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덜 떨리는 나의 몸. 내 앞의 거친 손. 어른 인간의 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잔뜩 일그러진 나의 얼굴. )
("Conviértete en humana. Los humanos son fuertes porque son débiles.")
(그때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다. 그래도 어렴풋히, 뜻은 짐작했다.)
이로 물어뜯는다. 물어뜯어 살을 쟁취하고 피를 쟁취한다. 그리고... 에릭을 지긋히 바라보는 짐승. 사나운 빗속 사이에서 몸을 낮추고 위협의 소리를 낸다.
동경한 누군가의 모습을 쫒다니. 그래서 너야말로 반짝이는 것일까나.
그리고, 그리고...
잡혔다. 사납게 크르렁 짓어대고 턱에 힘을 주어도 에릭의 손이 풀리지 않는다. 내빼기 보단 앞으로 힘을 준다. 힘으로 짓눌러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짓누르지 않으면 카사가 위험했다. 에릭의 손사이사이로 빛나는 살벌한 이빨. 팽팽한 싸움에 떨리는 그 둘.
퍽! 에릭의 다리에 명치를 맞아버린다. 턱에 더욱 더 힘을 주며 몸부림치는 거대한 늑대. 날카로운 발톱이 에릭의 어깨를 그으려 발버둥친다. 핏줄이 서버린 눈.
한번. 에릭의 말은 틀리지 않아서.
두번. 자신은 그만큼 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라서.
그리고 의념이 담긴 세번.
"커헉!"
뭔가 부러졌다. 익숙한 느낌에 기억은 갈비뼈라고 알려준다. 거친 기침을 함께 내뱉으며 순간 몸에 힘이 빠진다.
(그때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다. 그래도 어렴풋히, 뜻은 짐작했다.)
( ---- [인간이 되렴.])
(나는 처음으로 그 손을 물지 않았다.)
(할멈. 할멈. 아브엘라. 할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 할멈에게 선물받는 미소. 언어. 이름. 존재.)
(그날 풀어준 것은 재갈정도가 아니였던거야.)
(하지만 할멈. 나는 아직도 생각해. 할멈이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인간의 어려움따위 하나도 모르게. 잦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 어둑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단순한 일상. 사람의 슬픔과 언어로 전달되는 복잡한 감정같은 거 하나도 모른 채, 큰 꿈도 지나친 절망도 없는 평온한 나날.)
(영원히 내 작은 세상에서 웅크리고 싶었어. 내게 존재하는 작은 마음을 깨달았기에 나는 절망해. 달콤한 꿈을 한번 맛 보았기에 나는 배고파. 아무리 헛된 꿈인 걸 알아도.)
아마, 늑대의 길다란 입을 잡고 있던 에릭의 손은 풀어질수 밖에 없을테다.
(난 아마.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꺼야. 너희가 나를 이해하기 전에, 내가 너희를 이해하기 실패했는 걸. 사람이기 전에, 인간이기 전에, 생명이란 것은 그런 거야. 오만했던거야.)
(나도. 너도.)
의념기를 풀어 작아진 카사가. 누가 봐도 뚜렷하게 인간의 모습인 카사가. 악다문 입으로 사납게 에릭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난 약해서. 난 약해서.
연약하기 그지 없는 야수의 심장을 강한 모습아래 꼭꼭 숨겨도. 결국 그 것은 모두 거짓 모습이었는 걸.
콰직. 에릭의 어깨를 그어내리던 야수의 발이, 인간 소녀의 손이 되어 그의 멱살을 틀어잡으려 한다.
비가 내린다. 카사의 눈물과 섞여 얼굴을 타고 내려와 분에 찬 그녀의 얼굴을 차갑게 식힌다. 인간의 모습으로 외친다. 그리 원하면서도 부정하던 인간의 모습으로.
"그래!! 난 약해!!! 경고따위가 최선이면서 네 목도 못 꺽고!!! 난 약해!!! 난 정상이 아니야!!!! 어디든 같아, 어디든 고립된거야!!! 근데!!!!!"
어둠에서 빛나는 호박색의 눈. 구름끼어 어둠고, 비가 내려 흐릿한 시야에도. 피가 흘러내려 완전히 뜨이지 못한 한쪽 눈에도, 그 색깔 만은 강렬하게 불타오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힘내고 있는 거야!!!!!!! 난 약하고, 머저리이고, 외로워!! 그러니까 노력하고 있는 거야!!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리 넘어지고 떨어지고 상처나고 살이 부르터져도.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그대로 누워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 두 발로 꼿꼿히 흙밭을 딛고 일어선게 그 증명이었다.
"누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거야!!!! 너야말로. 멋대로!! 단정하지 마!!!!!"
망념이 슬슬 한계였다. 몇칠간 의념기를 킨 상태, 그리고 지금의 전투. 그에 반해 잔뜩 준비하고 온 에릭 하르트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뒤로 치켜 들어, 에릭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리는 주먹, 그리고 주먹. 간단명료하고, 너무나도 기본적인 그 동작에 의념을 잔뜩 담아서 말이다.
진화의 일환이다. 개체가 모여 집단을 이루면 종족 보존의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진다. 작은 개체들이, 특히 약한 개체들이 함께 힘을 합치면 생존에 유리한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진화해버려, 무리를 떠나면 안되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어, 무리와 함께 살고 싶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작위적인 원인으로 생존확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모두 화학적, 생물학적 레벨에서의 반응이다. DNA 그 자체에 각인되어 버린 반응과 기본적인 욕구다.
카사는 그런 지훈을 바라본다. 어째서인지 멍한 느낌의 지훈을. 그리 당당히 얘기 해놓고선 얼빠진 표정이다.
굶주림. 졸림. 갈증. 외로움. 사랑. 그 모든 욕구. 우리의 생물학적으로 코딩되러버린 우리의 기본인 욕구를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복잡한 언어 때문일까? 아이에게 총기를 손에 들려주는 것처럼, 언어가 복잡하니까, 이렇게 복잡하게 쓰고 싶은 거야.
그래서 카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는다. 그의 본심을 듣는다. 카사의 숨소리 만이 지훈의 말 중간 중간의 정적을 채운다.
펜리르는 실에 묶여져, 티르의 손을 끊어 버렸다.
카사는 실로 묶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사는 이미 덫에 걸려버렸다.
알고도 걸릴수 밖에 없는 덫. 마치 수수께끼같은 문장이다. 나는 카사. 나는 펜리르. 나는 배가 고픈 이름없는 아이. 나는...
펜리르는 그레이프니르에 묶일 이유가 없었다. 불품없는 실이라 명예도 없고, 신들의 속셈을 의심하는 상태였다. 아마 펜리르가 묶인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티르가 입에 손을 넣었기 때문이다. 티르가 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덫에 걸어갈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너무 외로워. 친구가 필요해.」"
눈을 깔고 내되기는 카사.
- 자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벌이었겠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죄책감이 엄청났을테니.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이자, 조금이나마 펜리르에게 하고싶었던 속죄였겠지.
"한지훈아. 너는 내 도구야?"
하하. 배가 고프지 않아.
"한지훈아. 너는 나를 아껴?"
카사는 눈을 감는다. 몸에 돌고 있는 의념이 풀린다. 거대한 늑대가, 보통보다도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저 손발을 땅에 붙히고 있는, 태어난 그대로의 소녀.
목부터 손끝까지, 그리고 또 발끝까지, 몸을 뒤덮는 끔직한 흉터 - 카사에게는 영광의 흉터인 것을 내보인채, 눈이 뜨인다. 호박색 눈이 지훈을 똑바로 바라본다.
"한지훈아, 너는 내 친구야?"
뭐가 우스웠을까. 카사의 인간의 얼굴은 읽기 쉽다. 그 얼굴에 떠오르는 희열이든, 뭐든.
바보. 멍청이. 돌대가리! 하하하. 내가 이겼어!
펜리르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게 너의 패인이야, 한지훈아! 하하하!
티르가 손을 넣으면, 그대로 무엇이든 할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티르!
잘 먹겠습니다.
까득.
역시 인간의 모습이 힘조절이 능숙하다. 입안에 베이는 핏물. 검지의 굳은 살덩이. 인간치고는 날카롭지만, 짐승 치고는 뭉툭한 송곳니가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다. 그래도 끊어내지는 않는다. 의념을 쓰지 않는 다면 흉터가 되어버릴 상처만을 남긴채.
법률의 신 티르는 손을 내주어주며, 그저 일방적인 속임수였던 것을 공정한 '거래'로 바뀌었다. 그 둘이 친구였기에.
카사는 지훈의 손을 입에서 꺼냈다. 그리고 일어섰다.
글레이니프에 묶이기도 전에 늑대는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왜냐면 우리는. 나는. 모두 다. 서로가 필요하고 말아버린 외로운 생명체니까.
카사는 지훈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내 친구, 한지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나의 티르. 네가 말한대로야. 나를 아껴줘. 나를 좋아해줘. 나를 좋치 말아줘, 나의 친구. 별밤아래 사전을 들어 느낀 희열이 떠올랐다. 나만 안다는 비밀을 생각하며 히죽거린 그 날 밤.
"나 말야."
카사의 맑디 맑은 눈동자는, 지훈의 것을 바라본다. 처음 만난 그대로, 담겨져 있는 의지를 그대로 내보이는 투명한 주홍색 창문.
늑대화도 유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카사를 내려다본다. 싸늘한 두 눈동자에 떠오르는 감정은 비정. 동정심도 측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카사 떨어지자, 그 역시 균형을 못잡고 비틀거리다 상체를 늘어트리며 숨을 고를 뿐 이었다. 손에서는 피가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덜렁 거리는 느낌의 어깨에서도 고통이 계속..계속 느껴져왔다. 호흡을 고를수록 폐에 차오르는 습기와 입안에 느껴지는 씁쓸한 피 맛이 불쾌하게 그지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그냥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하나미치야에게, 만석이에게, 부장님에게, 하루에게, 가람에게.. 그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더는 신경쓰지 말라하고, 멀어지면 그만이다.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지례짐작하고 혼자 도망치는 것 만큼 편하고 쉬운 것도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카사는 아브엘라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밥을 어떻게 먹는지 배웠고, 존댓말은 어떻게 쓰는지 배웠다. 아브엘라와 얼굴을 맞대며 배운 그것들은 카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에릭 하르트만은 아브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웅의 행적을 동경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느꼈다. 하지만 배움을 청할 기회가 산산조각이 나버렸기에....
자신이 얻지 못한 기회를 얻은 카사에게 질투하는 것 이다. 카사가 이대로 단념해버리면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이다. 카사가..... 아브엘라에게 배운 인간성을 부정하고 고립되어가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쏴아아 ㅡ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이렇게 비가 쏟아져도, 팔이 엉망이 되고, 얼굴도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되어도 청월의 교복만큼은 빗방울에 젖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 네가 발버둥쳐도... 아프란시아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은 없어 카사. "
이젠 힘도 다 빠졌는지, 에릭은 차분한 목소리로 카사를 설득했다. 청월의 교복을 입은 카사를 떠올려봤다. 분명 잘 어울릴 것 이다. 하나미치야는 카사와 잘 놀아줄 것 이다. 기회가 되면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자. 모두가 그녀를 좋아해줄 것 이다. 청월의 훌륭한 교사들은 그녀를 인도해주는 등불이 되어줄 것 이다. 영성이 낮다고 책을 못 읽어 아쉬워 하는 몰골은 두번다시 볼 수 없을 것 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카사의 인간관계인가?
" ...... 아 "
생각하는 사이 카사의 주먹이 에릭의 눈 앞에 다가왔다. 막으면 된다. 명확하게 카사는 지쳤고, 그는 아직 싸울 여력이 된다. 막으면 된다...막으면...
퍼억 소리와 함께 뺨에 느껴지는 화끈한 격통과 함께, 에릭의 몸이 가볍게 떠오른다.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 처럼, 공중에 떠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왜 막지 않았을까. 막을 필요가 없었던걸까.
카사가 인간으로서 의념을 담아 내지른 주먹은 확실하게 에릭의 뺨에 적중하고... 쿵 하고 에릭이 나가떨어지자 찰팍 거리는 소리가 한순간 울려퍼짐과 동시에 카사의 앞에 에릭이 쓰러졌다.
어깨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듯 너덜거리고, 손은 날카로운 이빨로 상처 투성이에 생각없이 망념을 쓴 댓가로 가디언 칩이 삐 울리며 경고음을 내뱉고 있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주륵 하고 흘러내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 .... 아프란시아에 남아있으면, 이번에 겪은 일 보다 더 많은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거야. 사람이란 짐승은 잔인해서 바보인 널 속여먹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보인 거짓웃음은 당연하고, 훨씬 더 잔혹하게 널 이용해 먹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넌 아프란시아에 남고 싶은거야........? "
>>38 " 겁먹지 마! 지금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내면 내일은 더 행복한 날이 올테니까 말야!! "
>>39 " 이거 봐라. 하나랑 우리 사이에서 낳은 딸이야. 귀엽지? 난 우리 애가 이렇게 쪼그마한 핏덩이일지 몰랐단 말이지. " " 이 아이만 보면 그 생각이 들어. 그 날 쓰러지지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진 않았나 하고 말야. " " 난 네 미래야. 의심하지 말고 일어나 에릭 하르트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