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의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7년 봄 김개미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중
◆ 센티넬버스 기반의 1:1 스레입니다. ◆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수합니다. ◆ !!!TRIGGER WARNING!!! 이 스레는 피폐한 플레이를 지향하며, 등장인물 및 배경의 특성상 플레이 중에 흡연 및 음주, 범죄행위 등이 묘사될 수 있고, 잔인한 장면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누구와도 통하지 못하고, 이 퇴적지 한가운데서 고요히 썩어가는 것." "제물마저도 되지 못한 흠있는 짐승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정당한 결말이겠지요."
이름: 아이작Issac. 기록된 성씨 없음. 나이: 29세 성별: 남 직위/등급: 센티넬/S
외모: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192센티미터 82킬로그램. 적정 체중. 밀도높은 근육이 뼈를 졸라매듯 들러붙은 팔다리와 몸은 홀쭉하게 쭉쭉 뻗고, 몸의 관절부가 도드라져 기괴한 실루엣을 자아낸다. 보기 좋은 몸매에서 한 발짝 더 내딛어버렸을 때의 그런 기괴함이 있는, 기형이 전혀 없음에도 기형적이라는 표현이 머리에 떠오르는 체형. 피부색도 기괴한데, 희지도 검지도 노랗지도 않은 핏기없는 회색 피부는 먼지 앉은 시체를 방불케 한다. 면도도 잘 하지 않아 턱에 자라다 만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굽슬굽슬한 까만 머리카락도 대강 자르는 것 이외엔 별 관리를 하지 않아 덥수룩하다. 우묵 들어간 안와에는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게슴츠레하게 처진 눈매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균형잡힌 이목구비며 선명한 콧날, 잘생긴 입모양이 신경써서 관리하면 빛을 볼 수도 있을 듯한 얼굴이지만, 그는 그런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인상에서 가장 기괴한 부분은 눈이었다. 그늘지고 칙칙한 생김새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기있는 선명한 색채를 띈 부분이었지만, 그 푸르스름한 색채는 사람의 눈동자라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낯선 밤하늘 아래 나직이 표류하는 푸른 별과도 같은 그 기괴한 눈동자는 명백히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편안하고 후줄근한 기능적인 옷들을 즐겨 입었다. 질긴 청바지에, 아무런 장식없는 티셔츠나 터틀넥 티셔츠, 후드티- 그것도 색이 칠해지지 않은 흰색이나, 칙칙한 회색 등의 그런 스트릿웨어들 말이다. 이따금 날씨가 영 추우면 그 위에 점퍼나 파카를 챙겨입는 정도일까. 목에는 요주의 센티넬을 감시하는 데 사용하는 신호기가 장착된 초커가 채워져 있다. 함부로 풀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고는 하나 그가 그걸 찢어버리거나 벗어버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로, 그가 그걸 얌전히 차고 다니는 것은 나는 상부의 통제에 고분고분하게 따르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성격: 외모만큼이나 비틀리고 꺾인 인간. 정상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줄은 알았으되,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향상심이 목적없는 증오와 맥락없는 자기혐오로 굳게 결박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에는 습관처럼 남은 자상함의 흔적이 있다. 독설을 쉽게 입에 담는 냉랭한 비관주의자이나, 그 행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기색이 종종 묻어나오곤 한다. 피딱지가 굳어 비늘이 된 겉껍데기와는 달리 속마음은 여물지 못해 쉬이 상처입었으나, 그는 이제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여력도 남지 않아, 전기가 흐르는 바닥 위에 목줄 매여 늘어진 개처럼 학습된 무기력에 얽매여 있다. 인생에 있어 '바람' 이나 '기대감' 따위를 모조리 포기한 채로, 그저 가축처럼 숨만 붙어있는 채로 정부 기관의 통제와 지령에 따라 일할 뿐이다.
능력: 생체 변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생체변이능력. 힘줄과 살점과 갑각, 가시, 발톱, 유독성 낭종 등으로 이루어진 변칙적인 생체기관 변이를 일으켜 그 스스로가 매우 위협적인 생체병기로 거듭날 수 있으며, 피해를 입어도 순식간에 재생하고, 반복되는 공격에 적응하고 진화하여 해당 공격에 대한 내성까지 갖출 수 있다. 그의 생체변이능력은 비단 그의 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그는 타인이나 다른 사물 역시 감염시켜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거나 변이시키며 감염을 전파시킬 수 있고, 또한 충분히 감염되거나 쇠약해진 인간, 혹은 사망한 인간을 흡수하여 인간의 기억이나 능력을 모방할 수 있다. 감염의 전파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감염체 괴물들을 양산하여 괴물 군대를 형성할 수도 있고, 지구 전체를 감염시켜 거대한 살덩이 공으로 변질시켜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S급 센티넬들 중에서도 XK 레벨 세계멸망 시나리오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역대 최흉의 능력으로, 관리협회와 정부기관의 엄중한 감시를 받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정확한 능력은 알려지지 않은 변칙성 바이러스를 제어하는 것으로, 바이러스를 제어한 결과가 신체의 변형이나 다른 사물 혹은 생명의 감염 및 변이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가 제어하는 바이러스는 집단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아이작은 '그들' 이 걸어오는 말에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다. 아이작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미루어보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일단은 그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그가 의도치 않은 감염이 발생하는 일은 없으나, 예외적으로 가이드가 가이딩을 위해 접촉할 때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이러스가 적극적으로 가이드를 감염시키려 시도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바이러스의 감염은 가이드 능력으로 막아낼 수 있으나, 바이러스 감염을 막으면서 가이딩을 해야 하기에 S급의 가이드라 하더라도 그에게 충분한 가이딩을 제공해줄 수 없다. 해당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지닌 가이드라면 그에게도 충분한 가이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아이작의 바이러스에 내성을 지닌 가이드가 나타났다.
기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정부측의 센티넬이지만,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고용했다기보다는 통제하에 두고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것에 가깝다. 그렇지만 당연히 정부의 센티넬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급료나 수당, 성과급을 받는다. S급 센티넬에게 지급되는 정당한 액수의 급료를 받고 있으나, 좋아하는 것도 없고 소비에 대한 의욕도 없어 소비가 극단적으로 저하되어 있는 기괴한 생활양식 때문에 그의 통장에는 어느 센티넬보다도 많은 돈이 무덤에 파묻히듯이 예금되어 있다.
유아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성장했으며, 광신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원장의 양육 하에 불행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같은 원생들과 함께 매 순간 짓지도 않은 원죄를 추궁당하며 속죄를 위한 고행을 빙자한 학대와 설교를 빙자한 폭언을 받아왔으며,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매 년마다 원생 중 한 명이 선택되어 '제물' 로 바쳐져 산 채로 인신공양을 당하는 것까지 지켜보아야 했다. 사회와 격리된 높은 담장 너머의 고아원에서 행해진 이런 엽기적 사태를 눈치채는 이는 없었고, 아이작이 18세가 되던 날 그가 제물로 선택되었으며, 그의 배에 의식용 단검이 꽂히는 그 순간 그의 능력이 발현됐다.
능력 발현과 함께 그는 국지적 흑색 생물학 재해 사태를 일으켰고, 그가 자라던 고아원이 위치한 마을 전체를 뒤틀린 살점의 숲으로 변이시켜 감염체 괴물들이 배회하는 지옥으로 만들었다.
S급 센티넬 4명을 비롯한 숱한 희생자를 낸 끝에 생물학 재해 사태는 종결되었으며, 해당 사태는 대규모 가스관 연쇄폭발로 위장되어 은폐되었다. 이후 아이작은 투항 의사를 보였고, 정부 기관은 최대한의 프로파일링과 능력 분석 끝에 그를 정부기관의 센티넬로 등록하여 엄중한 감시하에 두자는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정부 소속 센티넬은 "히어로" 처럼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대중에 노출되기 마련이나, 아이작은 그 능력의 기괴한 특성과 불안정한 성격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기밀로 취급되는 센티넬이다. 주된 업무는 정부에 적대적인 센티넬들 중에서 특히 위협적인 센티넬들을 상대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심문 대상에게서 정보를 '추출' 해내는 것.
이름: Miriam M. G. Morris 나이: 19세 성별: 女 직위/등급: 가이드 / [C]
외모: 하얗고 복실거리는 머리카락와 순하게 쳐진 눈매는 양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어갈 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손목이나 손가락 마디의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깡마른 몸이나, 갈색의 피부임에도 건강하다는 느낌은 일절 주지 못하는 피부는 여리고 처연한 분위기를 심화시켰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알비노의 그것처럼 신비롭거나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지 못했다. 오히려 하얗게 세어버린 노인의 세월을 연상시켰다. 끊어질 듯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겨우 보였다. 동양의 보석이라던 옥을 닮은 색이었다. 혹은 얕고 맑은 바다의 파도를 떠올리게 되는 색이었다. 눈동자는 늘상 눈치를 보듯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조용하게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앙 다물린 입술은 여러번 쥐어뜯긴 듯 피딱지가 보였으며 색이 바래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에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벙벙한 스웨터나 맨투맨를 자주 입었다. 여름에는 반바지를 종종 입기도 했으나 항상 무릎 바로 위에 오는 길이보다 짧지는 않았다. 신발은 검은색 운동화를 자주 신었다. 센티넬만큼이나 가이드도 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경우가 잦았기에. 이미지 참조: https://picrew.me/image_maker/42963/complete?cd=vRZBw0dw0e
성격: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 하지만 상냥하고 올곧으며 강단도 있는 아이...로 보였다. 그를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십에 십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미 뒤틀린 것을 예쁜 껍데기로 두르고 있을 뿐이다. 누더기를 기워 내보였으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기준에 맞춰 답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그의 기준은 선과 악이 아니다. 그의 기준은 사랑이다. 그는 사랑에 목말랐다.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확인하고 싶어했다. 가슴을 갈라 피로 뒤덮인 사랑을 꺼내고자 했다. 그렇게라도 제 손에 쥐어 온전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해? 정말로? 그렇다면 증명해. 내 손과 발에 입 맞추고 나만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란 말이야. 네가 온전히 내 것이라 말해!!
기타: 후천적 센티넬 및 가이드의 평균 발현은 15세, 19세에 발현한 그는 꽤 늦은 편이었다. C급 가이드의 존재는 그럭저럭 평범했다. 가이드가 항상 부족한 것을 떠올리자면 나름 인재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애매한 등급인 건 매한가지였다. 의무적으로 돌리는 매칭에서 S급 센티넬과 매칭률 98.93%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만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평범했을 것이다. 시스템의 오류로 생각한 센티넬-가이드 관리 협회는 다시 한 번 실험을 주도했으나 오히려 99.70%로 높아진 매칭률이 기록되었다.
그는 입양아다. 투자 목적에 가까운 입양이었다. 검사에서 가이드 혹은 센티넬로 발현할 확률이 높게 나왔으나 17세가 되도록 발현을 못하자 거의 버린 자식에 가까워졌다.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19세의 생일, 그는 기적적으로 발현했다. 그것도 가이드로.
센티넬과 최초로 90% 이상의 매칭률을 기록한 가이드, 그것도 지금껏 전담 가이드가 없던 S급 센티넬의 가이드는 귀하다. 그는 권력과 애정을 손에 넣었다. 그의 가족들은 이제 빌빌 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권력도, 애정도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싶은 것은 그딴 것이 아니었다. 그저....난,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딴에 숨긴다고 숨기고, 실제로도 맡기 힘들긴 하지만 가까이서 체향을 맡게 된다면 담배 특유의 독한 향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간접 흡연 정도로는 묻을 수 없는 냄새가 말이다.
그의 가이딩은 독특한 향기를 풍겼다. 아직 보름달이 기울지 않은 새벽, 눈으로 뒤덮인 전나무 숲 속에서 날 법한 향이 흘러들어왔다.
응, 당연하지!! 집착 망사랑 너무...좋아 짜릿해 늘 새로워@!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저야말로 부족한 솜씨나마 열심히 해보겠습죠 잘 부탁드립니다(그랜절)
처음 만나는 순간이면....내 생각으로는 처음 매칭 검사 결과를 보고 믿지 못한 연구원들이 미리엄과 아이작을 직접 불러서 가이딩을 측정해보는 걸로 생각하고 있거든? 이 때 가이드가 전염되서 죽느냐 안 죽느냐도 겸사겸사 확인할 겸해서. 그 때 빼도박도 못하게 검사 결과가 나오면서 이제 인정받는 걸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은데....아예 이 부분부터 돌려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아예 같이 임무 나가야 하거나 뭐...그런 순간부터? 아이작주는 어느 쪽이 좋아?
개인적으론 2차 검사에서 마리에게 아이작의 혈액에서 채취한 바이러스를 노출시켜보는 쪽으로 추가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대면시킨다는 것도 좋겠네. 그런데 나는 아이작에게 가이딩을 하려다 가이딩도 못하고 바이러스에 잠식당해 죽은 가이드가 두어 명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바이러스의 치사성보다는 마리가 정말로 아이작의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확인할 겸해서 두 사람을 접견시킨다고 하는 거라면 괜찮겠다! 나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도, 처음으로 같이 임무를 나가는 순간도 다 좋지만 기왕 하는 거 다 해보고 싶어. 마리주가 좋다면 최초 면담부터 돌려보는 건 어떨까?
오 어 정확히 말하자면 (매칭률 높게 나온 그) 가이드가 죽나 안 죽나를 말한 거였어...좀 구체적으로 말할 것 그랬네. 시트 보니까 이미 가이드한테도 전염된다는 실험은 한 것 같길래...(머쓱타드) 나도 좋아! 그러면 최초 면담부터 해보자!! 어떻게 시작하면 좋으려나...🤔 아이작이나 마리가 먼저 도착한 상태에서 연구원이 나머지 한 명을 데려오거나 들여보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게 좋으려나? 아, 일단 선레는...다이스를 굴릴까...?
* 두 차례의 시험 결과, 마리의 가이드 등급은 C급으로 책정되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협회의 통지서가 마리에게 배달되었다.
* 그러나 두 번째로 도착한 통지서에는 조금 이상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마리가 특정 S급 센티넬과 99.70%의 공명율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 더 이상한 것은, S급 센티넬들은 대중에게 있어서는 슈퍼히어로와 같은 존재였기에 보통 S급 센티넬과 매칭되었다고 하면 해당 센티넬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보통인데, 통지서에는 해당 센티넬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칸에 <기밀> 이라는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 통지서에는 해당 센티넬과의 접견을 위해 모월 모일 협회의 지부로 출석해 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고, 마리는 통지서의 요청대로 정해진 날짜에 협회에 방문했다.
* 지금까지 센티넬/가이드 관리협회의 지부는 시청의 민원창구 같은 사무적이지만 개방적이며 일상적인 분위기였고, 좀 큰 지부라고 해도 그렇게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리가 이번에 방문한 지부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그러나 꽤 직책이 높아보이는 사람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상황이 변했다. 차가운 조명에 엄중한 회색 복도에는 CCTV가 잔뜩 깔려있었고 무장병력 여럿이 문마다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두꺼운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제각각 다른 키카드가 필요한 삼엄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 마리를 인솔해주는 직책 높아 보이는 양복차림의 사람은, 마리의 질문에는 대부분 가보면 알게 될 거라는 말로 대답을 흐렸지만, '매칭된 상대가 S급 중에서도 이레귤러라고 할 만한 독특한 존재' 라거나 '성격이 좀 괴팍한 편' 이라는 둥 오늘 만나보게 될 센티넬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마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오늘의 접견과 관련있어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를 인솔해 온 사람도 마찬가지였고. 양복 차림의 사람은 이마의 땀을 한번 닦은 뒤에, 마리의 손에 키카드를 하나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키카드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리와 매칭된 센티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안에 들어가면 연구원들의 지시를 따르라고 알려주고는 그 사람은 바삐 되돌아서 가 버렸다.
문을 열면, 꽤 밝은 조명이 켜진 방이 보일 것이다. 방 모퉁이에는 카메라와 스피커가 달려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 건너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사람이 한 명 앉아있었다. 조금 야위어보이는 홀쭉한 체형의 그 사람은 새하얀 구속복 차림이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고, 탁한 빛깔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더벅더벅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우묵 패인 눈매는 미동 없이 감겨 있었다. 마리를 기다리다가 잠깐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TV 뉴스 같은 데서 보던 얼굴은 아니다. 그가 그들이 말한 마리의 센티넬일까? 그를 깨워야 할까?
C급 가이드라는 것을 판정받은 날, 미리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웠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C급이라곤 해도 가이드는 가이드. 아무리 흔하다 한들 센티넬의 수에 비해 늘 부족한 가이드의 존재는 귀했다. 순식간에 달라진 취급이 어이 없기만 했다. 미리엄의 가족들은ㅡ 그 날부터 미리엄을 인간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존재로 취급해줬다고 해야 할까. 멸시할 가치조차 지니지 못한 투명인간에서 인간으로 격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미리엄은 두 번째 통지표를 받았다. 글자를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몇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S급 센티넬과, 그것도 전무후무한 기록의 매칭률로. 미리엄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부단히 힘을 주었다. 무려 S급 센티넬이다! 그것도 저런 매칭률이라면...미리엄은 센티넬에게 있어 가이드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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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은, 말하자면, 실로 오랜만에 들뜬 상태였다. 그걸 평범하게 들떴다고 평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편범한 19살이 보일만한 반응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적당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주눅든 것처럼 눈을 굴렸다. 어깨를 당기고 허리를 굽혔다.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불안해 보이도록 옷자락을 꾸욱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바닥을 향하고 있는 시선이 건조하다는 것을 알 사람은 없었다. 미리엄은 키카드를 받았을 때, 이 긴긴 길도 마침내 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마 이 너머에는 센티넬이 있을 테다. 모든 것이 비밀로 붙여진 '그' 센티넬. 미리엄은 지나치게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몇몇 센티넬의 괴악한 생김새를 떠올리며, 그것보다 최악을 상정했다.
가족들의 폭언이 이리도 도움되는 날은 많지 않았다. 불쌍한 미리엄, 반푼이 미리엄. 너에게 해 뜰 날은 없을 거란다. 귓가에 웅웅 을리는 말을 명심했다. 심호흡을 한 미리엄은, 떨리는 손으로 키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문이 열렸다. 삼엄한 경비 치고 생각보다 멀짱해 보이는 방이었다. 문을 바로 뒤로 둔 채로, 미리엄은 시선을 이리저리로 던졌다. 카메라, 스피커, 테이블, 의자...그리고 사람 하나. 생각보다 괴악하게 생긴 사람은 아니었다. 찬찬히 뜯어보자면 어느 정도 독특하기는 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색빛 피부, 움푹 패인 눈가와 늘어져있는 눈그늘. 이리저리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관리도 제대로 안 한 것 같은 수염 자국. 저 닫힌 눈꺼풀 뒤에 있을 눈동자는 무슨 색일까.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리엄은 다시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사람은 아무래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깨워야 할까? 기다린다면 곧 연구원이 오기야 할 것이다. 잠시 두 선택지 중 저울을 기울여보던 미리엄은 손을 뻗었다.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면 잠을 깨우려는 것처럼 센티넬의 어깨 즈음을 톡톡 두드릴 것이다.
별로 까다롭지는 않았어! 선레 읽으면서 뭔가..1인칭 시점 선택지 게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리가 아직 손에 안 익어서 장면은 그럭저럭 떠오르는데 글이 느리게 써지는 거 있지? 벌써 밤 시간이내. 비가 한 번 왔더니 밖이 엄청 추워. 그쪽은 어때?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아이작은 좋아하는 날씨나 싫어하는 날씨 있어?
내가 레스를 쓸 때 내 캐릭터의 1인칭 시점보단 내 캐릭터를 바라보는 3인칭 시점으로 쓰는 게 더 편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비가 오고 나선 밤바람이 다시 쌀쌀해졌네. 감기 안 걸리게 창문 단속 잘하고 자! 아이작의 경우는 사시사철 자기 방에 암막커튼을 쳐놓고 지내기에 날씨에 대한 호불호가 무딘 편이야. 다만 빗소리를 좋아해서, 비가 오는 날은 좋아해. 많이 오면 많이 올수록.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는 어떻게 해도 1인칭이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같은 게 그나마 편하더라고 응, 걱정 고마워! 아이작주도 감기 조심하고. 요즘에 날씨가 따스해졌다가 추워졌다가를 반복해서 감기 걸리기 딱 좋을 것 같더라. 암막커튼을 치고 지내는 이유가 있을까? 일단 비 오는 날....(메모해두기) 마리랑은 완전 반대네! 마리는 비 오는 날은 캄캄해서 싫어하고 구름이 없어서 달이 환하게 뜨는 날을 좋아해. 나중에 비오는 날로도 일상 한 번 돌려보고 싶다..!
미리엄의 손은 허공을 소리없이 갈랐고, 그것이 하얀 방호복의 표면에 닿기까지 남자는 느리게 숨을 쉬는 것 말고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리엄의 손이 조심스레, 살며시 노크하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을 때,
남자의 눈두덩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 한가운데서, 푸른 달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푸른 눈동자. 그러나 그 푸르른 색깔은 코카시안의 혈통에서 유래한 그런 인간적인 파란색이 아니라, 마치 길을 잃어 낯선 하늘에 떠오른 이방의 달을 방불케 하는 기묘하게 선명한 푸른 빛이었다. 그것은 깜빡임도 없이 천천히 떠져서는, 자신의 잠을 깨운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점점 떠지면서, 그의 눈썹에 무언가 희미한 표정이 걸린다. 속삭임이, 멈췄어. ...의아해하는 듯한 표정이다. '누구세요?' 같은 단순한 의아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당신은..."
하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온다. 이름 같은 것을 물어보려고 꺼낸 질문이 아니었으나, 혼란스러운 악몽에서 방금 깨어나 혼탁한 머리로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상적이네요. 일반적인 C급 정도의 가이드라면 아이작이 있는 밀폐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바로 호흡곤란 반응을 보일 텐데 말이죠." "호흡곤란은커녕 별 이상도 느끼지 않는 것 같네요." "실내의 공기 성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입니다." "무의식 상태에서는 아이작이 병원체의 의사를 제어하지 못해서 가이드에게 가해지는 위협이 더 클 텐데... 뭐랄까... 병원체가 가이드를 공격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느껴지네요." "-사전 반응은 이 정도로 해도 좋겠네요. 이제 진행요원을 입장시키세요.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죠."
방음처리된 매직 미러 너머에서, 흰 가운을 입고 필기판을 든 무리들이 수군거리며 필기판에 무언가를 제각기 필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직 미러 너머의 모습이 미리엄에게 보일 일은 없었다. 잠시 뒤, 매직 미러 너머의 연구원들이 아이작이라고 부른 센티넬과 미리엄이 있는 방으로 다른 연구원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연구원은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미리엄에게 그 센티넬을 소개해 주었다.
"오셨군요, 미리엄 양. 소개드리기 앞서, 이 분은 능력 특성상 S급 센티넬들 중에서도 대중에 그 존재를 노출하지 않고 활동하는 센티넬이라는 점과, 존재 자체가 2급 기밀이라는 점을 먼저 고지해 드려야겠군요. 아이작 씨입니다. 아이작 씨, 이 쪽은 미리엄 양입니다. 매칭 테스트에서 아이작 씨와 99.70퍼센트의 공명율을 기록한 가이드가 바로 이분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미리엄은 가이드다. 갓 발현해 미숙한, 가이딩을 조절할 줄도 모르는 가이드. 남자에게 손이 닿은 순간부터 미약하게나마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실내에 시린 바람이 스며들었다. 달이 휘영청 뜬 겨울의 새벽,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밭과 짙은 녹음을 뽐내는 전나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엄은 둥그러니 쳐진 눈을 깜박였다.
얕은 에메랄드빛 바다와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달이 눈을 마주쳤다. 미리엄은 일순 몸을 굳혔다. 손을 거두거나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인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눈동자에 천천히 감정이 들어찼다. 공포? 혐오? 아니다. 좀 더 원초적인....그래, 차라리 탐욕이 올바른 명명일 것이다. 예쁘다. 나 '저걸' 가지고 싶어졌어.
미리엄은 똑똑한 아이였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며 웃었다.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욕망을 눈꺼풀 뒤로 감췄다.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의 말은 새벽의 고요함을 닮아 있었다. 무언가 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리엄은 그제서야 손을 거두었다. 시선이 당신에게서 떨어졌다. 입술이 굳게 다물려졌다. 소개 이후에 이어진 질문에 미리엄은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어 연구원을 보았다. 곧이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황한 것처럼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어, 아뇨...전혀 없었어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순진한 낯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반해 차갑게 식은 이성이 속삭였다. 이건 실험이었다. 전에도, 아니,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멀쩡하고.
결론을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게 생각한 미리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연구원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물건'을 품평하듯 하는 시선으로 미리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찰나였으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연구원은 시간을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정해진 대사를 읊듯 지시를 내렸다.
"오늘 할 건 간단한 테스트에 불과하니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먼저 두 분, 손을 맞잡아 보시겠습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미리엄은 잠시 머뭇거리다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빠끔거리며 입모양으로만 말을 건네왔다. '손, 잡아도 괜찮아요?' 아이작의 것에 비해서는 한참 작을 손이 애매하게 공중을 떠돌았다.
공허한 우주를 지나 이방의 달이 도달한 곳은 평온한 겨울 숲의 밤이었다. 공허처럼 텅 비어있으나 공허와는 다른, 숨막히도록 조용한 평온이, 그 남자에게 난생 처음으로 깃드는 순간이었다. 낯선 공기 가운데서 남자는 구름처럼 고요히 잠에서 깨었다. 얼굴에 서서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는 당신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에는 차가운 순수가 있었다. 풍파를 거치며 훼손된 흔적이 남았음에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은 순수가, 경이를 머금고 당신을 응시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미리엄에게 남자는 메마른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미리엄의 뒤로 문이 열리는 모습에 남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눈을 떼자, 남자도 나직이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하고는 연구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구원이 미리엄을 짤막하게 소개해줄 때, 남자의 눈에는 여전히 기묘한 이채가 비치고 있었으되 그 얼굴표정에는 방금 잠에서 깬 무방비한 모습은 사라지고, 타인들 앞에서의 가장을 위한 막막하리만치 덤덤한 무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하고, 남자- 아이작이라고 소개받은 센티넬은 자신이 하려던 말과는 다른 삭막한 말을 내어놓았다.
손을 댈 때 연구원이 기대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 아이작이라는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엄에게 품은 의문이 있을 텐데, 남자는 의구심마저 드러내지 않고 참을성있게 무표정을 유지했다. 연구원이 아이작의 구속복에 채워진 매듭을 풀어주며 다음 지시를 내릴 때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구속복 소매를 걷고 손을 꺼낼 뿐이었다.
그러나 미리엄이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무표정의 틈새로 그의 눈빛에 무언가 담겨있는 것이 미리엄에게 보였다. 미리엄과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낯선 것에 대해 어린아이가 흔히 품곤 하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범벅된 불안이 그의 눈에 있었다. 그러나 눈빛과 달리, 아이작의 손은 미리엄의 손으로 뻗어왔다. 창백하고 핏기가 없는 손아귀. 손가락은 홀쭉하고 길게 뻗어있는데, 손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툭툭 불거져있는 그것은 마치 하얀 거미 같았다. 나를 잡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대신, 아이작은 고개를 가볍게 까닥했다.
제 3자가 들어온 순간부터 희미하게나마 걸쳐있던 미소는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불안해 보이며 경계심 어린 표정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반갑다는 말에도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을 받을 뿐이었다. 굳게 닫힌 입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속복을 푸는 모습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구속복이라, 무엇을 위해? 저 사람이 진실로 S급 센티넬이라면 저런 구속복이 의미가 있나? 특수제작인가? 그렇다면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생각이 빠르게 오갔다. 끊어졌다. 이질적인 푸른 눈 속에 담긴 것을 다시금 마주하는 순간, 미리엄은 그 외를 생각할 수 없었다. 미리엄은 방금 전, 둘만 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그것이 언뜻 아이작의 불안을 잠재우려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미리엄은 뻗어오는 손을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단단히 잡으려 했다. 당신에 비한다면야 한참 작을, 그러나 부드럽지만은 않을 손바닥이 겹쳐졌다.
미리엄은 여러모로 설원을 생각나게 하는 아이였다. 새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이 그러했으며, 이제는 더욱 짙게 풍겨오고 있는 전나무 숲의 향취가 그러했다. 그는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설원을 떠올리게 했다. 분명 시린 풍경임에도 왜인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맞닿은 곳으로부터 겨울의 한자락이 피어올랐다.
"이전과 동일하게 작열감이나 구토감 등 신체적 이상은 없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하는 것은 실험에 가까웠다.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의 존재는 특이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엄 양, 아이작 씨를 안아보시겠습니까?"
미리엄은 눈동자를 도륵 굴려 아이작을 보았다. 어차피 결정권이 많지 않은 건 알았다. 그럼에도, 해도 괜찮겠냐 묻는 것처럼 당신을 보는 시선은 조심스러웠다.
사실 그 구속복의 물리적 구속력은 남자의 목에 채워진 초커만큼이나 빈약했다. 다만 그 초커와 마찬가지로, 그것에는 물리적인 강도 이상의 구속력이 있었다. 기관의 허락 없이 잡아뜯어 버리면 과태료 혹은 징계- 구속복을 잡아뜯고 나서 벌인 일에 따라서는 반정부 센티넬로 간주되어 기관의 적으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있다. 기관의 엄격한 규정이 그것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이드에게 이 센티넬은 이 정도의 통제가 필요한 위험인물이라는 경고와 함께, 이 센티넬이 우리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안심시켜주는 역할도 겸했다. 마치 맹견에게 씌운 입마개와 목줄 같은 것이랄까. 그러나 그게 묶어두고 있는 것은 단순한 맹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미리엄의 손이 묶여 있던 남자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은 좀 기괴한 색과 모양이긴 했지만 어쨌건 사람의 손이었으나, 그 손에 어린 냉기에는 왜인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아주 생소한 것을 접했을 때 보이는 경탄. 그것이 그 남자의 빛날 정도로 푸른 눈 위에서 반짝이자 그것은 경외심으로까지 보였다. 아주 고요한, 하지만 아주 분명한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얼굴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눈빛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이내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미리엄의 손을 아프지는 않을 만큼 꼭 쥐어보았다. 낯설면서도 그리운,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시감에 그는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나, 취하고 있는 건가.
연구원은 미리엄에게는 질문을 던졌지만, 아이작에게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미리엄이 있는 이 자리에서는 질문을 일부러 던지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구원이 꺼낸 다음 지시에, 아이작은 한번 연구원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미리엄을 바라보았다. 미리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선택권은 없었다. 다만 미리엄의 조심스러운 시선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에, 아이작은 조금 당황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이다가 말없이 당신에게로 팔을 벌려 새하얀 구속복 차림의 품을 무방비하게 내어보였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쑥스러워서, 아이작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결국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작의 손은 차가웠다. 사람의 손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서움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미리엄은 손을 더 단단히 쥐려 했다. 당신, 혹은 그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기도 했다. 다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이작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음을 피워올렸다. 그 자신이 무해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이얀 웃음이었다.
미리엄은, 연구원을 다시 보았다가, 팔을 벌린 아이작을 다시 보았다.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으나 얼마 가지는 않았다. 미리엄은 천천히 걸어가 아이작을 안았다. 모습을 보자면 안겼다는 말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미리엄은 팔을 당신의 허리에 두르고 얼굴을 폭 파묻었다. 가만히 안고 있다가, 아이를 달래듯 등을 느릿한 손길로 토닥였다. 서투른 손길이었다. 시린 공기가 흘러들어갔다.
이렇게 누군가를 안는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더라. 미리엄은 기억을 더듬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거나 토닥이는 것은 얼마나 되었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이에게 닿는 것이 생각 외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행이었다.
그의 손은 쉽사리 당신의 온도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잠깐 거머쥐고 있자니 서늘함이 서서히 잦아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작은 미리엄과 시선을 쉽사리 맞추지 못했지만, 눈에 미리엄의 미소가 걸릴 때마다 시선을 쉽게 떼지도 못했다. 그는 명백히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낯선 감정에 보이는 반사적이고 소극적인 거부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미리엄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품은 쉽사리 미리엄을 받아안았다.
객관적으로 말해 아주 안락한 품은 아니었다. 구속복이 그렇게 두껍지는 않아서 옷 너머로 그의 품이 꽤 분명하게 느껴졌다. 싸늘하기는 손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고, 그의 품이며 당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안는 팔뚝에 배겨 있는 튼튼하면서도 앙상한(표현이 이상한데, 느낌이 그랬다) 근육들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등을 쓰다듬을 때는 불거진 갈빗대며 울룩불룩한 등근육들이 생생히 만져졌고, 끌어안는 동작은 조금 쭈뼛거리는 것이 영 서툴렀다.
그렇지만 당신을 받아 안는 그 포옹에는, 분명히 미리엄에게는 오래간만일지도 모를- 낯선 쭈뼛거림으로도 감출 수 없는 살갑고 기꺼운 기색이 있었다. 미리엄이 힘을 주어 꼭 끌어안자, 아이작의 상반신이 당신에게 조금 기울어졌다. 문득 미리엄에게 미리엄의 것이 아닌 희미한 심장박동이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작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곤 미리엄의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댔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유기견 같았다.
>>33 >>35 히..히.....(이 글을 마리주가 매우! 좋아합니다) 강의랑 과제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이작주 응원 받으니까 좀 힘난다!!
마리: (아이작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리: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마리: 어차피, 마리: 넌 내 것이고, 난 내 손에 들어온 걸 놓을 생각 없거든.
첫키스는 확실히 본편에서 해야지...벌써 하면 나중에 아쉬워!! 지금 나도 마리 고삐 잡고 말 가리는 중이야 이러다 다 말할까봐.... 노래 좋다!! 마리 목떡은 아직 몇개 중에서 고민 중이라서..나중을 기약하는 걸로! 남자 두 명 중에서 아이작 목소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워??
저녁.. 먹고..왔...다... 다소 전투적인 저녁이었어.. (배가 빵빵) 힘이 난다니 다행이네. 기왕인 거 저녁도 맛있는 걸로 먹어! 두 남자 목소리 중 어느 쪽 목소리인지는 마리주가 더 끌리는 쪽으로 생각해도 무방해! 하지만 아이작주는 2절을 시작하는 좀더 덩치있는 쪽(미쓰라진)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이작: ...취향이 참 별나시네요. 아이작: 당신이 지금 뭘 거머쥐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 좋겠는데. 아이작: 정말이지,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아이작: 걷잡을 수 없게 돼버릴 것만 같은데. 지금 이 순간도. 매 순간이.
미리엄의 손도 썩 따듯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온도는 아니었으나 아이작의 것에 비하면 사람답다고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는 서로의 온도가 스며들어 비슷해졌을 테다. 미리엄은 당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쉽게 알아차렸다. 저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은 어른이 저를 보고 쑥스러워 한다는 건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이작의 등을 토닥이며, 미리엄은 호기심을 억눌러야만 했다. 불거진 갈빗대라던가 근육들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으나 미리엄은 '예의'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라도 저런 모양들을 따라 쓸어내리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같은 나쁜 생각도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내, 작은 소리가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희미한 고동 소리가 들렸다. 미리엄은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이작의 쪽으로 몸이 조금 더 기울었다. 규칙적인 소리는 사람을 풀어헤치기 충분한 것이라, 미리엄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늦췄다. 어깨에 느껴지는 온기를 오롯이 받아들였다.
미리엄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전면에 배치된 거울의 용도를 모르지 않았다. 광물은 빛날지 몰라도 온기가 없다. 옥을 그대로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가 거울 너머를 향했다. 누군가가 그 너머에 있다는 걸 직감한 것처럼 말이다. 미리엄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방 안에 있는 연구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검증은 여기서 끝인가요? 아니면..."
말 끝을 적당히 흐렸다. 건조한 목소리가 작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슬슬 이 정도로 실험했다고 하고 끝내도 될 것 같고, 아니면 더 해도 될 것 같은데...사실은 내가 아이디어가 떨어져가는 중이라 ( ..)
잘 먹고 왔어?? 나는 저녁 쌈채소랑 밥이랑 해서 든든히 먹고 왔어! 사실...빵도 조금 뜯어먹었고 그래.. 나는 두 쪽 다 어울리는 것 같아서 고르기가 어려운 걸... 그러니 아이작주가 말해준 쪽으로 생각해둘게! 아이작주가 이렇게 찰떡인 목떡을 가져오면 이제 마리주는...마리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마리: 어라라, 내 것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 거야? (웃음) 마리: 보통은 소유격 부분을 먼저 부정하지 않던가. 사람은 소유할 수 없는 존재라던가 이야기하면서 말이야.
앗... 마리주가 오기 전에 내가 잠들어버렸네... 쌈 싸먹고 왔구나. 지금쯤이면 자고 있겠지? 마리의 목떡은 천천히 가져와도 좋아. 답레는 천천히 써서 둘게. 우선은 이 모먼트부터..
아이작: 오, 조금 튕기는 척을 해드렸어야 했나요? 아이작: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 운운하는 헛소리를 믿을 정도로 휴머니스트도 아니거니와, 무언가에 소유되는 건 익숙하니까요. 아이작: 한때는 내가 짓지도 않은 원죄의 소유였고, 최근까진 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죠. 아이작: 당신이 나를 소유하겠다는 것이 나를 마음에 담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마음 속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리라도, 나같은 것에겐 과분할 테니.
답레는 천천히 줘도 괜찮아! 오늘은 어제처럼 날이 좀 따뜻한 것 같아. 아이작주는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있을까?
마리: 아니-, 지금이 좋아. 난 아무래도 말 잘 듣는 개새끼가 되겠다는 사람이 취향인 모양이라서. 마리: ...역시 그건 좀 거슬리네, 당신 목줄이라던지...아직까지도 정부의 소유라고 낙인 찍혀 있는 것 같아서. 마리: (초커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떼었다.) 마리: 그렇다고 벗으라 할 건 아니지만, 당신이 누구의 것인지 정도는 똑바로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 사랑. 마리: 내가 당신에게 내어주는 건 고작 보잘 것 없는 자리 정도가 아니니까.
미리엄의 시선이 뻗어온 매직 미러 너머에서, 미리엄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자기들 좋을 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동조율은 99.70%에서 안정되어 있습니다. 실내 대기에서도 어떤 생물학적 이상사항도 검출되지 않고 있네요. 혈액 샘플 실험에서 기대한 대로의 반응입니다." "맥박이나 표정 등에서 나타나는 징후를 감안하면,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꽤 호감을 갖고 있는 모양이네요." "동조율이 높지 않은 가이드와 아이작이 같이 있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아주 인상적이에요. 저번에 그 센티넬 범죄자 조직에 동조한 가이드를 아이작에게 던져줬을 때 기억나세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저는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토할 것 같아서..." "어쨌건,"
미리엄이 시선을 돌릴 때, 연구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보이는-비유하자면, 마치 학부생들 사이에 서 있는 교수 같은- 연구원이 말을 꺼내자, 방에 있던 연구원들 모두가 침묵했다.
"최초 접견에서 별다른 이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각인 수속을 진행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겠네요. 현 단계에서 상호간의 반응을 살피는 건 여기까지로 하고, 특수기동대 대기령을 해제하고 통상적인 매칭 수속을 진행시켜 주도록 합시다. 안에 들어간 친구에게 그렇게 진행하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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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이 질문을 던지자, 연구원은 정중한 웃음으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고는 귀에 차고 있던 핸즈프리에 손을 대었다. 뭐라 말은 하지 않았음에도 대답이 돌아왔는지, 연구원은 미리엄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네, 됐네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접견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이네요. 이대로 가이드-센티넬 매칭 등록 절차와 각인 절차를 진행해도 괜찮겠네요. 매칭 등록 결정권은 가이드인 미리엄 양께 있고, 등록하기로 결정하신다면 각인 절차에까지 동의하시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아, 포옹하고 있는 것은 이제 놓으셔도 돼요. 등록하시겠어요?"
-그러나 미리엄이 그 포옹을 푼다고 해서, 아이작이 당신을 바로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포옹을 풀고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래도 눈을 감은 채로 멍하니 당신을 끌어안고 있다가, 당신이 한번 더 벗어나려고 시도해야 당신이 포옹을 풀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 당신을 놓아주겠지.
>>43 내가 답레를 보통 메모장에 써서 작성칸으로 옮기는데, 옮기다가 맨 첫 단락을 빼뜨려먹었네.. 글머리에 이걸 추가해서 읽어줘!
< 예의- 물론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 미리엄과 미리엄의 센티넬 사이에는 예의라는 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초면의 남자의 품에 끌어안겨 그 고동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99.70%라는 역대급의 동조율을 기록한 가이드와 센티넬의 사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으니까. 특수성. 미리엄에게 그는 초면의 남자 정도였지만, 아이작에게 그녀는 조금 더 복잡한 의미가 있었다. '초면의' 가 아니라 '최초의' 였으니까. >
낮잠 자기 아주 좋아서 낮잠을 때려자다가 점심을 놓쳤어8v8 그것 빼고는 괜찮다! 점심은 간헐적 단식 한 걸로 치자.. 마리주가 있는 곳도 날씨가 좋은 것 같네. 과제는 잘 되어가고 있어?
아이작: (킥킥거리며 웃음) 개... 그것 참 시적인 표현이네요. 아이작: -이 초커는, 내가 다른 이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얌전하게 있겠다는 약속이 유효하다는 증거... 같은 것이니까요. 아이작: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이게 필요해요.
아이작: 나는 자리잡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거에요. 아이작: 나를 사랑해준 당신을 위해서.
미리엄은,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통상적으로 말하는 예의를 숙지하고 있었다. 가이드 일은 그에게 있어 처음이었다.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익히 들어보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일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미리엄은 최대한 '정상적'으로 굴었다.
연구원에 말에 아이작을 안고 있던 손을 푸르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손길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굳이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안긴 채로 몸을 틀어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취했을 뿐이었다. 제 생각보다 가이드의 영향력을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리엄은 잠시 저울질을 해보았다. 자신은 고작 C급 가이드다. 그것도 지금처럼 가이드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게 좋지도 않았다. 이- '아이작'이라는 사람과 매칭을 한다면? S급 센티넬의 유일무이한 가이드다. 반응을 보아하니 저 이전에는 이를 가이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을 것이다. 미리엄은 상황의 주도권이 완벽히 제게 있는 것을 선호했다. 이 S급 가이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가이드가 없었다면 꽤 골칫덩이였을 터.
어떤 방식이어야지 내가 제일 많은 이권을 챙길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해야만 내가 최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고작 19살이 머리를 굴린다고 하여도 낼 수 있는 방책은 한계가 있었다. 그것도 권력마저 없는 한낱 아이라면. 미리엄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여기서, 등록하지 않겠다 하면 어떻게 되죠?"
당신네들은 표면적으로라도 선택권을 줄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미리엄은 겁먹어 불안해 하는 아이를 충실히 연기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조금은 당황해 머뭇거리는 아이. 초면인 사람과 갑작스레 만나 낯을 가리고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순진하고 어린 소녀. 당당하게 말하려 했지만 숨길 수 없는 두려움에 목소리를 떠는 것처럼 보이도록.
저녁은 먹부림 거하게 부리려고 ^.^! 과제는.. 항상 그렇지... 그렇지만 해도 또 생길 뿐이잖아, 하고 안 해버리면 과제가 '쌓여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니까 어쩔 수 없어..
아이작: (마리의 손에 기대서 눈을 감는다) 아이작: 평생 도망자로 살던가, 아니면 이 별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할 겁니다. 아이작: 그 과정에서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능력으로 인해 당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고려하면, 나는 이 보잘것없는 목걸이 하나와 이 세상을 맞바꾸려 들고 싶지는 않군요. 아이작: 이게 내게 허락된 행복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과분하다고 해도... 지나치게 머뭇거릴 생각 없거든요. 아이작: 고분고분한 개가 취향이지요, 아닙니까? (손목에 가볍게 쪽)
아이작은 미리엄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짝 늦게 팔을 풀려고 했지만, 잠깐 팔을 느슨하게 한 사이 미리엄이 조금 더 편안한 자세를 잡자 조금 머뭇대다가 다시 미리엄의 어깨에 팔을 얹어놓았다. 물론 센티넬에게 있어 가이드의 영향은 큰 편이었다. 대단히 특이한 경우인 아이작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물론 미리엄에게는 아직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지만, 곧 알게 될 일이었다.
"등록 절차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미리엄 양께서 원하시는 때에 언제라도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당돌한 반문이었으나 그에 대한 대답 역시 준비되어 있다는 듯, 연구원도 미리엄을 안심시키려는 가식적인 웃음을 띄면서 평온한 어조로 틈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2명 이상의 센티넬에게 동시에 90% 이상의 동조율을 보이는 가이드가 나타나거나, 한 명의 센티넬에게 90% 이상의 동조율을 보이는 가이드가 2명 이상 출현한 기록은 없다. 파장이 일치하는 센티넬-가이드의 관계는, 그 원리는 해명되지 않았지만 1:1을 원칙으로 한다.
"혹시 등록을 거부하고 싶으시다면, 대신 몇 가지 조건에 반드시 동의해주셔야 합니다."
기관 측에서는 미리엄에게 쉽사리 주도권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미리엄의 떨리는 목소리에 연구원은 표면적인 선택권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선택권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등록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를 쉽사리 내어주는 것도, 그 대신에 몇 가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거는 것도 분명 그만한 속셈이 있을 테지만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충분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어가던 연구원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금 떨렸다. 무기질적인 회색을 유지하고 있던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내려앉은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면, 눈을 감고 있던 센티넬- 아이작이 고개를 들어서는 그 이상한 푸른빛의 눈동자를 뜨고는 연구원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연구원의 웃는 얼굴에 꺼림칙한 두려움을 애써 삼키는 기색이 드러났다. 그는 힘겹게 태연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이서 서로 이야기를 좀더 나누셔도 되고요."
연구원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아이작은 미리엄에게로 떨어뜨렸다. 그러다 그는 미리엄의 어깨를 부드럽게-제딴에는-감싸고 있던 팔을 어깨에서 떼어내서는, 미리엄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가위바위보 구도다.
기관은 미리엄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으나, 이 남자는 이들에게 명백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엄은 이 남자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꼭 맛있는 걸로 든든히 챙겨먹기! 맞아....과제를 하면 또다른 과제가 올 뿐...그렇다고 드랍할 것도 아니니까 하긴 해야 하지만......^p^
마리: 그걸 내가 '원한다'고 해도? 그래도 하지 않을 셈이야? 마리: 뭐...안심해. 그럴 생각이 있는 건 아니거든. 마리: 단지 네 답이 궁금했을 뿐이지. 마리: 아하하! 마음에 들어. 네 말마따나 내 취향은 고분고분하게 구는 개라서...나한테 제 목줄을 쥐여주겠다는 사람이 좋거든, 너처럼.
뭔가 한국어로 하니까 느낌이 미묘하게 안 사는데 맨 뒤에 like you, my dear.라고 끝맺을 것 같다.... 맞아!! 늘 좋은 생각은 작성 버튼 누르고 나서야 떠오른다니까..?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어.
>>49 (두근) 이러면 마리...진짜로 제 쓸모 사라지거나 아이작이 다른 데 눈 돌릴까봐 경각심 확 들어서 그렇게 싫어하던 집안의 힘을 빌려쓰든 제 손으로 살인하든 어쨌거나 만나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겠지...기관에서 만든 거면 건드리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덜덜 떨다가 아이작 가스라이팅 도 심하게 해서 저만 바라보게 할 것 같고 그냥 가이드면....(말잇못)
>>51 힘내라... 과제를 하면 짬짬이 아이작과 돌릴 시간이 있어.. 이게 아이작이랑 아이작에게 기생하고 있는 군체지성이랑 얽히면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천천히 이야기해보자 ^p^ 일단 그 "두번째 가이드" 는 아직 쓸지 안 쓸지 결정이 안 된 요소이기도 하고.. 애초에 군체지성과 미리엄이 만나게 할지도 안 정했는걸.
아이작: 당신이 원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작: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라고 해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아이작: 다만 당신을 잃는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으니, 만반의 준비를 할 충분한 준비기간을 요구할 겁니다.
아이작: 그렇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습니까. 아이작: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순간만으로도, 제물마저 되지 못한 흠있는 짐승에게는.. 과분한걸요.
미리엄은 멍청이가 아니다. 지금까지 아득바득 살아온 과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리엄은 쉽게 기관이 저에게 주도권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질 것 없는 자는 무서울 게 없다지만 미리엄은 아니었다. 적어도 미리엄은- 자신의 목숨이 귀했고 안락한 삶을 갈망했다. 자신의 약점이 될 스람이야 없었으나 저 자신이 바로 약점이었다. 힘 하나 없는 어린 가이드.
당연히 저 표면적인 선택권도 가식에 불과할 것이다. 엄청난 패널티를 부여하든 뭘 하든 하여 이 거래를 성사시키고야 말겠지. 인생 자체가 이런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해도 익숙해지진 않았다. 갑작스레 피로함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쉽게 물러설 수도 없었다. 미리엄은 욕망이랄 게 많은 사람이었고, 잃을 것이 비교적 적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변이 있었다. 미리엄은 바뀐 공기의 흐름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이작, 그 센티넬. 분명 그 이 덕분이다. 미리엄은 두려움에 떨던 연기 따위 집어치웠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리엄은 활짝 웃었다. 내게 패가 있다면 굳이 휘두르지 않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조커가 제 것이라면 안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아이작'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오늘, 그리고 한 번 정도 더 만나고 정했으면 하는데...괜찮을까요?"
아, 그리고 다음번에는 둘이서만 만났으면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순하기만 했다. 사르르 접힌 눈꼬리도 유순한 분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센티넬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의문문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리엄은 자신에게 올려져 있던 손이 떨어진 것을 알았으나, 오히려 힘을 빼고 아이작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헐 뭔가...예상 외다.. 미리엄 그런 식으로 부르는구나...?? 아이작 진짜 유기견 같다는 묘사도 그렇고 진짜 너무 귀여워요 슨생님
마리: ... 마리: (제게 기댄 얼굴을 들어 똑바로 했다. 이마, 눈가, 코 끝. 차례대로 내려오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겨울 바람에 옅은 시가향이 묻어나왔다) 마리: 그게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 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지는 않을 거야. 마리: 나를, 내 말을 믿어, 아이작?
허매 뭔가...뭔가 미리엄 엄청난 일에 휘말린 거 아니냐고 미리엄이야 세상 망하든 말든 잘...신경 안 쓸 텐데.. 아이작만 있다면...(흐린눈) 일단 그 부분은 돌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자! 나중에라도 스토리 있었으면 좋겠다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찬찬히 일상물(?)같이 돌리는 거지 뭐. 저녁 맛있게 먹고 와~!
마리: (별처럼, 달처럼. 환하게도 웃었다) 마리: 사랑해, 아이작. 마리: (당신의 품에 폭 파묻혔다. 그 상태로 힘을 주어 마주안았다)
가위바위보 국면의 교착 상태가 해결되는 법은, 가위, 바위, 보 셋 중 하나가 다른 둘 중 하나를 포섭하는 것이다. 보통은 자신에게 열세이지만 다른 쪽에게 우세를 갖고 있는 쪽을 포섭하려 들기 마련이다. 가위가 보자기를 협박해 바위를 다루려 하듯이, 기관은 미리엄을 잡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바위의 눈앞에서 해버린 것이 패착이었다. 아이작은 발상을 뒤집었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당신에게 자신을 쥐어주었다.
눈앞의 이 연구원이 끔찍한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힘의 밸런스가 기관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버리고 말았음을 이 연구원은 물론이요 매직 미러 너머의 연구원들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 매직 미러 너머에서 가장 나이많은 저 연구원의 얼굴표정이 얼마나 보기좋게 찌푸려져 있는지 미리엄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나 공적으로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당신과 아이작과 이 연구원뿐이었다. 연구원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친절한 톤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창구로 와주세요. 센티넬과의 매칭 등록과는 별개로, 정식 가이드로서 등록을 하셔야 되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이작 씨는 존재 자체가 기밀로 취급되는 센티넬이기에 몇 가지 서명하셔야 되는 보안 서약도 있으니까요."
이 센티넬은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국가 전체의 수많은 센티넬들과 가이드들을 통제하에 두고 부리는 기관이 눈짓 한 번에 눈치를 보는 걸까? 미리엄의 손안에 기꺼이 자신을 쥐어주기로 한 이 조커 카드는 이 판 위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다는 소리인가? 지금 그의 품에 기대고 있자면, 그저 키가 조금 크고 이성에 대한 내성이 형제만 있는 집에서 자란 다섯 살 꼬맹이 수준인 얼뜨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심지어 그는 당신이 더 편안하게 기대올 것은 생각을 못 했는지, 심박이 조금 빨라지는 게 미리엄에게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충분히 이야기나누시고, 이야기가 끝나시면 방문 밖의 가드에게 면담이 끝났다고 말씀해주세요."
하는 언질을 마지막으로, 연구원은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더 할 것이 없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연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푸른 눈이 미리엄에게로 스르륵 떨어졌다. 매직미러 너머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이작과 미리엄만 남았다. 마침내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장소를 옮길까요?"
뜻밖에도 꽤나 지적으로 들리는 저음의 목소리. 칠칠맞은 몰골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눈빛에는 꽤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그 눈으로 문득 자신의 등 뒤편에 있을 매직미러 쪽을 힐끔 곁눈질해 보였다. 그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찬찬히 일상물처럼 돌려도 스토리가 있어도 다 좋다.. 그때그때 끌리는 식으로 생각해가며 맞춰보자! 한 쪽을 하면 어느 한 쪽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조금씩 양념처럼 곁들여도 좋을 테니까. ..그리고.. 세계멸망 엔딩이 되면 아이작은 소멸해 버리기에... (두구둥) 트루 배드 엔딩인 거시야... 군체지성이 아이작에게 지배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메리 배드 엔딩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이작: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눈가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도 같다) 아이작: 사랑합니다. 미리엄. 당신이 사랑하는 만큼. 아이작: (미리엄을 꼭 끌어안는다)
미리엄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방실방실 웃었다. 당신네들은 약올리려 그러는 것이 틀림 없었다. 한순간에 힘의 우위가 뒤집혔다. 그만큼 제가 잡은 패가 대단하는 뜻일 터. 애초부터 미리엄이 아이작과 매칭을 하지 않을 생각은 0에 수렴했다. 단순한 C급 가이드, 그것도 매칭률이 끔찍하게 낮을 가이드보다는 S급 센티넬의 유일무이한 가이드가 훨씬 낫지 않겠나. 미리엄은 굴러들어온 패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이런 블러핑은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더해, 운좋게 자신이 가지게 될 이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된 것이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런, 말하고 나서 보니 당신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말이다. 단순히 창구로 와달라는 안내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이건 마치...아이작이라는 센티넬의 위치에 대해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로도 들리지 않나? 갑자기 들은 생각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틀어막았다. 이- 작은 몸짓에도 크게 반응하는 남자는 잭팟일 것이다. 자명했다. 이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이제부터의 숙제겠지만 말이다. 연구원이 나가려 하자 미리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예 문이 닫히자, 미리엄은 매직 미러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옮기죠, 저 치들이 움직일 것 같지는 않으니."
아이같이 천진하던 목소리는 훅 낮아졌다. 잠시 전까지도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일단 이쪽이 본래 목소리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였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거예요?"
미리엄은 그제서야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보았던 반응으로 보아 못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확답을 받아 나쁠 건 없었다.
미리엄을 내려다보며 아이작은 나직이 대답했다. 물론 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방 안에 들어왔던 연구원은 미처 그것을 구두로 통보하지 않았다. 그의 말의 문맥은 그 점을 파고든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었지만, 그러나 그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이 정도의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고 확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일이 드물기에 잘은 모릅니다만... 굳이 이런 갑갑하고 삭막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매직 미러 너머에서는 당연히 이 방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들릴 것이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기색이었다. "과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고 연구팀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없었다. 연구팀장은 결국 못마땅한 얼굴로 몇 가지 지시를 전달했다.
"...가실 겁니까?"
아이작은 미리엄에게 되물었다. 미리엄이 아직도 아이작의 품 안에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기대눕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대로인 채로 가겠다고 한다면 미리엄을 안아들고 가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정확히 하자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곳에 데려온 것부터가 그런 의미를 띄고 있기는 할 테다. 미리엄 앞의 센티널이 저리도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마음에 들었다. 미리엄은 흐드러지게 웃었다. 19살, 성년과 미성년 사이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져 있는 나이기에 여전히 앳된 기색이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과 어우러진 얼굴은 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래도 가는 편이 낫겠죠. 듣는 귀가 많은 건 딱 질색이라서."
그러나 그 얼굴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미소는 쉽게 씻겨 내려갔다. 가면서까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을 생각은 없는지, 미리엄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대신 아이작을 향해 몸을 틀더니, 손 하나를 내밀었다.
"저 여기 지리 몰라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말이었다. 한마디로 길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손 잡고 가달라는 소리 아닌가. 아이도 아니면서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보니까 가이딩도 제대로 못 받은 것 같던데, 손이라도 잡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저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들여다보자면 묘한 몰골이다.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는지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머리카락도 그냥 깎기만 하는 걸까 덥수룩했다. 튀어나온 눈썹뼈 아래로 깊숙이 들어간 눈매에는 비단 이마가 드리운 그늘뿐만 아니라 다크서클까지 짙게 끼어 있는 것이, 체계적인 자기관리와는 거리가 꽤나 멀어보였다. 본인은 그게 이상하다는 자각도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손톱은 단정한 것이 의외라면 의외일까.
그나마 잘생긴 턱이라던가 균형잡힌 코와 입을 보자면 조금 신경써서 꾸며보면 구제의 여지가 없지도 않았으되, 부드럽게 웃는 것만으로 앳된 기색 위에 이름모를 꽃이 흐드러지듯 하는 미리엄에 비해서는 생동감이 너무도 결핍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오로지 음울하게 낀 다크서클 위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것 밖의 무언가를 품고 있는 푸르른 눈이 그의 인상을 대인관계 결핍의 외톨이에서 비밀을 품은 은둔자로 격상시켜 놓고 있었다.
아이작은 당신을 품에서 놓아주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매직미러 쪽으로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아이작은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미리엄이 당돌하게 건네어온 손길에, 아이작은 눈을 깜빡이다 "...그런가요." 하고 대답하며 당신의 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마디가 툭 튀어나온 기묘한 손이, 처음 연구원의 지시로 손을 맞잡았을 때처럼 미리엄의 손을 잡아왔다. 처음 잡았을 때보다는 훨씬 덜 차가웠다.
"사실 나도 잘은 모릅니다만, 상관없겠죠."
손을 잡은 채로, 그는 미리엄을 미팅 룸 밖으로 조심스레 에스코트했다. 문을 열자, 문 밖에 있던 무장 경비가 "아이작 씨..." 하고 말을 걸면서 아이작을 제지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내 복도 저편에서 달려온 다른 경비가 숨을 고르며 "아니, 두 분을 보내드려." 하고 그의 손을 막았다. 무언가 언질을 받고 온 듯, 두 번째로 달려온 경비는 "아이작 씨, 여기 옷가지입니다." 하며 옷가지가 담긴 소쿠리를 내밀었다. 아이작은 거기에서 새까만 점퍼만을 건성으로 집어들고는, "나머지는 버리던가, 가옥으로 보내주세요." 하고 주문했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는 듯, 여상스러운 태도였다.
"다만 미리엄 양의 가이드 등록을 해야 하니까 이야기를 끝내시면 다시 센터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달라졌을 뿐, 돌아나오는 길은 이리로 들어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키카드로 열리는 문들이라던가 하는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인상적인 변화가 있었다. 무장 경비나 연구원들을 마주칠 때, 자기 일에 바쁜 듯 타인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던 이들이 흠칫 놀라거나 움찔하며 물러서는 모습이 이따금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그 칙칙한 구역을 지나올 때 이야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다시금 관리협회의 지부다운 개방적이고 일상적인 분위기의 구역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이작도 미리엄도 센터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점퍼를 대충 어깨에 걸쳤다. 구속복이라고 해도 착용자를 구속하는 데 쓰는 기구들은 상반신에만 마련돼 있어서, 외투를 걸치면 구속복 바지는 그냥 칙칙한 색깔의 면 바지 정도로 보였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아이작은 미리엄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를 잡아타야 되긴 하지만 제가 아는 곳으로 가도 좋습니다."
마리는...어이없다고 생각은 하면서 웃었지 않았을까! 귀엽다고 생각했으니 괜찮을 거야 아마(?) 답레는 내일 올라올 것 같아! 나도 아이작주랑 아이작이랑 저녁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요즘에 며칠 되었다고 이러는지 여기서 힐링 잔뜩 받고 가는 중이야! 아이작주도 여기서는 축 쉬고 재밌게 있다 갔으면 해. 잘자고 좋은 꿈 꿔, 아이작주! 내일 봐!!
미리엄은, 새삼스레 아이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도 보기야 했다마는 이렇게까지 자세히 관찰하던 건 아니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움푹하니 들어간 눈가, 광채가 일렁이는 푸른 눈, 굳게 다물린 입술. 미리엄은 맞잡아온 손을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엮어넣었다. 마디 사이를 문지르더니 손바닥이 겹쳐지도록 힘을 주어 꾹 쥐었다.
아이작이 경비와 마주쳐 이야기하고 수많은 문을 지나 올라오는 동안 미리엄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주변을 관찰하듯 끊임없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겉으로만 본다면 새로운 환경에 움츠러든 것 같아 보이기만 할 것이다. 미리엄은 때때로 아이작을 향해 반응을 내보이는 이들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해석하듯이 꼼꼼히 살폈다. 이런 자리에 있는 사람은, 힘 없이 당하기만 하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눈치가 빨라지기 마련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모으려 했다. 미리엄도 그러했다. 기억 속에 모든 것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려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부의 문 밖을 나서고 아이작이 질문을 던질 때 즈음에서야 미리엄은 당신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아는 곳은 많지 않아서요, 그쪽이 아는 곳으로 가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작게 소리를 냈다가, 입술을 지그시 짓누르며 다물었다. 시선이 잠시 주위의 사람들을 향했다. 조금 더 벗어난 후에 이야기를 한다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지하의 어두침침한 구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이작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미리엄이 받은 인상은 마치 우리에서 놓여난 맹수가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듯한 경악과 두려움이었다. 지금까지 미리엄이 아이작의 모습을 본 것뿐이라고는 매우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기에, 그들이 어째서 이렇게나 아이작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도착한 '평범한 구역' 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들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으로서의 아이작은, 그저 미리엄이 살갑게 거머쥐는 손길을 조금 수줍게 맞잡아주는 아저씨일 뿐이다.
"마찬가지네요."
미리엄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만 기색은 눈치챘지만, 미리엄이 입을 다문 이유를 잘 알았기에 아이작은 가볍게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협회 지부 건물의 문을 나서며, 아이작은 점퍼의 지퍼를 반쯤 올렸다. 도로변으로 나가자 때마침 이쪽으로 오는 택시가 있어, 아이작은 손을 들어 택시를 멈춰세웠다. 그는 택시의 뒷좌석 문을 미리엄에게 열어주고는, 미리엄이 차에 타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아마 제가 잘 아는 카페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겁니다."
미리엄이 차에 탔다면, 아이작 역시 미리엄을 따라 뒷좌석에 타고는 점퍼 주머니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꺼내어 주소지를 찍어서 기사에게 건네어줬을 것이다. "이 주소로 가주세요." 뒷좌석이 닫히고, 택시는 이내 뉴 고모라 도심지 외곽의 어수선한 도로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경악, 공포,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마치 지처겡 다가온 맹수를 보는 듯한...? 지금으로서 확실한 것은, 저 아래에 위치한 높으신 분들만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운좋게 저와 맺어진 센티넬이 대단히 강력하다는 것. 센티넬 그 자체보다는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제 옆에서 수줍어하는 이를 보자면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성격 나빠 갑질하는 이를 대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좀 더...원초적인 공포에 가까웠지.
아이작이 건네는 배려를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배려를 당연시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런 것들이 익숙한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실제적으로는 익숙하지 않았다. 단지 얕보이지 않는 법을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것 뿐이었다. 택시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미리엄은 그제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난 당신이랑 매칭 안 할 생각 전혀 없어요. 거기서 뻗댄 건 말하자면...블러핑 같은 거라서."
제 손에 굴러온 힘을 놓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것을 이야기해주는 이유는,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에 안 들거나 이 일을 피하고 싶거나 한 건 아니니까 한시름 놓으라는 말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아이작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쯤으로 축약할 수 있을까. 미리엄은 눈을 마주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신뢰. 아이작은 푸르스름한 눈으로 가만히 미리엄을 바라보다가, "그렇습니까." 하고 나직이 대답했다. 꽤나 싱거운 대답이다.
아이작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그 어떤 말이 돌아오건, 그 어떤 상황에 놓이건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그리고 그런 해석은 대개 적중했으며, 그 해석이 빗나가는 경우는 그런 비관적 관점보다도 상황이 더 나쁘게 돌아가는 경우뿐이었다.
예상대로다. 하고 아이작은 속으로 차갑게 자조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라고 해도 결국은 비즈니스 관계인데, 새삼스레 인간적인 관계라도 기대했나? 나 같은 괴물이?
"다행이네요. 능력 부작용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기 직전이었거든요."
옅게 미소지어 주는 미리엄에게, 아이작은 -본인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냉소적인 대답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들과 너무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택시는 어느덧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건물들의 높이가 꽤나 낮아져 있었다. 도심지의 중심가에서 벗어나 외곽지로 나오는 경계선이라 할 만한, 조금 을씨년스런 풍경 속을 조금 달리자 매우 허름한 카페 하나가 나왔다. 아이작은 택시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어설픈 동작으로 차 문을 열고는 내린 뒤 미리엄에게로 손을 내뻗었다.
돌아오는 건 싱거운 대답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미리엄은 눈매를 휘어가며 사르르 웃었다. 웃음은, 기본적으로 호감의 표시다. 또한 경계심을 없애기에 가장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미리엄은 어떻게 웃어야 자신의 외모가 가장 빛을 발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 눈을 휘고 입매를 다듬어야 순하고 앳된 인상으로 보이는지 알았다.
"마리, 라고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하면 너무 이를까요?"
미리엄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부드러웠으며 하는 말들은 아이작을 배려하여 회피할 길이나 다른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본질이 어떠하든 간에. 물론 그 포장지를 까보자면 있는 것은 욕망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포장되었고, 그것은 또다시 위선과 호의로 포장되었다. 미리엄은 좋은 연기자였다. 타고나지 않았다 해도 19년 인생 동안 갈고 닦은 것이 허술할 리 없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괜찮을까요?"
냉소가 짙게 묻어나는 대답에 돌아온 것은 질문이었다. 미리엄은 숨긴다고 숨겼으나 옅은 걱정이 흘러나오는 얼굴을 하곤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덧붙이는 말은 변명조였다.
"솔직히, 제 나이가 후천적 가이드로는 좀..많잖아요. 그러는 바람에 가이드나 센티넬에 대해 그렇게 깊게 아는 건 아니라서, 어디까지가 실례가 아닌지 잘 모를지도 몰라요."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돌하게 굴며 연구원에게 요구를 하던 소녀는 어디 갔는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불안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제 두 손을 꾹 맞잡았다. 눌린 손마디가 허옇게 질렸다.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제 주제를 모르진 않아서요."
농조였으나 조소가 미약하게 스며들어갔다. 분명 녹색이라 하면 생동감이 가득해야 하거늘, 미리엄의 옥색 눈동자는 거멓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온 생애 걸쳐 철저하게 약자였다. 지나치게 까불어 제 목숨을 잃을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아이작 앞에 미리엄이 나타난 것도 인생에 걸쳐 줄타기를 알맞게 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자신의 표정이 굳은 걸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했는지, 미리엄은 살풋 웃음을 머금곤 바깥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 오는 게 얼마만이었던가. 얼룩진 그것을 추억이라 감히 칭할 수 있다면, 그래,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아이작."
미리엄은 아이작이 뻗어준 손을 기꺼이 잡았다. 주위를 휘 둘러보다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고개를 까닥여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말에, 아이작은 눈을 깜빡이며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이걸? 하고 되묻는 듯한 제스쳐였다. 그러다 그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미소라기엔 시큼하고 쓰게 뒤틀린 시니컬한 웃음이다.
"취향이 특이하시네요."
필시 빈말일 것이다. 하지만 빈말로라도 저런 말을 사뿐히 담을 수 있는 게 아이작은 부러웠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하고, 마음에 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충분히 익숙하며 그것을 스스로 잘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 그는 그것을 잘 제어하지 못했고, 그것을 제어하려 들 때마다 익숙하지 못한 말이 사고를 쳐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이작은 냉소적인 농담을 선호했다. 무난하게 나쁜 선택지라는 건 잘 알았지만, 적어도 더 최악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히 그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항상 우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패배감과 절망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특히 인간관계와감정교류 분야에서 그는 아주 당연스럽게 최악을 상정하고 그것을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마리... 당신이 그게 낫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리엄이 질문을 던지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이드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보거나, 이야기를 길게 나누어본 건 처음이기 때문에 당신보다 못하면 못하지 더 낫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죠."
미리엄의 비취색에 한가득 담긴 비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확언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저와의 매칭을 거절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저도 당신의 센티넬 노릇에 충실할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절망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불성실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는 적어도 사무적 관계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리라고 확언했다. 공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전담 가이드의 신변 또한 지키는 것.
아이작은 손을 내뻗어 카페의 문을 열었다. 낡아빠지고 쇠락한 가구들이 겨우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카페는 분명히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안락함이 있었다. 들어온 입구 맞은편에 또 문이 하나 있었는데, 소박한 정원이 꾸려진 카페 안뜰로 통하는 문이었다. 딱 봐도 심술궂어 보이는 늙은 바리스타는 대단히 못마땅한 눈길로 아이작을 힐끔 바라보았고, 아이작이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원두 몇 줌을 그러모아 그라인더에 집어넣었다.
"더블샷으로 부탁드립니다." 하고, 커피 이름마저 말하지 않는 폼이 여기에 깨나 드나든 모양이다. 아이작은 미리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리엄-아니, 마리 씨는 뭔가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아이작은 보다시피 단 한 번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서 초기 접근이 까다로울 텐데, 저번에 돌렸던 짤일상만큼의 대화가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 아이작이 어떤 센티넬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이작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꺼려지는 괴물로 여겨져 배척받아왔는지가 마리에게 전달되면 상황이 좀더 나을 텐데. 마리가 협회로 돌아가면 협회 측의 인물과 면담하거나, 혹은 등록 과정에서 우연히(협회측 인물이 두고 간 파일이라던가) 그런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오늘 낮잠을 자서 그런가 쉽게 깨었는데 다시 잠들기는 어렵네. ^0^... 할 일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얼른 끝내고 쉴 수 있기를 바라.
마리의 설정을 지키기 위해 공략법을 알려주자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아이작에게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면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 거야! 특히 아이작의 능력이나 그간 당해온 취급 같은 것에 대한 정보를 얻고 스스로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포인트를 집어서 "당신은 이러이러한 괴물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람으로 좋아해줄 수 있다" 는 뉘앙스로 말하면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해. 협회에서 아이작을 가혹하고 엄격하게 대하는 데에 반감이 있는 협회 내 인물이 마리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주는 전개도 생각하고 있고, 이래저래 마리에게 도움을 줄 생각을 많이 해두고 있으니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미리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투명한 호의를 내보였다. "도와줬잖아요, 아까 전에." 미리엄은 속으로 저울질을 했다. 더러는 약점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 호의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미리엄은 아이작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으며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미리엄은 말을 고르며 맞잡은 두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내보일 카드를 신중하게 선정했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하고선 흘러나오는 것은 담담한, 외려 가벼운 웃음조차 섞인 말이었다.
"전 대부분 제 스스로 저 자신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어요. 작은 일이라도, 정말 사소한 일이라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다른 생각을 하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미리엄은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나서야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이 웃었다.
"저는- 당신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라고 해도, 고마웠어요."
봄꽃이 화르르 피어나듯 미소가 번져나갔다. 빈말이라 치부하기에는 이미 과거의 편린을 담보 잡았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가볍지도 않았다. 어느 장도 선을 가늠하기 위해 던지는 이야기기도 했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인데, 미리엄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안 그러냐 묻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겠죠? 앞으로 있을 시간이 적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국 무엇을 물으려 했던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미리엄은 다른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센티넬, 나의 센티넬. 입에서 그 말을 몇번 글려보던 미리엄은 옅게 웃었다.
"나도, 열심히 할게요...아이작."
바리스타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이작은 이곳을 자주 드나든 것 같아 보였다. 독특한 분위기에 미리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았으나 이상한 안락함이 공존했다. 정원, 안뜰로 이어지는 문에 잠시 시선을 사로잡혔다가 아이작의 질문에 되돌아왔다.
일이 많아서 이제야 왔네...오늘은 좀 늦었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아이작주? 너무 시간이 늦어서 이미 자러 갔을까? 만약 자러 간 거라면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정신 없는 하루였긴 한데 크게 나쁘진 않았어. 그리고 팁 고마워! 그걸 보면서...참 가스라이팅하기 딱 좋은 대사라고 생각하는...글러먹은 마리주....;;
"보편적으로 보자면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 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제가 얼마나 고약한 흉물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작은 미리엄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리엄이 담담하게 건네는 말에서, 아이작은 자신의 악몽같은 과거를 어렵잖게 되짚어볼 수 있었다. "정말로, 무슨 느낌인지 잘 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직 말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찬밥 대접받은 입양아와 입양마저도 되지 못한 고아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처지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었다. 아이작은 외톨이였고, 여전히 외톨이이기에 미리엄이 털어놓은 넋두리가 무슨 의미인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외톨이였기에 아이작에게는 그런 공감마저도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미리엄이 파스스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네자, 아이작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앞으로 있을 시간이 적진 않을 테니까요, 하는 미리엄의 말이 생각보다 조금 큰 울림으로 다가와서,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다시금 자신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아이작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잠깐 "마리." 하고는 미리엄이 알려준 이름을 입에 되뇌어 보았다.
"내겐 당신에게 알려줄 만한 애칭이 없는데."
아이작은 그렇게 잠깐 말을 잊은 듯한 표정으로 당신을 가만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찌되었건,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지는 모르겠군요. 전 그저 나쯤 되는 센티넬에게 가이드를 만나게 해 준다기에 5성 호텔 라운지 정도는 대절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성질 좀 부렸을 뿐인걸요."
잠깐 동안의 공백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이작은 농담을 던졌다. 농담에는 낮은 자존감과 반대로 높이 치솟은 자존심이 묻혀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 어떤 경지에 이르러 인정받은 인물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기도 아까 그 방 못잖게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커피 맛은 썩 괜찮으니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레모네이드요?"
아이작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메뉴가 나온 탓이다. 아이작은 어안이벙벙한 눈길을 바리스타에게로 돌려보았다. 바리스타는 여전히 심술궂게 찌푸린 얼굴이었지만-사시사철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그렇게 생긴 건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이작은 "안뜰에서 기다리죠." 하며 미리엄을 안뜰에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금요일 하루는 그럭저럭 괜찮았어! 자다가 중간에 깨서 좀 그렇긴 하지만.. 마리주는 지금쯤 잠자리에 누웠을 거라 믿고, 아이작주도 답레만 올려두고 다시 잠들기 시도해보러 갈게. 시간나면 만나! 그리고 아이작은 가스불로 지지라고 만든 캐릭터가 맞으니 마음놓고 구우셔도 됩니다 쓰앵님 흐흐흐. 상호간에 합의가 안됐으면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상호 합의 끝났으니 노 프라블럼이라구
흉물, 독특한 어휘 선택이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적어도 처음부터 자신을 비하하며 낮추는 모습을 계속 보이는 건 필시 연유가 있을 것이다. 미리엄은 당신이 던지는 말을 곱씹었다. 나중에라도 당신의 사정을 알게 될까? 알아야 하겠지.
아이작이 건네는 말에 미리엄은, 놀라워 보였다. 아이작의 말은 충분히 진실되어 보였고 별다른 거짓의 징후도 찾기 힘들었다. 진실이다. 내가 한 말이 무어였지? 나 자신만이 나를 구할 수 있는 이였다. 내 곁에는 누구도 없었다. 미리엄은 답을 꺼내는 대신,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듯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가지곤 웃었다.
"그러면 그냥 내가 알려주고 싶어서 멋대로 알려줬다고 생각해요. 정 신경 쓰이면 앞으로 뭐라 붙일지 생각해 봐도 되지 않겠어요?"
미리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구슬이 바닥에 통통 튀어가듯 낭랑한 소리였다.
"...오, 대단한 자신감인 걸요?"
미리엄은 의외인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이, 가벼운 탄성이, 동그랗게 뜬 두 눈이 그를 보여주었다. "물론 능력이 뒷받침된 만큼 단순한 자신감으로 치부하기만은 어렵겠지만요." 뒤늦게나마 푸슬푸슬 웃음을 흘렸다.
"어, 음, 죄송해요...그, 제가 쓴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막상 생각나는 게..."
반문에 미리엄은 움츠러들었다. 더듬거리며 변명조의 말을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사과부터 나오는 모습이, 방금 전의 말과 결부하여 본다면 한 가지 결론은 쉽게 나올 것이다. 적어도 과거가 순탄하지는 않았다는 점. 미리엄은 바리스타의 반응에 그나마 옅게라도 웃었다. 작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아이작의 인도를 따라 안뜰로 향했다.
작은 정원이었다. 화려하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미리엄은 무엇이 그리 시선을 끄는지 작은 식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슬슬 스케쥴이 망가지고 있고만.... 어제 아이작주가 답레를 준 시간 즈음에는 확실히, 응, 자고 있었네. 다시 잠에는 잘 들었어, 아이작주? 별로 깨있지 않고 남은 시간이나마 푹 잤다면 좋을 텐데. 오늘도 날이 따듯하더라. 이사 가는 날이라 조금 정신이 없긴 했어도 나쁘진 않은 하루였어. 아이작주의 하루는 어땠어? 물론 그렇지...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너무 빻은 망취향이라 구해질 줄도 몰랐고 썰이 이어서 달릴 줄도 몰랐어! 지금은 너무 잘 맞는 취향이라 조커처럼 웃으면서 돌리고 있지만 말이야. 진짜..압도적...감사...!
"..." 미리엄의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아이작은 주머니를 뒤적여보다가 카운터 위에 놓인 냅킨 홀더에서 냅킨 한 장을 뽑아 미리엄에게 건넸다. 미리엄-당신과 아이작은 어쩌면 꽤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 천천히 찾아보는 것도 좋겠군요."
아이작은 당신을 안뜰로 이끌며, 당신의 변명에 대답했다. "아뇨, 추궁한 게 아니라 그냥 저 영감이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좀 힘들어서요." 위축되는 당신을 다독이듯이 대수롭지 않은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아이작은 정원의 문을 열었다.
과연. 그와 같이 눈밑이 퀭하고 대인교류가 희박할 것 같은 은둔자 타입이 즐겨 찾을 만한 공간이다. 사방이 식물로 둘러싸여 있었으되 하늘만큼은 뚫려서, 도심지 외곽의 황량한 공제선 위로 오후의 하늘이 그럭저럭 충분한 크기로 걸려있는 곳이었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명상하기에는 딱 좋은. 그는 식물로 향해 있는 당신의 시선을 굳이 잡아끌거나 돌리려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이 시선을 다시 돌릴 때를 위해 파라솔 달린 탁자에 딸려 있는 나무 의자를 하나 빼어놓고는 그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능력이 뒷받침된 만큼, 하고 당신이 푹 찌른 말이 아이작에게 와닿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애초에 이런 구질구질한 연명마저도 허락받지 못하고 시체 한 구가 되어 미치광이의 제물 컬렉션에나 남지 않았겠는가. 능력이 아닌 다른 어떤 기적적인 일로 연명할 수 있었더라도, 이런 삶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겠는가. 당신을 만날 수도 없었겠지. 아이작의 가치는 아이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센티넬이라는 데에 있었다. "뭐, 다른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그런 능력이라도 있어야죠." 아이작은 냉소했다.
심술궂은 얼굴을 한 바리스타가 쟁반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에스프레소 더블샷과 설탕 스틱 2개, 그리고 길다란 컨에 담긴 레모네이드 한 잔이 탁자에 놓인다.
"뭐, 여하간, 이제 조금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설탕 스틱 두 개를 한번에 뜯어 에스프레소 전에 때려부으면서, 아이작은 말을 꺼냈다.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 있습니까?"
미리엄은 애써 눈물을 가리려는 것처럼 더 활짝 웃었다. 냅킨으로 눈가를 닦는 대신 맞잡은 두 손 사이에 꽉 쥐었다. 그렇게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진정될 것처럼 말이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시간은 많으니까요."
작은 웃음 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말이었다. 미리엄은 다독여주는 것만 같은 농담에, 눈동자만 굴리다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한다 해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옅게 웃으며 그래 보인다 동조했다. 당신이 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물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미리엄은 문득 위를 보았다. 푸른 식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뭐랄까, 참 예뻤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엄은 흐린 날만 아니라면 하늘 보는 것을 참 좋아했으니 늘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미리엄은 저도 모르게 천진한 아이의 낯으로 웃었다.
뒤늦게서야 미리엄은 아이작의 반대편에 앉았다. 미리엄의 말이 아이작을 찔렀다면, 이번에는 미리엄이 그러했다. 냉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미리엄은 순간적으로 목이 콱 쥐어채이는 기분을 받았다. 숨이 막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으나 탁자 아래로는 맞잡은 두 손이 희게 질려있었다.
"역시 그렇죠?"
말간 웃음은 순식간에 비틀렸다.
"제가 운 좋게 당신이라는 S급 센티넬이랑 높은 매칭률을 보인 것처럼요."
노래하듯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끝자락에 걸쳐진 것은 자조였다. 만약, 만약이라는 말은 참 많은 공상의 여지를 주었다. 만약 내가 가이드로 발현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S급 센티넬과 매칭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질문의 답은 쉽게도 떠올랐다. 미리엄은 저 진창에 처박혀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 삶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테다. 자신은 참 운이 좋았다, 고 미리엄은 생각했다.
바리스타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미리엄은 레몬 에이드를 제 쪽으로 가져왔다. 컵을 조금 흔들어 안의 내용물이 잘 섞이게 하던 미리엄은 아이작의 질문에 머뭇거렸다. 질문? 없을 리가. 처음 보는 사람에 기밀 정도나 되는 센티넬이다. 질문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예의라는 명목으로 어느 정도 쳐내고 있었다. 개중 그나마 신변잡기로 적당한 질문을 골랐다.
"음...아이작의 나이? 막상 물어보려니 딱히 생각나는 게 많진 않네요. 아이작은 저에 대해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아앗....주말이 더 바쁘다니 그 무슨 슬픈 일이야... 응, 이사했어! 새집은...낯설어! 물론 가구는 전부 전에 있던 거긴 한데..오히려 그래서 익숙함과 낯설음이 반반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아 맞아!! 뭔가 아 이건데? 싶으면 눈 색이라던지...피부색이라던지..앞머리나 그림체라던지 묘하게 부족해. 그렇다고 직접 연성은 또 실력이 영 그렇고 말이야.
자괴감을 참지 못하고 비틀려버린 당신의 미소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작은 과거의 만약이 아니라 현재의 만약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런 능력이 발현되는 게 극히 희박한 확률이고, 그 능력과 매칭율이 높은 가이딩 파장을 갖게 되는 것도 극히 희박한 확률이지만, 어찌되었건 그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고도 당신이 각인을 승낙할지에 대한 확신이 아이작에게는 없었다. 자신의 능력은 당신이 방금 하늘을 올려다보고 띄웠던 그런 천진난만한 미소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으니까. 능력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은.
당신의 질문에 머릿속으로 잠깐 숫자를 뇌어보던 아이작은, 이내 답을 내어놓았다. "올해 생일이 온다면, 스물아홉이군요." 하고 컵에 티스푼을 집어넣고 천천히 젓던 아이작은, 잠깐 뭔가 각오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들어올렸다. 그리고 질문을 꺼냈다.
미리엄은 이걸 생각보다 많다고 표현해야 하는지, 혹은 그 반대로 말해야 할지 잠시 갈등했다. 애초에 센티넬-가이드 관계에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스물 아홉이라면- 자신과 거의 10살이 차이나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냐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미리엄이 택한 것은,
"생각보다는 많네요."
-라는 답이었다. 별다른 감정 없이 던져진 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의 놀람 정도는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
미리엄은 잠시 아이작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아니면 뭐가 더 있나? 이런 말을 꺼낼 이유가 무엇이 있지? 두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정보는 절대적으로 작았다. 이런저런 추측도 쓸모 없을 확률이 높았다. 미리엄은 평면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 무슨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벌레 같은 징그러움만 아니라면 괜찮을 거예요...아마도."
주변에 무관심한 만큼이나 스스로에게도 무관심했기에, 아이작은 본인의 나이를 상기해보는 게 낯설었다. 그 악몽 같았던 어느 날 밤이 지나고 나서는 그는 스스로의 나이를 세는 것이나 생일을 헤아려보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 보니 그 날로부터 벌써 11년이 흘러왔다는 사실마저도 새삼스러웠다. 그런 것들이 자칫 나쁜 기억을 건드려 깨워버릴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 18살 생일을 자신의 팔목에서 칼로 베어낸 피로 하나하나 카운트해 나가던 원장을 떠올려버렸다. 그는 표정을 태연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다행히 다른 화제거리는 있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제 능력 때문에 말이죠."
물론 그 화제거리도 만만찮게 불편한 것이었지만. 아이작은 커피를 집어들고는 몇 모금 들이마셨다.
"...겉보기도 그렇고, 기작도 그렇고 상당히 흉한 축이거든요. 벌레는 아닙니다만." 조금이라도 뜸을 들이거나 하면 그대로 이런 이야기를 할 자신감을 잃을 것 같았기에, 아이작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능력이 보기 흉하다는 게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로 던진 질문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면 계속 그런 암시가 있었지. 그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은 비단 '예측불허의 강자' 에게 보낼 만한 것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에측불허의 괴물' 에게 보내질 만한 그런 시선이었지. 그들의 시선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인간 두겁을 뒤집어쓰고 있는 더 끔찍하고 흉측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이 자리에서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센터에 가셔서 제 능력을 정리해둔 파일을 열람하셔도 됩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듯, 아이작은 다시금 잔을 들어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는 커피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별다르지 않게 넘어갔다. 그 정도면 최악은 아니었고, 미리엄은 그 부분을 더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 레몬 에이드를 몇모금 마셨다 시고 달달한 것이 그나마 머리를 깨우는 것 같았다.
역시, 능력에 관한 거였나. 그 말을 꺼낼 다른 이유가 없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엄은 아이작이 엄청난 인성파탄자만 아니라면, 그것도 자신에게 그- 성격을 내보일 것만 아니라면 별 상관이 없었다. 저 자신마저 공격받을지도 모르는 능력? 애초에 센티넬과 함께 현장을 나갈 때부터 목숨의 위협이야 예정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타인에게서 비롯되었느냐, 혹은 주신의 센티넬에게서 비롯되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흉한 외모? 저는 뭐 예쁘기라도 하던가. 적당히 인간의 형체라도 지녔으면 됐지. 파탄난 성격? 애초에 미리엄은 그렇게 성인이 아니었다. 누굴 죽이고 다니든 힘을 휘두르던 저한테만 안 하게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한마디로, 미리엄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S급 센티넬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단순한 몇가지 이유로는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괴물이든 인간이든 하는 것은 미리엄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괴물이라 한들 제 편에 서준다면 인간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작의 이야기에도 미리엄이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바로 이랬다.
"아이작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러니 아이작이 준 선택지를 도로 돌려준 것도 그래서 가능한 것일 테다. "난 괜찮으니 마음대로 해요. 아이작이 괜찮다면 보여주고, 영 껄끄럽다면 내가 알아서 파일 보고 올게요." 미리엄의 말은 상당히 차분했다. 물론 굳이 따진다면야 직접 보는 것이 이해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파트너가 될 센티넬을 들쑤실 정도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후에라도 충분히 볼 수 있을 테니. 미리엄에게 있어 아이작이 건네는 말의 무게는 딱 그 정도였다.
당신은 나이 문제에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고, 아이작도 잠깐 나쁜 기억이 떠올라 움찔했을 뿐 나이 문제 자체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당신을 따라 쿨하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젠 나쁜 기억에서 도망치려다 맞닥뜨려 버린 나쁜 상황이 문제다. 아이작에게 있어 그건 상당히 중대한 문제였다. 제물마저 되지 못한 흠결있는 짐승을 추한 괴물로 정의하는 저주. 그게 자신의 능력이었고, 아이작에게 그것은 일종의 컴플렉스였다. "..." 그러나, 결국은 한 번 마주해야 할 문제다. 어차피 당신은 그 파일을 볼 테니까.
"지금 여기서, 잠깐이나마 보여드리는 게 차라리 낫겠죠."
카페 건물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안뜰이고, 아이작은 누군가의 시선이나 귀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당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이 광경이 엿보일 염려는 없을 것이다. 아이작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니 그건 분명히 왼손을 들어올리는 동작이었는데 그 곳에 있는 것은 왼손이 아니었다.
뒤틀리고 몸서리치는 힘줄과 근육이 몸을 비틀고 있는 게 보였다. 잔뜩 부풀어올라 기괴하게 뒤틀린 괴물 같은 것이 아이작의 왼손을 감싸고 있었다. 아니 아이작의 왼손이 괴물로 변해 있었다. 간신히 손을 연상할 수 있는 구조를 한 그것의 힘줄 사이로 줄지어 선 날카로운 이빨들이 물결치는 게 보였고, 그것의- 간신히 손가락 끝이라고 칭해줄 수 있을 끄트머리에는 꼬챙이 같은 뼈송곳이 야수의 손톱처럼 비어져나와 있었다. 시시각각 그 형태를 바꾸며 몸을 뒤트는 기괴한 고깃덩이 사이로, 열망에 가득 찬 작은 푸른 눈동자 서너 개가 당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변해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보면, 펼쳐져 있는 것은 외계의 정원. 싱그럽게 깔려 있는 잔디들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다른 행성의 해저에 돋아난 해초 같은 불길한 촉각들이 어디서 본 것만 같은 푸른빛을 띄고 뻗어 있었으며, 등나무들은 어디론가 가고 푸른색의 빛을 머금은 낭종들과 있는 힘껏 긴장되어 뒤틀린 힘줄의 기둥 같은 것들이 뻗어올라 이상한 정원의 모서리를 뒤덮고 있었다.
"복잡한 용어를 배제하고 설명하자면, 괴물 바이러스를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괴한 힘줄들도 촉각들도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스르로 스며들듯 사라지고, 그 곳에는 방금까지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작의 왼손은, 당신이 기관에서 꼭 맞잡고 나왔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조금 기괴하게 생겼을지언정 분명히 사람의 손이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말의 경고 없이 이루어진 일은 놀라하기 충분했고, 그 이후에 변모한 모습 그 자체도 놀랍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미리엄, 이 작은 소녀가 그 이질적인 모습에 경멸이나 멸시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이미 본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미리엄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까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찬찬히 둘러보기만 했다. 관찰하는 시선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 미리엄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느릿하게 숨을 쉬며 말을 골랐다. 솔직히 말하자면ㅡ
"놀랍네요. 꼭 영화 속 장면 같아서."
담백한 말이었다. 미리엄은 말을 잇기 전 레몬 에이드를 한 모금 들이켰다. 따가운 탄산이 포르르 일어났다. 입 안에서 액체를 굴리다가 미지근해질 즈음에서야 삼켰다.
"제가 만지면 위험할까요?"
앞뒤를 잘라먹은 물음이 톡 터졌다. 당신을 바라보는 옥색 눈에는 궁금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자신도 실없는 질문이라 여겼는지 미리엄은 비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웃음조차 가라앉았다. 미리엄은 잠시 레몬 에이드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뒤적거렸다. 생각의 바다에서 말을 건져내었다. 제 몫의 음료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이번에는 재빨리 삼켰다. 앞에 있는 당신, 아이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나잇대에 가지기에는 제법 단단한 눈이었다.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딱지가 앉은 모양새였다.
"있죠, 당신이 괴물이라 불리든 말든 전 별로 신경 안 써요. 실제로 그렇다 해도 상관 없고요."
미리엄에게 중요한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이 제 목을 조르지 않는 한, 아니, 그렇다 해도. 미리엄은 눈을 내리떴다. 쇄골 근처 한 지점을 지그시 눌렀다. 쓰리게 웃었다. 미리엄은 다시 아이작과 눈을 맞추려 했다.
"보통 가이드가 만지면 위험합니다. 이 바이러스들은 제 통제를 따르지만, 단 하나의 경우, 가이드가 근처에 다가왔을 때는 제 통제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가이드를 감염시켜 흡수하려 시도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듀티를 받아 투입되는 경우, 근처 구역에 있는 정부에 등록된 가이드들에게는 대피령이 발령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이작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상당히 섬뜩한 답변이었다. 그것은 미팅 룸에서 내려온 지시의 의미에 대한 해명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감염당한 가이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이드들은 본능적으로 가이딩 에너지를 소모해서 감염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어지간한 가이드의 가이딩 파워로는 감염마저 다 막지 못하는 모양이고, A급이나 S급 가이드라고 해도 감염을 저항하는 데 가이딩 에너지를 돌리고 나면 저를 가이딩해줄 에너지는 소량밖에 남지 않는다더군요."
아이작은 문득 소매 한쪽을 살며시 걷어보았다. 혈관이 두드러진 곳마다 주사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다.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주사자국도 있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도 있다. 아마, 센티넬들이 가이드를 받지 못할 때 임시변통으로 사용하는 안정제를 투여한 자국이리라. 경구복용한 게 아니라 혈관에 주사한 걸 보니, 거의 마약에 가까운 독한 안정제일 것이다. 그는 가이드를 받지 못하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부작용이 심한 안정제에 의존해 견뎌온 모양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들은 이상하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만, 네, 당신에게는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들은 당신과 그를 만나도록 하기 위해 꽤 많은 사전검증과 조사를 거쳤다. 가이드 테스트에 포함된 신체검사 중에 채혈한 당신의 혈액을 아이작의 혈액에 노출시켜 보는 등, 당신이 모르는 여러 번의 사전 테스트 끝에 오늘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오고 말았지만.
아이작은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이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음울하게 침잠해있는 그것은, 그러나 그 음울한 그늘 아래에서도 어른거리는 빛을 띄고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다 아이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
그러다 그는 쓰게 웃으며, 도피오 잔을 들어 몇 모금을 더 비웠다. 이제 바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미리엄은 입을 다물었다. 추측은 했다. 어쩌면 아이작의 그 능력이 지금까지 당신이 가이드가 없얶던 이유였노라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먼저 일러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미리엄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보다는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왜 이제서야 동앗줄을 내려주느냐고 화를 내는 것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백 배는 더 생산적이다. 미리엄은 아이작의 말을 들으며 컵을 매만졌다.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가이드는 결국, 나 하나라는 말이지?
제법 마음에 드는 결론이었다.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그런 것들이 주는 울림이 얼마나 파급력을 가지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엄은 입꼬리를 잔으로 슬쩍 가렸다. 가볍게 던진 말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돌아온 것이 조금, 당황스럽다는 것처럼 눈을 굴렸다.
"그러면...지금까지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거예요?"
옅게 떨리는 목소리는 당혹이나 연민을 담은 것으로 보기 충분했다. 세간에도 센티넬에게 있어 가이드와 가이딩의 중요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 보여요?"
미소 한자락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담고 있는 눈동자는 아이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침잠해 있는 것들을 살펴보려는 것마냥. 그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나직하게 웃었다.
"내 지옥을 손수 제작하고 유지해주던 사람들에게 느꼈던 것에 비하면, 당신은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요."
당신 앞의 작은 소녀는 입에 지옥을 담으면서도 말갛게 웃고 있었다. 굴곡 없는 인생을 산 아이나 지을 법한 하얀 웃음을 어여쁘게도 매달고 있었다.
갱신하고 가! 오늘은 집에만 있었더니 통 날씨를 모르겠네...나는 오늘 중간고사가 코 앞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어. 어제 늦게 잤더니 오전에 좀 피곤하긴 하더라. 아이작주는 좋은 하루 보냈을까? 그리고 위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다가 생각난 건데, 혹시라도 아이작에게 다른 가이드가 생긴다면 일단은 자신의 목숨을 협박하는 게 앞순서고 죽인다는 선택지는 제일 뒤로 미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이작은 알까. 이 순간 자신에게 드리우는 줄이 구원의 동아줄인지, 아니면 새로운 목줄인지. 모를 것이다. 알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그 남자의 목줄을 생명줄처럼 잡아쥐고 옥죄며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도 당신에게 기꺼이 자신의 숨통을 줄에 매달아서 쥐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언제고 항상 입맛대로 자신을 통제하고 이용해먹으며 기회가 닿으면 자신들의 지구에서 배제하려 하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 모든 죄를 떠안은 죄인인 것처럼 취급하는 정부기관보다는 차라리 당신이 나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최악보다는 차악일지도 모를 미지가 나았다. 자신의 목에 매인 줄을 잡고 매달리는 게, 당신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견딜 만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새로운 목줄, 구원의 동아줄 둘 중 어느 쪽으로 불러도 사실 무관할 것이다. 상당히 많이 지쳐보이고 쇠약해져 있는 이 기이한 남자는 홀로 버려져 서서히 죽어가던 참이었기에. 남자의 눈에 어린 푸른빛은 신비로웠지만, 감정의 색채가 퇴색되고 부패되어 깎여나가 있는 칙칙한 빛이었다.
"보시다시피." 꾸며낸 연민이 어린 질문에, 아이작은 소매를 걷어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의 그림자가 드리운 눈매가 시니컬한 눈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이 이토록 조용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실감하네요."
아마 그의 센티넬 부작용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그러다 자신의 말에 당신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말갛게 웃자, 아이작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뒀다. 웃음이 거둬진 무표정은 무언가 생각에 깊이 잠긴 느낌이 있었다.
"네, 그래보입니다."
"저도 잘 알거든요.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것."
"어느 날은 이 삶이 너무도 비참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신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차라리 나를 지옥불에 떨어뜨려 달라고."
자신의 목숨을 협박이라... 아마 정말로 그걸 돌리게 된다면 아이작은 그 두번째 가이드의 존재를 모르고 마리가 먼저 그 두번째 가이드의 정보를 접하게 된 상황일 텐데, 그러면 아마 군체지성이 먼저 말을 걸어올 거야. 여기서 어쩌면 어떤 엔딩이 될지 분기점을 가르는 선택지가 나오게 될지도?
아이작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미리엄에게 있어 확실한 것 하나는, 이 길만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나 모르는 길이지만 무엇이든 지금보다는 나을 테다. 원하지도 않는 상처를 달고 매일 밤 울음과 분노를 삭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다. 이 앞에 있는 것이 지옥도보다 더한 미래라도 괜찮았다. 미리엄은 타인의 의지로 당하느니 자신의 의지로 불 속으로 발을 디딜 인간이었다.
미리엄에게 있어, 아이작을 택하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 미리엄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 늦게나마 알아들은 탓이다. 아마 부작용의 이야기겠지 싶었다. 만들어낸 것에 진심이 섞이기 시작했다. 원체 연민이나 동정이란 무책임하고 가벼운 감정 아니던가.
"지금도 그래요?"
아직도 가이딩의 감각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아이작에게 가이딩이 닿고 있는지 아닌지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다. 주위에 가이딩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 해도 지금 당장의 상태로는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확실히, 빠른 시일 내에 감각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아이작의 말을 들으며, 미리엄은 마치 웃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옅어졌다. 아예 표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전처럼 환한 미소는 분명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 말로도 부족했다. 그건 어딘가 음습했으며 무엇인가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자신이든 이 세상이든. 미리엄이 잔을 내려놓자 작은 소리가 울렸다.
"...신이란 것이 있다면, 참- 불공평해요."
미리엄은 살풋 웃었다. 음울한 기운은 빠르게 사라지고 연분홍 꽃잎을 닮은 엷은 미소만이 남아있었다. 그래, 세상은 불공평했다. 누군가는 지옥에 처박아져 있는 반면에 누군가는 정말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신이란 것이 있다면, 미리엄은 분명 그것을 죽이고 싶어질 게 틀림 없었다.
센티넬들은 능력의 부작용으로 오감과 신경이 과하게 민감해지는 과민감증을 겪는다고 하는데, 아마 그는 청각에 있어서 극도로 예민해지는 걸까. 그는 무엇에 그렇게 고통받아온 걸까.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핍박과 고뇌가 검게 말라붙은 눈에도 한 줄기 안식이 찾아든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뻔한 방식이었지만, 당신은 누군가에게, 적어도 모두에게 미움받는 이 사내에게 그런 안식을 안겨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겨울 숲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데, 낯섬이라던가 두려움이라던가 추위 같은 부정적인 느낌은 없고 차분한 안식만이 남아있는 듯한 그런 느낌에 그는 자신이 무방비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당신이 쏟아놓는 탄식에, 아이작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당신을 가만히 주시했다. 무언가 살펴보는 눈길도 아니었고, 동정하는 눈길도 아니었다. 씁쓸한 공감의 눈길이었다. 당신과 마찬가지의 구렁에 떨어져있기에 뭐라 위로도 던질 수 없고 희망찬 말도 던질 수 없는.
공감합니다, 같은 무의미한 진심을 꺼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 대신에 말을 돌리기를 선택했다.
"-그래, 진작에 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참. 고맙습니다."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쑥스러웠는지 괜히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커피는 진작에 다 마셔버렸기에, 안에 뭔가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시인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본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네요."
# 월요일에 답레 받아서 토요일에 주는 텀 실화...?? 마리주가 텀이 길 수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이렇게 텀이 길어질 줄은 몰랐네. 미안해 88
평생을 고요함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미리엄은 시선을 내리깔고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애초에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신의 그 생은 충분히 고통스러웠을까? 당신의 고통이, 지옥이 뼈에 사무치게 괴로웠을 수록 제가 줄 안식이 구원으로 다가올 텐데.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제 힘이 아이작에게 있어 구원으로 다가오기를, 미리엄은 간절히 바랐다. 동시에 누군가의 고통을 연민이 아니라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저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러나 미리엄은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 이외의 것을 몰랐다. 다른 방법을 배운 적 없었다. 제가 있던 밑바닥에서 올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다. 언제나, 그랬다.
아이작과 눈을 마주친 미리엄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음울한 미소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바뀌었다. 미리엄은 자신에게 닿은 눈빛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연민이나 동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따지자면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아이작이 건넨 말이 의외였는지, 미리엄은 에이드를 마시려던 것도 멈추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고맙다니, 무엇이? 미약한 당혹감이 서린 채로 눈을 깜박였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일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당황이 섞여들어간 말은 일견 딱딱해 보였다. 그것을 그 자신도 알아차렸는지 미리엄은 더듬거렸다.
"그, 아, 으, 그게 아니라..."
볼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갔고, 시선은 형평없이 떨렸다. 두 손을 맞잡고 꾹꾹 누르던 미리엄은 조금 진정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별로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아서요."
#괜찮아, 괜찮아! 애초에 구할 때부터 느긋하게 돌렸으면 좋겠다고 했는걸. 게다가 나도 요즘에는 정신이 도망가려고 하고 있고 하니까...한마디로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당신이 고통과 구원의 무게를 느긋하게 저울에 달아보는 동안, 남자는 감정을 표현하기엔 너무 지쳐버린 얼굴을 내세우고는 당신이 당신도 모르게 흘린 그 작은 것들에도 갈사 직전에 물을 입에 담는 아이처럼 구원을 맛보고 있었다. -물론, 수분이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던 사람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물을 먹이면 오히려 물에 체해 죽기 마련이다.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당신의 손끝에 묻혀서 떨어뜨려주는 것. 조금씩 축여나가는 것. 충분히 그를 당신에게 적응시켜야 하지 않겠나. 마약성 진통제처럼. 하루라도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때까지.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정도는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짐승 길들이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
별로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아서요, 하는 당신의 말에, 아이작은 눈을 깜빡이다 문득 자신의 흉물스러운 손을 들어보았다. 관절이 지나치게 두드러진 거미와 같은 손- 그러나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에게서 주의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는 생각이 들기 전에, 다시 당신에게로 눈을 들었다. 당황한 듯 붉어진 얼굴에,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처음 웃어보는 웃음이라 조금 어색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무엇에서 자유로워졌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감탄만 하고 있었으니 꼴이 우스웠겠습니다."
아이작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제가 바이러스를 부린다고는 말씀드렸죠. 조그만 세포들로 이루어진 바이러스 군집을, 수백 조- 수천 조 마리씩."
"부작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체감되는 것은... 그것들이 떠드는 소리입니다. 배고프다. 피냄새를 맡고 싶다. 지키고 싶다. 오늘 기분이 너무 꿀꿀하다. 계획에 동참하라. 이 곳은 너무 갑갑하다. 우리는 진작 너에게 힘을 주었는데 너는 뭐가 아쉬워서 사냥개 놀이나 하고 있느냐. 보아라, 저들은 너를 성가신 가축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풍족한 과수원들과 아름다운 정원을 세울 것이다..."
"지칠 생각을 하지 않고, 떠들어대니까."
"그뿐만 아니라, 제가 흡ㅅ─"
"확실히 그것들을 제어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것들의 의식까지 어쩌지는 못하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난 이후부터... 그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어요."
"별로 한 것이 없다고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제 입장에선 저 같은 괴물에게 가까이 와주시기로 결정해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해주었지만... 그들은 항상 저를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를 통제불능의 괴물 취급하고 있으니까요. 틀린 말도 아니지만."
# 고마워 88 그래도 오늘부터는 좀 많이 여유로워져서, 전보다 훨씬 자주 체크하고 답레도 좀더 빨리 줄 수 있게 될 것 같아.
그런데 아이작이 한 익숙치 않은 말이, 마리도 그런 말 듣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홍당무 되는 게 너무 귀엽다... 아이작이 집적거리려던 거 목줄 잡았어. 아직 그만큼 감정의 거리가 가깝지 않은 것도 있고, 아이작은 지금 마리와의 만남이 어떤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업무의 연장선이고, 마리와 나누는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 상호작용 하나하나도 아직 기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결국 미리엄이 당신, 아이작의 구원자 행세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반대로 당신이 미리엄에게 줄 것 또한 일종의 구원이 될 테다. 누군가를 물들이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물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과거의 자신으로 남아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금의 미리엄은 이를 간과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뼈저리게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미리엄은 아이작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지거나 하는 대신 조용히 잔을 매만졌다. 아이작이 건네주는 정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여러번 곱씹고 생각하며. 당신이 말하는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자면ㅡ 그래, 그랬다. 그 바이러스는 차라리 군체지성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에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한 헛소리를 지나쳐 무언가를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직은 속단할 수 없었다. 아이작이 말해주는 말은 축소되어있으며 한 편으로 과장된 면모도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기억력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저, 저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흩어졌다. 미리엄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 노력했다. 오갈 데를 잃은 시선이 제가 쥐고 있는 잔을 향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미리엄은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씁쓸했다.
"정말로, 고맙다고 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애초에 제가 있는 선택지가 몇 없어서요."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물론...제가 아이작의 가이드가 되기로 한 건 제가 아이작을 직접 만나고 내린, 온전한 제 결정이지만요..."
미리엄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왼쪽 손으로 오른쪽의 팔목 가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힘을 실었는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에 가까워 보였다. 미리엄은 살포시 웃었다. 거센 빗속에서 여린 꽃잎이 모조리 떨어지고 만 꽃이 겹쳐 보였다.
"...거부했다면, 아마..."
목소리가 흐려지다 끝내 끊어졌다. 미리엄은 마치 정신이 막 들은 사람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뒤늦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환하게 웃었다.
"뭐, 부모님이 절 죽일지도 모른달까요? 확실히 주위에서 성화였겠죠, 정부도 포함해서."
농담으로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였다. 미리엄은 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차가운 액체가 선득한 감각을 남기며 목 뒤로 넘어갔다.
"여하간에- 당신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어떻게든 피하려 했을 거예요. 지금처럼 이야기하는 대신."
다시 말하자면 외부의 압박이 아예 없었다곤 말하지 못해도, 아이작의 가이드가 되기로 선택한 건 자의라는 말이다. 미리엄은 타의로 길을 걷느니 어떻게든 통로를 만들어 도망갈 사람이었다 그 통로 끝에 존재하는 것이 죽음이라 하여도. 이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리엄은 아이작이 마음에 들었고, 아이작의 가이드가 되기로 결정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집적거리는 아이작은 매우매우 보고 싶지만(사심 100%) 일단 마리가 아직은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어서 포기.... 사실 지금도 보면 마리가 마음을 연 것처럼 이것저것 다 이야기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문을 꼭 닫은 채로 얕게 흘려보는 중이니까 말이야. 마리가 아이닥을 받아들이는 건...시간이 좀 지나야 하지 않으려나? 고로 그건 미루는 걸로!
조금이라도 여유로워졌다니까 다행이다. 많이 바쁜 것 같아서 좀 걱정되었거든. 그리고 요즘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것 같던데 감기 조심하고, 코로나도 조심하고!
당신이 신중하게 말을 고른-적어도 그러려 한 만큼이나, 아이작은 당신이 조심스레 풀어놓는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깊게 경청했다. 흐리고 구슬픈 미소를 띈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환한 미소로 얼버무려서 꺼내어놓는 부모님이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비유적 표현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 미소로 가리는 말이 왠지 자신이 Absorb에서 Absolute로 황급히 말을 꺾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이작은 그것을 굳이 들추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신도 농담 한 마디를 한다는 듯이, 얼굴에 미소를 띄고는-그러나 웃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의 얼굴에는 시니컬한 웃음이 걸릴 뿐이었다-당신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오,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한 번 말씀을 나눠볼 테니까."
물론 그 말씀을 나눈다는 동사에는 사용한 표현 이상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지만, 당신에겐 별 상관없지 않은가? 진짜 부모도 아니고, 부모다운 부모 노릇을 해주지도 않은 이들이었으니. 당신이 음료수를 마시곤 내놓은 말에, 아이작은 웃음을 거두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입니다. 당신이 정했다는 것."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아이작을 마음에 들여놓았는지 아이작은 모르고, 당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도 아이작은 모르지만, 명목상의 선택지만 있을 뿐 사실상의 선택지는 없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선택지가 없었다. 명목상의 선택지마저 없다는 것은 사소한 차이에 불과했다.
당신도, 여기 있는 이 핼쑥한 남자도.
신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신에게서 버림받고 모든 것에게서 버림받았어도, 그럼에도 그 그늘진 황무지에서 극적으로 마주친 당신만큼은 그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를 만났다. 그는 조용히,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단 한번 되새겨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이작의 말에 미리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힘없이 흐트러졌다. 미리엄은 습관처럼 두 손을 힘을 주어 맞잡았다. 무언가를 억누르듯,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 고개를 떨궜다. 이야기라, 그게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은 알았다. 미리엄은 잠시 아이작을 만난 부모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당황할까? 혹은, 공포스러워 하기라도 할까.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미리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내어놓은 자식이었다. 감정의 쓰레기통이기도 했고. 입양온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센티넬이나 가이드로 발현되었다. 미리엄은 아니었다. 19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기 충분한 나이였다. 투자한 것이 사실은 원석이 아니라 돌멩이였다는 것은 분노할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엄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온건한 표현이었다. 미리엄은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향한 악의를 날카롭고 섬세하게 갈았다. 언젠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당신의 말이 유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이작이 되뇌이는 말을 들으며 미리엄은 생긋 웃었다. 다행히도 전하고자 한 바가 당신에게 닿은 모양이었다.
>>149 음.. 그런가!? 그러면 친밀도가 올라가면(적어도 아이작이 느끼기에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팍팍 집적대기로..(?) 응, 가늘어도 좋으니 길게 가자!
문제는 너무 일찍 잠들어서 새벽 2~3시에 깬다는 사실이야... 으윽 (역으로 와장창나는 중) 물론 잔병치레는 안 하도록 조심하고 있어! 요즘은 조그만 몸살기가 있어도 조마조마한 시국이니까...
사실, 이대로 아이작이 센터까지 바래다주고 아이작과는 헤어지지만, 센터에서 정식으로 가이드 등록하는 과정에서 아이작의 처우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던 간부가 마리에게 면담 신청해서 아이작에 대한 기관 측 기록을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주는 부분까지 돌려보고 싶긴 했어. 이 부분까지 돌려보고 싶은지는 마리주에게 맡길게! 우선 아이작이 센터로 돌아갈 것을 권하는 내용의 답레를 써둘게.
이 세상에 정당한 증오는 없다. 정당함을 입증받아야만 하는 증오도 없다. 그들이 당신에게 그랬듯이 당신이 그들에게 그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복수에 그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신중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최고의 순간을 기다려 최대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아이작은 너무 지나치게 예리한 면도날일 테니까.
그리고 그 예리한 면도날은 당신에게 너무도 쉽게 그 자루를 내어주고 있다. 상황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가이드로 정식 등록을 하시려면 센터로 다시 돌아가셔야 되는 거였죠."
아이작은 감았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매칭 절차와 각인 절차를 제쳐둔다 하더라도, 가이드 등록은 오늘 센터에 방문한 김에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잔은 그대로 두시면 바텐더가 치울 겁니다." 하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롸? 이제 보니 바리스타를 바텐더라고 적었어... 카페 들어올 때부터 헷갈리더라니.. 사고 한 번 칠 것 같더라니... 마리주도 중간고사 고생 많았어. 여유롭게 천천히 돌리자! 나도 지금 조금씩 생활패턴을 고치고 있는 중이야. 중간고사 시즌도 지나갔으니 다시 원상복구해야지 으윽..
하긴 센티넬 가이드는 그러라고(?) 있는 관계니까. 마리주 좋을 대로 아이작을 구워삶아줘^u^!
답레를 써오지 않고 저걸 막레로 해도 좋고, 마리주가 더 이어서 써오고 싶다면 찐막레를 써줘도 돼! (다만 찐막레를 쓰겠다면, 아이작주는 실수를 했지만 아이작은 바텐더가 아니라 바리스타라고 제대로 말했다고 쳐줘 8ㅁ8...) 토막글은 천천히 써보고 있을게.
본디 복수를 하려면 무덤을 두 개 파놓으라 한다. 하나는 그 사람의 것, 하나는 본인의 것. 미리엄은 결심이 선 그 순간부터 그 칼날로 인해 자신이 다친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다치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미리엄은 자신이 휘두룰 수 있는 힘이 그토록 많지 않음을 알았다.
"아, 네."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올 때 들었던 말은 여즉 기억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라도 돌아오라고. 미리엄은 잠시 제게 다가온 손을 바라보다, 손바닥이 맞닿도록 손을 잡았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이작의 손을 붙잡는 모양이 퍽 익숙해졌다. 미리엄은 당신의 손가락에 제 것을 엮었다.
"네, 돌아가요."
기껍지는 않아도,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미리엄은 참을성 있는 아이였다. 다음이라는 걸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무덤 두 개가 문제가 아니라 복수가 충분한 고통을 안겨주지 못하고 너무 빠르게 끝날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답레 분량을 줄이다가 그 부분까지 줄여버렸더니 전달이 안 됐었구나 ^q^) 그런 상상의 나래 펼치지 말고 오타려니 해줘yy 토막글은 조금씩 쓰고 있어! 오늘 마리주는 언제쯤 자러 갈 생각이야? 혹시 아직 잠이 안 온다면, 토막글을 올리고 나서 다음 일상 이야기를 해볼까 해서.
앗아.....마리주가 망충했다! 예리하다길래 뭐지 미리엄도 베일 수 있다는 건가...? 해버리고 말았던 마리주........:p 이 부분도 적당히 넘어가줘... 내일 아침부터 나가봐야 해서 슬슬 자러 들어갈 생각이었어! 다음 일상 이야기는 천천히 해보자!! 그리고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좋은 밤 보내, 아이작주!
"미리엄 양이 가이드로 등록되기 전에 몇 가지 주의해두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아이작이라는 그 사람에 대해서."
"당신이 전담하게 될지도 모를-당신이 아직 매칭 등록 의사를 밝히지 않았으니까요-센티넬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불안정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미리엄 양이 매칭 등록 의사를 정하기 전에 전달해드리는 게, 당신이 올바른 결정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거든요.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내어주시겠어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에요."
"아이작이 당신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주던가요? 자기 능력이라던가, 자기 개인사라던가..."
"예상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자기 속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긴 하죠. ...뭔가 털어놓는 법도 모를 거에요, 그 불쌍한 사람은."
"■■■■■ 마을에 대해 알고 계세요?"
"네, 작은 마을이니까... 알고 있다는 반응보다는 모른다는 반응이 더 정상적이죠. 그 마을에서 일어난 가스 폭발 사건도,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실리고 마는 정도였고요."
"그렇지만 사실 그 마을은 그렇게 작은 마을이 아니었어요. 거기서 일어난 사고도 가스 폭발이 아니었지요."
"■■■■■ 사건... 국지적 흑색 생물학 재해를 동반한, 센티넬 능력에 의한 대규모 무차별 살인 사건이죠."
"아이작이 자신을 잡으러 온 센티넬들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것은 살인사건으로 규정됐지만, 제가 보기에 적어도 그것은 아주 불행한 사고였어요."
"이건, ■■■■■ 사건 당시 아이작의 능력으로 침식된 ■■■■■ 마을의 전경이에요."
"...마치 외계 행성의 지옥 같죠?"
"아이작은 이 지구 전체를 이런 꼴로 만들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한 센티넬이에요. S급의 울타리 안에 두는 것도 말이 안 될 정도의."
"규모로 보자면 지구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하고, 위력으로 봐도 끔찍하기 그지없죠. 온 몸이 산산조각나도 멀쩡히 수복하거나 아예 새로운 몸을 만들어버릴 수 있고, 한번 받은 공격에 대해서는 반영구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어요.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데, 상대방이 충분히 감염됐다면 상대방의 몸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요. 심지어는 사람을 흡수해서, 그 사람의 기억이나, 센티넬을 흡수했을 경우 그 능력까지 모방할 수 있고요. 말 그대로, 전례가 없는 완전생물, 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죠."
"그게 우리 기관이 아이작을 두려워하며 예의주시하는 이유들 중 하나고요."
"그런 괴물같은 능력이 평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만도 공포스러운 일인데, 불안정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면 그만큼 더 무서운 일이죠..."
"■■■■■ 사건 당시, 아이작이 자리하고 있던 곳은 한 고아원이었어요. 아이작은 마을 전체를 감염체로 뒤덮었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그 고아원은 멀쩡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었죠."
"시간마비 능력을 지닌 센티넬이 아이작을 묶어놓고 있는 동안, 고아원 안에서 우리들은 많은 증거들과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죠. 고아원의 높은 담장 아래서, 원아들에게 행해지던 비정상적이고 광신적인 온갖 종류의 학대를요. -오, 이젠 다시는 그럴 수 없겠죠. 아이작은 한번 경험한 능력에 완벽히 적응하니까, 시간마비 능력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두었을 거에요."
"원죄라는 이름 아래, 그 뿌리가 되는 종교의 교리에서도 한참 어긋나버린 비틀린 고행이 원아들에게 행해졌죠. 그것은 그들을 끔찍하게도 육체적, 정신적, 간혹 성적인 측면에서까지 핍박했고, 한계로 몰아붙였어요. 원장의 일기며, 교직원들의 근로 일지며, 실험 일지며, 원아들의 일기라던가, CCTV 영상이며... 그 자료들을 맨정신으로 전부 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런 잔인한 학대들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행해져오다가, 말도 안 되는 극적인 비극으로 공개된 거죠."
"아마 이 고아원의 원장이라는 사람은, 절반 정도는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원아들이 센티넬이나 가이드 능력을 발현하기를 바랐던 것 같고... 나머지 절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저희도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결과적으로, 그녀는 성공했죠."
"아이작의 능력의 발현은, 극단적으로 몰아붙여져서는 결국에는 '희생 제물' 로 낙인찍혀서 버려진 병동에서 어린 양마냥 갈가리 찢겨나가는 도중에 발생했어요. 폭발적으로. 파괴적으로. 발현 당시의 CCTV 영상이 남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차마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학대를 스스로를 자각할 무렵부터 열여덟 살이 되는 날까지 받아왔는데."
"원래 저것보다 더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이상 증세를 보였어야 하는 사람인데,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고 차분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어요."
"저는 불안해요. 아이작이 그 차분한 표정 아래 감추어놓고 있는 것이 깨어나는 순간이요. 그것이 무엇이건, 결코 사람에게 우호적이진 않겠죠. 그는 명백히 이 세상을 원망하고 있으니까요."
"당시, 마비된 아이작을 두고 기관은 전세계적인 위협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센티넬을 기회가 있을 때 제거해야 한다는 파와, 아이작은 이용가치가 충분하다는 파로 갈렸어요. 당시에 역임하셨던 전대 국장님께서는, 아이작을 이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계셨기에 아이작을 살려두었던 거에요. 아이작을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지만, 아이작과 동조율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아이작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당신이 나타났어요."
"...솔직히 모두 터놓고 말씀드리자면, 기관은-우리는 당신을 이용해 아이작을 통제할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는 그만큼 위험하고, 엄청난 불안요소를 품은 존재니까요. 물론 기분나쁘시겠죠.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릴게요. 당신이 고삐가 되지 않겠다면, 우리는 당신을 존중할 테고요."
"그렇지만, 아이작과의 매칭 등록을 거부하신다고 해도... 아이작을 자주 지켜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작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할 거에요. 그에게 고삐를 채울 수 없다면 그에게 입마개라도 채워놓아야만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럴 수단이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미리엄 양에게... 무리한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는 거고요."
생각보다 마리한테 자세하게 알려줬구나...아무래도, 저 말을 들은 마리는 입을 다물고 최소한의 대답만 했을 거야. 그것도 회피성이 짙은 것들로. 속으로는 선택을 존중하기는, 하고 비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겉으로는 세상 순하게 눈을 뜬 모습으로 불안한 것처럼 위축된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리고 물론 아이작의 가이드가 안 되겠다는 생각은 정말 하나도 안하고 있겠지. 고삐가 되라는 것에 대해서는...기관의 통제 도구가 되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이작을 통제할 수 있는, 고삐를 쥔 '사람'이 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마리도 정상인은 아니니까.
뭐, 여하튼 이제 다음 일상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다! 마리가 조건으로 건 다음 만남 쯤의 이야기로 하면 되려나? 아니면 더 뒤쪽? 아이작주는 어떻게 생각해?
오늘은 조금 일찍 갱신했구나..! 나는 오늘 저녁때쯤~ 7시 넘어서부터 있을 것 같아. 매칭이 성사되면 그때부터 동거하게 되는 걸까... 아이작 집안이 너무 휑뎅그렁해서 마리가 당황할지도 모르겠네 ㅋㅋㅋ 최소한 쓰레기는 제때제때 치우지만, 그거랑 기본적인 가구들 외에는 책장도 없이 쌓여 있는 의학서적들뿐일 테니까... 아, 아이작 취미가 독서고 의학서적을 선호한다는 TMI를 내가 말했던가? 센터에선 각인제로 각인할 건지 직접 각인할 건지도 물어볼 텐데 마리는 대답을 어떻게 하려나.
그 외에도 아무래도 기관 측에서도 마리가 아이작의 고삐를 쥐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마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고, '일반적인 절차' 핑계를 대면서 이런저런 심리 테스트로 마리를 프로파일링해보려고 했을 텐데, 마리가 독니를 숨겨놓고 있다는 게 얼마나 들켰을까? 마리가 대응을 잘해서 기관의 수사관들이 마리의 성격에 대해 눈치를 못 챘을까, 아니면 조금 미심쩍어하고 있을까, 아니면 마리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까?
아이작: ...안전가옥이 좀 을씨년스럽죠. 아이작: 딱히 인테리어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아이작: 좀 더 꾸며도 되고... 아니면 아예 집을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마리는 집에 있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으니까, 아무래도 동거하는 쪽으로 가지 않으려나? 아이작 취미가 의학서적 읽는 거구나...! 멋져!! 마리는...이해를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조금 당황은 해도 그렇게 크게 놀랄 것 같진 않네. 마리가 지내던 곳도 딱히 뭐가 많이 있던 편은 아니니까. 직접 각인이면...정확히 뭐로 생각하고 있어? 가이드버스 변용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긴 한데 어 음 그거..려나?
마리는 아무래도 학교에서도 무슨 일이 있다 해도 평범한 아이 흉내를 내면서 지내고 있으니까, 심리검사에서 뭐가 드러나진 않을 것 같아! 조금 쎄한 것 같다 싶다가도 소심하지만 예의바르고 유순하게 행동하고, 잔뜩 긴장해서 허술하게 실수도 연발하는 모습을 보고 누가 뱀이라고 생각하겠어. 오히려 저번의 당돌한 행동이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전부 쥐어짜낸 거라고 생각하면 모를까. 정리하자면- 조금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어도 심증 뿐이고, 직접 미리엄을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을 많이 가리는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어.
마리: 조금 휑하긴 하네요. 마리: 잘 수 있는 침대 정도만 내어주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아서요. 마리: ...그러니까, 전에 지내던 방이랑요.
마리: 여하튼ㅡ 아이작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지금도 비가 오는데. 집인데도 영 서늘한 기분이야. 옷이라도 챙겨입고 있는 중이야. 아이작주도 따듯하게 잘 챙겨입어!
의학서적을 읽는 이유는 별것 없어! (아이작: 사람의 몸의 구조를 잘 파악하고 있으면, 사람에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지니까요. (음침한 웃음))
각인의 경우는 마리주 말대로 센티넬-가이드버스에 대한 해석이 플레이마다 다양해서, 각인에 대해서는 마리주가 받아들이기 편한 것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각인제를 사용하는 간접 각인의 경우는 서로의 혈장에서 추출한 특정 성분과 촉매를 혼합해서 각각 센티넬과 가이드에게 주사하는 것으로 생각해두고 있음)
평범한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심리 프로파일러들도 네 명 중에 한두 명이 미심쩍게 여길 정도로만 일코(?)를 잘 하고 있는 거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추울지 몰라 담요 꺼내두고 있었는데, 비가 그치지 않고 와서 그런가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네. 그냥 눅눅한 정도야. 제습기.. 제습기가 필요하다..
아이작: 음... (철봉으로 된 조악한 프레임에 매트리스 하나 덜렁 올려져 있는 1인용 침대를 물끄러미) 아이작: 거주지에 대해서는 일단 두고 고민해보기로 합시다. 아이작: 침대는 사버리면 그만이기야 한데, 산다고 침대가 우리 집으로 순간이동하진 않으니까 오늘 밤이 문제로군요. 아이작: 저야 바닥에서 자면 그만이지만, 남이 쓰던 침대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청결하게는 사용했습니다만.
왠지...설마 그런가 생각하기는 했어.... 마리는 그 대답을 들어면 오히려 실용적인 취미라고 해두려나?
각인...아무래도 마리라면 각인제 대신 알아서 각인하겠다고 할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그 각인을 뭐로 하면 좋으려나. 마리주는 정말로 음란마귀라던지 그런 게 아니지만(중요) 생각나는 쪽이....(자체검열)(?)
한 다섯명 중에서 한두명 꼴? 운 좋으면 없거나 있다가도 만나보고 의심을 버리기도 하고. 마리는 양 가죽 뒤집어쓰는 것 하나는 정말로 잘 하니까. 아...확실히 비오면 습기가 장난 아니지. 여기도 공기가 좀 눅눅해. 그래도 빗소리는 듣기 좋다.
마리: 그럴까요? 말마따나 집을 사는 것도, 가구를 사는 것도 오늘 당장은 안 될 테니까요. 마리: ...? (침대를 봤다가 다시 아이작을 봄) 마리: ...어, 그, 침대를 쓰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요, 그래도 집주인을 바닥에서 자게 하기는 좀.... 마리: 제가 신경쓰여서요.
마리주가 생각하기 편한 대로.. ^ㄱ^ 장면 넘기는 거라면 할 수 있고 불필요한 묘사라고 생각되면 언제건 다른 것으로 바꿔도 되니까.
그런 느낌이구나. 기관에서는 틀림없이 아이작 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겠네. 마리를 일종의 고삐로 사용하려고, 아이작보단 마리 쪽에 컨택을 많이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말인즉슨 마리에게 선택권이 많이 주어진다는 뜻) 응, 빗소리.. 그러고 보니 마리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했었나?
아이작: 저야말로 어디서 자건 괜찮습니다. 소파도 있으니까요. 아이작: 소파야말로 볼썽사납게 헤져 있어서 당신을 눕힐 곳이 못 되고.. 아이작: 일단은 당신도 여기에 사는 셈이니,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작: 한 침대를 쓰긴 좀 그렇지 않겠나요. 아이작: ......(귓가가 빨개짐) 제가 한 농담치고도 형편없군요. 잊으세요.
(내적 비명) 일단....묘사 대충 건너뛰는 방법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각인하게 되어있다던가 음음 고민 좀 해봐야 되려나.
그렇겠지! 저렇게 소심하고 겁많은 아이가 무언가를 해볼 거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겠지. 게다가 마리는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부러 얕보이기를 자주 하는 편이니까. 쉽게 속아넘기기 쉬울 거라고 생각될지도 몰라. 응, 기억하고 있었구나! 마리는 비오는 날이 캄캄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 습해서 축축한 것도 그렇고. 아이작은 반대로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지.
마리: 차라리 내가 소파에서 잘까요? 마리: 알긴 하는데...그래도, 아직 좀 불편해서요. 주인 있는 집에 눌러앉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리: (피식) 마리: 어차피 내 처음도, 끝도 아이작이 될 텐데...겨우 그걸로 부끄러운 거예요?
아이작: 조금 웃기네요. 저도 내내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아이작: 역시, 날이 밝는 대로 거처를 바꾸는 게 좋겠네요. 아이작: ...(공연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함)그- 심적 거리감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괜찮지만(자기 무덤 팜) 마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적인 랜드마크가 거기밖에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의 접선을 주선하는 곳이 거기이기도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그 곳은 아이작과 미리엄 사이에 최소한의 영향력이라도 남겨놓으려 고군분투 중이었으니까.
센티넬-가이드 관리기관 센터.
사실 겉보기로만 보면, 랑데뷔로 삼기에는 꽤 나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관리기관 센터는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는 기관이기에 그만큼 치장에 신경을 쓴다. 번듯한 건물과 환히 열린 창구, 개방감이 느껴지는 산뜻한 인테리어 외에도 센터 내에 카페와 멋진 정원까지 차려놓고, 정문에는 정부 소속의 유명한 스타 센티넬들이 한껏 꾸미고 촬영한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기관 건물은 관공서와 연예인 기획사, 카페를 적당한 비율로 짬뽕해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이 관리기관 센터를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곳에만 오면 왜인지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불편한 박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작에게는 없는, 가끔씩만 불행하며 때로는 행복한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건강하고 산뜻한 미소가 공기 중에 가득 떠돌고 있었기에. 센터를 오가는 직원들과 센티넬들, 가이드들에게는 아이작에게 없는 것이- 살아있다는 생동감과 활기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거기에다 그런 불편한 박탈감을 느낄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도 만만찮은 골칫거리였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들이 함부로 얼굴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센터의 로비 한켠의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아이작은, 그저 낡아빠진 점퍼를 걸친 초췌한 청년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오늘은 두 번째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아이작은 여유시간이 충분한 것을 선호했기에,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넘게 일찍 나와서는 센터 한켠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야말로 선레가 늦었네 88 마리주가 자주 들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늦는 건 자꾸 나네88..
아이작의 근처에 접근하는 가이드면 무조건 위험하다고 설정할 경우 배경 선정이 까다롭고, 아이작이 다른 가이드와 돌발적으로 마주칠 위험이 없는 영역을 구성하느라 수반되는 이런저런 보안절차를 서술하다가 글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지루해질 것 같아서, <파장이 맞지 않는 가이드가 아이작에게 접근하면 위험하다> 에서 <파장이 맞지 않는 가이드가 아이작에게 가이딩을 시도하면 위험하다> 로 설정을 바꾸기로 했어!
말하자면, 지금 막 건물에 들어선 이 작은 체구의 소녀는 그런 분위기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활기 넘치는 거리에 손쉽게 녹아들만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조금 소심하고 겁많아 보이더라도, 작약만큼이나 수줍고 사랑스레 웃을 수 있는 아이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다. 차라리 연약한 어린양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미리엄도 매한가지였다. 익숙해졌다는 것이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리엄은 늘 이런 공기가 구역질 난다고 생각했다. 미리엄이라는 소녀는, 차라리 음습한 뒷골목이 편했다. 모두가 평등하게 불행한 지옥에서라면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살기 편한 곳은 역시 이런 곳이었다. 속여넘기기 쉬운 이들이 즐비했으니. 미리엄은 양의 가죽을 걸쳤다.
잠시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미리엄은 곧 그 사람을 발견해 곧바로 걸어갔다. 약속 시간보다 3분 가량 이른 시각이었으나 이미 만나려 하는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걸음걸이가 조금씩 빨라졌다.
속삭임은 당신과 헤어진 바로 그 순간 다시 시작됐다. 물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그 속삭임들에 아이작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 그랬었다. 그렇지만, 그 짤막하고도 달콤한 침묵은 아이작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소음에 대한 내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려버리고 말았다. 속삭임들은 좀더 집요해졌고, 아이작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감염체들의 목소리들과, 자신에게 흡수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들. 그들은 아이작의 실패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고, 아이작의 현재 상황을 다시 각인시켜 주었으며, 감히 그런 '죄' 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편안해지고자 하는 아이작을 맹비난했다.
결과적으로 요 며칠 사이 그는 좀더 초췌한 꼴이 되어 있었다. 입맛이 떨어져 요 며칠간 식사량이 절반 정도로 떨어졌고. (아마 이대로 며칠 더 지나면 확실히 거식증이라 해도 될 듯했다) 당연히 수면시간도 형편없이 줄어들어서 눈 아래의 검은 음영은 더 진해졌다. 그러잖아도 관상이 툭 튀어나온 이마와 움푹 들어간 눈두덩 때문에 눈에 그늘이 많이 지는 타입인데.
그런 아이작에게도 온난습윤한 뉴 고모라의 늦봄의 햇살이 따뜻하긴 매한가지였고... 더군다나 부족한 수면까지 겹쳐, 그는 센터 건물 한구석에서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조촐한 모양새로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소파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수그려서는. 마치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데도, 염치 불구하고 불가항력으로 잠에 빠졌다는 듯이, 잠든 몰골마저도 흡사 길잃은 개가 쓰러져있는 꼴이었다.
그런 아이작을 깨우는 발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던 아이작은, 얼굴에 미소를 활짝 피워낸 당신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눈을 비볐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내가 잠깐 졸고 있었던가요?"
미소는 사그라들었다. 그 빈틈을 걱정이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 윤곽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약을 접한 이는 견딜만 했던 일상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술이나 담배도 엇비슷했다. 짙어진 음영은 너무나 선명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에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미티도록 어렵다. 의존하지 않고 밤을 보낸다는 것은 자해나 다름 없다고 생각될 정도다. 실제로는 그 반대임에도.
미리엄은 느릿하게, 그러나 이내 빠르게 다가가 아이작을 안으려 했다. 걱정어린 얼굴을 품에 묻으려 했다. 단호하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당신을 달래듯 감싸안았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미리엄은 눈을 내리떴다. 아이작을 한 번 힘주어 안고는 천천히 팔을 풀려 했다. 아이작이 붙잡지 않는다면 조금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아예 접촉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신이 원한다면.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저를 잡으라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미리엄이 내뱉는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하고 상냥했다.
아이작에게는 어느 쪽도 달라질 것 없다. 말기 환자나 다름없는 삶이기에. 약에 손을 대지 않으면 고통에 시달리고, 손을 대면 손을 대는 대로 그것에 중독된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 없이는 삶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다. 기껏 당신이 안심하고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개가 생겼는데, 이래서야 개가 너무 비루먹지 않았나. 그 개가 얼마나 흉측한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센터 내에는 녹초가 되어 있는 사람도 종종 보였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포옹하는 것도-혹은 그 이상의 행동을 하는 것도 꽤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당신이 누군가를 끌어안는 것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당신의 품 안에 끌어안긴 이 남자가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칙칙한 몰골이라는 특이점이 있긴 했지만.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두 번 정도, 직원이 아이작을 무단침입한 노숙자로 오해하고 다가왔다가 아이작의 목에 매어진 S급 센티넬 카드를 보고 물러났었다.)
아이작은 당신을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품에 머리를 마음껏 기댔다. 그의 퀭한 눈이 다시 감겼다가, 당신이 놓아줄 때는 그 이상한 푸른빛을 띄고 당신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는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만남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더욱이 이것은 비단 당신과의 두 번째 만남일 뿐만 아니라, 평생을 통틀어 마음놓고 대할 수 있는 사람과의 두 번째 만남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걱정이군요."
당신이 건네는 말이 너무 낯설어서, 아이작은 흐리게 웃었다.
"나더러 조금 편한 곳에서 자라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 누구도 이 개를 길들여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단지 꺼림칙하게 여기며 돌팔매질을 해왔을 뿐. 당신에게는 잘된 일이다. 전에 스쳐간 누군가의 기억을 털어내줄 필요 없이, 무방비하게 텅 비어 있는 이 퇴폐적인 보헤미안에게 당신을 한가득 채워넣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미리엄은 자신의 앞에 있는 버림받고 비루먹은 개가 마음에 들었다. 애초부터 길들이기 쉬우며, 어쩌다 한 번씩 떨어질 다정과 상냥에도 모든 것을 바칠 이를 바라고 있었다. 이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삶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자야말로 일말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미리엄은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긴 과정의 일부다. 솜씨 좋은 사냥꾼은 아이작이 경계심을 녹이고 스스로 그 목에 목줄을 걸게 될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릴 것이다. 제 말 한마디에 매달리고 저를 박해한 이들의 숨통을 기꺼이 끊어버릴 충견을 기르기 위해서라면 인내할 수 있었다. 평생이 기다림의 연속이었으니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미리엄은 아이작이 자신을 잡지 않자,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미리엄은, 굳은 입가를 뒤늡게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것이 아이작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다른 무엇일지는 미리엄, 본인만이 알 것이다.
"듣다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담백하고 단순한 말이다. 그러나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에 미래를 포함시켰다.
"아이작, 앞으로도 볼 사이잖아요. 대화 같은 것들은 다음에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미래에 자신과 아이작이 있을 것임을 단정지었다. 미리엄은 서서히 애정으로 엮어 무엇보다 튼튼할 목줄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친 미리엄은, 따사로운 햇살을 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작은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꺼림칙한 시선과 비켜가는 발길 등 커다란 해충을 대하는 듯한 취급에는 익숙했지만, 누군가가 건네어오는 일상적이고 상냥한 말이나 손길, 온기 같은 것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까. 아이작은 그저 '센티넬과 가이드, 라는 특수한 관계성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내게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줄 수 있었을까?' 하는 암울한 자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아이작은 스스로가 그 답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래, 이건 일종의 비즈니스니까.' 라는 느낌으로 납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건네어주는 온기가 너무 달아서. 이 상냥한 적막이 너무 달가워서... 당신이 당신의 말에 부드럽게 실어주는 미래가 너무 반가워서, 그런 것들이 그만 아이작에게 허황된 착각을 심어주고, 당신의 향을 무심코 깊이 들이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괴리가 자신을 얼마나 호되게 앓도록 만들지도 모르고.
"예기치 못한 컨디션 난조일 뿐입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본인이 스스로 고집을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어찌됐건 쓰러질까 걱정된다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었다.
"정히 걱정되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죠. 여기 센터에도 카페는 있으니까요."
그는 안경을 고쳐썼다. 차림새는 적잖이 후줄근한-유행은 둘째치고라도 옷가지들이 하나같이 낡은 티가 나는 것들이었다-꼴이었지만, 안경 알만큼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서는 그의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가감없이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몸을 씻는 것 이외에 그가 알고 있는 몸단장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도 했다.
일요일에 받은 답레를 금요일에 돌려주다니... 8.8 마리주 한 주는 좀 어떻게 보냈어? 나는.. 나는 주중은 잘 못 보냈어.. 주말 동안은 좀 오래 붙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두 번째는 아이작을 데리고 데이트하는 것처럼 될 텐데 어떠려나. 마리가 걱정하는 부분에 중점을 둬서 어디건 끌고 가서 햇살 좋은 공원이나 아이작네 집에를 가서 낮잠을 자도 되고, 아니면 아이작의 옷을 사러 간다거나, 서로의 취미를 공유한다거나.. 아, 이러면 아이작은 마리를 서점으로 데려가려 할지도🤔
추후 전개는 무난한 데이트로 해도 되고.. 아니면 아이작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범죄자 센티넬의 도주극에 마리가 휘말리는 전개로 해도 좋을 것 같아. 센티넬이 마리를 협박하다가, 머리 끝까지 화난 아이작이 매스컴과 경찰조직 등의 카메라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범죄자 센티넬을 끔살했다가 아이작과 기관 사이에 불화가 좀더 심화되는 전개라던가..?
미리엄은 선을 잘 가늠하는 사람이었다. 그랬었다. 당신과의 관계는 통상적인 예의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탓에 선을 찾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우리의 관계는 일반적인 인간 관계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미리엄은 가이드, 라는 칭호가 지닌 권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관계가 일반적일 수는 없다.
하고 싶다면 당신을 깨뜨려 보관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이작과 미리엄의 관계는 일반적인 센티넬-가이드 관계보다도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미리엄은 자신이 들었던, 당신에 관한 말을 기억했다. 그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를 박살내면 무슨 소용이 있지? 죽어버린 들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미리엄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 물들다 못해 일말의 애정이라도 얻기 위해 무엇이든 바칠 충견이었다.
그리하여 미리엄은 오랜 시간을 들여 아이작이 제게 익숙해지게 만들 속셈이었다. 당신의 숨결 한 자락에도 자신이 녹아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당신이 이 작은 소녀가 없으면 살지 못할 지경으로,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지나친 카페인 섭취는 몸에 안 좋아요, 아이작."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하는 말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상적인 걱정. 쉽게 지나치는 사람에게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 그러나 어쩌면...당신에게는 그렇지 못할 말. 미리엄은 당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렌즈 하나를 사이에 두고 푸른별을 마주했다. 마치 광물의 그것처럼 투명한, 비취색의 눈동자가 당신을 비추었다.
"그러겠죠. 더이상 미룰 생각도 없긴 해요."
미리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너무 시간을 질질 끄는 것도 별로 보기 좋지는 않을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칭을 안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일단 그러기만 한다면 지금의 집구석을 빠져나올 정당한 근거도 마련될 것이다. 생각을 매듭지은 미리엄은 툭, 말을 내뱉었다.
마리주는....주말이 지옥이었어..........주중은 그나마 수업만 들으면 어케 되는데 과제가 아주 어우... 아이작주는 주말 잘 보냈어?
오, 어느쪽이든 재밌어 보인다! 그래도 아직 초반이니까...미리엄이 공원에 끌고가서 잠깐 낮잠이라도 잤다가 쇼핑을 하러가든 서점을 가든 하려 했는데 거기서 휘말리는 건 어떨까? 마리를 인질 삼아서 한창 인질극이 벌어지다가 아이작이 (기관 기준으로) 돌발 행동을 한다거나.
확실히, 당신과 이 남자의 관계는 미증유의 관계였다. 모든 상황이 특수했다. 10년의 터울은 충분히 세대 격차라고 불러줄 수 있을 만한 간격이었고, 두 사람이 얽힐 일은 센티넬과 가디언이라는 특수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없었을 것이다. 센티넬과 가디언이라는 극적이면서도 편리하기 그지없는 관계로 서로 맺어졌다고 해도, 그 남자는 보통의 29세들과는 천차만별의 괴인생을 살아온 이상한 인간이었다. 당신 또한 그에 못잖은 고통투성이 인생을 살았고. 그런가 하면 서로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호의적인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 남자는 아직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런 확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당신은 단순한 상호의존관계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를 종속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한숨을 톡 쉬고 꺼내어놓은 말에서, 아이작을 멈칫하게 한 것은 커피 한 잔이 지나친 카페인 섭취라고 지적당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그런 지적을 건네어오는 배려심이었다. 당신의 생각대로. 그것은 커피 몇 밀리리터에 카페인 몇 밀리그램이 함유되어 있으며 성인 일일 권장량은 얼마라는 따위의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따라서 아이작은 커피 한 잔에 함유된 카페인은 일일 권장량의 절반 정도라는 쓸모없는 반박보다는, 뒷통수를 멋적게 긁적이는 것을 택했다.
"사실, 당신과 할 만한 일이 커피 한 잔씩 나눠마시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사회와 거의 격리되다시피 살아온 그이기에, 무언가 사회적인 양식이나 행동이라고는 오래된 지상파나 넷플릭스, 유튜브 그리고 자신이 흡수한 사람의 기억 따위에서 단편적으로밖에 접하지 못해 그런 데에는 지식이 희박한 그였다. 그래도 지겹게 나오는 광고라던가 이따금 눈에 담는 시트콤의 한 장면에서 종종 커피를 나눠쥐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왔기에. 더구나 이 센터에 입점한 가게도 바나 레스토랑 따위가 아니라 카페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추론이었다.
당신이 장난스레 웃으며 되묻자, 아이작은 당신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명백히, 뭔가 걱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저는... 기쁜 일입니다만,"
순순히 인정하는 아이작의 귓바퀴가 조금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햇살이 비쳐서 그런가? 아이작은 손을 들어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 모양으로 싸쥐었다.
제시한 상황이 마리주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런 느낌으로 천천히 진행해보자! 공원은 센터에서 좀 떨어진 곳이기만 하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 아니면 센터의 공원에서 쉬다가 시내로 이동해서, 아이작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던가.. 아이작이 마리와 같이 있을 때 범죄자 센티넬이 나타나면 마리를 인질로 잡기는커녕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정리될 테니까.
대학생은 지금이 상당히 바쁜 시즌이지 (끄덕) 응, 그럭저럭 별일 없어 괜찮은 주말이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마리주가 주말이 주말이 아니라니 좀 안타깝고 그렇네.. 😭
사실, 커피 한 잔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미리엄도 알고는 있었다. 그 말을 꺼낸 것은 어째서인지 당신이 커피를 많이 마실 것 같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그럴 수 있죠."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통 대화 장소로 택하는 곳 중 하나가 카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저번의 경험으로 미리엄이 센티넬-가이드 협회 자체를 꽤나 껄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성적으로는 차라리 사람이 많은 이곳이 함부로 손대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반감이 쉽게 억눌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아이작이 조금 편하게 자는 시간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미리엄은 시선을 떨구고 한쪽 손목을 매만졌다. "...잠 못드는 밤이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이나마 아니까..." 흐린 목소리가 빠르게 흩어졌다. 미리엄은 소매 끝을 습관처럼 끌어내리고 정돈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당신을 바라보며 옅게나마 웃었다. 억지로 웃듯 어색한 미소였다.
"괜찮아요, 당신만 그러는 것도 아닌 걸요. 저야말로 제가 아이작에게 괜찮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미리엄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분홍빛 봄에나 어울리는 모양새로, 순하게도 웃었다. 한때 미리엄이 그토록 시기하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똑 떼어다 덮어썼다. 사랑받아 사랑하는 것밖에 모른다는 무지한 얼굴로.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 사람을.
정리하자면 센터에서 좀 떨어진 공원으로 갔다가, 아이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마리가 휘말리는 건가? 뭐 때문에 잠시 떨어졌다고 하면 좋을까...마리가 목이 말라서 음료 자판기만 잠시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이작이 대신 갔다오겠다고 했다던가? 아니면...뭐가 있으려나(소재고갈)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종강!! 종강만 하면 좀 낫지 않나 싶어. 괜찮은 주말이었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답이 늦어서 미안해. 요즘에 정말...정신이 없네.
날짜 바뀌기 전엔 주고 싶었는데 8-8 너무 늦게 왔지.. 두 사람을 잠깐 떨어뜨릴 상황이야 많지! 아이작이(혹은 마리가) 잠깐 전화를 받으러 다른 곳으로 이동하느라 둘이 떨어진다거나, 마리주 말대로 해도 되고, 아니면 마리주가 제시한 상황을 조금 뒤집어서 마리가 잠든 아이작을 놓아두고 잠시 뭔가 사려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 이동한 곳에서 사건에 휘말린다거나..
종강이라면 6월 말경이었던가.. 대학교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기억이 안 나네 *_* 답이 늦는 건 괜찮아. 마리주가 미리 언질해준 상황이기도 하고, 취미보다 우선해야 하는 게 있잖아. 나는 마리주가 그렇게 고생하고도 시간을 내어서 여기 돌아와준 게 기쁠 뿐이야. 조금만 더 힘내면 고생했어, 하고 말해줄 수 있겠네.
아이작이 아직 밖이라 마리주라던가 내가 원했던 만큼 캐릭터성이 잘 드러나질 않아 고민이다..!!
껄끄럽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 아이작을 종속시키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명백히 당신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싶어했다. 당신에게 아이작에 대한 자료들을 보여준 저번의 그 간부가 그랬듯이 몇몇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도 몰랐지만, 그들은 아이작이라는 짐승을 가장 효과적으로 옭아맬 목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했다. 당연히 남들 앞에서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무언가를 공공연히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도 그들의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말끝을 흐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당신을 바라보다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긴, 여기서 낮잠을 자는 건 조금 눈치가 보이는 일이겠지요... 당신 이전에도, 직원이 날 깨우려 두 번인가 다가오다가 그냥 돌아가더군요." 상술했듯 아마 그건 아이작이 여기서 자고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걱정해주어서."
왜인지, 조금 낯설다. 이 모든 세상이 그저 마분지며 골판지 따위로 조잡하게 꾸민 무대일 뿐이고, 그 위의 모든 것들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만 준비된 조악하고도 사악한 함정이나 속임수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수줍고도 고운 미소가 자신을 위해서 지어지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적어도 혐오감을 억누르지는 않더라도 능숙하게 감출 수는 있어야 했다. 철저히 약자인 이들이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미리엄이 휘두룰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다름 아닌 아이작이었다. 그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 미리엄은 아이작을 거머쥐어야만 했다. 아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초조함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았다. 미리엄은 습관처럼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숨기곤 말갛게 웃었다. 더없이 상냥하고 포근하게 웃었다. 멍청한 이들은 무얼 모른다지만 그것이 미리엄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괴물을 길들이는 것은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과 같은 태양이지, 힘만 강한 바람이 아니다. 그리고 미리엄은 그 사실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별로,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한 건 아니에요. 당연한 걱정인 걸요."
아이작은 분명 진심으로, 악의 하나 없이 던진 말이었을 테지만, 미리엄은 도저히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이작의 눈을 가린 것은 분명 저 자신이었다. 원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속이 쓰렸다. 연민이었나. 나를 닮아보이는 당신에게 느끼는 동정이었나. 미리엄은 그것들을 즈려밟고는, 미소지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즉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웃음이 잦아들 즈음에야 미리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아이작이 그렇게 믿어주니까 앞으로 노력해 봐야겠어요." 그리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말이 잇따랐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일단은 아이작이 저랑 있을 때라도 좀 편하게 잤으면 좋겠는데...어디 추천할만한 곳이라도 있어요?"
평생을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제물용 가축이나, 도구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뀔 리는 없다. 평생을 그늘 속에서 살아오다가 언뜻 흐린 태양빛이 우연히 비껴들었을 뿐이다. 구름이 껴서 그렇게 맑고 환한 빛도 아니었지만, 그늘에서 시작해 그늘에서 끝났어야 할 인생에게는 그 정도 햇살도 따가웠다.
햇살을 피할 수도, 밀쳐낼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럴 기력은 없다. 그렇게 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마 별로 뭔가 바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햇살이 따가웠음에도, 아이작은 태양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피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 포장한다고 비난해도 좋다.
당신이 능청스레 윙크하며 질문을 던지자,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장소를 추천받고자 한다면 질문자를 한참 잘못 골랐다. 그 스스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장소는 그의 집과, 집 바로 앞에 있는 카페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그나마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곳이 서점이긴 한데, 서점이 잠을 잘 만한 장소는 아니지 않은가. (당신과 지금 있는 이 센터는 아마도 두 번째로 와보는 것이고, 그나마도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논외다.)
아이작은 무심코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다른 이의 기억을 떠올려보려다 움찔했다. 자기 것도 아닌 다른 사람그것도 내가 죽인 사람의 기억을, 그 중에서도 행복한 기억을 뒤져보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기에.
문득 조금 후회가 들었다. 삶을 조금이라도 다양하게 즐겨보려는 시도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면 보통이라면 머릿속의 속삭임들이 와글와글 들고 일어나 천고에 둘도 없는 죄인인 그를 맹렬히 성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당신이 옆에 있었기에 머릿속은 조용했다. 텅 빈 머릿속으로, 그는 방백하듯이 별 이상한 걸 다 후회해본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생각 끝에 별 신통한 장소를 떠올리지는 못하고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드리기 창피합니다만, 제 생활반경은 아주 좁은 편이라서요... 집과, 집 앞의 카페, 이따금 가는 서점 외에는 기억해두고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미리엄은, 무엇보다도 향긋하며 어여쁘고 따스해야 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만큼. 당신, 아이작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자연스레 생각할 만큼.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 하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줄을 쥐여주고 모든 사람을 물어뜯고 말 정도로.
그렇기에 미리엄은 본성을 뒤집고 상냥하디 상냥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러나 일련의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단순한 인사치레, 예의를 차리는 정도의 행동에도 당신은 낯설어 하고 있었다. 평생토록 호의 한 번 못 받아본 사람처럼. 사랑 한 번 못 받아본 사람처럼.
...어쩌면 미리엄과 유사한, 방식으로 대해졌던 사람일지도 모르는.
"으음...그러면 근처 공원을 어떨까요?"
미리엄은 의도적으로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다. 그리고 다른 생각으로 틀었다. 예컨대 당신과 어디로 가면 좋을지, 같은.
"오늘 햇살이 너무 덥지도 않고 따스한 게, 밖에 나가기 딱 좋을 것 같더라고요."
눈매를 나긋하게 휘었다. 햇볕처럼. 그래,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처럼. 겨울의 향을 품고 있는 소녀는 역설적으로 따듯하고 안온했다.
"애초에 저도 그렇게 따지자면 생활 반경이 넓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저랑 다녀보면 되는 일이니까요...아, 물론 아이작이 괜찮다는 전제 하에 말예요."
그의 삶에서 냄새라고는 곰팡이냄새와 피비린내였고, 어여쁘게 반짝이는 세상은 비루먹은 떠돌이개에게 허락되지 않은 빛나는 문지방 너머일 뿐이었으며, 햇살마저 들지 않는 음울한 안개 속에서 영원히 홀로 표류하는 뗏목과 같은 그의 삶에 온기가 있을 리 없었다. 강대하고 화려한 능력을 가진 스타 센티넬들은 명예와 헌신의 이름 아래 의무만큼의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추악한 병균을 부리고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물에게는 "블랙 옵스" 라는 목줄만이 허락될 뿐이었다. 필요에 따라 존재가능성을 부정당하는, 사회의 부정적인 찌꺼기나 위험한 낭종을 종말처리하는... 처리반.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반짝이는 곳으로 남아있기 위해, 그는 자신이 누리게 되었을지도 모를 행복에 대한 가능성을─ 호의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볼 가능성을 모두 착취당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향기와 모습과 온기는 어떤 의미로 새겨지게 될까.
뭐,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자. 평생을 마당에서 밧줄로 비끄러매어놓고 키운 번견은 난생 처음으로 집안에 끌고 들어오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이 푸른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내는 비록 그러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피로감이 물든 얼굴 여기저기에서 불안감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뭔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서투른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불안감이.
그러니 이 개에게 차근차근 교육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 스스로는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 당신의 향기며 온기는 그 불안감을 불식시키기에 차고도 넘치는 것이다. 마냥 불안해하기에는 하얀 겨울 숲에 난반사되는 햇빛이 따스했고, 쌓인 하얀 눈이 푹신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은 신세를 잔뜩 지게 될 것 같군요."
당신이 얼굴에 그리는 머쓱한 미소를 따라, 아이작의 얼굴에 미소같지도 않은 어설픈 미소가 옅게-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옅게 그려졌다. 그는 그 푸르른 눈을 당신에게 주시한 채로, 의자의 팔걸이를 거머쥐고는 거추장스러운 몸뚱이를 일으켰다.
그건 미소였다. 비록 힘들게 알아볼 정도로 희미한 무언가였고, 어설프기도 하였으나. 미리엄은 아이작의 미소에 생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고, 당신이 내치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손을 잡았을 것이다. 손 끝에서 포근한 겨울이 맺혔다. 싱그러운 녹빛을 간직한 전나무 숲이 바람에 맞춰 가볍게 잎을 흔들었다. 비취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흰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얕게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이작. 당신은 내 파트너잖아요."
맑은 눈동자가 아이작을 향했다. 깜박,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배싯 웃었다. 내 파트너. 나의, 센티넬. 미리엄은 입 속에서 그 단어를 몇번 굴려보았다. 작은 말장난이 가져오는 차이는 뚜렷하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의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당신이 나의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단어 몇개가 자리를 바꾼 것 뿐이다. 그럼에도 그 말이 내포한 의미는 달라진다.
소유격이란 그런 법이다. 무언가를 가진다, 소유한다. 그 소리인즉 자신이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자신의 것을 의미한다. 제 곁에 남아있음을... 깜박, 미리엄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아이작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듯한 시선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래도 말 들어보니까 협회 근처에 크고 작은 공원이 몇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름이..."
얼핏 들었던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멜...멜번?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가는 길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을 설핏 찡그리고 고민하던 미리엄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말았다.
"음, 여하튼. 가보면 알겠죠."
가볍고 무책임한 말이다. 그러나 짓궃게 웃는 소녀의 모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타박할 힘조차 빼놓고 같이 웃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유된다는 것. 그것 역시, 일종의 관계다. 아이작에게는 처음으로 주어지는... 어쩌면 유일하게 주어지게 될 심도있는 어떤 관계. 그러니까, 아이작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그 무언가. 그래서 아이작은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망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신세를 잔뜩 지게 될 것 같군요, 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지만, 부디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비굴한 아부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당신의 그 말. 그것은 어쩌면 어떤 허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싯 웃음을 흘리는 당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는 왠지 햇빛이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당신이 자신이 아닌 자신 너머의 자신을 통한 당신의 계획을 바라보고 있을지언정.
"그렇군요. 가 보면 알겠죠."
당신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던졌지만, 아이작은 거기에 대고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 역시도 그 공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왠지 탈력감을 불러오는 당신의 말간 웃음 위로 햇살이 말갛게 부서지는 게, 조금 눈부시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툰 미소를 건 채로 아이작은 나직이 말을 흘렸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는 자기가 느낀 점을 솔직히 말할 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데에 아주 서툴렀다. 햇살 속에 당신의 미소가 난생 처음 본 것처럼 아름다웠어요, 같은 느끼한 말을 실제로 입밖으로 뱉어내는 재주가 아이작에게는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그게 최선이었다.
"약속날짜 하나는 잘 잡은 것 같군요."
그 말과 함께, 아이작은 당신을 따라 센터 밖으로, 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항상 동일하게 삭막하던 지평선이 오늘따라 낯설게 눈부신 것 같아, 아이작은 눈을 반쯤 감았다. 바람이, 바뀐다.
짐짓 진지한 척을 하며 이야기한 내용이란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말을 마친 미리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움틀거리며 꽃봉우리를 터뜨리는 봄꽃을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그 말은 일말이더라도 진심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 이 작은 소녀는 당신에게 많이 의지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어떤 의미든 간에.
"그렇죠? 오늘 하늘이 참 예뻐요. 그렇게 흐리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고."
당신의 저의까지는 모르는지, 미리엄은 그 말간 얼굴로 재잘거렸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날이 좋았다.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가로수는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조잘거렸다. 무채색의 도시가 햇빛 아래 색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 이런 날이 좋더라고요."
그리 이야기하는 미리엄은 진실로 기뻐보였다. 미약하게나마 상기된 볼, 자연스레 휜 눈꼬리와 입매와 들뜬 목소리. 모든 것들이 기분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가죽부터 심장까지 얼어붙어 있던 삶에, 여름날 오후의 햇빛이 따가웠다. 얼어붙어 있던 삶에 해빙기가 오는 것인가. 마치 평범한 일상처럼 웃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평범한 일상마저도 꿈에서나 그릴 사치였던 그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당신을 따라나서는 걸음이 조금 쭈뼛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쭈뼛거릴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그 쭈뼛거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미숙함이었기에.
"맑은 날인가요."
뉴 고모라의 모습이라고 하면 칙칙한 밤하늘과 음울한 회색 사이에 자극적인 네온사인을 보기 싫게 덕지덕지 떡칠한 모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오늘과 같은 화창한 날씨에 밖에 나오는 것은 아이작에게 있어 꽤나 드문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쨍하게 뜬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뉴 고모라가 낯설었다.
"저는 밖에 잘 나다니지 않기에,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을 좋아합니다."
그는 맑은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날씨보다는 귀에 무언가가 들리는 날씨를 좋아했다. 이런 하늘 아래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자면 불합리한 증오가 스멀스멀 차올랐고, 누구에게도 향해서는 안 되는 그 부정적 감정은 바로 자신을 갉아먹곤 했기에.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이런 맑고 환한 날씨도 용서- 아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그 순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맑은 날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저벅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당신의 손을 쥔 채로 당신을 나란히 따라오는 아이작의 입에는, 아직 몇 번 지어보지 못해 서툴기 그지없는 옅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생각보다, 산책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관리기관의 정문을 나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만치 앞에, 비 그친 다음날의 말간 신록을 두르고 있는 공원이 보였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틀리지 않은 이름이 공원의 표석에 적혀 있는 게 여기서도 보인다.
아이작은 미리엄과는 정반대의 날을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엄의 호오와는. 선호를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날을 말하라면 비가 오는 어두운 밤처럼 어울리는 것도 없으리라. 다른 이유를 제하고서라도 저는 비 오는 밤을 싫어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장 열등한 면모를 닮은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던가? 있다면 성인군자겠지. 미리엄은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해본 적은 없지만...아이작과 함께라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이작을 올려다 보며 말을 돌려주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인 것이 수줍게 피어난 꽃과도 같다. 말 끝에 고운 미소가 매달린다. 속 빈 말을 입에 담고도 겉은 어여쁘다. 사랑을 모르면서도 사랑, 그 비슷한 것을 입에 올린다. 지독히도 상냥한 음색이다.
"어...제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나봐요."
어물어물 말하며 멋쩍게 웃는다. 햇살이다. 순한 양이며, 사랑스러운 꽃이다. 빛나는 보석이 그 두 눈에 박혔으며 하이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쩌면 감히, 당신의 구원을 천명할 이다.
그러나 뱀은 언제나 구원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던가?
공원 내는...밝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의 소리와 단란한 가족의 소리, 바람에 스스스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가 들린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린다. 햇볕이 밝다. 공원 내 호수가 아름다히 반짝인다. 그리고 미리엄은 그 안으로 당신을, 아이작이라는 사람을 이끌었다.
햇살이 비쳐왔다. 멜번 파크라는 표석을 배경으로 당신의 멋적은 미소가 반짝이는 것을 아이작은 잠깐 멍청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에게 햇살을 꾸며줄 수 있지만, 그는 당신 대신 손에 피에 묻혀주는 것 말고는 딱히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평범한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에 여느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처럼 평범한 삶에 서툴어 항상 위화감이 있었고, 그렇게 재밌는 사람도 아닌데다, 비루먹고 마모되어 기운도 없는 주제에 어수룩하기 짝이 없어서 조금의 호의어린 손길에도 재미없게 금방 꼬리를 흔들어버리고 마는, 거기에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당신의 열등한 부분, 즉 음울하게 비내리는 날과 꼭 닮아있는 인간이었으니까. 햇살을 향해 손을 뻗기마저 포기한. 그러나 이제 그의 그림자 끝에 햇살 한 자락이 걸렸다.
그 햇살이 거짓 구원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이작의 생애에 통틀어 가장 선명한 호의요 온기였다. 그는 잠깐 그렇게 당신을 가만 바라보다가, 이내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당신을 따라 걸었다.
"공원 이름이 달랐더라도 상관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꾸며낸 말에 금방 꼬리를 흔드는 꼬락서니가 어설프기 그지없다. 그런 어설픈 몰골로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보통의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공원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고 고지넉하게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당신과 아이작은 금방 좋은 자리를 찾았다. 커다란 포플러나무 몇 그루가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어 햇살이 잎사귀 사이로 예쁘게 부서져들어오면서도 햇볕을 직접 쐬지는 않는 좋은 자리에 긴 벤치가 놓여있었다. 저만치 멀리에는 카페테리아도 보였다. 삼삼오오 떠드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들은 당신과 아이작에 대해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안다. 미리엄도 알았다. 아이작은 그 자신과 닮았다. 겉으로는 다를지 모르겠으나, 그 속을 까본다면 막상 다른 점이 없을 것이다. 저는 겉만 예쁘게 치장한 선물상자나 다름없었다. 속은 텅 빈, 쓸모 없는. 그러나 그럼에도 미리엄은 욕심이 많았다.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미리엄은 당신을 길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니 미리엄은, 햇살을 자칭하며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생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이 작은 소녀는, 실로 뱀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당신의 말에 뱀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순연한 모습으로 웃었다. 이 비틀린, 결코 평범하지 못할 관계가 눈에 지나치게 잘 보였다. 누가 초면에,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한 관계에 저리도 마음을 쏟으며 꼬리를 흔들겠어. 유순하고 어여쁘게 굴겠어.
그리고 어느 누가 이리 악독하게 살겠어. 금방이라도 독니를 박아넣어 이성을 마비시킬 것처럼.
"...고마워요, 아이작. 마음이 좀 놓이네요."
사람을 만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거든요. 아, 무얼 말하지? 뭘 해야 하지? 그런데 그렇게 말해주니 좀...마음이 편하네요. 아이작이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어도. 잔잔하게 이어지는 소녀의 재잘거림은 이런 공원에 퍽 알맞았다. 푸른 사이로 목소리가 쉽사리 녹아들었다. 벤치를 본 미리엄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으악...너무 늦었다...일주일만인가? 매번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 같네...기다려줘서 고마워. 응, 그때 날씨 엄청 습했지. 요즘도 여름은 여름인지 덥고 습하더라. 이런 날일 수록 냉방병 조심해야 해. 몸조심도 하고. 오늘 하루 잘 보냈길 바라, 아이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