음마저 흐르는 듯 두었기에 자신의 검에 닿은 것입니다. 그 가르침 속에서도 지훈은 다시금 검을 잡아들지만 에반은 천천히 검을 내립니다. 그 얼굴은 의념 각성자라 볼 수 없을 만큼 노후하고, 또한 온화합니다. 이제는 진한 주름이 새겨진 얼굴과, 백색으로 물들어버린 머리카락은 그의 세월을 추측하게 합니다. 단지. 그 강대한 힘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만요. 에반은 익숙하게도 여기까지. 하는 짧은 말로 지훈에게 대련의 마지막을 알립니다. 닿을 수 없는 검에 패배하여 다시금 고민하는 지훈에게 에반은 말합니다.
" 여전히 자신의 검을 찾지 못하고 있군요. "
지훈은 그 말을 떠올립니다. 영웅절, 그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셀 수 없는 수많은 검들의 모습. 손에 들고 사용하는 검이 아니라, 검사 '한지훈'이 걷고자 하는 길을 검성은 다시금 묻고 있습니다.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립니다. 그대로 잠들기 위해 떠난 날, 정말로 갑작스러운 하루였을겁니다.
그리고 그 날 밤, 검성은 미지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자신의 의념을 남기고, 자신의 육신을 남기고, 그 혼만이 길이 되어 정체 모를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검성의 장례식.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과 슬픔 속에서 지훈 역시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강했고, 여전히 인류의 영웅이었으며, 수많은 검을 쓰는 가디언들의 스승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스승을 떠나보낸 날에도 지훈은 검을 휘둘렀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스승의 죽음에도 슬퍼하지도 않는다고, 스승의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냐고요. 그러나 지훈은 말 대신 검을 휘둘렀습니다. 검성의 마지막은 추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행복한 소식을 들었다는 듯, 마치 인류가 이제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 웃으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행복한 마지막을 맞았으니까요. 다만, 제자의 마음에 먹구름을 가득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수없이 검을 휘두르고, 수많은 식을 만들고, 수도 없는 승리를 경험하지만. 먹구름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저 공허한 마음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던 지훈은 에반이 자주 쉬던 의자에 앉아, 그가 자주 보곤 하던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날의 하늘에는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푸른 파도와, 하얀 물결들이 넘실거리던 하늘과 함께, 에반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지나치게 어두웠습니다. 지훈은 검을 들고 바깥으로 향했습니다. 검을 잡고, 하늘을 향해 크게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 검이 닿을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기예를 가졌다 하더라도 하늘을 벤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지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구름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라, 구름을 걷어내기 위한 검.
지훈은 그때부터야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걷고자 했던 독불장군의 길은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국 무언가를 믿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결국. 진심을 담을 수 없다면 무엇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숨을 내쉽니다. 검을 내쥐고, 자세를 취하고 마침내 뽑아들며 긴 선을 긋습니다. 선은 형이 되고, 형은 공이 되며, 공은 태가 되어 마침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지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자루의 검을 느낍니다. 그 검의 이름은.. 지금은 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창천검.
푸른 하늘을 닮은 검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온 전신에 드는 강렬한 힘도 마음에 들지만, 가장 좋은 것은 머릿속이 이상할 만큼 맑다는 것입니다. 마치 푸른 하늘과 같이.
지훈은 검을 쥐고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베고자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단지 휘두르기에, 닿는 것에 반응할 뿐. 그 결과는 오롯이.. 검이 내보일 뿐.
주인에게 사랑받던 인형이 낡고 도태되어 새 멋진 장난감에게 밀려나고 질투하는 장면... 우와 초반 얘기는 현재시점에선 무거운 이야기다... 5살 때면 딴 애들한테 Tv 잘보이는 자리 내주고 애들이 웅성거릴 때는 애들한테 초점을 맞추다가 애들이 다같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따라서 봅니다. 음악이나 큰 목소리, 색감 같은 거에 집중해서 강조되는 감각 쪽을 따라가다 정작 스토리 중반쯤에 지쳐 잠들어서 스토리 물어보면 하나도 기억 못하고... 대신에 보면서 먹으라고 과자 같은 걸 놓아주면 과자를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흡수하겠네요. 위가 쪼그매서 망정이지 디저트배도 컸으면 애들이 먹으려는데 자꾸 어디선가 없어지는 과자 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