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힘에 부친다는 듯 검을 떨어트렸다. 눈 앞에서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 때문이었나. 확실한 것은, 그는 한순간,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힘에 부쳤더라도 최선을 다했다. 허나 버거웠던 그 수준마저도 상대에게는 놀아주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 앞에 있는 에릭은, 혼자였지만 자신을 놀아주던 상대와 대등하게, 전력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존재하는가.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로 체념에 가까워졌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가 아닌 소년, 어쩌면 청년의 목소리가.
'검을 휘두르지 않는 거야?' 어째서 검을 휘둘러야 하지? 나는 아무 도움조차 되지 않는데.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네 존재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내게 의미가 있었나? 그저 존재하기만을 갈망하며 살아왔을 뿐인 것을. 처음부터 의미따윈 상관 없었지.
'그렇다면 넌 왜 검을 휘둘렀지?' ...나를 위해서.
목소리는 웃는다. 네가 친구를 잃었을 때를 기억해. 너는 그 날 아무것도 하지 못 했지. 널 위해 희생한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죄와 애도 뿐이었다. 그날, 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친구를 아무리 소모품이자 도구로 여긴다고 해도, 그것을 지키지 못 했다는 것은 네가 친구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지. 후자의 넌 존재를 지켰지만, 전자의 넌 존재를 잃었다. 넌 그날 이미 한 번 죽었다. 존재를 잃었기에.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뭐지? 그럼에도 계속 존재하는 이유는 뭐지?
지훈은 홀로 중얼거린다. 그건, 그 친구가 남긴 것 때문에. 그리고 이 몸뚱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내 친구의 존재가 이 몸뚱이에 스며들어 남아있기 때문에.
아직 내 곁에 남아있는 친구들과, 날 위해 떠나간 친구를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존재한다.
" 비록 죽었을지라도, 삶이 나를 다시 부른다면... "
그 부름에 응해야겠지. 만족한 듯 목소리가 속삭였다. 지훈은 그 순간 너무나 지쳐서, 너무나 허탈해서 검을 놓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면, 자신은 이곳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준 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모든것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단지 검 하나를 내려놓는 것 만으로도. 그저 시시한 상실감과 같은 감정 때문에. 넌, 그래도 괜찮아?
그는 책을 펼친다. 이 순간, 나는 검을 휘두른다. 나를 위해. 그리고 날 위한 너를 위해. 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라도 검을 휘두르겠다. 그것만이 자신의 친구들을 지키는 방법이며, 그것만이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므로. 최초의 검을 휘두르는 목적을, 그는 잊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검.
지켜본다. 지켜본다. 무거운 분위기를 띠고 있던 워리어에게서 느껴지는 절망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그걸 절망이 아닌 망념이라 부른다던가? 뭐, 됐다. 지금은 두 단어가 같은 뜻이나 다름없으니. 그저 지켜본다. 워리어의 보호 없이, 적의 공격에 맞서고 있는 두 랜스들을 지켜본다. 막아내는 것조차 벅차 보이지만, 싸우고 있다. 서포터들에게 공격이 닿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이 파티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 이 또한 두 개가 다를 바가 없다. 그 모습을 똑바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인데도 먼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있었다.
그건 기적이었고, 성립되지 않는 수식이었고, 비대칭이었고, 압도적이었으며, 빛났고,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에게 몰아닥치는 장면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특출나지 않았던 검은 '주인공'의 격을 내려받아 자신의 눈으로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정신으로도 생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다─못해 무엇인지조차 뚜렷하게 느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낸다. 발을 내딛는 대지의 한 조각 한 조각이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어쩌면 처음부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을 것처럼 그 움직임이 닿는 배경으로서, 다색의 공격과 회피로 이루어진 뒤섞임을 비추고 있었다. 기를 죽이다 못해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그것마저 지켜본다. 지켜봐서, 무엇을 느꼈을까? 저 풍경에 휘말리면 순식간에 죽어버릴 것 같다는 공포. 제 친우였던 것을 떠나보내게 만든 것들을 향한 분노.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동료에 대한 놀람. 든든함. 그것이 이루어내는 대리만족. 그것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슬픔. 무력함. 이 전장에서 떨어져있는 듯한 괴리감. 소외감. 이 순간을 지켜보며 얻을 수 있는 감정은 이것보다도 더 많고 방대하며 한꺼번에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나열된 적은 갯수의 감정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에, 그런 가닥가닥의 감정들을 치워놓고 정보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하지만, 없다. 없다. 무기가 있고, 동료가 있고, 사지 멀쩡하고, 차오른 망념은 당장 의념 사용이 끊어져버릴 정도는 아닐 텐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있는 건 있지만 이 작은 무대에 영향을 끼칠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게 옳다.
없어? 정말? 없어. 정말. 모든 걸 할 수 있는데? 그래. 정말 오랜만에, 완벽하게 무능했다.
나이젤은, 나이젤 그람이라는 사람은, 늘 그랬듯 미소를 지었다. 그릇 없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마주치는 누구라도 그 미소를 제 그릇에 찰랑거리도록 받아넣을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미소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고, 허공으로, 서 있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똑똑 흘러내려 허망하게 사라져간다.
나는 도구다. 다시 도구가 되었다. 인간이란 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에 붙어야 할 이름이다. 나는 쓸모없다. 나는 지금, 멈춰있다. 슬픈가? 외로운가? 아니면 가슴 속엔 공허함 뿐인가? 네가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불편함으로 뭉뚱그려진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확언하자면 그저 텅 비어 있었다. 공허함조차 떠난 빈 그릇이었다. 무언가를 따르기에 딱 좋은 빈 그릇이었다. 책이 펼쳐진다.
방어막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일까요, 조금은 동요되었던 감정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며 여러분들을 전심전력으로 서포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랍니다. 무엇보다 카사양의 체력이 지금 많이 위태로우시기 때문에 방어막으로만 보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직접 체력을 나눠드리는 것도 있지만 우선은 그래요, 보다 빠른 방법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여기서 던져서 바로 닿는다면 좋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