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 아, 죄송합니다. 손님.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사근사근하게 대답한다) 현재 모든 방이 예약되어있습니다만 저 두 손놈을 내쫓고 나면 방이 하나 비는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1층에 바가 있으니 느긋하게 한잔 하고 계시면 금방 정리하고 예약 도와드리죠.
거리의 대로변 앞 한 남녀가 서로 몸싸움을 하고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남자만이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쳐맞고 있다는게 맞는것 같다
"아아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발...한번만!.."
가여운 표정으로여자의 다리를 잡으며 매달리는 남자 하지만 상대방은 그의 간절한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지 핏발선 시뻘건 눈을 부릅 뜨고 이성을 잃은채 구타를 멈추지 않는다 주변의 제지가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이 그 남자의 마지막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들만큼 엉망인 그의 몰골 체격이 원래 왜소한것도 있고 뺨은 피멍이들고 입안에서는 피떡이 되어 차마 쳐다보기도 불쌍할 정도였다 동시에 그의 쳐진 갈색의 눈동자와 연한 밀발의 머리카락이 그 처연함을 배로 만드는것같다
"다신...다신 내눈앞에 나오지말도록해 그땐 진짜 죽여버릴테니까"
무서운 경고와 함께 그에게 침을 뱉으며 어딘가로 사라지는 여자 남은 남자만이 처량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약간 시시껄렁한 느낌마저 드는 인상의 장신 남자, 마녀 사냥꾼. 타오르는 태양초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목을 덮을 만큼 약간 긴 그는 어깨에 특주 마총으로 보이는 무기를 걸쳐 놓고 느긋하게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신이 마녀고, 여기는 당신의 거처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는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조금 심심해 보일 뿐.
남자는 자리에 앉는 당신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마 자기도 손님이니까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앉든 말든 남자를 평범한 손님 대접 해줄 필요는 없지만.
" 그거야 늘 하는 일이지. 오늘도 할 필요는 없고. "
값싼 묘기를 부리는 광대처럼 어깨에 진 마총의 손잡이가 아닌 중간쯤을 물건처럼 잡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놓든지 세워놓든지 한다. 소파가 있으면 그 옆에 세워 뒀을 것이고, 카펫이 있으면 그 위에 올려놓고 끝부분으로 돌돌 말아놓기까지 하는 뻔뻔한 짓을 했을 것이다.
"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했고, 내가 먼저 쳐들어왔으니 사실 내가 시비를 건 셈이지만, 아무튼 간에 오늘은 휴전하자. 어때? "
싸움이 안 났는데 휴전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사냥꾼과 마녀 간의 오랜 악연을 전쟁이라고 친다면 그럴듯하지만, 사냥꾼이든 마녀든 제멋대로 제각각이어서 같은 직종이라고 하나로 묶을 만한 게 아니다. 아무튼 여전히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앉을 자리를 찾는 말은 태연함을 넘어 뻔뻔하게 보였다. 도대체 뭘 하러 온 건지 감도 안 잡힌다. 목적을 알 수 없기에 그녀는 한가닥 긴장을 내비치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냥꾼이 마녀의 거처에 들어오는 일은 사냥할 때 밖에 말고 없는 줄 알았는데."
여태 몇명의 마녀를 꿰뚫었을지 모르는 마총으로 묘기 아닌 묘기를 부리는 걸, 그녀의 녹색 눈이 따라간다. 고풍스런 카펫을 돌돌 마는 걸 보곤 살짝 눈썹을 내리깔며 하지마, 라고 말했을테지.
"대체 왜 그러는지 심히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 나도 싸우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집안이 망가지는 건 더더욱 보기 싫고."
그러니 기꺼이 이 모순적인 휴전을 받아들이겠다며 몇가지 손짓을 한다. 마녀답지 않게 단정하고 흰 손이 그의 뒤를 손짓하자 푹신한 소파가 튀어나오고, 딱 소리나게 손가락을 튕기자 먹음직스런 과자와 차가 준비된 테이블이 중앙에 생겨난다. 저절로 움직이는 티팟이 따른 찻잔을 그의 앞으로 살짝 밀어놓고서 독은 없다고 말해준다.
"못 믿겠으면 먹지 말고.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정도는 얘기해주겠지? 다짜고짜 휴전을 꺼냈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거 아냐."
그가 악의가 없다면 그녀는 무기력하게 의자에 기대 턱을 괴었다. 설마 이것도 없는 건 아니겠지.
세계를 위협하던 마왕이 쓰러지고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왕을 무찌른 용감한 젊은이들은 다음에 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고 그들은 각자 살던 마을로 돌아갔다. 제국에서 그들의 공을 치하한 것은 아주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용감한 젊은이들의 이름이나 행적은 단지 2년만에 천천히 잊혀지고 있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시골 마을. 이곳은 마왕을 쓰러뜨린 이 중 한 명이자 검사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한때는 마족에 의해 공격당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전쟁을 꺼리고 평화를 사랑하던 마족은 물론이며, 인간들까지 모두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마을 도장에서 검사였던 사내는 자신의 검술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평범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아무래도 그런 평범한 하루와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찾고 계신 분이라면 지금 도장 안에 계세요!"
막 교육을 마치고 나온 어린아이 한 명이 사내를 찾고 있는 누군가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수건으로 자신의 땀을 닦고 있는 한때 성스러운 검을 들고 싸웠던 그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RPG게임 세계관 같은 곳에서 엔딩을 맞이하고 2년 정도 뒤의 시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 짓은 완전 사절이고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는 자유로 둘게!
몰라, 씨*...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 사랑하겠다 약속하는 나라에서 살던 내가 이 휘황찬란 알록달록 머리 밭에서 뭘 할 수 있겠어. 말이 통하는게 신기하지. 말 타고 동쪽으로만 존* 달리다 보면 한 바퀴 돌기 전에 동방예의지국에는 갈 수 있나. 염병, 치마 짧다고 혼내던 학주 대머리가 그리워지긴 처음이네.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이 개떡같은 곳에서 날 냥줍, 아니지. 인간줍 해준 저 사람은 돈 개많은 부자로 보이니까 적어도 어디 인신매매하는 곳에 팔아넘기진 않겠지. 이 으리으리한 저택에 발 한 번 디뎌본 것도 아주 좋고, 아. 가방은 뺏겼지만 뭐 알바냐. 니들이 얄리얄리얄라셩을 알아? 수능의 ㅅ도 모를텐데 한문제도 못 풀걸. 나도 못 풀거든. 내 가방 짤짤 털어봤자 못 알아보니까 돌려주겠지. 그것도 아주 좋아. 근데 아무리 긍정마인드로 행복회로 기똥차게 돌리려고 해도 하나는 도저히 돌아가지가 않는단 말이지. 이 무지개머리놈들아,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밥심!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앉혀다 놓고 뭐하는데? 아, 마라탕에 배추랑 숙주 존* 넣고 소고기 추가해서 먹고 싶다!
문을 넘어 들어온 이는 푸른끼가 도는 신비한 피부에 농염한 눈빛 마치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였던것같은 분위기를 가진 한 마족의 여인이였다. 보통이라면 그저 미색의 마족정도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라면 아마 눈치 챘을것이다 그녀가 그 2년전의 마왕과 무척이나 외견이 닮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쪽이..."
하지만 2년전 자신을 쓰러트린 원수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기엔 좀더 푹신하고 달콤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 그래 마치 사랑이라도 빠진듯한...푸른 뺨에 어쩐지 복숭아빛이 물든다
"실례지만 그쪽이 제 애인이신가요?"
그녀는 그를 본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심장에 떨어진듯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제대로 이성을 유지할수없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이 마음을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하리!
/부하들로 인해 다시 부활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하들은 제물이되고 불완전한 의식으로 기억도 잃고 남은거라고는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칼을 박은 이에 대한 뜨거운 원망뿐...이지만 어쩐지 기억이 애매해서 뜨거운 마음밖에 안남고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채 제 기억속의 그 남자를 찾아온 기억상실마왕...이라는 설정 너무 길고 이상한가?
창백한 피부에 눈물이 한줄기가 죽 그어진다 외로운 외각의 망가진 성에서 여지껏 그의 얼굴만을 기억하면서 버텨왔다 가끔은 먼길을 가는 고통이 자신을 덮쳐와도 자기가 이리도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내칠리 없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소문을 쫒아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그는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자신을 마왕같은이라(아니다 마왕맞다) 매도하며 살아남은 존재 조차 부정을 당하다니
"저는 살아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였나요? 그렇게 제가 미우셨나요?"
환영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다만 저도 모르는 자신을 알아줄 그만을 바라며 온것인데 이리도 홀대 받을 줄은...그녀는 순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온다 그 맹목적인 믿음은 배신이 되어 고스란히 죄없는 그를 향한다
"복수...복수? 내가 당신에게 복수를 왜해? 이렇게 사랑하는...으윽!! 사랑? 이게 사랑인가 가르쳐줘 나는 어떤 사람이였어?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가져오며 마왕의 한은 무엇을 가져올까 흐르는 눈물은 마를길없이 그저 고운 두손으로 감싸쥐어 막아보지만 손틈새로 비치는 그 붉은 눈은 피같은 원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그 모습에 검사는 순간 혼란을 느꼈다. 허나 아무리 봐도 상대는 마왕의 얼굴과 너무나 비슷했다. 그렇게 힘겹게 싸운 상대인데 설마 자신이 그 상대를 못 알아볼까?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했던 동료들 역시 모두 동의할 것이 분명하다고 검사는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에 검사의 마음은 조금씩 동정심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방심할 순 없었기에 사내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저러다가 갑자기 공격해올 수도 있었으니까.
"네가 마왕이 아니라면 너는 누구지? 넌 내가 아는 마왕과 너무나 비슷하게, 아니. 그냥 똑같이 생겼어. 다시 깨어나면서 기억이라도 잃은건지, 아니면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너하고 연인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마왕이 어떤 이였냐고? 한때 세계를 위협했던 마왕은 그야말로 잔혹한 이였어. 마족 이외의 종족을 모두 멸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었지. 물론 마왕의 속마음은 모르겠으나, 나는 동료들과 함께 그런 마왕과 싸웠고 2년 전에 쓰러뜨렸어. 그리고 그 마왕과 똑같이 생긴 네가 나타난거야."
방금보다는 경계심을 살짝 줄인 목소리였으나 자세는 조금도 경계를 풀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며 검사는 일단 열려있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사랑한 적 없어. 난 단 한 번도 널 사랑한 적 없어. 네가 마왕과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인지, 마왕인진 모르겠지만 만약 기억이 없다면 이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 정착해서 평화롭게 살아줘. 전쟁은 끝났고, 더 이상 나도 평화를 해치려는 마족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설사 네가 마왕 본인이라고 하더라도, 세계를 침공하지만 않으면 싸우고 싶지 않아."
야, 라는 호칭에 시종이 눈을 부라리는 것에 손을 들어 막은 사내가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하엘. 이 여자가 먹을 걸 가져와라."
말버릇을 먼저 고쳐야겠군. 금사를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에 선명한 금안, 지고한 황가의 핏줄을 뜻하는 색에도 여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다섯 살 아이도 아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모른다면 그대로 이상하고, 모르는 척 하는 거라면 대단한 연기자일 터. 처음 보는 모양과 옷감으로 만든 복식 또한 특이했다. 빼앗은 가방에서는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륙에서는 처음 보는 물건 뿐이었고. 이상한 언어로 쓰인 서책과 특이하게 생긴 필기도구, 작고 네모난 금속 판 같은 것. 궁정 마법사조차 어떤 특이사항도 읽어낼 수 없다 하였지. 그렇다면 다른 대륙에서 온 것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름 별장에 사냥을 나왔다가 이런 걸 주울 줄이야.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널 보냈는지 언제까지 함구할 생각이냐."
밤하늘을 한 가닥 잘라낸 것 같은 머리칼과 그림자조차 어둠을 드리우지 못하는 눈동자. 신전 잡놈들의 예언대로였다. 진정 신의 뜻일지, 그놈들의 장난질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야 이제부터 밝혀내면 될 일.
와씨, 뭘 야려? 분명 나 인간줍 해준 저 사람 없었으면 방금 요단강 건넜을 거다. 내가 이 상큼한 나이에 염라대왕한테 절 올릴 뻔 했다고. 근데 저 사람이 막아주니까 겁대가리 상실이다, 이 새끼야. 어디 한번 생면부지의 한테 눈으로 욕 좀 처먹어보라지. 내가 싸가지 밥말아먹었거든. 그래도 밥 준다는데, 그쪽한테는 좀 얌전하게 굴어볼게.
"...감사요."
먹을 거 주는 사람 쫓아가지 말라고 콩만할 때부터 들었긴 한데, 지금은 좀 다르지 않냐. 굶어 죽느니 먹고 죽겠다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 먹을 거 주는 사람 최고. 니들이 대한민국 고딩들은 몰라서 그런데, 먹을 거 하나에 우사인 볼트 뺨치게 달리는 애들이라고. 그 때만큼은 빌빌대던 애들이 죄다 올림픽 국가대표, 아. 올림픽도 우사인 볼트도 모르겠네. 근데 뭐? 저게 무슨 개소리야.
"예? 누가 보낸거면 그 새끼 제가 먼저 족치고 싶은데요."
아니, 그렇잖아. 난 집 가는 버스에서 깜빡 졸았을 뿐이라고. 근데 아직도 꿈속인가 싶은 여기에 와 있다? 내 장래희망이 그때부터 범죄자가 되는거지, 씨*. 개같은 놈, 누군지는 몰라도 잡히면 그때가 그새끼 향 꽂는 날이다.
"근데 왜 반말이세요."
내가 먼저 야 라고 했긴 한데, 그래도 존댓말 썼잖아. 배고픈데 가 아니라 배고픈데'요' 라고 해줬잖아. 그쪽도 존댓말 써야하는 거 아니냐? 학주쌤이 보면 기절할 거 같은 머리색을 하고는.
감사요, 라. 참으로 특이한 화법이로군. 생김새도 그렇고, 역시 외국인인가. 그러나 그렇다기엔 제국어가 지나치게 유창하지 않나. 트레이에 간단한 음식과 티푸드, 차를 가지고 들어온 시종이 소녀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사내의 앞에는 얼음을 띄운 독한 술이 준비되었다. 사냥과 뜻밖의 수확으로 더워진 피가 영 가라앉지 않았던 탓이다. 사내는 말을 하는 소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거짓을 말하는 표지는 없었으나……. 스스로를 설명해내지 못하는 초면의 수상한 여자를 그저 신탁 대로의 일이라고 믿기에 사내는 적도, 의심도 지나치게 많았다. 이미 사내의 마음은 8할 정도는 신전의 개수작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저 작은 여자가 과연 쓸모가 있을까에 대해서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전이 준비한 패라면 오히려 내가 거둬 그놈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을 것인가. 여자를 살려뒀을 경우의 이점을 생각하던 차에 이어진 말에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불퉁한 소녀의 말에 무엄하다, 감히 황……! 까지 말하고 또 한 번 사내의 손짓에 말이 막힌 시종이 울그락불그락 한 얼굴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
느릿한 말투에서 위압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태어나기 전부터 군림하는 위치에 있어 온 자의 말투였다.
"누구도 너를 보낸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 곳에 떨어져 있었지?"
황제가 여름 별궁에 사냥을 온 것은 최측근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설령 신전 놈들이 알았다 하더라도 그가 언제 올 줄 알고 그 곳에, 심지어 맹수가 있는 숲에 여자를 가져다 둔 단 말인가. 실제로 자신이 아니었다면 여자는 죽을 뻔 했지 않나. 무술이라곤 배우지 않은 것 같은 몸이었다. 저런 몸으로 그 곳까지 혼자 기어들어 가는 것도 말 없이는 불가능한 일.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어디 미슐랭 호텔도 음식을 이렇게 고급지게 내올 거 같지는 않은데. 개쩐다. 이거 안 홀리고 배기냐? 저 고급져 보이는 음식들이 N극이면 내 눈은 S극이다. 아, 근데 차는 좀 별로. 커피도 그렇고, 사람들 입맛 참 특이하단 말야. 풀 뜯어 말려다 우린 물이나, 콩 태워서 우린 물이나 둘다 뭐가 맛있다고. 저건 뭐야. 술? 알콜중독자인가? 깡소주도 미친 놈이나 하는 거랬는데 양주가 더 독하지 않나? 몰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여기에 금강산은 없지만 일단 입에 뭣 좀 물고.
"와씨…"
소리내서 욕할 뻔 했네. 눈치 빠르게 입 틀어막은 내 손, 잘했어. 어쨌든 진짜 개존맛. 급식이 이러면 좋겠다, 와. 인생 살맛 난다. 여기서 살고 싶진 않긴 한데. 근데 쟨 또 왜 급발진이야.
"황?"
감히 황. 저쪽 머리가 좀 노랗긴 한데 누를 황은 아닐테고. 나 지금 좀 많이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나 설마 지금 입에 넣은 게 최후의 만찬 각 섰냐? 개빡친 저 사람 손에 죽으면 차라리 다행일 거 같은데 이거 맞냐? 오, 입맛 존* 떨어지는데. 저 말투 봐라, 대답 안 해도 알겠다. *됐다, 씨*. 여기에 뭐 안락사가 있겠어, 뭐가 있겠어. 끽해봤자 독약이거나 목 뎅겅 아니냐? 단두대에 목 날라가나? 개에반데. 표정 구기는 거봐. 아까는 구해줘놓고 지금은 죽일 각 재는 거냐고. 지금 좀 개쫄리는데 화장실 간다고 튀어볼까? 어디로 튀지? 아까 그 숲? 그래, 나한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단두대냐, 짐승 먹이냐.
잘 먹는군. 오랫동안 굶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기엔 얼굴에서 제법 윤이 나는데. 사내가 술을 들이켰다. 검은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자 이상하게 목이 탔다. 잘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표정이 안 좋아진 소녀의 얼굴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빠르게 이어진 말에 사내가 빙긋이 웃었다.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 편인가.
"네 목숨은 내 것이니 넌 그리 고민할 필요 없다."
내가 주웠으니 내 것이지. 그리고 사내는 독약처럼 번거로운 수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개진개진 피를 토하며 몸을 비트는 모습은 영 미관상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
"당분간 나와 있어야겠다. 이름이 뭐지?"
선황이 적은 가장 가까이에 두라 하였지. 그 가르침 하나 만큼은 지금까지도 잘 써먹고 있었다. 황제는 그녀를 곁에 두고 관찰하기로 결정했다. 그놈들이 준비한 것이라면 대가를 치루게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실제 신의 뜻이라면……. 엿이나 먹으라지.
그래, 이게 황제폐하지. 누구는 죽음을 각오하는데 웃는 것 좀 보라지. 다이아몬드 수저라서 좋겠다, 아주. 사형 선고 기다리는 기분 참 상쾌한데, 쟤 뭐래? 저거 술 같더니만 나 냄새 맡고 취했냐? 헛것 듣냐?
"와우..."
저런 대사 드라마에서나 본 거 같은데, 거기 여주들 미쳤나. 저걸 듣고 가슴 설레한 거냐? 오마이갓이다, 진짜 죽을까봐 개쫄려서 심장 뛴거면 인정. 아니면 한 대 치고 싶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잘못 착각했다거나. 황제폐하는 애완 인간 키우는 취미가 있다고 소문나길 바란다, 제발. 내가 좀 막 나가기는 하는데 목숨 줄 쥐신 분 악담 퍼트릴 정도로 막 나가지는 못해서 존* 아쉬워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
"그 당분간이 제가 늙어죽을 때까지면 좋겠네요."
그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더 좋겠고.
"이유아."
이름 존* 쉬워. Lee U A. 맘 같아서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마리 드 앙투아네트 이런거 말하고 싶긴 한데, 황제를 조롱하냐며 뒤질까봐 좀 사릴려고.
따박따박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황제는 조금 흥미가 동함을 느꼈다. 지금껏 제게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던 탓이다. 겁이 없는 건지, 당돌한 계집. 볼 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여자라기엔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신탁이 내려 온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니고ㅡ신화 속 밤의 여신의 색을ㅡ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몹시도 공교롭지 않은가.
"이유아. 몇 살이지."
그러나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니 우선 지켜볼 수 밖에.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발음해 보았다. 발음하기 어렵지 않은 이름이었다. 성이 없나? 평민인가. 자신의 이름을 되물어 오는 무례에도 익숙해진 황제는 유쾌히 웃을 수 있었다.
"이슈타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면서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는 없었지만 이름은 이름이니. 옆에서 시종이 기함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 작은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듯한……. 이상하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기울인 황제의 시선이 유아의 앞에 놓인 음식에 가 닿았다. 그녀가 손을 조금 대다 만 음식을 보고 시종에게 지시했다.
궁금한 거 뒤지게 많네. 몇 살이긴 몇 살이야, 썩어문드러진 수험생 고삼이지. 만 십팔세다, 씨*. 수능 준비만 하다 갑자기 목숨 줄이 남의 손에 쥐어졌으니 이러다 억울해서 뒈지겠네. 홧병 나서 뒤지거나. 라고 말하면 진짜 뒤질테고.
"열아홉."
대꾸 했으니 말 시키지 마셔. 아까 먹다만 거나 마저 먹을라니까. 내 목숨 지꺼라는데 독탄 음식일 리는 없겠지. 이미 조금 먹기도 했고 될대로 되라 그래. 게다가 남이 차려준 맛있는 음식을 남기는 건 예의가 아니걸랑. 이게 바로 주입식 교육으로 뇌에 박힌 유교 예절이다! 차는 안 먹을거지만.
"이슈타르? 긴데."
내가 사는 나라 대통령 이름 세글자를 당당히 불렀는데, 남의 나라 황제폐하를 떠받들까보냐. 이씨 성에 슈타르라고 생각하고, 슈라고 줄여버릴테다. 부르는 호칭 하나 맘대로 했다고 죽이기라도 하겠어? 황제폐하 씩이나 되면서 그렇게 쫌생이같이 굴겠어? 아바타스타나 해라, 슈비두비룹바 샬랄랄라. 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웃긴데.
"슈라고 불러도 돼요?"
말하고보니까 아까 급발진하던 애, 곧 고혈압으로 쓰러지겠는데. 여기 병원은 제대로 있나? 엥, 근데 잠깐.
열아홉이면 성년은 되었군. 어쩐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황제는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정체를 모르는 자가 황제의 여름 별궁에 몰래 침입했음에도 고문은 커녕 살려 주고, 친히 식사까지 내렸는데……. 뭐가 불만인 거지? 네 글자의 이름이 길다 하는 걸 보면 여자의 출신지에서는 두세 글자 정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듯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디저트와 같은 이름을 얻은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너무 달콤해 보이지 않나."
신선한 무례함에 파르르 떨던 시종이 황제의 명령에 테이블을 치우려던 차, 자신을 막는 말에 황제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식은 음식을 무슨 맛으로 먹는다는 거지.
"식성이 특이하군."
이어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덧붙였다.
"하엘이 거기 독을 타진 않았을텐데?"
# 슈의 아바타스타에서 좀 웃었어ㅋㅋㅋㅋ 혹시 너무 짧으면 말해줘ㅠㅠ 생각이 유아 아가씨처럼 다채롭게 흐르지가 않아서 자꾸 받은 것보다 짧게 돌려주게 되네ㅠㅠ 그리고 세계관은 나름대로 클리셰스럽고 평범하게(?) 만들어 보고 있는데 혹시 세계관 불편한 부분이나 원하는 부분 있으면 말해줘! 아니면 맘대로 막 끼워넣어줘!!
물론 내가 생각한 건 다른 이유지만. 저 황제폐하 뒤로 아바타스타가 보여서 저쪽 볼때마다 좀 웃기단 말이지. 아니, 나 낙엽 굴러가는 거 보고 웃는 나이라고. 이 정도면 웃을만하지 않나? 황제 비웃었다고 뒤지긴 싫은데, 쟤네는 아바타스타 모르니까 됐지. 웃는 걸 눈치보는 것도 좀 * 같잖아. 그래도 아예 소리까지 내며 웃기 전에 셀프로 입 막을게. 먹는 슈로. 먹을 거라도 맛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라, 진짜.
"식성 문제가 아니라, 굳이 시킬 필요가 없다구요."
"그쪽이 부리는 사람들도 다 남의 집 귀한 아들딸내미, 왕자님공주님이거든요."
아닌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음식 데워오라고 시켜먹는 건 좀 그렇잖아. 여기 전자렌지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 저 황제폐하는 전자렌지 있어도 다 시켜먹었을 듯. 아무튼 굳이? 란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고.
"그냥 편식인데요. 아. 하엘도 같이 먹을래요?"
계속 하엘, 하엘 거리는데 하엘 맞겠지 뭐. 지금도 나 때문에 좀 개빡친 애한테 이러면 약올리는 것 같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기 황제폐하도 나도 뭐 먹는데 쟤 입은 입 아니래. 콩 한쪽도 나눠 먹으랬다고. 차 말고 다른 것도 같이 먹으면 좋지. 안 먹는다고 다 남겨서 버리면 지구가 울고 북극곰이 울고 나무가 울고.
/ 웃음포인트 저격 성공! ٩( 'ω' )و / 길이랑 세계관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흔한 로판 세계관에 K고딩이 설치고 다니는걸 보고 싶어서 쓴 거라, 오히려 세계관 설정 붙여줘서 고마워! 신전이랑 신탁 엄청 궁금해!
그는 여자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대륙의 모든 것은 그를 위해 존재했다. 신이 약속한 영광의 가호가 제국의 태양인 그를 촘촘히 두르고 있었다. 그가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황제가 살아온 세상이었다. 음식이 식었다면 다시 내오는 것이 당연지사이지 않나. 식성 탓도 아니라면 왜 차가운 음식을 먹겠다는 거지. 덧붙여진 말은 그를 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내 사람의 생명이 귀한 것은 당연하나 이게 그의 일인 것을. 무능한 자는 귀하지 않다.
"이 대륙에 나보다 귀한 자는 없다."
시종이 어느새 빈 잔을 채웠다. 황제가 조금 느른해진 얼굴로 잔을 들어 올렸다.
"공주? 왕국 출신이었나?"
유아의 말 끝을 잡아챈 그가 되물었다. 한미하더라도 왕국 출신이라면 출신지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습관적으로 머릿속에 정보를 써내려 가며 그녀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편식이라, 차는 즐기지 않는 편인가. 그렇다기에 티푸드는 잘만 먹는데. 시종에게까지 음식을 권하는 모습에 그가 드디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눈치 빠른 시종은 지금까지 주인의 반응을 보고 여자를 대할 제 태도를 정한 차였다. 황제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하엘, 내일 이 여자도 함께 돌아갈 거다."
한 마디에 시종은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오늘 이 별장에서 여자가 머물 방을 청소하고, 갈아입을 의복과 마차를 준비할 것이다. 그 외에 필요한 부분도 알아서 챙기겠지. 그는 유능하니까. 응접실에 둘만 남게 되자 황제가 조금 더 느른해진 얼굴로 물었다.
"말은 탈 줄 아나?"
# 늦어서 미안해ㅠㅠ 나도 로판 세계관에 갑자기 뛰어든 고등학생! 이런 거 한 때 엄청 좋아했어서 이어봤는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신전과 신탁은... 보여주고 갈 수 있길~!
어우씨, 밥맛. 그넁 퍠햬럐걔 뱰럐. 이 댸롁얘 냬뱨댸 기햰 쟤는 업땨. 내가 친히 별명까지 지어줬구만. 고분고분 말 들을 줄 알았다면 정말 유감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신분 제도에 굴할쏘냐. 이번에 빵긋 웃은 건 고의야. 약 오르지? 그래도 구해줘서 이 정도로 그치는 줄 알아. 나름 생명의 은인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다고. 그쪽이 존* 왕재수 밥맛이라 그렇지. 저런 사람을 상사라고 모신다니 불쌍한 하엘. 갸륵하기도 해라, 쟤 잔 비었다고 다시 채우는 것 좀 봐. 엥. 저거 술 아녔냐? 와, 진짜 알콜중독자인가봐. 양주를 아주 그냥 물 마시듯이 해치워버리네. 저러다 취해서 술꼬장 부리는 거 아냐?
"왕국은 무슨. 대한민국이라고 알긴 하세요?"
약 올리냐? 왕국은 무슨. 그래도 좀 어릴 땐 엄마아빠가 우리 공주님이라고 불러주긴 했는데. 아씨, 엄마아빠 보고 싶잖아. 기껏 생각 안 하고 있었더니만. 보고 싶다고 울면 다 큰게 징그럽다고 할텐데 그 모습이라도 보고 싶냐. 씨*, 그래도 개같아서라도 안 운다. 적어도 저 황제폐하 눈 앞에서는 안 울 거라고. 존심 상해.
"아가씨요?"
어디서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을 배우셨대. 아까까지만 해도 저 죽일 기세 아니셨어요? 어우, 닭살 돋아. 아가씨가 뭐야. 방금까지 씹어서 삼킨 거 죄다 육안으로 확인할 거 같네. 위장 청소할 거 같아. 으으으.
"뭐? 어딜 가요? 아니, 하엘은 어디 가요!"
애완 인간 산책이라도 하러 가냐고. 돌아가? 여기가 어디길래 뭘 돌아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멋대로 착각하고 싶다, 진짜. 손짓 한 번에 사라지는 하엘 쫓아서 사라지고 싶다고! 저 황제폐하는 존* 갑이고 난 을이다 못해 걍 호랑이 앞에 쥐새끼구만, 둘만 남겨놓으면 어떻게 되겠냐고. 쥐새끼가 어떻게 되겠냐고! 아냐, 설마 변덕부려서 죽이기라도 하겠어?
"말 본 적도 없는데요."
"그거 말고도 할 줄 아는 거 아무것도 없고요."
대한민국 수험생한테 뭘 기대해? 조선왕조나 원소 주기율표는 읊어 줄 수 있겠다.
/ 괜찮아! 이어주러 와줘서 고맙지! (*´∇`*) / 유아 입 험한 거 불편하면 말해줘!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격을 생각해서 욕설이 계속 나올 것 같거든.
하늘엔 짙은 잿빛이 드리워 한 줌의 빛조차 들어오질 않으니, 살을 에는 추위가 맴돌아 그곳은 설국(雪國) 이었고 땅엔 억센 잡초 한 포기조차 자라질 않으니, 사신조차 이곳을 떠나 그곳은 사지(死地) 였기에 한때 휘황찬란한 문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던 제국은 비로소 망국(亡國) 이라 불리었다.
4대 재앙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레와 같은 천둥을 다루는 뇌신, 태양처럼 작열하는 불꽃을 다루는 화마, 모든걸 얼려버리는 설녀, 그리고 바다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해신. 한명 한명이 전부 이 세계를 멸망시킬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다. 이미 익숙한 이야기라면, 혹여 방탕아. 방랑자, 그리고 적귀(赤鬼) 라고 불리우는 여인에 관해 알고 있는가? 늘 술에 취한채로 거리를 거니우며 남색, 심지어는 여색에까지 손을 대는 방탕아. 한 번에 수십마리의 소를 먹어치우며 걸핏하면 싸움을 벌이는 망나니. 자신을 따르는 불한당들과 방랑단이라는 패거리를 만들어, 단 두 가지만을 엄격한 규율로써 정해두고 활개치는 여인이었다. 그 규율은 자유로이 살것, 그리고 방랑단원은 전부 가족으로 대할 것. 여기까지만 소문이 전해졌다면 그저 별 볼일 없는 부랑자였겠지만, 언젠가부터 퍼진 단 하나의 소문에 의해 그녀는 경외시되어왔다.
제국 안에서 파벌싸움을 하던 두 귀족이 마침내 전면전을 벌인 때였다. 맞닿은 국경에 수많은 기사들이 무장한채 돌격 신호만을 기다리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적귀가 한 어린 여자아이의 사체를 껴안고 나타났다. 그녀는 그 사체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둔 뒤에,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 주목. "
그 순간 그곳에 서있던 모든 이들이,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며 죽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 시선이 전부 집중되었고, 내뿜는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혼절하는 이들이 전체 병력의 반절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 내 가족이 죽었다. "
" 약초를 캐다 팔며, 언젠가 반드시 나처럼 자유로이 살것이라며. 정원이 딸린 집에서 멋진 왕자님과 결혼하여 두 세명쯤 아이를 낳을거라던 어린 여자애였다. 포션을 만들거라며, 국가에 헌납하라며. 그 어린 아이가 캐온 두어송이의 약초를 빼앗아가던 병사에게 제발 돌려달라며 애원하자, 그 병사는 욕심스레 아이의 생명까지 빼앗아갔지. 난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원인인가? 무엇이 이 작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근본적인 원인인가? 그리고 결론에 다다랐다. "
" 지금부터 제국 내부의 전쟁을 금하겠다. 그리고 너희 전원의 목숨을 앗아가겠다. "
평야는 술렁였다. 저 여자아이는 천민이었고, 그런 꼬마 한명의 목숨을 왜 신경써야 하는가? 천민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적귀에겐 가족이 없었으니, 피가 이어진 자매조차 아니었다.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객기의 여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매춤에서 새하얀 귀신의 가면을 꺼내어 썼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 적귀야행. "
그리고 그녀는 해를 베었다.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고, 그녀는 윗옷을 가볍게 벗었다. 몸에 수놓아진 귀신들, 흩날리는 꽃잎들, 파도치는 물결들. 그녀는 칼을 뽑아들어, 단 두번의 거합만으로 살기에 버틴 병력의 절반을 베었다. 그 뒤로는 무참한 학살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새하얀 가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비로소 적귀가 되었다. 이에 제국엔 또 하나의 소문이 돌았다. 적귀는 4대 재앙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졌노라고. 그렇게 그 날, 제국엔 다섯번째 재앙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패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다. 화마의 습격으로 제국은 멸망했다. 도처엔 살갗이 타는 냄새, 비명지르는 소리, 그리고 어딜 보든 시체뿐이었다. 적귀는 화마와 아흐레를 싸웠지만 오른팔을 잃었다.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게 다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허망스레도 화마는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남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과 소국을 잇는, 자랑이었던 거대한 항구는 원형을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파괴되었고 비옥한 토지는 저주받아 언데드들을 부활시키는 늪이 되었으며 살아있는 생명은 자신을 제외하곤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골칫덩어리였던 우글거리는 고블린도, 그걸 토벌하러 첫 모험을 떠나는 뜨내기 모험가들도. 누구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했다. 한때 왕성이었던 장소로 가, 사체조차 남지 않은 황제와 황비의 돌 뿐인 무덤을 만들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버려진 사생아였지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질긴 생명력은 그녀의 몸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삼년을 넘는 긴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은 서서히 그녀를 갉아먹을 뿐, 그녀가 편히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게 건강했던 몸은 초췌해져 금방이라도 부러질것처럼 말랐으며 화려했던 의복은 어느새 삭아 낡은 누더기가 되었다. 언제쯤에야 죽을 수 있을까. 그저 간절히, 죽음만을 소망하던 그녀는 비루해진 왼손을 허공에 뻗고, 삼년만에 무언가를 말했다.
" 나는 망국의 황녀, 유일한 생존자, 붉은 도깨비 ' 아르센 '. 내게 안식을 다오. "
끝까지 제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며 방긋거리는 모습에 황제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그는 제법 실리주의자였고, 호칭 따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제 이름을 다정한 애칭같이 부르기에 한 번 찔러본 것 뿐. 정치적 필요성이 있을 때에나 황족 모독죄니 뭐니 가져다 붙이는 거지. 그는 가장 높은 자였고, 이 여자가 그를 뭐라 부르든 그러한 그의 위치에는 변화가 없다. 그보다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자존심과 고집도 있는 편인가. 일개 평민이 가질만한 성질머리는 아닌데.
"처음 듣는 나라로군."
대한민국? 그럼데 왕국은 아니라고. 이 대륙의 나라를 전부 외우고 있는 그가 처음 듣는 나라라는 건 최소한 대륙을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즉시 조사를 지시하고……. 생각을 끊어내는 유아의 조잘거림에 황제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하엘이 사라지니 불안한가. 그러나 그 외에는 이 별장에 이런저런 지시를 내릴 만한 인물이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황궁으로."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애초에 비밀리에 나온 터라 오랜 시간 비울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정체를 확실히 밝혀 내지도 못한 여자를 두고 갈 수도 없고. 귀한 패가 될 수도 있으니. 거짓일 가능성도 있지만 승마를 할 줄 모른다면 쉽게 도망치진 못하겠군. 유아의 말에 황제가 그린듯한 미소를 지었다.
국사고 세계사고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강력한 삘링이 있지. 여기가 지구인지 부터 의심해야 될 거라는 삘링. 5대양 6대륙조차도 제대로 없을 거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존* 암울한데. 야, 눈 감아봐. 뭐가 보여? 새까만데. 그게 니 미래다. 그 말장난이랑 지금 내 꼬라지랑 다를게 뭐냐고. 배고프고 맛있는 것까지 현실적인 꿈일 가능성은 없나. 한 번 손톱까지 세워서 볼따구 꼬집어보면 이게 따끔해서 눈물이 나는건지, 내 인생이 한탄스러워서 눈물이 맺힐려는 건지. 그래도 뭐다? 쟤 앞에서는 절대 안 운다. 씨, 짜증나.
"…여기는 뭔데요?"
분명 여기도 개고급진데? 휘황찬란한데? 황제 쯤 되면 성이랑 자택으로 쓰는 저택이랑 따로 있나? 황제는 집이 성인 거 아냐? 한마디로 쟤 홈그라운드? 도망칠 가능성이 진짜 쭉쭉 낮아진다, 낮아져. 아주 지구 내핵까지 파고든다, 씨*. 황궁이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봐도 마차나 말 기준일텐데 내가 그걸 이해할 리도 없고, 버스 기준으로 설명해달라할 수도 없고. 한숨이 나오려는 걸 마른 세수 한 번으로 참아내는 나, 제법 대견해요.
"승마를 제가요?"
"고문 한 번 창의적으로 하시네요."
몸 쓰는 거랍시고는 일주일에 두세시간 있는 체육 시간이 끝이었는데, 말 타는 걸 배운다고? 내가? 말 타다가 떨어져서 목 부러져 죽는 엔딩이 지금 머릿속에 또렷히 그려졌는데. 아니, 아니지. 언젠가 저 손아귀에서 도망치려면 이 거지체력으로 달리는 것보단 말 타고 달리는게 훨 낫겠지. 애초에 내가 좋다하든 싫다하든 저 황제폐하는 지 맘대로 할 수 있는데 내 의견이 중요하겠냐.
"저 뭐, 기사같은 거로 쓰시게요? 나쁜 선택지 같은데."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이래봤자 생각나는 거라곤 기사 같은 거 뿐인지라. 조선시대에도 말 타고 다니는 건 장군님들이었으니까 비슷하겠지, 뭐.
/ 당연히 현생이 더 중요하지! 사과 안해도 괜찮아! 귀엽게 보고있다니 아량 넓은 참치...! (*´-`)
갑자기 제법 아프게 볼을 꼬집는 모습에 황제의 손이 뻗어 나가려다 멈췄다. 제 앞에서 자해 혹은 위험한 행동을 시도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눈이 촉촉해 진 정도인 걸 보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내 여름 별장."
수도에서 말로 세 시간은 내리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탁 트인 초원과 호수를 낀 별장은 아름다웠다. 황제는 사람과 일에 짜증이 솟구칠 때면 가끔 이 곳으로 말을 달려 오곤 했다.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건 아마 어린 시절 몇 년 간 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나룻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거나, 그냥 수영 자체를 즐기기도 좋을 만큼 맑은 호수였다. 별장 부지 한편에는 인위적으로 숲을 조성하고 동물을 풀어 사냥터를 만들어 가을이면 사냥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유아의 말에 황제가 한바탕 웃은 후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고양이 손을 빌릴 만큼 제국에 인재가 없진 않다."
기사라니. 제 몸 하나 못 지킬 것같이 생겨서는 누구를 지킨단 말인가. 그의 치세 이래, 제국의 기사단과 군대는 그 역사상 가장 강성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 자신부터가 타고난 무인이었고. 유아에게 승마는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달아날 수단은 적을 수록 좋을테니.
"그리고 네가 배울 건 승마가 아니라…,"
시종의 노크소리에 황제의 말이 끊겼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제가 창 밖을 힐긋 내다보았다.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황제가 몸을 일으키며 유아에게 일어나서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내일은 제대로 된 방에서 잘 수 있을거다."
# 고마워~ 나는 유아가 뺨을 실제로 꼬집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면 저 부분은 스루해 줘! 그리고 문 앞에서부터 유아의 목욕시중과.. 오늘 잠들 방까지는 별장에 상주하며 관리하던 하녀가 안내해 줄 계획인데 내가 상대하듯 써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혼자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은 부분일까? 난 둘 다 좋으니 이건 편한 대로 말해줘~ 앗 또 잠들기 전에 정원.. 같은 곳에서 우연히 한 번 더 만나는 상황 연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밤산책... 약간 로망이라서)
짐작가는게 있느냐고. 있지, 있고 말고. 뒤늦게 중2병이라도 온게 아닌가 싶은 짐작이. 아니면 수험 스트레스로 미쳤다거나. 볼따구가 아직도 따가운 걸 보면 꿈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저 둘 중 하나겠지. 하, 이걸 내 입으로 말하자니 뭔가 *같은데.
"제가 사는 곳이랑 여기랑 아예 다른 세상이란 거요."
완전 중2병 말기 발언이라고, 이거. 근데 그거 말고는 설명될 길이 없잖아. 여기 뭔데, 나 뭐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납치해서 가상세계에 가둬둔 거냐고. 어딘지도 모를 나라 황제폐하 손에 목숨 줄 쥐인 거랑 별 다를 건 없나? 마른 세수가 절로 나온다, 절로. 손바닥이 얼굴을 가렸다가 내려가는 그 사이에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이 바뀌면 좋을련만, 여전히 그 황제폐하 앞이고. 여기는 그래, 지 여름 별장이란다.
"겨울 별장도 있어요?"
할 대꾸가 영 없었거든. 내가 여름보다 겨울 파이기도 하고, 아니, 여기 겨울은 있긴 하지? 사계절은 있는거지? 평생 배우고 써먹은 상식이 안 통할 걸 생각하니 30년은 더 늙은 기분인데.
"사람 손이거든요."
손 하나를 쫙 펼쳐서 보여줬다. 고양이손이 비유적 표현이란 건 알지만, 그냥 짜증나게 하려고. 맘 같아서는 그대로 가운데 손가락만 남기고 다 접어버리고 싶지만. 엿날려도 무슨 뜻인지 모를 거 같은데 그냥 저질러버려? 지도 대한민국에 태어났어봐, 주구장창 공부만 하느라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랑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비례하다 못해 의자 쪽 시간이 더 길어질건데.
"승마말고 뭐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대잖아. 첫번째는 말을 하다는 마는 것이고…. 그대로 그냥 목욕하러 가기만 해봐라. 한국인들 성질머리가 얼마나 급한데, 궁금한 것도 빨리 안 알려주면 큰일난다. 큰일낼 방법부터 생각해봐야 하지만.
"저요?"
방금 분명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그쪽 부르지 않았어요? 근데 난 왜?
"남이 목욕하는 거 구경하는 취미는 없는데요."
/ 헷갈리게 서술해서 미안해, 유아가 진짜 꼬집은 것 맞아! / 목욕 시중이랑 방 안내는 나도 상관이 없는데 유아가 하녀랑 황제폐하 이야기를 하려할 것 같아. 그래서 이걸 보고 싶다면 상대해주듯이! 만약 나 혼자 처리하면 그냥 대충 뒷담(?) 좀 했다며 축약할 것 같아. / 밤산책도 좋아! 달 뜬 밤이면 황제폐하 머리카락이랑 눈이 반짝이셔서 이쁘겠다 (*´∇`*)
다른 세상이라니, 황제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세상이라고 가정한다면 의아하던 점들이 전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이자 전략가였다. 일 할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쉬이 무시하지 않는. 기억을 뒤적이자 언젠가 고서에서 본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두 개의 달과 관련된……. 그 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턱을 쓸며 짧게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그녀의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약하게 부어있는 볼에 시선이 갔다.
"없어."
겨울은 척박한 계절이다. 겨울 별장을 가진 귀족들은 많았으나 황실은 그래서는 안됐다. 황제가 별장 따위로 도망치는 건 영 책임감 없어 보이지 않나. 겨울은 평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곳간을 풀어야 하는 시기였다. 유아의 손짓을 보며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작고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건 고양이 손과 비슷한데 말이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하는 것에 그가 끊었던 말을 이었다.
"이 곳에서 사람구실 하려면 필요한 지식들 말이다."
유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 곳에 대해 열 살 아이보다 모르고 있을 테니. 좋은 나무를 주워서 패로 다듬어 쓰려면 공들여 깎고 색을 칠해야 한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확실한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황제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하엘과 회색머리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따라가."
황제가 유아에게 다시 한 번 손짓하고 하엘을 따라 사라졌다. 회색 머리의 하녀가 유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별장에 머무르시는 동안 아가씨를 모시게 된 로라입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는데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 역시 뒷담이라면 놓칠 수 없지요.. 함께하겠습니다ㅎㅎ 따라오는 레스 간단히 써주면 열심히 빙의해서 안내할게!
겨울은 있긴 있나보다. 빼앗긴 가방 속에 있는 교과서랑 문제집, 필기노트, 프린트물을 죄다 태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계산해도 내 인생 반절 이상이 거깄는데. 억울해서라도 21세기의 상식과 지식이 통하면 좋겠다고. 역사는 진짜 쥐약인데, 가방 돌려받으면 한 번 읽어봐야지. 시*, 내가 자진해서 공부하겠다고 책을 필 생각을 하다니. 부모님이랑 학교, 학원쌤들이 알면 뒤집어질텐데.
"사람구실…."
그래, 언젠가 도망치면 어쨌든 여기서 살아야할텐데 그건 알아둬야지. 승마는 안 가르쳐준다니 얄미워 죽겠지만, 몰라. 나중에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겠지. 왕재수밥맛탱이 손에 목숨 줄 쥐어준 채로 언제 뒤질지 모르는 랜덤 시한부 인생은 살기 싫거든. 여기서 사는 것도 이미 끔찍하다고. 아니,사실 아직도 실감 안 나. 꼬집은 볼이 아파도, 어디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 아니면 아예 테마파크 같은 여기에 뚝 떨어져있는데도 존* 실감 안 난다고.
"이제는 그냥 내가 개로 보이나."
딴 생각 좀 하고 있었더니 하엘이랑 같이 홀랑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여서, 기회다 싶었지. 뭐했냐고? 메롱이다, 새끼야. 여기도 혓바닥 내미는게 메롱으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뒷통수 한 대 치고 싶은 거 꾹 누르고 메롱 한 번으로 퉁쳤으니 다행인 줄 아셔. 원래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다 뒷담 까이는 거야. 목 날라갈까 뒤에서만 얌전히 궁시렁거리는게 얼마나 착해.
"아가씨 말고 유아!"
진짜 존* 기쁘다, 하…. 아까 먹었던 음식들이 맛있어서 기뻤던 것보다 훨씬. 진짜 사람을 만난 기분이라고, 나. 로라 언니인지, 로라 친구인지, 로라 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황제폐하에 비하면 로라는 평생 쫓아다닐 자신있다고. 이제 처음 봤지만 아무튼 그래.
"저 사람 보다가 로라…보니까 살 것 같아요. 응, 잘 쫓아갈게요!"
화색이 돈다는 말이, 숨통이 트인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진짜. 지금 문학 조지면 열이면 열 문제, 백이면 백 문제 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여기 와서 이렇게 편하게 웃을 수 있다니.
/ 황제폐하랑 로라를 대하는 온도차가 확실하게 느껴지길 바라며 (*´-`) /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유아 픽크루 만든 거 올려도 될까? 황제폐하가 유아를 묘사하는 걸 보고 생각난 이미지가 있어서 만들어봤거든!
구식 리볼버가 당신의 피부에 맞닿는 감촉이 서늘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 때문일까? 허술하게 지어진 외벽 틈새로 스미는 겨울 바람 때문일까? 어젯밤 까지만 하더라도 당신을 따스히 바라보던 노을빛 눈동자가 아직 마음 속에 선명하기 때문일까? 전부 지난 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차가운 총구가 당신의 이마를 한 번, 입술을 한 번,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짓누른다. 그에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여자의 눈초리는 여전히 나른히 반쯤 내려앉아, 당신의 모든 것을 궤뚫으려는 듯 날카로울 뿐이다. 여자가 목덜미 즈음에서 뭉텅 잘린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쯧, 혀를 찼다. 당신을 애잔히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경고했잖아요. 아마—, 바다를 좋아하는 릴리아가, 였나. "
여자가 잠시 눈을 굴렸다. 허공을 잠시 흘기던 눈동자가 곧장 당신에게로 꽂혀든다. 릴리아. 그것은 한 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또 다른 그녀였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항상 방긋이며 미소를 머금던, 꿈을 품고 작은 섬마을에서 상경한 앳된 여인. 그것이 그녀의 릴리아였다.
그녀는 한 때 릴리아였고, 한 때 로즈였으며, 한 때는 엘레나, 또 한 때는 폴라였다. 아마 이보다 더 많은 삶을 품었으리라. 곱슬 머리의, 아름다운 금발의, 입가의 점이 마력적인, 꽃을 사랑하던, 독특한 억양의 사투리를 쓰던. 모두가 그녀였고 모두가 그녀가 아니었다.
" 내 진짜 이름도 모르는 주제에. 설마... 기밀 서류를 뒤져 찾아낸, 요원 기록에 남겨져있던 그 이름을 내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한건가요? "
내 생각보다도 어리석은걸.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턱을 괴어냈다. 여전히 총구는 당신의 목덜미에 처박은 채로. 여자가 리볼버를 매만지자 그 움직임이 여실히 당신의 얄팍한 피부 위로 전해진다. 그 소름 돋고, 불쾌한 감촉이.
" 그게 진짜 이름일 리 없잖아요. 기억도 나질 않네. 헤일리 톰푸스였나. 아무튼. "
있잖아요. 여자가 성큼 제 상체를 기울여 당신에게 다가섰다. 양무릎을 땅에 딛은 채,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눈높이를 맞춘 모양새였다. 남은 한 손은 여전히 리볼버를 쥐고서.
" 진심이었나요? 나를 사랑한다던 그 말 말이에요. 정말로 나를 사랑했나요? 근본도 뭣도 모를 인간들로 가득 차있던 그 곳에서, 나를 사랑했나요? "
여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목소리도, 눈빛도, 모두 건조할 뿐이다. 마치 거짓을 심문하는 냉철한 수사관처럼. 그저 질문을 던질 뿐이다. 당신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가?
# 수어 사이드 스쿼드... 같은 기밀 특수요원 기관 같은 곳에 소속된 두 사람의 이야기 라고 생각해주면 될 거 같아! 물론 여자에게는 좀 비밀이 많아보이지만 ㅎㅎ... 편하게 이어줘!
로라가 부드럽게 웃었다. 듣던 대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하엘에게 미리 설명을 들어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예법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였지. 폐하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하다 경을 치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아가씨가 묵을 방까지 준비하라 하신 것을 보면 폐하께서 묵인하시는 것일 터였다. 응접실은 별장 2층에 있었고, 욕실은 4층이었다. 해가 거의 저물어 어두워지자 별장 곳곳에 마법으로 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로라 역시 마법으로 된 등을 들고 유아를 욕실로 안내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손님용 욕실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곳곳이 금으로 장식되어 호화로웠다. 커다란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고, 좋은 냄새가 났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황제폐하 웃을 때는 생각도 안 나더니 지금은 잘만 생각나네. 아가씨라는 호칭은 어떻게 못하겠지. 그냥 친구하고 싶은데.
"방금 얘기한 건 슈 폐하한테 비밀이에요."
"앞으로 얘기할 것도."
뒷담 오지게 깔 거거든. 로라한테까지 불똥 튀면 그건 안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둘 만의 비밀로 쉿. 로라를 따라 층을 두 번 오르는 동안 든 생각은, 내가 중2병 말기거나 수험 스트레스로 미쳤다고한들 이런 상상은 못할 거란 거였다. 창 밖에 지던 노을조차 사라지고 아예 어두워지니 켜지는 불 같은 거. 여기가 디즈니랜드도 아니고 말이 돼? 그러고보니 로라가 들고 있는 것도, 저거 전기도 아닐테고. 뭐야, 마법? 진짜로? 이건 또 뭔데. 욕실 맞아? 이거 맞냐? 나 무슨 어디 대통령 딸이냐? 완전 귀빈 대접받는 거 같은데?
"어, 고마운데… 로라 앞에서 씻어요?"
엄마랑도 목욕탕 안 간지 좀 된 거 같은데? 부끄럽지 않을까? 이거 맞냐? 진짜 맞냐? 로라한테 어떻게 줘요? 벗어두면 가져간단 뜻이겠지? 팔은 왜 걷었을까? 로라가 옷 젖을 일이 있나요? 없을 거 같은데? 없는데? 왜 사극 드라마에서 궁녀들이 높으신 마마님들 옷 벗겨주고 씻겨주고 다 하는게 생각나지? 아니지?
그녀의 주인은 황제였고, 주인에게 비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웠기에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간 이 정도 나잇대의 여성이 별장에 머무르고 간 적이 없어 로라도 조금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릴게요."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을 보니 목욕 시중은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피부와 머릿결, 건강 상태를 보면 귀한 댁 아가씨인 것 같으나 예법과 이런 태도를 보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주인은 곁에 있기만 해도 위압감에 다른 이들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멋대로 괴롭히는 폭군이 아님에도 그 분위기 자체가 사람을 찍어 눌렀다. 그런 그와 긴 시간을 보내고, 저런 말을 하는 것 치고 유아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셨어요. 욕조에 몸 담그시면 머리부터 감겨 드릴게요."
로라가 장미 비누와 향유, 아래층에는 수건이 놓인 트레이를 가까이 끌고왔다.
# 상상했던 뚱한 표정 그대로라 귀여워ㅋㅋㅋ 앞머리도 예쁘고... 이제 유아 얼굴 상상하며 글 쓸 수 있어서 더 즐겁네~ 고마워!
초면에 말을 놓고 아랫사람 대하듯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황제폐하는 잘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못한다고. 특히 아랫사람 대하듯이 구는 거! 절대! 그러다 나중에 사회 나가면 꼰대새끼 지*한다고 욕 처먹기 십상이지.
"그, 혼자 할 수 있는데. 그 꼰, 슈 폐하가 시켰어요?"
설마 목욕까지 시켜주라고 시킨 거야? 진짜로? 아니, 나도 씻고 싶지. 씻고 싶어! 개찝찝하니까 뽀득뽀득 개운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은데, 근데 아무리 그래도 진짜 방금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는 누가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느냐고! 이래봬도 부끄럼탈 줄 알거든? 수줍음 많은 소녀인 척 할 수 있거든?
"아니, '그러셨어요'가 아니에요! 제 목숨이 자기 거라나 뭐라나. 인륜과 도덕을 개무시해버렸다구요."
그것보다 욕조에 몸 담그기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냐고. 옷 벗고 홀랑 들어가면 되는데, 머리도 혼자 감을 줄 아는데. 갓난 애기, 개, 애완 인간. 셋 중 어느 거냐, 나.
새파란 리볼버 총열이 턱수염을 긁고 내려가는데도, 남자는 친근한 사람에게 농담따먹기하듯 넉살좋은 어조였다. 허공에 넘실넘실 춤을 추는 먼지 사이로, 새벽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는 여전히 여자를 흔들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총부리 앞에서도 지난날과 별로 달라보일 게 없는 태평하고 느긋한 눈빛이다.
안락의자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꼰 채로, 그는 가슴팍에 리볼버가 겨누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손에 들려 있던 커피잔을 태연히 들어서는 한 모금 마셨다. "난방은 개판인데 커피는 좀 봐줄 만하네. 당신도 한 모금 어때." 쟁반에 놓인 부드러운 김이 올라오는 두 번째 커피잔을 눈짓해보이며, 그는 처연하리만치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참 상냥한 사람이라니까. 괜찮아. 후회는 하지 않아."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는, 남자는 손을 들어 장난스레 이름을 손에 꼽기 시작했다. "그래- 릴리아였고, 엘레나였고, 로즈였고, 폴라였고... 그리고 몇 개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술집의 허세등등한 허풍선이가 자기 애인들의 이름을 줄줄대이는 것마냥 남자의 입에서 느긋하게 일련의 이름이 차곡차곡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기에 그는 허풍을 떠는 것처럼 거만하지도 않았고 바람을 자백하는 것처럼 겁에 질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을 걸었던 사람에 대한 분명한 애정만이 묻어 있었다. 그는 덧붙였다.
"맞아, 헤일리. 그랬었지. 단서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 이름이면 더 좋고."
남자는 눈을 감았다. 이 위험한 목적지를 위해 자신이 내려놓아야 했던 것들과 잃었던 것들을 떠올려 본다. 경찰 선서. 조직에 첩자로 투입될 때의 비밀 유지 서약. 청춘을 다 바쳐 장악한 조직. 막대한 돈으로 개척한 루트. 돈으로 치를 수 없는 대가로 엮은 인맥. 그림자와 빛의 경계에 올려진 자신의 삶. 선 위에서 계속 균형을 유지하며 줄타기를 하고 있는 동안 자신에게 약속되었던 풍요와 권력. 정말이지, 일반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터무니없는 바가지 여행경비다. 그렇지만 남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꽤 합리적인 비용이었다.
"물론이야."
자기의 삶을 수십 번씩 포기하며 살아온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내 삶을 한 번쯤 더 포기하는 게 대수겠는가. 그래도 정말이지, 이 말 한 마디를 하겠다고 참 더럽게도 오래 걸렸다.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지. 그리고 사랑할 거야."
남자는 눈을 떴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보는 여자와 눈을 마주한 채로, 자기 바지주머니를 툭툭 쳐 보였다. 담배 케이스가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꽤 멀리 돌아오긴 했는데... 어쨌건 말할 기회는 줘서 고맙네. 괜찮다면 담배 한 대 꺼내줄 수 있을까? 섣불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간 가슴이 좀 아플 것 같아서 말야."
# 배경은 낡은 여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괜찮을까? ++ # 수어사이드 스쿼드라길래 수스쿼스럽게 튀면서도 진짜 수스쿼 등장인물들이랑은 안 겹치는 캐릭터를 찾다 보니 느와르풍 아자씨가 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스루해줘.
" 당신의 그 태평한 면을 좋아했었죠. 당신과 있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았거든. "
커피잔을 기울이는 당신을 보며 여자가 총구를 잘그락 댔다.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 마음은 없는 것일까? 글쎄, 그녀의 얼굴 만으로는 그 생걱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난 됐어요. 여자가 짤막히 대답했다. 풍겨오는 커피 내음은 좋았으나 구태여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닌 모양이다.
" —난 원래 친절하지 않아요. "
제법 많은 걸 담고 있는 한 마디다. 당신에게까지 닿았으련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하랴. 오늘 밤이 지나면 말 한 마디에 담긴 의미 따위야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 꽁초 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리라. 짓밟혀 바닥에 눌러붙은 그것보다도 못한 존재.
" 단서로 쓸 만한 가치도 없는 이름이었어요. "
여자가 차분히 흘러지나가는 제 이름을 듣고서 대답했다. 목소리가 차갑다. 원래 그녀의 목소리가 이리도 차가웠던가? 당신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그녀는 참 많은 삶을 살아왔고, 참 타고난 변장가였다. 목소리 쯤이야. 어쩌면 어제까지 당신의 이름을 담아내던, 그 상냥한 햇살 같은 목소리도 하루아침이면 사라질 물거품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여자가 차분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금발 위로 흔들리는 먼지들이, 날선 분위기와 다르게 나풀이며 왈츠를 춘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음에도. 당신의 나직한 고백에 벌써 겨울이 지고 봄이 오른 줄 알았던걸까. 여자는 말 없이 다시 상체를 숙여 당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당신과 여자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깝다. 잽싸게 움직인다면 아주 손쉽게 여자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만을 향하던 그 시선 마저 옆으로 기울어 당신의 주머니를 바라본다. 그녀는 방심했다. —오, 인질 앞에서 그리 무방비한 태도를 취하다니. 우리는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의 스승이라면 혀를 차며 그리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그녀의 리볼버를 빼앗고 가시가 삐죽이는 여관 바닥에 그녀를 내려쳐버릴까? 아니, 아마. 그러지 않을테지.
그녀는 말 없이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손으로 케이스를 밀어 열었다. 그리고는 제일 앞에 꽂혀있는 담배 한 대를 손가락으로 밀고는 익숙히 그것을 물어 꺼내는 것이다. 한 손에 총을 쥔 채로 제법 여러 번 담배를 물어봤나보군.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 라이터는 당신이 꺼내요. "
여자가 말했다. 담배를 문 탓에 발음이 약간 웅얼거린다. 그녀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지만.
"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고, 사랑할 것이라. "
여자가 다시 한 번 웅얼였다.
" 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인간을, 무척이나 싫어해요. 잘 알잖아요. "
오, 당신이 책임감 없는 인간이란 이야기는 아닐테다. 아마도. 그녀는, 미래형의 그 문장에 조금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여자가 담배를 왼 손에 끼워 입에서 떼어냈다. 그녀의 입술이 한 번 달싹인다. 잠시 무언가를 내뱉으려다 그것을 정돈하려 서둘러 붙잡아낸 것이다.
" 함부로 당신의 미래에 날 가두지 말아요. …불확실한 미래에, 내 발목을 묶어두지 말란 이야기예요. "
아, 그녀는 사랑에 약한 사람이었나보다.
# 응응! 처음에는 낡은 폐공장... 같은 걸 생각했는데 여관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아냐아냐 마음에 들어! 매력적인 느와르 아저씨! 이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