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의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7년 봄 김개미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중
◆ 센티넬버스 기반의 1:1 스레입니다. ◆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수합니다. ◆ !!!TRIGGER WARNING!!! 이 스레는 피폐한 플레이를 지향하며, 등장인물 및 배경의 특성상 플레이 중에 흡연 및 음주, 범죄행위 등이 묘사될 수 있고, 잔인한 장면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속삭임은 당신과 헤어진 바로 그 순간 다시 시작됐다. 물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그 속삭임들에 아이작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 그랬었다. 그렇지만, 그 짤막하고도 달콤한 침묵은 아이작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소음에 대한 내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려버리고 말았다. 속삭임들은 좀더 집요해졌고, 아이작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감염체들의 목소리들과, 자신에게 흡수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들. 그들은 아이작의 실패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고, 아이작의 현재 상황을 다시 각인시켜 주었으며, 감히 그런 '죄' 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편안해지고자 하는 아이작을 맹비난했다.
결과적으로 요 며칠 사이 그는 좀더 초췌한 꼴이 되어 있었다. 입맛이 떨어져 요 며칠간 식사량이 절반 정도로 떨어졌고. (아마 이대로 며칠 더 지나면 확실히 거식증이라 해도 될 듯했다) 당연히 수면시간도 형편없이 줄어들어서 눈 아래의 검은 음영은 더 진해졌다. 그러잖아도 관상이 툭 튀어나온 이마와 움푹 들어간 눈두덩 때문에 눈에 그늘이 많이 지는 타입인데.
그런 아이작에게도 온난습윤한 뉴 고모라의 늦봄의 햇살이 따뜻하긴 매한가지였고... 더군다나 부족한 수면까지 겹쳐, 그는 센터 건물 한구석에서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조촐한 모양새로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소파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수그려서는. 마치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데도, 염치 불구하고 불가항력으로 잠에 빠졌다는 듯이, 잠든 몰골마저도 흡사 길잃은 개가 쓰러져있는 꼴이었다.
그런 아이작을 깨우는 발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던 아이작은, 얼굴에 미소를 활짝 피워낸 당신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눈을 비볐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내가 잠깐 졸고 있었던가요?"
미소는 사그라들었다. 그 빈틈을 걱정이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 윤곽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약을 접한 이는 견딜만 했던 일상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술이나 담배도 엇비슷했다. 짙어진 음영은 너무나 선명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에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미티도록 어렵다. 의존하지 않고 밤을 보낸다는 것은 자해나 다름 없다고 생각될 정도다. 실제로는 그 반대임에도.
미리엄은 느릿하게, 그러나 이내 빠르게 다가가 아이작을 안으려 했다. 걱정어린 얼굴을 품에 묻으려 했다. 단호하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당신을 달래듯 감싸안았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미리엄은 눈을 내리떴다. 아이작을 한 번 힘주어 안고는 천천히 팔을 풀려 했다. 아이작이 붙잡지 않는다면 조금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아예 접촉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신이 원한다면.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저를 잡으라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미리엄이 내뱉는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하고 상냥했다.
아이작에게는 어느 쪽도 달라질 것 없다. 말기 환자나 다름없는 삶이기에. 약에 손을 대지 않으면 고통에 시달리고, 손을 대면 손을 대는 대로 그것에 중독된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 없이는 삶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다. 기껏 당신이 안심하고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개가 생겼는데, 이래서야 개가 너무 비루먹지 않았나. 그 개가 얼마나 흉측한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센터 내에는 녹초가 되어 있는 사람도 종종 보였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포옹하는 것도-혹은 그 이상의 행동을 하는 것도 꽤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당신이 누군가를 끌어안는 것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당신의 품 안에 끌어안긴 이 남자가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칙칙한 몰골이라는 특이점이 있긴 했지만.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두 번 정도, 직원이 아이작을 무단침입한 노숙자로 오해하고 다가왔다가 아이작의 목에 매어진 S급 센티넬 카드를 보고 물러났었다.)
아이작은 당신을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품에 머리를 마음껏 기댔다. 그의 퀭한 눈이 다시 감겼다가, 당신이 놓아줄 때는 그 이상한 푸른빛을 띄고 당신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는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만남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더욱이 이것은 비단 당신과의 두 번째 만남일 뿐만 아니라, 평생을 통틀어 마음놓고 대할 수 있는 사람과의 두 번째 만남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걱정이군요."
당신이 건네는 말이 너무 낯설어서, 아이작은 흐리게 웃었다.
"나더러 조금 편한 곳에서 자라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 누구도 이 개를 길들여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단지 꺼림칙하게 여기며 돌팔매질을 해왔을 뿐. 당신에게는 잘된 일이다. 전에 스쳐간 누군가의 기억을 털어내줄 필요 없이, 무방비하게 텅 비어 있는 이 퇴폐적인 보헤미안에게 당신을 한가득 채워넣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미리엄은 자신의 앞에 있는 버림받고 비루먹은 개가 마음에 들었다. 애초부터 길들이기 쉬우며, 어쩌다 한 번씩 떨어질 다정과 상냥에도 모든 것을 바칠 이를 바라고 있었다. 이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삶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자야말로 일말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미리엄은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긴 과정의 일부다. 솜씨 좋은 사냥꾼은 아이작이 경계심을 녹이고 스스로 그 목에 목줄을 걸게 될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릴 것이다. 제 말 한마디에 매달리고 저를 박해한 이들의 숨통을 기꺼이 끊어버릴 충견을 기르기 위해서라면 인내할 수 있었다. 평생이 기다림의 연속이었으니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미리엄은 아이작이 자신을 잡지 않자,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미리엄은, 굳은 입가를 뒤늡게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것이 아이작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다른 무엇일지는 미리엄, 본인만이 알 것이다.
"듣다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담백하고 단순한 말이다. 그러나 미리엄은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에 미래를 포함시켰다.
"아이작, 앞으로도 볼 사이잖아요. 대화 같은 것들은 다음에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미래에 자신과 아이작이 있을 것임을 단정지었다. 미리엄은 서서히 애정으로 엮어 무엇보다 튼튼할 목줄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친 미리엄은, 따사로운 햇살을 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작은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꺼림칙한 시선과 비켜가는 발길 등 커다란 해충을 대하는 듯한 취급에는 익숙했지만, 누군가가 건네어오는 일상적이고 상냥한 말이나 손길, 온기 같은 것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까. 아이작은 그저 '센티넬과 가이드, 라는 특수한 관계성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내게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줄 수 있었을까?' 하는 암울한 자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아이작은 스스로가 그 답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래, 이건 일종의 비즈니스니까.' 라는 느낌으로 납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건네어주는 온기가 너무 달아서. 이 상냥한 적막이 너무 달가워서... 당신이 당신의 말에 부드럽게 실어주는 미래가 너무 반가워서, 그런 것들이 그만 아이작에게 허황된 착각을 심어주고, 당신의 향을 무심코 깊이 들이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괴리가 자신을 얼마나 호되게 앓도록 만들지도 모르고.
"예기치 못한 컨디션 난조일 뿐입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본인이 스스로 고집을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어찌됐건 쓰러질까 걱정된다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었다.
"정히 걱정되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죠. 여기 센터에도 카페는 있으니까요."
그는 안경을 고쳐썼다. 차림새는 적잖이 후줄근한-유행은 둘째치고라도 옷가지들이 하나같이 낡은 티가 나는 것들이었다-꼴이었지만, 안경 알만큼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서는 그의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가감없이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몸을 씻는 것 이외에 그가 알고 있는 몸단장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기도 했다.
일요일에 받은 답레를 금요일에 돌려주다니... 8.8 마리주 한 주는 좀 어떻게 보냈어? 나는.. 나는 주중은 잘 못 보냈어.. 주말 동안은 좀 오래 붙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두 번째는 아이작을 데리고 데이트하는 것처럼 될 텐데 어떠려나. 마리가 걱정하는 부분에 중점을 둬서 어디건 끌고 가서 햇살 좋은 공원이나 아이작네 집에를 가서 낮잠을 자도 되고, 아니면 아이작의 옷을 사러 간다거나, 서로의 취미를 공유한다거나.. 아, 이러면 아이작은 마리를 서점으로 데려가려 할지도🤔
추후 전개는 무난한 데이트로 해도 되고.. 아니면 아이작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범죄자 센티넬의 도주극에 마리가 휘말리는 전개로 해도 좋을 것 같아. 센티넬이 마리를 협박하다가, 머리 끝까지 화난 아이작이 매스컴과 경찰조직 등의 카메라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범죄자 센티넬을 끔살했다가 아이작과 기관 사이에 불화가 좀더 심화되는 전개라던가..?
미리엄은 선을 잘 가늠하는 사람이었다. 그랬었다. 당신과의 관계는 통상적인 예의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탓에 선을 찾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우리의 관계는 일반적인 인간 관계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미리엄은 가이드, 라는 칭호가 지닌 권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관계가 일반적일 수는 없다.
하고 싶다면 당신을 깨뜨려 보관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이작과 미리엄의 관계는 일반적인 센티넬-가이드 관계보다도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미리엄은 자신이 들었던, 당신에 관한 말을 기억했다. 그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를 박살내면 무슨 소용이 있지? 죽어버린 들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미리엄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 물들다 못해 일말의 애정이라도 얻기 위해 무엇이든 바칠 충견이었다.
그리하여 미리엄은 오랜 시간을 들여 아이작이 제게 익숙해지게 만들 속셈이었다. 당신의 숨결 한 자락에도 자신이 녹아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당신이 이 작은 소녀가 없으면 살지 못할 지경으로,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지나친 카페인 섭취는 몸에 안 좋아요, 아이작."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하는 말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상적인 걱정. 쉽게 지나치는 사람에게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 그러나 어쩌면...당신에게는 그렇지 못할 말. 미리엄은 당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렌즈 하나를 사이에 두고 푸른별을 마주했다. 마치 광물의 그것처럼 투명한, 비취색의 눈동자가 당신을 비추었다.
"그러겠죠. 더이상 미룰 생각도 없긴 해요."
미리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너무 시간을 질질 끄는 것도 별로 보기 좋지는 않을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칭을 안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일단 그러기만 한다면 지금의 집구석을 빠져나올 정당한 근거도 마련될 것이다. 생각을 매듭지은 미리엄은 툭, 말을 내뱉었다.
마리주는....주말이 지옥이었어..........주중은 그나마 수업만 들으면 어케 되는데 과제가 아주 어우... 아이작주는 주말 잘 보냈어?
오, 어느쪽이든 재밌어 보인다! 그래도 아직 초반이니까...미리엄이 공원에 끌고가서 잠깐 낮잠이라도 잤다가 쇼핑을 하러가든 서점을 가든 하려 했는데 거기서 휘말리는 건 어떨까? 마리를 인질 삼아서 한창 인질극이 벌어지다가 아이작이 (기관 기준으로) 돌발 행동을 한다거나.
확실히, 당신과 이 남자의 관계는 미증유의 관계였다. 모든 상황이 특수했다. 10년의 터울은 충분히 세대 격차라고 불러줄 수 있을 만한 간격이었고, 두 사람이 얽힐 일은 센티넬과 가디언이라는 특수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없었을 것이다. 센티넬과 가디언이라는 극적이면서도 편리하기 그지없는 관계로 서로 맺어졌다고 해도, 그 남자는 보통의 29세들과는 천차만별의 괴인생을 살아온 이상한 인간이었다. 당신 또한 그에 못잖은 고통투성이 인생을 살았고. 그런가 하면 서로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호의적인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 남자는 아직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런 확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당신은 단순한 상호의존관계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를 종속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한숨을 톡 쉬고 꺼내어놓은 말에서, 아이작을 멈칫하게 한 것은 커피 한 잔이 지나친 카페인 섭취라고 지적당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그런 지적을 건네어오는 배려심이었다. 당신의 생각대로. 그것은 커피 몇 밀리리터에 카페인 몇 밀리그램이 함유되어 있으며 성인 일일 권장량은 얼마라는 따위의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따라서 아이작은 커피 한 잔에 함유된 카페인은 일일 권장량의 절반 정도라는 쓸모없는 반박보다는, 뒷통수를 멋적게 긁적이는 것을 택했다.
"사실, 당신과 할 만한 일이 커피 한 잔씩 나눠마시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사회와 거의 격리되다시피 살아온 그이기에, 무언가 사회적인 양식이나 행동이라고는 오래된 지상파나 넷플릭스, 유튜브 그리고 자신이 흡수한 사람의 기억 따위에서 단편적으로밖에 접하지 못해 그런 데에는 지식이 희박한 그였다. 그래도 지겹게 나오는 광고라던가 이따금 눈에 담는 시트콤의 한 장면에서 종종 커피를 나눠쥐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왔기에. 더구나 이 센터에 입점한 가게도 바나 레스토랑 따위가 아니라 카페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추론이었다.
당신이 장난스레 웃으며 되묻자, 아이작은 당신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명백히, 뭔가 걱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저는... 기쁜 일입니다만,"
순순히 인정하는 아이작의 귓바퀴가 조금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햇살이 비쳐서 그런가? 아이작은 손을 들어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 모양으로 싸쥐었다.
제시한 상황이 마리주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런 느낌으로 천천히 진행해보자! 공원은 센터에서 좀 떨어진 곳이기만 하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 아니면 센터의 공원에서 쉬다가 시내로 이동해서, 아이작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던가.. 아이작이 마리와 같이 있을 때 범죄자 센티넬이 나타나면 마리를 인질로 잡기는커녕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정리될 테니까.
대학생은 지금이 상당히 바쁜 시즌이지 (끄덕) 응, 그럭저럭 별일 없어 괜찮은 주말이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마리주가 주말이 주말이 아니라니 좀 안타깝고 그렇네.. 😭
사실, 커피 한 잔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미리엄도 알고는 있었다. 그 말을 꺼낸 것은 어째서인지 당신이 커피를 많이 마실 것 같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그럴 수 있죠."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통 대화 장소로 택하는 곳 중 하나가 카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저번의 경험으로 미리엄이 센티넬-가이드 협회 자체를 꽤나 껄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성적으로는 차라리 사람이 많은 이곳이 함부로 손대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반감이 쉽게 억눌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아이작이 조금 편하게 자는 시간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미리엄은 시선을 떨구고 한쪽 손목을 매만졌다. "...잠 못드는 밤이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이나마 아니까..." 흐린 목소리가 빠르게 흩어졌다. 미리엄은 소매 끝을 습관처럼 끌어내리고 정돈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당신을 바라보며 옅게나마 웃었다. 억지로 웃듯 어색한 미소였다.
"괜찮아요, 당신만 그러는 것도 아닌 걸요. 저야말로 제가 아이작에게 괜찮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미리엄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분홍빛 봄에나 어울리는 모양새로, 순하게도 웃었다. 한때 미리엄이 그토록 시기하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똑 떼어다 덮어썼다. 사랑받아 사랑하는 것밖에 모른다는 무지한 얼굴로.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 사람을.
정리하자면 센터에서 좀 떨어진 공원으로 갔다가, 아이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마리가 휘말리는 건가? 뭐 때문에 잠시 떨어졌다고 하면 좋을까...마리가 목이 말라서 음료 자판기만 잠시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이작이 대신 갔다오겠다고 했다던가? 아니면...뭐가 있으려나(소재고갈)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종강!! 종강만 하면 좀 낫지 않나 싶어. 괜찮은 주말이었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답이 늦어서 미안해. 요즘에 정말...정신이 없네.
날짜 바뀌기 전엔 주고 싶었는데 8-8 너무 늦게 왔지.. 두 사람을 잠깐 떨어뜨릴 상황이야 많지! 아이작이(혹은 마리가) 잠깐 전화를 받으러 다른 곳으로 이동하느라 둘이 떨어진다거나, 마리주 말대로 해도 되고, 아니면 마리주가 제시한 상황을 조금 뒤집어서 마리가 잠든 아이작을 놓아두고 잠시 뭔가 사려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 이동한 곳에서 사건에 휘말린다거나..
종강이라면 6월 말경이었던가.. 대학교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기억이 안 나네 *_* 답이 늦는 건 괜찮아. 마리주가 미리 언질해준 상황이기도 하고, 취미보다 우선해야 하는 게 있잖아. 나는 마리주가 그렇게 고생하고도 시간을 내어서 여기 돌아와준 게 기쁠 뿐이야. 조금만 더 힘내면 고생했어, 하고 말해줄 수 있겠네.
아이작이 아직 밖이라 마리주라던가 내가 원했던 만큼 캐릭터성이 잘 드러나질 않아 고민이다..!!
껄끄럽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 아이작을 종속시키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명백히 당신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싶어했다. 당신에게 아이작에 대한 자료들을 보여준 저번의 그 간부가 그랬듯이 몇몇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도 몰랐지만, 그들은 아이작이라는 짐승을 가장 효과적으로 옭아맬 목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했다. 당연히 남들 앞에서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무언가를 공공연히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도 그들의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말끝을 흐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당신을 바라보다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긴, 여기서 낮잠을 자는 건 조금 눈치가 보이는 일이겠지요... 당신 이전에도, 직원이 날 깨우려 두 번인가 다가오다가 그냥 돌아가더군요." 상술했듯 아마 그건 아이작이 여기서 자고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걱정해주어서."
왜인지, 조금 낯설다. 이 모든 세상이 그저 마분지며 골판지 따위로 조잡하게 꾸민 무대일 뿐이고, 그 위의 모든 것들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만 준비된 조악하고도 사악한 함정이나 속임수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수줍고도 고운 미소가 자신을 위해서 지어지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적어도 혐오감을 억누르지는 않더라도 능숙하게 감출 수는 있어야 했다. 철저히 약자인 이들이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미리엄이 휘두룰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다름 아닌 아이작이었다. 그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 미리엄은 아이작을 거머쥐어야만 했다. 아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초조함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았다. 미리엄은 습관처럼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숨기곤 말갛게 웃었다. 더없이 상냥하고 포근하게 웃었다. 멍청한 이들은 무얼 모른다지만 그것이 미리엄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괴물을 길들이는 것은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과 같은 태양이지, 힘만 강한 바람이 아니다. 그리고 미리엄은 그 사실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별로,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한 건 아니에요. 당연한 걱정인 걸요."
아이작은 분명 진심으로, 악의 하나 없이 던진 말이었을 테지만, 미리엄은 도저히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이작의 눈을 가린 것은 분명 저 자신이었다. 원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속이 쓰렸다. 연민이었나. 나를 닮아보이는 당신에게 느끼는 동정이었나. 미리엄은 그것들을 즈려밟고는, 미소지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즉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웃음이 잦아들 즈음에야 미리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아이작이 그렇게 믿어주니까 앞으로 노력해 봐야겠어요." 그리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말이 잇따랐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일단은 아이작이 저랑 있을 때라도 좀 편하게 잤으면 좋겠는데...어디 추천할만한 곳이라도 있어요?"
평생을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제물용 가축이나, 도구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뀔 리는 없다. 평생을 그늘 속에서 살아오다가 언뜻 흐린 태양빛이 우연히 비껴들었을 뿐이다. 구름이 껴서 그렇게 맑고 환한 빛도 아니었지만, 그늘에서 시작해 그늘에서 끝났어야 할 인생에게는 그 정도 햇살도 따가웠다.
햇살을 피할 수도, 밀쳐낼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럴 기력은 없다. 그렇게 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마 별로 뭔가 바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햇살이 따가웠음에도, 아이작은 태양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피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 포장한다고 비난해도 좋다.
당신이 능청스레 윙크하며 질문을 던지자,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장소를 추천받고자 한다면 질문자를 한참 잘못 골랐다. 그 스스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장소는 그의 집과, 집 바로 앞에 있는 카페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그나마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곳이 서점이긴 한데, 서점이 잠을 잘 만한 장소는 아니지 않은가. (당신과 지금 있는 이 센터는 아마도 두 번째로 와보는 것이고, 그나마도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논외다.)
아이작은 무심코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다른 이의 기억을 떠올려보려다 움찔했다. 자기 것도 아닌 다른 사람그것도 내가 죽인 사람의 기억을, 그 중에서도 행복한 기억을 뒤져보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기에.
문득 조금 후회가 들었다. 삶을 조금이라도 다양하게 즐겨보려는 시도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면 보통이라면 머릿속의 속삭임들이 와글와글 들고 일어나 천고에 둘도 없는 죄인인 그를 맹렬히 성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당신이 옆에 있었기에 머릿속은 조용했다. 텅 빈 머릿속으로, 그는 방백하듯이 별 이상한 걸 다 후회해본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생각 끝에 별 신통한 장소를 떠올리지는 못하고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드리기 창피합니다만, 제 생활반경은 아주 좁은 편이라서요... 집과, 집 앞의 카페, 이따금 가는 서점 외에는 기억해두고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미리엄은, 무엇보다도 향긋하며 어여쁘고 따스해야 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만큼. 당신, 아이작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자연스레 생각할 만큼.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 하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줄을 쥐여주고 모든 사람을 물어뜯고 말 정도로.
그렇기에 미리엄은 본성을 뒤집고 상냥하디 상냥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러나 일련의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단순한 인사치레, 예의를 차리는 정도의 행동에도 당신은 낯설어 하고 있었다. 평생토록 호의 한 번 못 받아본 사람처럼. 사랑 한 번 못 받아본 사람처럼.
...어쩌면 미리엄과 유사한, 방식으로 대해졌던 사람일지도 모르는.
"으음...그러면 근처 공원을 어떨까요?"
미리엄은 의도적으로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다. 그리고 다른 생각으로 틀었다. 예컨대 당신과 어디로 가면 좋을지, 같은.
"오늘 햇살이 너무 덥지도 않고 따스한 게, 밖에 나가기 딱 좋을 것 같더라고요."
눈매를 나긋하게 휘었다. 햇볕처럼. 그래,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처럼. 겨울의 향을 품고 있는 소녀는 역설적으로 따듯하고 안온했다.
"애초에 저도 그렇게 따지자면 생활 반경이 넓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저랑 다녀보면 되는 일이니까요...아, 물론 아이작이 괜찮다는 전제 하에 말예요."
그의 삶에서 냄새라고는 곰팡이냄새와 피비린내였고, 어여쁘게 반짝이는 세상은 비루먹은 떠돌이개에게 허락되지 않은 빛나는 문지방 너머일 뿐이었으며, 햇살마저 들지 않는 음울한 안개 속에서 영원히 홀로 표류하는 뗏목과 같은 그의 삶에 온기가 있을 리 없었다. 강대하고 화려한 능력을 가진 스타 센티넬들은 명예와 헌신의 이름 아래 의무만큼의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추악한 병균을 부리고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물에게는 "블랙 옵스" 라는 목줄만이 허락될 뿐이었다. 필요에 따라 존재가능성을 부정당하는, 사회의 부정적인 찌꺼기나 위험한 낭종을 종말처리하는... 처리반.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반짝이는 곳으로 남아있기 위해, 그는 자신이 누리게 되었을지도 모를 행복에 대한 가능성을─ 호의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볼 가능성을 모두 착취당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향기와 모습과 온기는 어떤 의미로 새겨지게 될까.
뭐,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자. 평생을 마당에서 밧줄로 비끄러매어놓고 키운 번견은 난생 처음으로 집안에 끌고 들어오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이 푸른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내는 비록 그러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피로감이 물든 얼굴 여기저기에서 불안감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뭔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서투른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불안감이.
그러니 이 개에게 차근차근 교육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 스스로는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 당신의 향기며 온기는 그 불안감을 불식시키기에 차고도 넘치는 것이다. 마냥 불안해하기에는 하얀 겨울 숲에 난반사되는 햇빛이 따스했고, 쌓인 하얀 눈이 푹신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은 신세를 잔뜩 지게 될 것 같군요."
당신이 얼굴에 그리는 머쓱한 미소를 따라, 아이작의 얼굴에 미소같지도 않은 어설픈 미소가 옅게-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옅게 그려졌다. 그는 그 푸르른 눈을 당신에게 주시한 채로, 의자의 팔걸이를 거머쥐고는 거추장스러운 몸뚱이를 일으켰다.
그건 미소였다. 비록 힘들게 알아볼 정도로 희미한 무언가였고, 어설프기도 하였으나. 미리엄은 아이작의 미소에 생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고, 당신이 내치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손을 잡았을 것이다. 손 끝에서 포근한 겨울이 맺혔다. 싱그러운 녹빛을 간직한 전나무 숲이 바람에 맞춰 가볍게 잎을 흔들었다. 비취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흰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얕게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이작. 당신은 내 파트너잖아요."
맑은 눈동자가 아이작을 향했다. 깜박,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배싯 웃었다. 내 파트너. 나의, 센티넬. 미리엄은 입 속에서 그 단어를 몇번 굴려보았다. 작은 말장난이 가져오는 차이는 뚜렷하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의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당신이 나의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단어 몇개가 자리를 바꾼 것 뿐이다. 그럼에도 그 말이 내포한 의미는 달라진다.
소유격이란 그런 법이다. 무언가를 가진다, 소유한다. 그 소리인즉 자신이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자신의 것을 의미한다. 제 곁에 남아있음을... 깜박, 미리엄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아이작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듯한 시선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래도 말 들어보니까 협회 근처에 크고 작은 공원이 몇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름이..."
얼핏 들었던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멜...멜번?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가는 길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을 설핏 찡그리고 고민하던 미리엄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말았다.
"음, 여하튼. 가보면 알겠죠."
가볍고 무책임한 말이다. 그러나 짓궃게 웃는 소녀의 모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타박할 힘조차 빼놓고 같이 웃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유된다는 것. 그것 역시, 일종의 관계다. 아이작에게는 처음으로 주어지는... 어쩌면 유일하게 주어지게 될 심도있는 어떤 관계. 그러니까, 아이작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그 무언가. 그래서 아이작은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망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신세를 잔뜩 지게 될 것 같군요, 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지만, 부디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비굴한 아부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당신의 그 말. 그것은 어쩌면 어떤 허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싯 웃음을 흘리는 당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는 왠지 햇빛이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당신이 자신이 아닌 자신 너머의 자신을 통한 당신의 계획을 바라보고 있을지언정.
"그렇군요. 가 보면 알겠죠."
당신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던졌지만, 아이작은 거기에 대고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 역시도 그 공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왠지 탈력감을 불러오는 당신의 말간 웃음 위로 햇살이 말갛게 부서지는 게, 조금 눈부시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툰 미소를 건 채로 아이작은 나직이 말을 흘렸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는 자기가 느낀 점을 솔직히 말할 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데에 아주 서툴렀다. 햇살 속에 당신의 미소가 난생 처음 본 것처럼 아름다웠어요, 같은 느끼한 말을 실제로 입밖으로 뱉어내는 재주가 아이작에게는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그게 최선이었다.
"약속날짜 하나는 잘 잡은 것 같군요."
그 말과 함께, 아이작은 당신을 따라 센터 밖으로, 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항상 동일하게 삭막하던 지평선이 오늘따라 낯설게 눈부신 것 같아, 아이작은 눈을 반쯤 감았다. 바람이, 바뀐다.
짐짓 진지한 척을 하며 이야기한 내용이란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말을 마친 미리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움틀거리며 꽃봉우리를 터뜨리는 봄꽃을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그 말은 일말이더라도 진심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 이 작은 소녀는 당신에게 많이 의지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어떤 의미든 간에.
"그렇죠? 오늘 하늘이 참 예뻐요. 그렇게 흐리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고."
당신의 저의까지는 모르는지, 미리엄은 그 말간 얼굴로 재잘거렸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날이 좋았다.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가로수는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조잘거렸다. 무채색의 도시가 햇빛 아래 색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 이런 날이 좋더라고요."
그리 이야기하는 미리엄은 진실로 기뻐보였다. 미약하게나마 상기된 볼, 자연스레 휜 눈꼬리와 입매와 들뜬 목소리. 모든 것들이 기분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가죽부터 심장까지 얼어붙어 있던 삶에, 여름날 오후의 햇빛이 따가웠다. 얼어붙어 있던 삶에 해빙기가 오는 것인가. 마치 평범한 일상처럼 웃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평범한 일상마저도 꿈에서나 그릴 사치였던 그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당신을 따라나서는 걸음이 조금 쭈뼛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쭈뼛거릴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그 쭈뼛거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미숙함이었기에.
"맑은 날인가요."
뉴 고모라의 모습이라고 하면 칙칙한 밤하늘과 음울한 회색 사이에 자극적인 네온사인을 보기 싫게 덕지덕지 떡칠한 모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오늘과 같은 화창한 날씨에 밖에 나오는 것은 아이작에게 있어 꽤나 드문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쨍하게 뜬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뉴 고모라가 낯설었다.
"저는 밖에 잘 나다니지 않기에,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을 좋아합니다."
그는 맑은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날씨보다는 귀에 무언가가 들리는 날씨를 좋아했다. 이런 하늘 아래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자면 불합리한 증오가 스멀스멀 차올랐고, 누구에게도 향해서는 안 되는 그 부정적 감정은 바로 자신을 갉아먹곤 했기에.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이런 맑고 환한 날씨도 용서- 아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그 순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맑은 날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저벅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당신의 손을 쥔 채로 당신을 나란히 따라오는 아이작의 입에는, 아직 몇 번 지어보지 못해 서툴기 그지없는 옅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생각보다, 산책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관리기관의 정문을 나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만치 앞에, 비 그친 다음날의 말간 신록을 두르고 있는 공원이 보였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틀리지 않은 이름이 공원의 표석에 적혀 있는 게 여기서도 보인다.
아이작은 미리엄과는 정반대의 날을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엄의 호오와는. 선호를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날을 말하라면 비가 오는 어두운 밤처럼 어울리는 것도 없으리라. 다른 이유를 제하고서라도 저는 비 오는 밤을 싫어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장 열등한 면모를 닮은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던가? 있다면 성인군자겠지. 미리엄은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해본 적은 없지만...아이작과 함께라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이작을 올려다 보며 말을 돌려주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인 것이 수줍게 피어난 꽃과도 같다. 말 끝에 고운 미소가 매달린다. 속 빈 말을 입에 담고도 겉은 어여쁘다. 사랑을 모르면서도 사랑, 그 비슷한 것을 입에 올린다. 지독히도 상냥한 음색이다.
"어...제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나봐요."
어물어물 말하며 멋쩍게 웃는다. 햇살이다. 순한 양이며, 사랑스러운 꽃이다. 빛나는 보석이 그 두 눈에 박혔으며 하이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쩌면 감히, 당신의 구원을 천명할 이다.
그러나 뱀은 언제나 구원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던가?
공원 내는...밝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의 소리와 단란한 가족의 소리, 바람에 스스스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가 들린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린다. 햇볕이 밝다. 공원 내 호수가 아름다히 반짝인다. 그리고 미리엄은 그 안으로 당신을, 아이작이라는 사람을 이끌었다.
햇살이 비쳐왔다. 멜번 파크라는 표석을 배경으로 당신의 멋적은 미소가 반짝이는 것을 아이작은 잠깐 멍청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에게 햇살을 꾸며줄 수 있지만, 그는 당신 대신 손에 피에 묻혀주는 것 말고는 딱히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평범한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에 여느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처럼 평범한 삶에 서툴어 항상 위화감이 있었고, 그렇게 재밌는 사람도 아닌데다, 비루먹고 마모되어 기운도 없는 주제에 어수룩하기 짝이 없어서 조금의 호의어린 손길에도 재미없게 금방 꼬리를 흔들어버리고 마는, 거기에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당신의 열등한 부분, 즉 음울하게 비내리는 날과 꼭 닮아있는 인간이었으니까. 햇살을 향해 손을 뻗기마저 포기한. 그러나 이제 그의 그림자 끝에 햇살 한 자락이 걸렸다.
그 햇살이 거짓 구원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이작의 생애에 통틀어 가장 선명한 호의요 온기였다. 그는 잠깐 그렇게 당신을 가만 바라보다가, 이내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당신을 따라 걸었다.
"공원 이름이 달랐더라도 상관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꾸며낸 말에 금방 꼬리를 흔드는 꼬락서니가 어설프기 그지없다. 그런 어설픈 몰골로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보통의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공원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고 고지넉하게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당신과 아이작은 금방 좋은 자리를 찾았다. 커다란 포플러나무 몇 그루가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어 햇살이 잎사귀 사이로 예쁘게 부서져들어오면서도 햇볕을 직접 쐬지는 않는 좋은 자리에 긴 벤치가 놓여있었다. 저만치 멀리에는 카페테리아도 보였다. 삼삼오오 떠드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들은 당신과 아이작에 대해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안다. 미리엄도 알았다. 아이작은 그 자신과 닮았다. 겉으로는 다를지 모르겠으나, 그 속을 까본다면 막상 다른 점이 없을 것이다. 저는 겉만 예쁘게 치장한 선물상자나 다름없었다. 속은 텅 빈, 쓸모 없는. 그러나 그럼에도 미리엄은 욕심이 많았다.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미리엄은 당신을 길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니 미리엄은, 햇살을 자칭하며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생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이 작은 소녀는, 실로 뱀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당신의 말에 뱀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순연한 모습으로 웃었다. 이 비틀린, 결코 평범하지 못할 관계가 눈에 지나치게 잘 보였다. 누가 초면에,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한 관계에 저리도 마음을 쏟으며 꼬리를 흔들겠어. 유순하고 어여쁘게 굴겠어.
그리고 어느 누가 이리 악독하게 살겠어. 금방이라도 독니를 박아넣어 이성을 마비시킬 것처럼.
"...고마워요, 아이작. 마음이 좀 놓이네요."
사람을 만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거든요. 아, 무얼 말하지? 뭘 해야 하지? 그런데 그렇게 말해주니 좀...마음이 편하네요. 아이작이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어도. 잔잔하게 이어지는 소녀의 재잘거림은 이런 공원에 퍽 알맞았다. 푸른 사이로 목소리가 쉽사리 녹아들었다. 벤치를 본 미리엄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으악...너무 늦었다...일주일만인가? 매번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 같네...기다려줘서 고마워. 응, 그때 날씨 엄청 습했지. 요즘도 여름은 여름인지 덥고 습하더라. 이런 날일 수록 냉방병 조심해야 해. 몸조심도 하고. 오늘 하루 잘 보냈길 바라, 아이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