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속이 차가워졌다. 그리 큰 잔은 아니라고 해도 차가운 술을 몇 번이고 삼켰으니까. 이만 일어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이 약간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초점이 돌아왔을 땐,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게 생겼다. 잔이... 짝수다. 짝수인 게 뭐가 문제인가? 홀수면 O, OOO, OOOOO... 하고 뭔가 규칙적인 모양이 된다. 중간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짝수는 OO, OOOO, OOOOOO 처럼 쓸데없이 갯수도 늘어나고 중간도 없고 대칭은 맞는데 아무튼 좀 불편해진다. 나이젤은 한쪽으로 밀어뒀던 잔들을 다시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중앙으로 가져왔다. 짝수다. 아무리 봐도 짝수다. 어디에서도 1개를 끌어올 수 없다...! 불편. 방금 전까진 신경 안 쓰였는데, 갑자기 신경쓰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어졌다...! 그리고 김진단씨는 맨 오른쪽에 있는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이럴 수가! 다른 쪽엔 안 부었는데 한쪽에만 부었다! 대칭이 안 맞는다 이 말이다! 나이젤은 다시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어느새 탄산도 없고 흑맥주랑 한참 먼 달콤한 술이 있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대칭 앞에서...!
잔인한 미소라니 그런 거 보일 리가 없잖아요☆ 이런 천사같은 아름다운 미소인데. 책상에 놓으면 대칭 맞출 게 없어서 들고 다니는 샴페인병(아까 지훈이한테 맥이려던 거)을 꼴꼴꼴 들이붓던 나이젤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 저 가지실래요? 저 쓸데 많아요.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레시피대로는 하는데."
데려다놓으면 가사 쪽으로 1인분은 한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1인분 자리 차지하고 0.2인분도 못 내는 사람도 많은데 1인분이라도 내면 쓸만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나이젤의 청소는 객관적으로 보면 깨끗하다곤 할 수 없다! 다림이의 방에 (그럴 일도 없지만) 나이젤을 들여놓으면 둘의 파장이 부딪쳐서(?) 참사가 날지도.
"어라? 지훈 씨? 그거 제 건데요. 그거 뺏기면 대칭 안 맞는데요. 그거 돌려주셔야 하는데요."
술에 취한 자의 그거 화법! 아무튼 대칭을 맞추기 위해 술잔을 수집해야 하는 상황. 나이젤은 자연스럽게 진단씨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서 블러디 메리를 원샷했다. 보드카 들어간 칵테일! 지금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 술 추가!
방금 한 말 되게 웃겼던 거 같다. 하지만 안 웃어야지. 생글생글한 표정은 얼굴에 고정되어 있지만 웃은 기분이 아니니까 안 웃은 걸로 쳐도 되지 않을까? 순간 지금 뭐의 소유권을 넘기고 있는지 까먹어버려서 "네에. 소유권 다 가져가세요." 하고 다림이 제정신이었으면 위험했을 발언을 하고....
"한 잔으로 되요? 병으로 해요, 병으로."
배 안 부른가? 샴페인 반 병을 순식간에 비워버린 나이젤이 진단씨에게 손을 뻗었다. 진단에모오옹~ 술이 비었잖아~~ 꼴받네... 아무튼 빈 샴페인병을 거꾸로 들고 잔을 들어올리는 다림에 맞춰 맥없이 와- 외쳤다. 분위기 타기?
"술잔 다 똑같이 생겼는데 왜 그거만 마음에 들어해요? 뭔가 확- 마음에 와닿는 그런 게 있나? 술잔의 호소력. 대단해요..."
서서히 언어력이 무너지던 나이젤은 저항없이 볼을 잡혔다!
"애자바여-"
대충 왜 잡느냔 뜻. 살집 있는 부드러운 볼은 아니지만 탱글함은 살아있다.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거절은 안 하는 상태로 그냥 꾹 잡혀있을까.
"마다앙... 나이젤 씨가...강아지에여? 강아지 나이젤.. 기여어! 으응... 소유권... 내가 가져버릴거야... 나는. 아니 나도.. 엄청 여러가지 줄 테니까.." 라고 말하지만 역시 진짜로 소유권 가지겠다 그런 건 아닙니다. 가지면 큰일나.. 취한 상태 한정일 거야..
술.. 수울... 이라며 잔을 들고 마시고 그러고.. 잡힌 볼을 보고는 자신은 지훈의 볼을 잡으려 시도합니다. 쭉 늘린다기보다는 잡고.. 그 다음은 고장난 것처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려나.
강아지란 말에 뭔가 반응하려다가 뒤쪽에서 멈췄다. 왠지 좀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여러가지 준다는 말을 거스름돈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그만큼 자신을 더 높은 가치로 샀다는 말이 되니까... 라는 의문의 사고방식을 해석을 시도해봐도, 술잔+여러가지에 자기 인권을 팔아넘긴 상황에서는 도무지 뭔 도그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허히 힝 항훙에 히호호잉.."
볼따구 잡히고 말하는 거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자기는 지훈한테 볼을 잡혀있고, 지훈이는 다림이한테 볼이 잡혀있으니, 나이젤은 다림이의 볼을 잡으려고 과감히 시도해보지만 볼 앞쪽까지 간 손이 팔에 힘이 빠진 것처럼 슈르륵 내려갔다가 다시 몸쪽으로 돌아왔다. 볼따구 강강술래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