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 없이, 손으로 감싼 얼굴에서 실소가 흘러나온다. 왜 일까? 나는 즐겁지가 않는데. 알수 없는 반응에서 알수 없는 감정이 마음 속 깊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하루의 대답. 느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자조적'이라 부르는 말투로 말하게 되어버린다.
"그래. 생존으로 직결돼."
눈이 감긴다. 시야가 단기적으로라도, 흑으로 물든다. 이를 악물며 쥐어 짜내는 말.
"무리가 흩어져도. 쪼개지고 무너져도. 살아만 있으면 돼. 살아만 있으면, 다음에는 뭐든 지 할수 있어."
회복을 할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소중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루, 너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돼. 다르게 살아왔다는 것은 이 말일까. 하루가 말을 한다. 분명 하루에게 가벼운 말은 아닐테다. 하루도 깊이 생각해서 내뱉은 말일테고, 하루가 살아온 방식, 살아온 철학에 따르면 맞는 말이라는 것은 어렴풋히 깨닫고 있다.
그렇기에.
카사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직면 할수 있었다.
생명은 무거웠다. 하지만 딱히 소중하지는 않았다. 하나가 살기 위해 하나를 스러지게 하고, 숨쉬는 간단한 활동에 수많은 희생이 들어간다. 소중한 것이라면, 그 누구의 희생 없이 생명을 살리는 하루가 아닐까?
무겁고 무겁다. 살아온 세월이 무겁다. 책임감이 무겁고, 생명의 무게가 무겁고, 언어가 무겁고, 이성이 무겁다.
하루의 시선이 무겁다.
피한다. 본능적으로 눈을 마주하려는 그녀를 피한다. 본능이 귓가에 속삭인다. 날 믿지마. 제발. 부탁이야. 하루, 너는 아무것도 몰라...
"..."
하루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하루의 제안. 하루의...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 너무 복잡해. 나는 머리가 나빠. 나는 이런 복잡한 감정 같은거 몰라...
"하루, 너는 상냥해."
칭찬도 아니고, 비난도 아닌, 담백한 어투다. 하루, 너는 네가 좋아하는 '신'에게 맹세하는 것이, 크나 큰 일이겠지. 하지만 나에겐 아니야. '신'이라는 사람, 누군 지도 몰라.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 단어는 내게 의미가 없어. 네가 나에게 왜 이러는 지, 왜 하필 나인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
감고 있던 눈을 뜬다. 십호흡. 호박색 눈이 붉은 기운에 둘러싸여 섬뜩하게 빛난다. 벽에서 몸을 때고, 전투테세에 들어서는 카사. 처음으로 하루에게 이를 드러내며,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카사의 호박색 눈이 붉은 기운에 둘러싸이는 것을 바라보며, 딱히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해본 적 없지 않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카사가 싸우자는 말은 하루에게 있어서 승산이 있을리가 없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루는 그 말을 비웃거나, 가당치도 않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겐 이쪽이 더욱 자신의 마음이 잘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카사를 좀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카사를 위해 사가지고 왔던 육포가 담긴 종이백을 얌전히 옆에 내버려두곤 주머니에서 [생명주입기]를 꺼내 가느다란 양손에 끼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금방이라도 찢어져버릴 것 같은 하늘색 원피스를 걸친 하루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 듯 손을 뒤로 움직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버린다.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하루는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는다. 어설픈 자세였지만, 적어도 겁을 내는 것 같진 않았다.
"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우두머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카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말이에요. 더욱 더 카사가 안전한 가디언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수 있는 토대가 될거라면... "
하루는 말을 이어가다가 끊어내곤 천천히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 기꺼이 해보겠어요, 카사. 당신의 마음... 제가 다 받아내보겠어요. "
하루의 손이 은은한 빛을 머금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심을 마친 듯, 온화한 미소는 사라진 얼굴을 한 체 이를 드러내는 카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승낙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하루가 싸울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은, 차라리 하루가 포기하고 등 돌려 도망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에서 해가 지고 있다. 뜨거운 빛이 기울어져,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카사의 눈동자처럼, 같은 색으로 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이런 세상이라면,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하루에게 마음을 전할수 있을꺼 같았다.
"그게 하루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를 이겨야 할꺼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하루. 정말로 삶이 걸린 듯이 싸워줘. 그게 이 죽음으로 달려나가는 세상에서, 먼지나 다름없는 필멸자들이, 우리라는 생명끼리 할수 있는 최선의 예의야.
그리고 그런 각오로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네 목을 뜯어 내고 말 것이야.
「이 구역 최고 포식자는 나」니까.
짐승의 모습으로 화한다. 인간의 것도 아니고, 늑대의 것을 닮아도 결코 늑대인 적이 없던 짐승의 육신. 하늘한 원피스의 소녀와 모든 것이 다른 육신. 길다란 이는 소통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두꺼운 털에 둘러쌓인 근육은 폭력만을 위해 특화되어있다. 크르르... 잇몸까지 드러낸 위협. 목에서부터 진동하는 깊은 울림. 살벌한 짐승의 눈이, 두려워 하지 않는 소녀의 눈을 마주한다.
"싸워, 하루."
길다란 입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의념기를 쓴 것부터 카사의 의지. 살아있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살아있을 정도까지는 뭐든 지 해버릴꺼야.
"날 이겨봐."
포효와 함께, 짐승이 하루를 향해 뛰어 들어간다. 커다란 몸집으로 가느란 소녀를 짓누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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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아리로 보내주마!!! 하는 개그를 필사적으로 참는 중 기숙사에 들어가려는 성학생들 다 막혀버림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카사는 지난날 자신의 방에서 육포 하나에 눈을 반짝이고 애교를 부리는 그 아이가 아니었다. 한마리의 늑대,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하루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거대한 늑대와도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겁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마음 한켠에 카사가 자신을 봐줄거라 생각해서 그런걸까. 아니다, 그저 이 순간의 너머에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 덤벼, 카사. 서포터라고 하지만... 만만하지 않을지도 몰라. "
나도 어엿한 가디언 지망생이니까. 하루는 하나로 곱게 모아 묶은 새하얀 포니테일이 흔들리게 자신에게 달려드는 카사를 피하지 않고, 똑같이 달려들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는 늑대가 무섭지 않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배워본 적이 극히 적은 하루는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것만으로 강약을 나눌 것이 아니었다.
" 항상 모든 것을 온몸으로, 정면으로 받아내려고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카사. 그건 앞으로 당신이 신경을 써야할 부분일거에요. 항상 늑대 무리로서 존재하던 때처럼 지낼 수는 없을거니까요. "
자신에게 달려드는 카사에게 마주 달려가던 하루가 나즈막히 말을 하는 순간, 하루의 손이 뻗어지고 강렬한 빛이 카사의 눈에 비춰졌을 것이다. 강렬하기 짝이 없는 섬광, 그것은 예기치 않게 터져나갔다. 그와 함께 하루는 그 강렬한 빛 너머로 몸을 숨겼을 것이다.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체로.
복잡한 언어에 담긴 복잡한 마음. 복잡한 언어에도 전달되지 못하는 복잡한 마음. 인간은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이해받을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안고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카사도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어설픈 경계선에 선 카사는 짐승마냥 눈을 돌릴수도 없었고, 인간마냥 그 헛된 희망을 완전히 포옹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살아온 환경, 그 것 그대로를 담아낼수 밖에 없었다. 자연의, 야생의, 생명의 폭력성을 그대로 담아서.
"큭!"
강렬한 빛과 함께 멀어진 시야. 귀가 쫑긋거리지만 하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짜증과 함께 알싸한 쾌감이 퍼진다. 그래, 하루. 강적과 싸울때는 이렇게, 약점을 공략하는 거야. 소위 말하는 비겁한 방식이든 뭐든. 생명은 철저한거야. 폭력적인거야.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거야. 아름답지 않아. 삶은 추악해, 하루.
의념으로 코를 강화하는 카사. 킁, 하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냄새를 잡는다. 그 냄새를 잡아채는 그 짧은 순간. 그 시간을 하루는 어떻게 썼을까.
"찾았다."
크르르, 이를 드러내며 바로 뛰어나가는 짐승. 하루가 있다고 인식하는 곳에, 거대한 앞발을 휘두른다.
큭, 하고 강렬한 빛에 눈이 잠시 마비가 된 카사가 냄새를 맡고선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하루가 찾았다는 카사의 말에 태연하게 답하며 의념으로 강화한 몸를 움직여 망설임 없이 카사를 향해 몸을 던진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 이 모습은 분명, 눈이 멀쩡한 카사라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저도 카사가 이렇게 달려올 때마다 해보고 싶었어요. 카사처럼 힘있는 모습으로 품에 뛰어드는거. 카사라면 충분히 받아줄 수 있을테니까요. "
망설임 없이 카사의 품으로 몸을 내던지는 하루였다. 물론 이번에는 안기는 것이 아닌, 의념과 무게를 실어 카사의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카사의 시력이 돌아와 하루의 모습을 본다면, 늘 하루에게 뛰어들던 자기 자신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 가끔은 저도 카사의 품을 맛보고 싶었어요. 이런 것보다는 좀 더 달콤한 포옹이면 좋았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