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 말하는 것이, 카사의 평상시와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다. 혀의 쓴 맛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미간을 찌뿌리며 생각을 말로 찬찬히 정리하려고 한다.
"있잖아, 사람들은 원래 다 혼자서 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혼자서 자고, 혼자서 씻고, 혼자서 놀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인지 뭐든 혼자서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 것일까?
"외롭지 않아?"
하루는? 하루는 안 외로워? 카사는 기숙사를 둘러본다. 1인실이 가장 좋다고 들었긴 한데, 혼자서 자는 것은 역시 외롭다. 하루도 하루 같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많은 곳에서 왔지 않나? 원래 그런 차이에 익숙해져야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흐음, 하고, 짐심으로 궁금한듯, 내리깐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건 좋아."
헤실, 하루의 설명에 웃어보인다. 그렇치, 그렇치! 우린 친하고! 응! 성별도 같고, 응! 난 하루랑 친하다! 하는 사실이 대단한 상이기도 한 듯, 어깨를 당당히 피게 된다. 둘 만이 방에 있음에도 거들먹거리는 폼이 여간...
이내 하루 앞에 나름 다소곳히 앉아 있는 카사. 하루의 손에 들려 있는 드라이기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존재는 알고 있고, 본 적은 있긴 한데, 제대로 써보는 건 처음이다! 켜지자 위잉-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하루의 손길에 애써 침착해진다. 끄윽, 참아야 해! 하고 속으로 되내기지만.... 그 노력 무색하게, 기분 좋은 따뜻함에 녹아내린다. 저거 무기가 아니었구나!! 혼자서 써봤을땐 화상입었는데! 신기하다!! 따뜻한 바람도 모자라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내리게 된 하루의 손길. 카사를 함락시키고도 모자랐다. 입안 얼음처럼 주욱 녹아내리지 않게 온 힘을 다하는 카사.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이내 위잉- 하는 소리가 끝기고, 카사는 머리를 한번 푸르르, 흔들었다. 톡, 톡, 조심스레 손 끝으로 만지다가 벌써부터 뽀송뽀송한 감촉이 신기했는 데, 손 바닥으로 머리를 투다닥, 매만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하루가 빗을 가지고 오자 내려나야 겠지만 말이다.
"나, 하루를 위하면 뭐든 참을 수 있어!"
믿어달라고! 완전 믿음직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는 카사. 이리저리 삗친 머리가 신빙성을 더해주는 지는. 글쎄. 그래도 이마에 하루의 간지러운 손길이 닿자 에헤헤, 하고 웃어보이는 것을 보니, 뭐든 좋은 게 아닐까.
"???"
머리카락이 빗겨지다 왠지 이상한 방향으로 머리카락이 틀어지자 얼굴이 혼란스러워진 카사. 금세 그 묘한 감각의 원인을 알아낸다.
?!???? 눈을 동그래 뜨다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본다. 이게... 나? 소녀 만화 같은 감상을 내뱉으며 머리를 툭툭, 건드리고 양 손으로도 잡아보는 게, 여간 신기한듯하다. 휙휙, 머리를 흔들어도 풀리지 않는 깜직한 양갈래에 탄성을 금치 못한다. 핫, 그러다가도 하루의 말에 튀어올른다. 열정 만점!
“... 혼자는 외롭죠. 그래서 늑대랑 다르게 사람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요. 같이 있으면 언제라도 행복할 것 같고, 그사람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람을. 그리고 그사람한테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
미간을 찌푸린 카사가 서툴지만 머리 속으로 말을 정리해서 말하려는 모습에, 가만히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내버려둔 하루는 카사의 물음이 들려오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방긋 웃어보인다. 그리곤 카사의 두손을 살며시 잡아서 자신에게 끌어당겨, 두 눈을 마주 했다. 카사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하루의 눈은 따스했고,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 당신을 사랑해요. ”
하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체, 카사에게 그렇게 말했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루의 분홍색 입술은 천천히 닫혔고, 보기 좋게 다물어졌다가 천천히 떼어졌다.
“ 이렇게 자신과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말을 하고, 함께 하길 약속한 다음 연인이 되고, 가족..그러니까 무리가 되는거에요. 늑대들보다 작지만 그에 비할만큼 든든한 무리가 말이에요. 그러니 인간들도 무리를 이루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단지 다들 아직 그렇게 말할 사람을 찾지 못했기에, 홀로 다니는 사람이 많은거에요. 카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거에요?”
카사의 두손을 부드럽게 맞잡은 체로 하루는 자상하게 물음을 건냈다.
거울을 보기 시작한 카사를 보며 하루는 자신의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도 능숙하게 말리기 시작한다. 카사의 머리를 말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르고 있었는지 새하얀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거울 앞에서 귀엽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카사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지도 모른다.
“ 카사가 제 머리를 묶어주려구요? ”
하루는 폴짝 뛰어온 카사의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드라이기를 껐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그녀의 머리는 하늘하늘 부드럽게 새하얀 그녀의 등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하루는 이것이 카사에게도 연습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카사가 자신의 머리를 똑같이 묶을 수 있게 헤어밴드 두 개를 내밀어 보였다.
“ 자, 그러면 제 머리는 카사한테 맡겨보도록 할까요? 실수를 해도 제가 고칠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말고 해봐요. ”
자신만 믿고 한번 해보라는 듯 다정하게 말한 하루는 눈웃음을 지은체로, 카사가 묶기 좋게 등을 돌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