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살결에 맞닿는 미지근한 온도와 뭉글거리는 습도가 자근거렸다. 무채색의 채도 낮은 회색 풍경과 투명 우산, 검은 옷의 생기 잃은 사람들. 검은 도로, 회색의 콘크리트.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소녀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 딱히 성냥팔이 나부랭이 따위여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옆에는 찢어져버리고 만 회빛의 우산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는 것은 빨강, 노랑, 파란줄이 그여져 있는 잿빛 셔터 앞 작은 현관의 좁은 가림막이었다.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은 닿지 않는 어깨에 물을 뚝뚝 떨구며 적시고 있었고 헝클이는 버릇이라도 있는지 젖은 채 부스스하게 떠 있는 정수리는 소녀의 빈틈 같았다. 소녀, 소녀라. 그래, 소녀는 맞지 않는 흰 셔츠에 풀려버린 리본 끈, 헐렁한 검은 니트 조끼와 무릎이 보이는 주름진 잿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검은 니삭스 위 흰 무릎에는 갓 만들어진 듯한 붉은 방울이 맺힌 쓰라린 상처가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뭘 봐요."
당신이 거기까지 관찰했을 때 소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방울거리는 빗소리를 타고 일렁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당신은 소녀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다.
후, 소녀의 긴 숨이 희게 퍼져나갔다. 소녀의 가느다란 흰 손과 상반된 검은색의 연초였다. 소녀는 힘없이 나른하게 뜬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았다. 빗소리가 추적거렸다, 바람이 소녀의 치마를 흔들고 당신의 심장 소리는 점점 귓가를 가득 채운다. 재를 튕겨내는 소녀의 손짓이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