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의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7년 봄 김개미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중
◆ 센티넬버스 기반의 1:1 스레입니다. ◆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수합니다. ◆ !!!TRIGGER WARNING!!! 이 스레는 피폐한 플레이를 지향하며, 등장인물 및 배경의 특성상 플레이 중에 흡연 및 음주, 범죄행위 등이 묘사될 수 있고, 잔인한 장면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경악, 공포,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마치 지처겡 다가온 맹수를 보는 듯한...? 지금으로서 확실한 것은, 저 아래에 위치한 높으신 분들만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운좋게 저와 맺어진 센티넬이 대단히 강력하다는 것. 센티넬 그 자체보다는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제 옆에서 수줍어하는 이를 보자면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성격 나빠 갑질하는 이를 대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좀 더...원초적인 공포에 가까웠지.
아이작이 건네는 배려를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배려를 당연시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런 것들이 익숙한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실제적으로는 익숙하지 않았다. 단지 얕보이지 않는 법을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것 뿐이었다. 택시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미리엄은 그제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난 당신이랑 매칭 안 할 생각 전혀 없어요. 거기서 뻗댄 건 말하자면...블러핑 같은 거라서."
제 손에 굴러온 힘을 놓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것을 이야기해주는 이유는,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에 안 들거나 이 일을 피하고 싶거나 한 건 아니니까 한시름 놓으라는 말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아이작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쯤으로 축약할 수 있을까. 미리엄은 눈을 마주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신뢰. 아이작은 푸르스름한 눈으로 가만히 미리엄을 바라보다가, "그렇습니까." 하고 나직이 대답했다. 꽤나 싱거운 대답이다.
아이작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그 어떤 말이 돌아오건, 그 어떤 상황에 놓이건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그리고 그런 해석은 대개 적중했으며, 그 해석이 빗나가는 경우는 그런 비관적 관점보다도 상황이 더 나쁘게 돌아가는 경우뿐이었다.
예상대로다. 하고 아이작은 속으로 차갑게 자조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라고 해도 결국은 비즈니스 관계인데, 새삼스레 인간적인 관계라도 기대했나? 나 같은 괴물이?
"다행이네요. 능력 부작용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기 직전이었거든요."
옅게 미소지어 주는 미리엄에게, 아이작은 -본인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냉소적인 대답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들과 너무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택시는 어느덧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건물들의 높이가 꽤나 낮아져 있었다. 도심지의 중심가에서 벗어나 외곽지로 나오는 경계선이라 할 만한, 조금 을씨년스런 풍경 속을 조금 달리자 매우 허름한 카페 하나가 나왔다. 아이작은 택시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어설픈 동작으로 차 문을 열고는 내린 뒤 미리엄에게로 손을 내뻗었다.
돌아오는 건 싱거운 대답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미리엄은 눈매를 휘어가며 사르르 웃었다. 웃음은, 기본적으로 호감의 표시다. 또한 경계심을 없애기에 가장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미리엄은 어떻게 웃어야 자신의 외모가 가장 빛을 발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 눈을 휘고 입매를 다듬어야 순하고 앳된 인상으로 보이는지 알았다.
"마리, 라고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하면 너무 이를까요?"
미리엄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부드러웠으며 하는 말들은 아이작을 배려하여 회피할 길이나 다른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본질이 어떠하든 간에. 물론 그 포장지를 까보자면 있는 것은 욕망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포장되었고, 그것은 또다시 위선과 호의로 포장되었다. 미리엄은 좋은 연기자였다. 타고나지 않았다 해도 19년 인생 동안 갈고 닦은 것이 허술할 리 없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괜찮을까요?"
냉소가 짙게 묻어나는 대답에 돌아온 것은 질문이었다. 미리엄은 숨긴다고 숨겼으나 옅은 걱정이 흘러나오는 얼굴을 하곤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덧붙이는 말은 변명조였다.
"솔직히, 제 나이가 후천적 가이드로는 좀..많잖아요. 그러는 바람에 가이드나 센티넬에 대해 그렇게 깊게 아는 건 아니라서, 어디까지가 실례가 아닌지 잘 모를지도 몰라요."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돌하게 굴며 연구원에게 요구를 하던 소녀는 어디 갔는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불안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제 두 손을 꾹 맞잡았다. 눌린 손마디가 허옇게 질렸다.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제 주제를 모르진 않아서요."
농조였으나 조소가 미약하게 스며들어갔다. 분명 녹색이라 하면 생동감이 가득해야 하거늘, 미리엄의 옥색 눈동자는 거멓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온 생애 걸쳐 철저하게 약자였다. 지나치게 까불어 제 목숨을 잃을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아이작 앞에 미리엄이 나타난 것도 인생에 걸쳐 줄타기를 알맞게 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자신의 표정이 굳은 걸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했는지, 미리엄은 살풋 웃음을 머금곤 바깥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 오는 게 얼마만이었던가. 얼룩진 그것을 추억이라 감히 칭할 수 있다면, 그래,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아이작."
미리엄은 아이작이 뻗어준 손을 기꺼이 잡았다. 주위를 휘 둘러보다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고개를 까닥여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말에, 아이작은 눈을 깜빡이며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이걸? 하고 되묻는 듯한 제스쳐였다. 그러다 그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미소라기엔 시큼하고 쓰게 뒤틀린 시니컬한 웃음이다.
"취향이 특이하시네요."
필시 빈말일 것이다. 하지만 빈말로라도 저런 말을 사뿐히 담을 수 있는 게 아이작은 부러웠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하고, 마음에 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충분히 익숙하며 그것을 스스로 잘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 그는 그것을 잘 제어하지 못했고, 그것을 제어하려 들 때마다 익숙하지 못한 말이 사고를 쳐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이작은 냉소적인 농담을 선호했다. 무난하게 나쁜 선택지라는 건 잘 알았지만, 적어도 더 최악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히 그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항상 우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패배감과 절망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특히 인간관계와감정교류 분야에서 그는 아주 당연스럽게 최악을 상정하고 그것을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마리... 당신이 그게 낫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리엄이 질문을 던지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이드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보거나, 이야기를 길게 나누어본 건 처음이기 때문에 당신보다 못하면 못하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죠."
미리엄의 비취색에 한가득 담긴 비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확언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저와의 매칭을 거절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저도 당신의 센티넬 노릇에 충실할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절망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불성실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는 적어도 사무적 관계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리라고 확언했다. 공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전담 가이드의 신변 또한 지키는 것.
아이작은 손을 내뻗어 카페의 문을 열었다. 낡아빠지고 쇠락한 가구들이 겨우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카페는 분명히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안락함이 있었다. 들어온 입구 맞은편에 또 문이 하나 있었는데, 소박한 정원이 꾸려진 카페 안뜰로 통하는 문이었다. 딱 봐도 심술궂어 보이는 늙은 바리스타는 대단히 못마땅한 눈길로 아이작을 힐끔 바라보았고, 아이작이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원두 몇 줌을 그러모아 그라인더에 집어넣었다.
"더블샷으로 부탁드립니다." 하고, 커피 이름마저 말하지 않는 폼이 여기에 깨나 드나든 모양이다. 아이작은 미리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리엄-아니, 마리 씨는 뭔가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아이작은 보다시피 단 한 번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서 초기 접근이 까다로울 텐데, 저번에 돌렸던 짤일상만큼의 대화가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 아이작이 어떤 센티넬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이작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꺼려지는 괴물로 여겨져 배척받아왔는지가 마리에게 전달되면 상황이 좀더 나을 텐데. 마리가 협회로 돌아가면 협회 측의 인물과 면담하거나, 혹은 등록 과정에서 우연히(협회측 인물이 두고 간 파일이라던가) 그런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오늘 낮잠을 자서 그런가 쉽게 깨었는데 다시 잠들기는 어렵네. ^0^... 할 일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얼른 끝내고 쉴 수 있기를 바라.
마리의 설정을 지키기 위해 공략법을 알려주자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아이작에게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면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 거야! 특히 아이작의 능력이나 그간 당해온 취급 같은 것에 대한 정보를 얻고 스스로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포인트를 집어서 "당신은 이러이러한 괴물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람으로 좋아해줄 수 있다" 는 뉘앙스로 말하면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해. 협회에서 아이작을 가혹하고 엄격하게 대하는 데에 반감이 있는 협회 내 인물이 마리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주는 전개도 생각하고 있고, 이래저래 마리에게 도움을 줄 생각을 많이 해두고 있으니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미리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투명한 호의를 내보였다. "도와줬잖아요, 아까 전에." 미리엄은 속으로 저울질을 했다. 더러는 약점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 호의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미리엄은 아이작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으며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미리엄은 말을 고르며 맞잡은 두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내보일 카드를 신중하게 선정했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하고선 흘러나오는 것은 담담한, 외려 가벼운 웃음조차 섞인 말이었다.
"전 대부분 제 스스로 저 자신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어요. 작은 일이라도, 정말 사소한 일이라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다른 생각을 하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미리엄은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나서야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이 웃었다.
"저는- 당신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라고 해도, 고마웠어요."
봄꽃이 화르르 피어나듯 미소가 번져나갔다. 빈말이라 치부하기에는 이미 과거의 편린을 담보 잡았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가볍지도 않았다. 어느 장도 선을 가늠하기 위해 던지는 이야기기도 했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인데, 미리엄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안 그러냐 묻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겠죠? 앞으로 있을 시간이 적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국 무엇을 물으려 했던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미리엄은 다른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센티넬, 나의 센티넬. 입에서 그 말을 몇번 글려보던 미리엄은 옅게 웃었다.
"나도, 열심히 할게요...아이작."
바리스타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이작은 이곳을 자주 드나든 것 같아 보였다. 독특한 분위기에 미리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았으나 이상한 안락함이 공존했다. 정원, 안뜰로 이어지는 문에 잠시 시선을 사로잡혔다가 아이작의 질문에 되돌아왔다.
일이 많아서 이제야 왔네...오늘은 좀 늦었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아이작주? 너무 시간이 늦어서 이미 자러 갔을까? 만약 자러 간 거라면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정신 없는 하루였긴 한데 크게 나쁘진 않았어. 그리고 팁 고마워! 그걸 보면서...참 가스라이팅하기 딱 좋은 대사라고 생각하는...글러먹은 마리주....;;
"보편적으로 보자면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 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제가 얼마나 고약한 흉물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작은 미리엄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리엄이 담담하게 건네는 말에서, 아이작은 자신의 악몽같은 과거를 어렵잖게 되짚어볼 수 있었다. "정말로, 무슨 느낌인지 잘 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직 말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찬밥 대접받은 입양아와 입양마저도 되지 못한 고아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처지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었다. 아이작은 외톨이였고, 여전히 외톨이이기에 미리엄이 털어놓은 넋두리가 무슨 의미인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외톨이였기에 아이작에게는 그런 공감마저도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미리엄이 파스스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네자, 아이작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앞으로 있을 시간이 적진 않을 테니까요, 하는 미리엄의 말이 생각보다 조금 큰 울림으로 다가와서,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다시금 자신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아이작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잠깐 "마리." 하고는 미리엄이 알려준 이름을 입에 되뇌어 보았다.
"내겐 당신에게 알려줄 만한 애칭이 없는데."
아이작은 그렇게 잠깐 말을 잊은 듯한 표정으로 당신을 가만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찌되었건,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지는 모르겠군요. 전 그저 나쯤 되는 센티넬에게 가이드를 만나게 해 준다기에 5성 호텔 라운지 정도는 대절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성질 좀 부렸을 뿐인걸요."
잠깐 동안의 공백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이작은 농담을 던졌다. 농담에는 낮은 자존감과 반대로 높이 치솟은 자존심이 묻혀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 어떤 경지에 이르러 인정받은 인물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기도 아까 그 방 못잖게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커피 맛은 썩 괜찮으니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레모네이드요?"
아이작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메뉴가 나온 탓이다. 아이작은 어안이벙벙한 눈길을 바리스타에게로 돌려보았다. 바리스타는 여전히 심술궂게 찌푸린 얼굴이었지만-사시사철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그렇게 생긴 건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이작은 "안뜰에서 기다리죠." 하며 미리엄을 안뜰에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금요일 하루는 그럭저럭 괜찮았어! 자다가 중간에 깨서 좀 그렇긴 하지만.. 마리주는 지금쯤 잠자리에 누웠을 거라 믿고, 아이작주도 답레만 올려두고 다시 잠들기 시도해보러 갈게. 시간나면 만나! 그리고 아이작은 가스불로 지지라고 만든 캐릭터가 맞으니 마음놓고 구우셔도 됩니다 쓰앵님 흐흐흐. 상호간에 합의가 안됐으면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상호 합의 끝났으니 노 프라블럼이라구
흉물, 독특한 어휘 선택이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적어도 처음부터 자신을 비하하며 낮추는 모습을 계속 보이는 건 필시 연유가 있을 것이다. 미리엄은 당신이 던지는 말을 곱씹었다. 나중에라도 당신의 사정을 알게 될까? 알아야 하겠지.
아이작이 건네는 말에 미리엄은, 놀라워 보였다. 아이작의 말은 충분히 진실되어 보였고 별다른 거짓의 징후도 찾기 힘들었다. 진실이다. 내가 한 말이 무어였지? 나 자신만이 나를 구할 수 있는 이였다. 내 곁에는 누구도 없었다. 미리엄은 답을 꺼내는 대신,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듯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가지곤 웃었다.
"그러면 그냥 내가 알려주고 싶어서 멋대로 알려줬다고 생각해요. 정 신경 쓰이면 앞으로 뭐라 붙일지 생각해 봐도 되지 않겠어요?"
미리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구슬이 바닥에 통통 튀어가듯 낭랑한 소리였다.
"...오, 대단한 자신감인 걸요?"
미리엄은 의외인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이, 가벼운 탄성이, 동그랗게 뜬 두 눈이 그를 보여주었다. "물론 능력이 뒷받침된 만큼 단순한 자신감으로 치부하기만은 어렵겠지만요." 뒤늦게나마 푸슬푸슬 웃음을 흘렸다.
"어, 음, 죄송해요...그, 제가 쓴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막상 생각나는 게..."
반문에 미리엄은 움츠러들었다. 더듬거리며 변명조의 말을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사과부터 나오는 모습이, 방금 전의 말과 결부하여 본다면 한 가지 결론은 쉽게 나올 것이다. 적어도 과거가 순탄하지는 않았다는 점. 미리엄은 바리스타의 반응에 그나마 옅게라도 웃었다. 작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아이작의 인도를 따라 안뜰로 향했다.
작은 정원이었다. 화려하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미리엄은 무엇이 그리 시선을 끄는지 작은 식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슬슬 스케쥴이 망가지고 있고만.... 어제 아이작주가 답레를 준 시간 즈음에는 확실히, 응, 자고 있었네. 다시 잠에는 잘 들었어, 아이작주? 별로 깨있지 않고 남은 시간이나마 푹 잤다면 좋을 텐데. 오늘도 날이 따듯하더라. 이사 가는 날이라 조금 정신이 없긴 했어도 나쁘진 않은 하루였어. 아이작주의 하루는 어땠어? 물론 그렇지...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너무 빻은 망취향이라 구해질 줄도 몰랐고 썰이 이어서 달릴 줄도 몰랐어! 지금은 너무 잘 맞는 취향이라 조커처럼 웃으면서 돌리고 있지만 말이야. 진짜..압도적...감사...!
"..." 미리엄의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아이작은 주머니를 뒤적여보다가 카운터 위에 놓인 냅킨 홀더에서 냅킨 한 장을 뽑아 미리엄에게 건넸다. 미리엄-당신과 아이작은 어쩌면 꽤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 천천히 찾아보는 것도 좋겠군요."
아이작은 당신을 안뜰로 이끌며, 당신의 변명에 대답했다. "아뇨, 추궁한 게 아니라 그냥 저 영감이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좀 힘들어서요." 위축되는 당신을 다독이듯이 대수롭지 않은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아이작은 정원의 문을 열었다.
과연. 그와 같이 눈밑이 퀭하고 대인교류가 희박할 것 같은 은둔자 타입이 즐겨 찾을 만한 공간이다. 사방이 식물로 둘러싸여 있었으되 하늘만큼은 뚫려서, 도심지 외곽의 황량한 공제선 위로 오후의 하늘이 그럭저럭 충분한 크기로 걸려있는 곳이었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명상하기에는 딱 좋은. 그는 식물로 향해 있는 당신의 시선을 굳이 잡아끌거나 돌리려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이 시선을 다시 돌릴 때를 위해 파라솔 달린 탁자에 딸려 있는 나무 의자를 하나 빼어놓고는 그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능력이 뒷받침된 만큼, 하고 당신이 푹 찌른 말이 아이작에게 와닿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애초에 이런 구질구질한 연명마저도 허락받지 못하고 시체 한 구가 되어 미치광이의 제물 컬렉션에나 남지 않았겠는가. 능력이 아닌 다른 어떤 기적적인 일로 연명할 수 있었더라도, 이런 삶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겠는가. 당신을 만날 수도 없었겠지. 아이작의 가치는 아이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센티넬이라는 데에 있었다. "뭐, 다른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그런 능력이라도 있어야죠." 아이작은 냉소했다.
심술궂은 얼굴을 한 바리스타가 쟁반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에스프레소 더블샷과 설탕 스틱 2개, 그리고 길다란 컨에 담긴 레모네이드 한 잔이 탁자에 놓인다.
"뭐, 여하간, 이제 조금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설탕 스틱 두 개를 한번에 뜯어 에스프레소 전에 때려부으면서, 아이작은 말을 꺼냈다.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 있습니까?"
미리엄은 애써 눈물을 가리려는 것처럼 더 활짝 웃었다. 냅킨으로 눈가를 닦는 대신 맞잡은 두 손 사이에 꽉 쥐었다. 그렇게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진정될 것처럼 말이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시간은 많으니까요."
작은 웃음 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말이었다. 미리엄은 다독여주는 것만 같은 농담에, 눈동자만 굴리다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한다 해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옅게 웃으며 그래 보인다 동조했다. 당신이 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물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미리엄은 문득 위를 보았다. 푸른 식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뭐랄까, 참 예뻤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엄은 흐린 날만 아니라면 하늘 보는 것을 참 좋아했으니 늘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미리엄은 저도 모르게 천진한 아이의 낯으로 웃었다.
뒤늦게서야 미리엄은 아이작의 반대편에 앉았다. 미리엄의 말이 아이작을 찔렀다면, 이번에는 미리엄이 그러했다. 냉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미리엄은 순간적으로 목이 콱 쥐어채이는 기분을 받았다. 숨이 막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으나 탁자 아래로는 맞잡은 두 손이 희게 질려있었다.
"역시 그렇죠?"
말간 웃음은 순식간에 비틀렸다.
"제가 운 좋게 당신이라는 S급 센티넬이랑 높은 매칭률을 보인 것처럼요."
노래하듯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끝자락에 걸쳐진 것은 자조였다. 만약, 만약이라는 말은 참 많은 공상의 여지를 주었다. 만약 내가 가이드로 발현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S급 센티넬과 매칭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질문의 답은 쉽게도 떠올랐다. 미리엄은 저 진창에 처박혀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 삶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테다. 자신은 참 운이 좋았다, 고 미리엄은 생각했다.
바리스타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미리엄은 레몬 에이드를 제 쪽으로 가져왔다. 컵을 조금 흔들어 안의 내용물이 잘 섞이게 하던 미리엄은 아이작의 질문에 머뭇거렸다. 질문? 없을 리가. 처음 보는 사람에 기밀 정도나 되는 센티넬이다. 질문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예의라는 명목으로 어느 정도 쳐내고 있었다. 개중 그나마 신변잡기로 적당한 질문을 골랐다.
"음...아이작의 나이? 막상 물어보려니 딱히 생각나는 게 많진 않네요. 아이작은 저에 대해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아앗....주말이 더 바쁘다니 그 무슨 슬픈 일이야... 응, 이사했어! 새집은...낯설어! 물론 가구는 전부 전에 있던 거긴 한데..오히려 그래서 익숙함과 낯설음이 반반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아 맞아!! 뭔가 아 이건데? 싶으면 눈 색이라던지...피부색이라던지..앞머리나 그림체라던지 묘하게 부족해. 그렇다고 직접 연성은 또 실력이 영 그렇고 말이야.
자괴감을 참지 못하고 비틀려버린 당신의 미소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작은 과거의 만약이 아니라 현재의 만약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런 능력이 발현되는 게 극히 희박한 확률이고, 그 능력과 매칭율이 높은 가이딩 파장을 갖게 되는 것도 극히 희박한 확률이지만, 어찌되었건 그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고도 당신이 각인을 승낙할지에 대한 확신이 아이작에게는 없었다. 자신의 능력은 당신이 방금 하늘을 올려다보고 띄웠던 그런 천진난만한 미소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으니까. 능력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은.
당신의 질문에 머릿속으로 잠깐 숫자를 뇌어보던 아이작은, 이내 답을 내어놓았다. "올해 생일이 온다면, 스물아홉이군요." 하고 컵에 티스푼을 집어넣고 천천히 젓던 아이작은, 잠깐 뭔가 각오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들어올렸다. 그리고 질문을 꺼냈다.
미리엄은 이걸 생각보다 많다고 표현해야 하는지, 혹은 그 반대로 말해야 할지 잠시 갈등했다. 애초에 센티넬-가이드 관계에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스물 아홉이라면- 자신과 거의 10살이 차이나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냐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미리엄이 택한 것은,
"생각보다는 많네요."
-라는 답이었다. 별다른 감정 없이 던져진 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의 놀람 정도는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
미리엄은 잠시 아이작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아니면 뭐가 더 있나? 이런 말을 꺼낼 이유가 무엇이 있지? 두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정보는 절대적으로 작았다. 이런저런 추측도 쓸모 없을 확률이 높았다. 미리엄은 평면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 무슨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벌레 같은 징그러움만 아니라면 괜찮을 거예요...아마도."
주변에 무관심한 만큼이나 스스로에게도 무관심했기에, 아이작은 본인의 나이를 상기해보는 게 낯설었다. 그 악몽 같았던 어느 날 밤이 지나고 나서는 그는 스스로의 나이를 세는 것이나 생일을 헤아려보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 보니 그 날로부터 벌써 11년이 흘러왔다는 사실마저도 새삼스러웠다. 그런 것들이 자칫 나쁜 기억을 건드려 깨워버릴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 18살 생일을 자신의 팔목에서 칼로 베어낸 피로 하나하나 카운트해 나가던 원장을 떠올려버렸다. 그는 표정을 태연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다행히 다른 화제거리는 있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제 능력 때문에 말이죠."
물론 그 화제거리도 만만찮게 불편한 것이었지만. 아이작은 커피를 집어들고는 몇 모금 들이마셨다.
"...겉보기도 그렇고, 기작도 그렇고 상당히 흉한 축이거든요. 벌레는 아닙니다만." 조금이라도 뜸을 들이거나 하면 그대로 이런 이야기를 할 자신감을 잃을 것 같았기에, 아이작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능력이 보기 흉하다는 게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로 던진 질문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면 계속 그런 암시가 있었지. 그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은 비단 '예측불허의 강자' 에게 보낼 만한 것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에측불허의 괴물' 에게 보내질 만한 그런 시선이었지. 그들의 시선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인간 두겁을 뒤집어쓰고 있는 더 끔찍하고 흉측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이 자리에서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센터에 가셔서 제 능력을 정리해둔 파일을 열람하셔도 됩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듯, 아이작은 다시금 잔을 들어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는 커피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별다르지 않게 넘어갔다. 그 정도면 최악은 아니었고, 미리엄은 그 부분을 더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 레몬 에이드를 몇모금 마셨다 시고 달달한 것이 그나마 머리를 깨우는 것 같았다.
역시, 능력에 관한 거였나. 그 말을 꺼낼 다른 이유가 없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엄은 아이작이 엄청난 인성파탄자만 아니라면, 그것도 자신에게 그- 성격을 내보일 것만 아니라면 별 상관이 없었다. 저 자신마저 공격받을지도 모르는 능력? 애초에 센티넬과 함께 현장을 나갈 때부터 목숨의 위협이야 예정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타인에게서 비롯되었느냐, 혹은 주신의 센티넬에게서 비롯되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흉한 외모? 저는 뭐 예쁘기라도 하던가. 적당히 인간의 형체라도 지녔으면 됐지. 파탄난 성격? 애초에 미리엄은 그렇게 성인이 아니었다. 누굴 죽이고 다니든 힘을 휘두르던 저한테만 안 하게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한마디로, 미리엄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S급 센티넬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단순한 몇가지 이유로는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괴물이든 인간이든 하는 것은 미리엄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괴물이라 한들 제 편에 서준다면 인간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작의 이야기에도 미리엄이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바로 이랬다.
"아이작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러니 아이작이 준 선택지를 도로 돌려준 것도 그래서 가능한 것일 테다. "난 괜찮으니 마음대로 해요. 아이작이 괜찮다면 보여주고, 영 껄끄럽다면 내가 알아서 파일 보고 올게요." 미리엄의 말은 상당히 차분했다. 물론 굳이 따진다면야 직접 보는 것이 이해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파트너가 될 센티넬을 들쑤실 정도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후에라도 충분히 볼 수 있을 테니. 미리엄에게 있어 아이작이 건네는 말의 무게는 딱 그 정도였다.
당신은 나이 문제에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고, 아이작도 잠깐 나쁜 기억이 떠올라 움찔했을 뿐 나이 문제 자체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당신을 따라 쿨하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젠 나쁜 기억에서 도망치려다 맞닥뜨려 버린 나쁜 상황이 문제다. 아이작에게 있어 그건 상당히 중대한 문제였다. 제물마저 되지 못한 흠결있는 짐승을 추한 괴물로 정의하는 저주. 그게 자신의 능력이었고, 아이작에게 그것은 일종의 컴플렉스였다. "..." 그러나, 결국은 한 번 마주해야 할 문제다. 어차피 당신은 그 파일을 볼 테니까.
"지금 여기서, 잠깐이나마 보여드리는 게 차라리 낫겠죠."
카페 건물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안뜰이고, 아이작은 누군가의 시선이나 귀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당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이 광경이 엿보일 염려는 없을 것이다. 아이작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니 그건 분명히 왼손을 들어올리는 동작이었는데 그 곳에 있는 것은 왼손이 아니었다.
뒤틀리고 몸서리치는 힘줄과 근육이 몸을 비틀고 있는 게 보였다. 잔뜩 부풀어올라 기괴하게 뒤틀린 괴물 같은 것이 아이작의 왼손을 감싸고 있었다. 아니 아이작의 왼손이 괴물로 변해 있었다. 간신히 손을 연상할 수 있는 구조를 한 그것의 힘줄 사이로 줄지어 선 날카로운 이빨들이 물결치는 게 보였고, 그것의- 간신히 손가락 끝이라고 칭해줄 수 있을 끄트머리에는 꼬챙이 같은 뼈송곳이 야수의 손톱처럼 비어져나와 있었다. 시시각각 그 형태를 바꾸며 몸을 뒤트는 기괴한 고깃덩이 사이로, 열망에 가득 찬 작은 푸른 눈동자 서너 개가 당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변해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보면, 펼쳐져 있는 것은 외계의 정원. 싱그럽게 깔려 있는 잔디들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다른 행성의 해저에 돋아난 해초 같은 불길한 촉각들이 어디서 본 것만 같은 푸른빛을 띄고 뻗어 있었으며, 등나무들은 어디론가 가고 푸른색의 빛을 머금은 낭종들과 있는 힘껏 긴장되어 뒤틀린 힘줄의 기둥 같은 것들이 뻗어올라 이상한 정원의 모서리를 뒤덮고 있었다.
"복잡한 용어를 배제하고 설명하자면, 괴물 바이러스를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괴한 힘줄들도 촉각들도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스르로 스며들듯 사라지고, 그 곳에는 방금까지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작의 왼손은, 당신이 기관에서 꼭 맞잡고 나왔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조금 기괴하게 생겼을지언정 분명히 사람의 손이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말의 경고 없이 이루어진 일은 놀라하기 충분했고, 그 이후에 변모한 모습 그 자체도 놀랍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미리엄, 이 작은 소녀가 그 이질적인 모습에 경멸이나 멸시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이미 본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미리엄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까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찬찬히 둘러보기만 했다. 관찰하는 시선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 미리엄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느릿하게 숨을 쉬며 말을 골랐다. 솔직히 말하자면ㅡ
"놀랍네요. 꼭 영화 속 장면 같아서."
담백한 말이었다. 미리엄은 말을 잇기 전 레몬 에이드를 한 모금 들이켰다. 따가운 탄산이 포르르 일어났다. 입 안에서 액체를 굴리다가 미지근해질 즈음에서야 삼켰다.
"제가 만지면 위험할까요?"
앞뒤를 잘라먹은 물음이 톡 터졌다. 당신을 바라보는 옥색 눈에는 궁금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자신도 실없는 질문이라 여겼는지 미리엄은 비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웃음조차 가라앉았다. 미리엄은 잠시 레몬 에이드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뒤적거렸다. 생각의 바다에서 말을 건져내었다. 제 몫의 음료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이번에는 재빨리 삼켰다. 앞에 있는 당신, 아이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나잇대에 가지기에는 제법 단단한 눈이었다.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딱지가 앉은 모양새였다.
"있죠, 당신이 괴물이라 불리든 말든 전 별로 신경 안 써요. 실제로 그렇다 해도 상관 없고요."
미리엄에게 중요한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이 제 목을 조르지 않는 한, 아니, 그렇다 해도. 미리엄은 눈을 내리떴다. 쇄골 근처 한 지점을 지그시 눌렀다. 쓰리게 웃었다. 미리엄은 다시 아이작과 눈을 맞추려 했다.
"보통 가이드가 만지면 위험합니다. 이 바이러스들은 제 통제를 따르지만, 단 하나의 경우, 가이드가 근처에 다가왔을 때는 제 통제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가이드를 감염시켜 흡수하려 시도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듀티를 받아 투입되는 경우, 근처 구역에 있는 정부에 등록된 가이드들에게는 대피령이 발령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이작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상당히 섬뜩한 답변이었다. 그것은 미팅 룸에서 내려온 지시의 의미에 대한 해명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감염당한 가이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이드들은 본능적으로 가이딩 에너지를 소모해서 감염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어지간한 가이드의 가이딩 파워로는 감염마저 다 막지 못하는 모양이고, A급이나 S급 가이드라고 해도 감염을 저항하는 데 가이딩 에너지를 돌리고 나면 저를 가이딩해줄 에너지는 소량밖에 남지 않는다더군요."
아이작은 문득 소매 한쪽을 살며시 걷어보았다. 혈관이 두드러진 곳마다 주사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다.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주사자국도 있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도 있다. 아마, 센티넬들이 가이드를 받지 못할 때 임시변통으로 사용하는 안정제를 투여한 자국이리라. 경구복용한 게 아니라 혈관에 주사한 걸 보니, 거의 마약에 가까운 독한 안정제일 것이다. 그는 가이드를 받지 못하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부작용이 심한 안정제에 의존해 견뎌온 모양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들은 이상하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만, 네, 당신에게는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들은 당신과 그를 만나도록 하기 위해 꽤 많은 사전검증과 조사를 거쳤다. 가이드 테스트에 포함된 신체검사 중에 채혈한 당신의 혈액을 아이작의 혈액에 노출시켜 보는 등, 당신이 모르는 여러 번의 사전 테스트 끝에 오늘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오고 말았지만.
아이작은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이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음울하게 침잠해있는 그것은, 그러나 그 음울한 그늘 아래에서도 어른거리는 빛을 띄고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다 아이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
그러다 그는 쓰게 웃으며, 도피오 잔을 들어 몇 모금을 더 비웠다. 이제 바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미리엄은 입을 다물었다. 추측은 했다. 어쩌면 아이작의 그 능력이 지금까지 당신이 가이드가 없얶던 이유였노라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먼저 일러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미리엄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보다는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왜 이제서야 동앗줄을 내려주느냐고 화를 내는 것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백 배는 더 생산적이다. 미리엄은 아이작의 말을 들으며 컵을 매만졌다.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가이드는 결국, 나 하나라는 말이지?
제법 마음에 드는 결론이었다.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그런 것들이 주는 울림이 얼마나 파급력을 가지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엄은 입꼬리를 잔으로 슬쩍 가렸다. 가볍게 던진 말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돌아온 것이 조금, 당황스럽다는 것처럼 눈을 굴렸다.
"그러면...지금까지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거예요?"
옅게 떨리는 목소리는 당혹이나 연민을 담은 것으로 보기 충분했다. 세간에도 센티넬에게 있어 가이드와 가이딩의 중요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 보여요?"
미소 한자락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담고 있는 눈동자는 아이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침잠해 있는 것들을 살펴보려는 것마냥. 그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나직하게 웃었다.
"내 지옥을 손수 제작하고 유지해주던 사람들에게 느꼈던 것에 비하면, 당신은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요."
당신 앞의 작은 소녀는 입에 지옥을 담으면서도 말갛게 웃고 있었다. 굴곡 없는 인생을 산 아이나 지을 법한 하얀 웃음을 어여쁘게도 매달고 있었다.
갱신하고 가! 오늘은 집에만 있었더니 통 날씨를 모르겠네...나는 오늘 중간고사가 코 앞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어. 어제 늦게 잤더니 오전에 좀 피곤하긴 하더라. 아이작주는 좋은 하루 보냈을까? 그리고 위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다가 생각난 건데, 혹시라도 아이작에게 다른 가이드가 생긴다면 일단은 자신의 목숨을 협박하는 게 앞순서고 죽인다는 선택지는 제일 뒤로 미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이작은 알까. 이 순간 자신에게 드리우는 줄이 구원의 동아줄인지, 아니면 새로운 목줄인지. 모를 것이다. 알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그 남자의 목줄을 생명줄처럼 잡아쥐고 옥죄며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도 당신에게 기꺼이 자신의 숨통을 줄에 매달아서 쥐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언제고 항상 입맛대로 자신을 통제하고 이용해먹으며 기회가 닿으면 자신들의 지구에서 배제하려 하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 모든 죄를 떠안은 죄인인 것처럼 취급하는 정부기관보다는 차라리 당신이 나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최악보다는 차악일지도 모를 미지가 나았다. 자신의 목에 매인 줄을 잡고 매달리는 게, 당신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견딜 만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새로운 목줄, 구원의 동아줄 둘 중 어느 쪽으로 불러도 사실 무관할 것이다. 상당히 많이 지쳐보이고 쇠약해져 있는 이 기이한 남자는 홀로 버려져 서서히 죽어가던 참이었기에. 남자의 눈에 어린 푸른빛은 신비로웠지만, 감정의 색채가 퇴색되고 부패되어 깎여나가 있는 칙칙한 빛이었다.
"보시다시피." 꾸며낸 연민이 어린 질문에, 아이작은 소매를 걷어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의 그림자가 드리운 눈매가 시니컬한 눈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이 이토록 조용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실감하네요."
아마 그의 센티넬 부작용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그러다 자신의 말에 당신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말갛게 웃자, 아이작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뒀다. 웃음이 거둬진 무표정은 무언가 생각에 깊이 잠긴 느낌이 있었다.
"네, 그래보입니다."
"저도 잘 알거든요.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것."
"어느 날은 이 삶이 너무도 비참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신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차라리 나를 지옥불에 떨어뜨려 달라고."
자신의 목숨을 협박이라... 아마 정말로 그걸 돌리게 된다면 아이작은 그 두번째 가이드의 존재를 모르고 마리가 먼저 그 두번째 가이드의 정보를 접하게 된 상황일 텐데, 그러면 아마 군체지성이 먼저 말을 걸어올 거야. 여기서 어쩌면 어떤 엔딩이 될지 분기점을 가르는 선택지가 나오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