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많이 힘냈다는 카사의 말에, 괜히 어색한지 헛기침을 하며,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 날 내가 했던 것은, 전부 우연이었다. 전부 우연이었고 무엇하나 내가 행한것은 없었다. 하나미치야와 결혼했다는 미래 역시 지금은 불투명한 미래, 검성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미래, 협회의 중역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미래, 무엇하나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전부 전부 허울 뿐 인 거짓 이야기 뿐이다.
그럼에도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에릭 하르트만은 능력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남에게만은 친절해야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 고마워 카사 "
그리고 카사의 이어지는 위험하다는 말에, 역시 그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메리는 위험하다,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 역시 위험하다. 자신 따위는 순식간에 한줌의 혈수로 만들어 버릴 그 공포스러운 능력을 보고도 죽이고자 마음 먹는것은 그 역시 미쳐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에릭 하르트만이 지닌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의 호의 라는 저주는 태생적으로 그에게 들러 붙어 있기에,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이 올 것 이다. 선택은 두가지다. 받아들이거나, 단죄하거나. 받아들이는 쪽의 미래는 지금의 정신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그는 이것이 불가능하고 헛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있음에도 죽인다는 헛소리를 광인처럼 마음에 새겼다. 결국 그는 인생일대의 선택마저도 능력이 부족하기에 소거법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 하지만 내가 해야하는 일이야, 물론 카사도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 찾아올거야. 워리어라는건. 그런 포지션이거든 "
...?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세상 천지에 그런 자판기가 있을 리가! 라고 해도 여기는 제노로운 평화시아. 캡틴 피셜로 이것이 제노시아의 일상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이젤은 맷돌손잡이를 잃어버린 은후의 말에 저런 반응인 걸 보니 1학년 신입생인 걸까... 하고 느긋한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요, 저번에 폭주했을 땐 쫓기던 랜스들이 한꺼번에 의념기를 써서 격퇴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은 인원도 적고 전 서포터니까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방법은 안 될 것 같네요."
은후가 피한 음료수캔 앞쪽으로 뛰어 캔을 걷어차 자판기에 맞춘 나이젤이 유리 위에서 금액투입구로 흘러내리는 콜라를 보고 생각하는 듯 으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목 근처까지 날아온 참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잠깐 생각하려다 목숨을 잃을 것 같다!
"다리의 칼날로 베고, 찌르고... 하지만 음료수는 더 날리지 않고. 뭔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역시 너무 허무맹랑한 생각일까. '정말 이게 정답인가 싶을 만큼 황당한' 그러나 정답인 생각을 하며 여전히 달리고... 또 달렸다...
말만 들었다면 똑같이 기뻐했을 카사였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 인간은, 하는 말과 나타내는 것이 다를까? 입은 기쁘고, 고맙다고 한다. 할멈에게 배운 것이다. 하지만 눈은 카사를 피하고 목에선 기침이 나오며 결국에는 웃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다. 짐승의 감인지, 몸으로 대화하는 늑대의 특성인지. 그 모든 것을 알아채는 것은 쉬운데,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 인간은 어렵다. 카사는 여전히 혼란스런 얼굴로 에릭을 바라본다.
인간은 어렵다.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고, 모르는 것은 궁금하다. 궁금한 것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카사는, 생각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튀어나온다.
"반응이 왜 그래?"
시비를 거는 듯하는 내용이지만, 정말 순수라게 그지 없이 물어보는 것이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도 기울이며 물어본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책을 돌려주러 오고, 광신도가 아니면 뭔지 보러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이상한 인간. 이 인간은 크나큰 위험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 위험으로 스스로 걸어간다.
카사는 정말로, 소유욕이 많은 짐승이다. 저 치료서처럼, 어떻게 생각하든, 한번 손에 들어 그 것의 촉감을 느끼면. 그 것이 한 순간이라도, 카사의 것이라고 생각되면...
놓는 게 정말로, 정말로 힘들어진다.
카사가 본래 그런 것일까, 아니면 본래 가진 것이 없던 자들의 특권일까? 에릭도 그 느낌을 아마 알고 있을테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동안 '카사의 동료'였던 에릭.
충족되지 않은 본능이 말했다. 지켜! 지켜야해! 두려워하는 본능이 말했다.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넌 이기지 못해. 현실을 받아 들여.
넌 아무 것도 지킬수가 없어.
에릭의 손을 쥐려고 한 카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뼈 깊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녀」를 생각하면 몸이 떨려온다. 카사에게는 도울 방법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카사는 정말로, 그... 생물 같은 거에게 상처 하나 만들 힘이 없었다. 손길 하나에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죽음은 무서웠다. 그 숨결을 피해 달려온 카사는 에릭의 말에 굳는다. 해야하는 일. 에릭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과 달리, 입가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 의뢰에선 에릭의 포지션이 분명...
짐승의 감을 지닌 소녀의 직감은 에릭이 쓰고있는 가면 따위는 우습게 간파하듯, 소녀는 에릭을 보며 혼란스러워 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애석하게도 에릭 하르트만 이라는 인간이 그런 인간이니까 카사는 이해할 수 없을 것 이다. 사람이란게 그렇다. 안괜찮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 짐승이 일방적으로 희노애락을 표출하는 것과 다르게 인간은 어째서인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 아니 어쩌면 감정 따위는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냥 에릭 하르트만 이라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니까.
" ..... 글쎄? "
결국 에릭 하르트만 이라는 인간은 카사가 꺼낸 에릭이 워리어로서 그렇게 말하는 거냐는 질문조차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런 뻔한 훈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보다 카사가 월등히 우월하고, 뛰어나고, 능력이 있는데 뭐가 잘났다고 오래 산 것 마냥 훈수를 두는거지?
아아 생각해보니 그런 카사마저도 한 줌의 혈수로 만들어버리는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에게 내가 뭐가 잘나서 죽일거라고 선언하는거지? 그냥 애초에 무릎 꿇고 발등에 키스하면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라고 빈다면 차라리...
핏 하고 또다시 정신을 놔버린 듯 풀린 동공에 다시 빛이 돌아온다.
에릭은 또 다시 카사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띄웠다. 거울을 보면서 몇번씩이나 연습했으니까 이것은 어렵지 않았다.
" 카사가 훌륭한 워리어가 되면 이해할꺼야. "
이 대답역시 가식이다. 왜냐면, 에릭은 훌륭한 워리어가 아니다. 그러니 에릭 역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
"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할까? 치료서는 내가 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카사에게 다시 좋은 걸로 돌려줄게. "
일단 생각해놨던 자판기 공략법 진짜 학교 자판기가 아니라 제노시아의 돌+I중 한 명이 만든 함정 자판기입니다. 진상은 나이젤이 음료수 하나 뽑아먹으려는데 돈을 투입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투입구에서 음료수가 나와서 이게 뭐지? 하고 꺼내봤다가 쫓아오기 시작한 것... 그리고 은후가 나타났을 때 잠깐 멈춰서 음료수를 날렸습니다. 즉 일단 음료수를 준 다음에 샀으니까 돈내놔라는 억지를 부리는 자판기. 해치우는 방법은 어떻게든 붙잡고 결제를 하면 일반 자판기로 돌아갑니다... 라는 것.
오늘치 Dog 소리 사실 에미리 성격란 보고 아 이거 시트쓸때 의도한건 아니였는데 에미리가 싫어하는 유형이 딱 은후라 상성때문에 만나면 큰일날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카사랑 에릭 일상 보고 아 에릭이랑 은후 만나면 상성때문에 100퍼 큰일나겠네 싶어서 덜덜 떨고있
짐승이랑 인간. 그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식상한 질문을 한다면, 그 답은 수 없이도 많을 것이다. 그래, 그 선을 긋는 답은 너무나도 많다. 그 어느 한 쪽에 서지 못하는 카사는, 인간 에릭을 바라본다. 애매모호한 답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하는 중인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실감이 난다. 에릭의 손에 들려진 치료서가 눈에 든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책.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짧게 불평하는 카사.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시선을 먼저 돌리는 것은 카사고, 패배자도 카사일테다. 어질어질한 마음에 애꿏은 벤치를 발로 찬다. 깡, 하는 소리가 나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벤치. 날라갔다면 그것대로 곤란 했을테지만, 왠지 자신의 무지함과 무력감이 생각나 얼굴이 구겨진다.
희망을 잃은 눈의 소년과 망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녀는 침묵한다.
"..."
본능이 의무를 속삭인다. 본능이 현실을 속삭인다. 그리고 소녀는 수많은 모르는 것 중에서 아는 것 하나를 집어 낸다.
에릭의 미소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소년이 동료라고 느껴버린 카사는 그 사실을 손쉽게 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듯 에릭의 말이 카사의 작은 심장을 죄어온다.
카사는 훌륭한 워리어가... '카사'. '훌륭한'. '워리어'. 아아. 작은 속삼임. 워리어의 의무는 지킨다는 거야.
"싫어."
에릭의 긴 말을 한 마디로 답한다. 어느 부분의 대한 답일까. 하나의 답이긴 할까? 카사는 찌뿌린 얼굴을 피지 않고 뒤로 돈다. 에릭과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명쾌한 대답 하나 없이, 말 하면 할 수록 심장이 아프다. 어질어질하다. 엉킨 실타래가 생각난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것에서 멀어지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뒤로 돌아서, 멀리 걸어가기 시작한다.
시작만 하고, 잠시 멈춰선다.
"그때 말이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이해하지 못하고 실패만 나타내는 치료서의 감촉. 그래도 놓기 싫어진다.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럴까. 얼굴을 돌려 에릭을 바라보지 않는다.
"조금 더 강해지면. 도와줄께. 도와줄꺼야."
일방적인 약속이자 다짐을 내뱉으면서도 에릭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사는 그래도 멀리 뛰어 간다.
// 연애 상담하러 왔는데 결국 서로의 상처만 후벼 판 동문. 그 둘의 운명은?!
수고했습니다 에릭주!!!! 진짜로 막 감정적이고 에릭의 캐릭터 짱이고 막 서로의 과거사가 이렇게 엃히고 막 (주접
지금 같이 있는 동료는 워리어. 의념기는 공격 계열은 아니지만, 적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계열의 능력. 자신은 서포터. 둘의 딜로는 저 무시무시한 자판기를 격퇴하기엔 무리다. 자판기... 얼만큼의 딜이 들어올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섭다. 닿는 순간 썰릴 것 같은 이미지다. 다른 사람... 어디에 있지?
이름도 모르는 1학년(추정)이 달리며 하는 말을 한 줄 한 줄 머리에 새기며 방안을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압도적인 적을 상대하는 법. 학교 안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선생님이 나타나서 수습해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당장은 와줄 것 같지 않다. 둘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료수를 발견하고 벌써 한 바퀴 돌았던가, 를 생각하기도 전에 은후가 음료캔을 발로 차 날렸다. 그 킥은 의외의 결과를 나타냈다. 내용물이 흘러나온 것치곤 꽤 많은 양이 남아있던 콜라 캔이 가볍게 날아가며 동전투입구로 콜라가 조금 흘러들어갔다는 것. 그 순간 자판기는 뭔가 처리하는 듯 칼날을 집어넣고 움직임을 멈췄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듯 붉은 라이트를 깜빡이며 움직임을 재개했다.
"확실히... 뭔가 먹힌 것 같긴 하네요." [동전 투입구엔 동전만 넣어 주세요!]
자판기가 멈춘 동안 꽤 거리를 확보한 나이젤이 은후를 보며 말했다.
"...저기, 조금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수락했으면... 대충 >>16의 진상과 "혹시 돈을 결제하면 저 자판기가 멈추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가 맞았지만... 이런 것이라도 제노시아라면 혹시? 가 역시!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유후, 실패던 성공이던, 경험이란 것은 유의미한 결과를 남기는 법이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다른 캔을 들어올린 은후의 행동이 잠시 멈추었다. 파티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좋은 파티원이지.
...
"아니, 그런 행동이 용인되나요??? 여기 제노시아는?????"
아무리 장인들을 만들어내는 아카데미라고 해도, 학생이 멋대로 함정 같은걸 만들어서 학교에 두게 놔둔다고? 은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여긴 제노로운 평화시아고, 이런 일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 다른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다시 속도를 높여 다가오는 자판기를 피해 달리면서도, 은후는 착실히 자신의 브라운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동전 여러개 정도는 주머니에 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사격을 하는 감각을 떠올리면서, 몸을 돌려 힘차게 자판기의 동전 투입구를 향해 그것을 던졌고... 힘차게 들어간 동전을 받은 자판기는 다시 칼날을 집어넣었다.
"근데... 음료 가격이 얼마죠? 숫자 보이시나요?"
방금 전 처럼 처리 상태로 돌아온 자판기를 노려보며 은후는 남은 동전을 꽉 쥐었다. 설마, 돌+I여도 가격 책정은 양심껏 해놨겠지.
확정된 건 아니겠지만 장난용으로 따로 만든 자판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장잉력 높은 잉여라고 해도 굳이 학교 자판기를 직접 개조해서 저런 걸 붙이진 않겠지. 기물파손이고 걸릴 가능성이 너무 크다. 학교에서 함정 같은 걸 설치하는 걸 가만히 냅두진 않지만, 마경-제노시아-의 악마들은 통제를 거부한다. 서류를 조작해서 아다만티움 4톤을 학교로 주문한 사람만 봐도... (대충 1스레에서 나온 공문 이야기라는 내용)
"잘 던지시네요?"
[투척]이나 비슷한 계열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젤은 동전을 받아먹고 다시 정지한 자판기를 응시하다가 가격 얘기를 듣고 콜라로 얼룩진 유리를 쳐다봤다. 이걸로 값이 안 된다던가 하면 피의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다행히 자판기는 평범한 자판기처럼 음료수 하나에 5GP~10GP의 가격대였고, 은후가 집어넣은 동전으로는 충분히 두 사람 몫의 음료수를 계산할 수 있었다.
자판기는 잠시 지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칼날을 꺼내지도, 투입구에서 음료수를 발사하지도, 미친 속도로 복도와 바닥에 칼자국을 내며 돌진하지도 않았다. 나이젤이 겁 없이 다가가 투입구가 열리지 않도록 발로 살포시 밟고 자판기를 똑똑 두드렸다.
"...된 것 같은데요?"
정말 이게 방법이었다니 이 함정 자판기의 제작자는... 정말... 평범한 사고방식의 돌+I였다. 물건을 강매하긴 하지만 제값에 팔아먹는 자판기라니. 하지만 둘이 산 음료수는 이미 자판기 앞면과 바닥에 다 엎질러진 후라서, 사라진 건 오직 은후의 돈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상처뿐인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승리라는 말도 무색하다. 이걸 만든 사람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까. 이 자판기를 증거로 제출하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은후는 말을 더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으며 에휴, 하는 소리를 냈다. 뭐, 여러 방면으로 어리숙한 1학년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아무래도 깨달음이라는게 생기는 법일지도 모르는 법이다. 가령, 제노시아의 학생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 비율이 높다- 라던가.
"운이 좋아서에요."
본인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자판기에 대한 긴장을 풀지 않고 슬금슬금 조금만 앞으로 다가가 숫자를 본 은후는 긴장을 풀고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실로 다행이다. 은후는 거지라고! 아무리 일상이라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같은 것이기에(?) 그는 함정 자판기를 만든 돌+I가 의외로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를 올렸다. 겁 없이 자판기에 다가간 나이젤과는 달리 자판기에 다가가기도 싫은 은후는, 충분히 작동을 멈춘 그것을 들고 빛의 속도로 교무실에 뛰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이 파티는 이걸로 끝.
"수고하셨습니다. 신 은후에요. 1학년이고... 19살이고... 워리... 아, 이건 이야기 했지 참."
당신은요? 라는 말 대신 은후는 앉은채로 나이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똑바로 나이젤의 얼굴을 보는건 은후에게는 처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