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들린 검의 무게는 거두어간 목숨의 무게, 차디찬 강철의 색을 머금은 검에 타고흐르는 붉은 핏방울이 바닥을 향해 뚝 뚝 떨어져 자국을 남기다 부웅 하고 휘둘러진 검에 의해 곡선처럼 붉은 선이 바닥에 그려진다. 선형을 털어낸 검이 달빛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것도 잠시. 손에 들린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그는 방금까지 살아 숨쉬었던 인형을 태엽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이 강철인형은 가족이 있었을 것 이다. 돌아가면 맞이해주는 친구가 있었을 것 이다. 누군가에게는 존경받았을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에겐 사랑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태엽이 풀린 태엽 인형은 멈출 뿐 이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대한제국의 황제폐하께서 이 자를 죽이라 명하셨으니. 나는 그저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 것은 가능성의 이야기다. 피와 강철을 품은 소년이 단념하였을 때 보여지는 길의 끝에 대한 몽상이며,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비극이라고 조차 불릴 수 없는 쓴맛을 품은 필름이다.
업무를 끝낸 나는 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냥개들이 살짝 고개만 숙이며 인사해줄 뿐, 다른 인간미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곳 에서. 나는 검은색의 장갑을 대충 벗어 던지며, 놓여져 있는 소파에 기대 앉았다. 사냥개는 24시간 언제든지 대기해야 하기에, 이런 순간에는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감기려는 눈꺼풀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었지만, 나는 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바라보았다. 구겨지고, 색이 바래고, 조금 찢어진 것을 테이프로 붙인 그 사진엔. 이제는 목소리를 떠올리기도 쉽지 않은 오래전의 친구들의 모습이 남겨져 있었다.
" ....... "
멍하니 손을 뻗어 낡은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언제 묻었는지도 모를 핏방울에 의해, 여우 소녀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스윽 그어졌다.
" 아.. "
황급히 옷소매를 이용해 사진을 닦는다. 그럼에도 붉은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에, 어깰 축 떨어트렸다.
그 날, 홍왕에게 죽여주세요 라고 말하며 단념한 날. 나는 홍왕의 사냥개가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이나마 써주겠다는 그의 말을 부정할 자격 따위. 목숨을 단념한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쭈욱, 홍왕의 명령에 수 많은 사람들을 베어 죽이면서,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고갤들자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충혈된 눈동자, 피로에 젖은 표정, 백발에 튀어오른 핏방울들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더는 인간 처럼 보이지 않았다.
"....."
앞으로도 나는 홍왕의 명령으로 수 많은 사람을 죽여나갈 것 이다. 그가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을 죽여야 한다 판단하기 전 까지.
" 현 시간부로 작전 종료,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을 보유한 에릭 하르트만을 처형하였습니다.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같은 사냥개인 그 남자는 검 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느끼며, 품에서 사진을 꺼내본다. 이름...뭐였더라.
마지막 순간에서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은 여우소녀와 남자애. 아마도 나의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 이다. 사진을 꼭 쥐며 눈을 감는다. 만약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나는 결코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 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