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공포영화에 조져지는게 취미라시더니, 공포영화 그 자체가 되셨잖아. (의심, 불신, 신용불량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저 정도로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면 생활공간은 극히 좁을텐데, 좀비 사태가 시작되고 2주 동안 어떻게 버티셨던거지? 몰아치는 불안한 상상이 점점 꼬리를 물고 그 몸집을 불려간다. 당신이 웃음에도 전혀 안심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고민했다.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거나, 좀비들을 내려다보거나, 주변을 살피거나. 그리고 한 번 심호흡을 한다. 스케치북에 글씨를 적으며, 당신을 바라보는 표정에 드물게 쓴웃음이 떠올라있다.) '못참겠어요. 저 진짜 꼴초라서, 그쪽 집에 담배가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그 글씨를 보여주자마자 방 안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 뒤로 한참을 창문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풀려가는 봄날씨에 맞지 않는 뚠뚠한 패딩과 노란색 안전모, 양 손엔 작은 사이즈의 철망치를 든 채다.) 내가 미쳤지, 진짜... (열심히 무장한 데 비해 기가 팍 죽어버린 표정이지만, 결심이 선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267 아, 안 통하나...? (당신의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웃는다. 다시 한번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이번엔 닿기 전에 멈춘다. 그러다 스케치북의 글자를 보고,) 아, 안되는데. 미쳤나봐! 여길 어떻게 온다는 거야.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양 팔로 X자를 만든다. 불안한 눈빛이 오갈데 모르고 방황한다. 결국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가 사라지자, 창틀을 붙잡고 상체를 창 밖으로 쭉 뻗는다. 잠시 뒤, 당신이 보이기 시작하자.) 안돼요! 담배 없어요! 오지 마세요! (목청껏 소리지르며 부산하게 양 팔로 X자를 만들길 반복한다.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좀비 떼들이 창문 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며 으르렁거린다.) 아 진짜, 안되는데. 안 되는데...!! (당신과 방 안쪽을 다급히 번갈아 본다. 그러다 고개가 오른쪽을 향했던 순간, 윽, 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양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린다. 다시 핏방울이 튄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 밤이 되면 정신 나간 것들이 몰려드는 구역질 나는 골목. 그 골목을 빛내는 건 어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남자의 배를 쑤신 손을 몇 번 움직이자 벽에 밀어붙인 채 팔목으로 틀어막고 있던 입이 왈칵 피를 토해냈다. 씨발, 더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쓰러진 시체를 대충 발로 걷어찼다. 이 꼴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비라도 시원하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매캐하고 컴컴하지만 곧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습한 공기가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폐부를 찔렀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림자처럼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그 기억이 벌써 스물거리며 뒷덜미를 감싸왔다. 그러던 중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조용히 몸을 숨기지 않은 것은 변덕이었다. 어쩌면 이상한 예감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아주 오랜 과거로 느껴지는 한 때의 기억이 향수처럼 몸을 단단히 휘감고 올라왔다. 네가 왜 이런 곳에?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고민과 달리 발은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그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까이로 다가와 소매를 붙잡았다. 당황으로 얼어붙은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꼴과 이 상황에 대한 후회를 느꼈지만 짐짓 침착한 얼굴을 하고 소매를 잡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아니, 괜찮아. 오랜만이네.”
이딴 멍청한 말이라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얼굴을 스쳐 화려한 피어싱에 시선을 두었다. 많이 변했구나. 그래도 여전히 너는.
// 이쪽은 남자로 설정했어! 소꿉친구는 '그'라고 썼지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ㅎㅎ 내가 대사를 너무 짧게 친 것 같은데 혹시 잇기 힘들면 말해주라!!
>>268 (진짜 무서워. 미쳤나봐.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믿겨지질 않는다. 마치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는데, 안전바를 올리는 것 같은 느낌. 온 몸의 신경과 감각이 붕 뜨는 느낌이다. 당신이 뭐라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애매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을 질끈 감아 지워버리려 애쓴다. 이렇게나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을 못 본 체 무시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아~진짜, 이런 좋은 곳을 두고 왜 나갈라 하냐. 진짜 배가 불렀지. (제 양 볼을 찰싹찰싹 때린다. 어제보다는 약하게, 정신을 차리려는 듯. 그리고 당신의 얼굴에 다시 핏방울이 튀는 걸 보고는 망치를 든 오른손을 휙 들어, 들고있던 망치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정확히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차를 향해. 망치에 보넷을 직격으로 맞은 차의 알림음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후, 후, 후우. (심호흡. 마지막으로 당신 쪽을 바라본다. 새파래진 얼굴로 겨우 히죽 웃으며 마스크를 올려쓴다.) 꼭, 담배가 있으면 좋겠네... (안쪽팔리게.)
>>269 오랜만이라는 그 말 한마디가 지독히도 현실성을 떨어뜨렸다. 그 세월이, 케케묵은 감정이, 그 모든 것들이 있는데, 네가 한 말은 고작 그 짧은 말이었다.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단박에 들었다. 지금 손에 집히는 감각이 단지 꿈일 리는 없었다. 많이 변한 네가 낯설었다. 그럼에도 너라는 것 그 하나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흐르고 있는 물기가 단지 빗방울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너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절의 나는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학업 성적이라는 것만 빼고, 공통점 하나 없어보이는 나와 네가 어울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릴 적의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중에 타투를 하고 싶다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랐던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시절의 나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아이였지만 더이상은 아니었다. 네가 변한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변했다. 이런 모습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멍청하게 술에 취해 클럽에서 밤을 버티게해줄 상대를 찾아 떠도는 나를, 네가. 뒤늦게 겁이 났다. 차라리 네가 나를 그 전의 아릅답고 반짝이던 모습으로 기억해줬으면 했다. 이런 음침한 모습이 아니라. 조금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에 숨었다. 마침 날이 어두웠다. 이 정도로 가려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금, 안심했다.
"잘...지냈어?"
멍청한 질문이었다. 당장 너가 뒤집어쓴 비릿한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너를 향해 손을 조금 뻗었다가, 머뭇거리다, 거두었다. 너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잡을 수 있을까.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아니라고 해도 난, 난 아닐 거라고 생각, 했는데..."
말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오랫동안 너를 찾아 헤맸다. 찾을 수 없었다. 흔적만이라도 붙잡고 싶어 떠돌아다녔다. 네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 시체만이라도, 그 무덤가라도 찾고 싶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전혀 잇기 힘들지 않았어☺ 일단 이쪽은 여자로 상정하고 쓰고 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270 (교차한 팔이 천천히 내려가고, 핏방울이 튄 얼굴이 당신을 향한다. 새하얗게 창백한 얼굴.) 안돼! 오지 마시라니ㄲ... (당신이 내던진 망치가 자동차 보닛에 떨어진다. 자동차의 알림음에 좀비들이 그쪽으로 모여들고, 여자의 얼굴은 울 것 같이 변한다.) 설마, 설마 진짜 올 생각은 아니시겠지? 무기도 없이 여길 어떻게 오겠다고. 그래,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하는데... (마스크를 올려 쓰는 당신을 본다. 불안한 눈빛) 왜 진짜, 나오려 하시는 것만 같지. (울상인 채로 다시 한번 고개를 젓고 양팔로 X자를 만들길 반복한다.) 진짜, 진짜 오지 마세요! 아! 미쳤어, 미쳤어 진짜! 정채문 씨, 진짜 미친 사람인가 봐! (얼굴을 문지른 적도 없건만 조금 전 튀었던 붉은 액체가 온통 번져 턱을 타고 흐른다.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질끈 문다. 여자의 모습이 방 안쪽,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272 (그럴까요? 가지 말까요? 아, 다행이다. 진짜 무서워서 죽어도 가고싶지 않거든요. 마음 속의 환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당신이 열심히 X자를 치는 것을 지켜보며 내적 눈물을 1리터는 흘렸을 것이다. 당신이 방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왼손에 들고있던 철망치를 오른손에 들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다녀오자. 현관문을 슬쩍 열어 틈새로 바깥을 지켜본다. 다행히도 집 앞에 죽치고 있던 도로의 좀비들은 차 쪽으로 옮겨간 모양이다. 알람음이 끝나기 전에 문을 활짝 연 찰나.) 힉─! (활짝 연 문에 뭔가가 파직, 하고 소리가 났다. 문에 박힌 좀비가 휘청거리는 걸 보고는 새파래진 얼굴로 망치를 휘적휘적 휘둘렀다. 망치에 얻어맞은 좀비의 피가 옷과 얼굴에 튀겨오고, 손에 전해져오는 끔찍한 감각에 속이 울렁거려왔다. 진한 썩는 시체 냄새에 마스크를 고쳐쓰고, 당신 집쪽을 향해 전력질주.) 실례하겠습니다...! (영락없는 도둑 꼴이다. 노크하는건 무리니, 현관문을 슬쩍 열어 안으로 들어선다.)
>>273 (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상하게도,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작은 공간. 좀비는커녕, 고양이 한 마리 없는 집마냥 흐트러진 구석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부엌의 찬장에는 참치캔이 쌓여있고, 조리대 위에는 껍질이 새까맣게 변한 아보카도도 하나 놓여있다. 인테리어 앱에 나오는 전형적인 집들처럼 잘 꾸며진 집이다. 삼각대와 줄자 따위가 굴러다닌다는 것과, 2주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난다. 소음을 따라가 보면, 피 묻은 티모셴코 재료역학이 펼쳐져 있고, 부서진 가벽과 그 앞을 막은 가구들, 그리고 그것을 칭칭 감은 덕테이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 두셋쯤 갈아낸 듯한 양의 피와 살점이 흩뿌려져 있다.) ...! (가벽 너머의 어두운 공간에서 계속해서 소음이 들린다.)
>>274 (후욱. 후욱. 마스크 아래서 피어난 뜨듯한 숨이 눈을 간지럽힌다. 망치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참치캔의 위치를 대강 눈으로 익혀두고, 눈 앞에 있는 문들을 열 때는 팔만 쭉 뻗어서 슬며시 열고 금방이라도 망치를 내려칠 준비를 한다. 기척은 끊임없이 느껴진다.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긴장한 나머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진짜 같은 과가 맞았네. 눈에 띄는 여러 요소들 덕에 마치 자신의 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저 너머에 있겠지. 유혈이 낭자해있는 공간이 어지간히도 비현실적이다. 역한 피냄새에 구토감을 억누르며, 조심조심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 가벽 쪽으로 다가가려던 찰나─발치에 삼각대가 치였다. 우당탕.) 아. (요란한 소음이 집 안에 울려퍼지고,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내 곧 땀으로 진득해진 망치를 꾹 쥐고 소음이 나는 곳으로 달려든다.) ─!! (좀비면 후려치고, 당신이라면 제동을 걸 수 있도록 단 하나의 브레이크만 걸어둔 채.)
>>275 (소음이 나는 곳을 향해 달려들자, 당신을 향해 피 묻은 야구방망이가 휘둘러진다.) 으아아...!!!...아아...??! (당혹한 표정의 여자가 가벽 너머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급히 휘두르던 야구방망이를 멈추려 비틀거린다. 여자의 뒤쪽으로, 방금 전 보인 집과 비슷한 구조의 집이 보인다. 이제 보니 집 하나를 가벽으로 막아 둘로 개조한 듯하다. 몇 발짝 앞에 창문이 보인다. 여자가 서 있던 곳이 저기였던 모양. 창문 바로 아래에 이불이 깔려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꼼짝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저, 정채문 씨?!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
뻔하디 뻔한 막장 스토리였다. 드라마에 나오면 누구나 혀를 차며 채널을 돌릴 정도로. 아버지에게 질려 어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도박에 미쳐 사채까지 땡겨 가며 노름판을 전전하던 아버지. 아버지는 목을 맸고 그는 그날로 집을 나왔다. 남아 있다간 장기가 전부 털릴 판이었으니까. 돈도 부모도 없는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다 우연히 조직 보스의 눈에 든 건 과연 행운이었을까. 차라리 그대로 죽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아직도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런 그를 지금껏 막은 것은 몇 안되는 즐거운 기억들이었다. 항상 자신의 옆에 있어주던 작고 반짝이는 여자애가 만들어준. 바로 네가.
비가 온다. 이런 물방울로 저지른 죄악이 씻겨 내려갈 리는 없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죄 대신 피가 씻겨 내려갔다. 그가 그녀를 봤다. 얇고, 붙고, 짧고 비치는 옷. 이 날씨에 저렇게 입고 춥지는 않을까. 눈이 마주치자 뒤로 조금 물러서는 모습에 그는 쓰게 웃었다. 두렵겠지. 그러면서도 옛 친구를 향해 손을 뻗는 네 따스함은 변하지 않았구나. 잘 지냈냐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둬지는 손이 아쉬웠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만나서는 안되는 거였다. 반짝이는 너에게 어떻게 내가 진흙을 묻혀.
우는 그녀를 보니 마음 한 곳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 줘야 하나. 그 망설임이 이제는 달라진 너와 나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같아 마음이 시렸다. 예전에는 내 멋대로 너와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분리된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날. 가끔씩 욕심내어 상상하곤 했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진창으로 처박으며 그는 조금 울었다.
"난 죽은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이게 맞았다. 네가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잊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놈으로 나를 기억하다 서서히 지워가길. 빗방울이 점점 거세어졌다.
// 혹시 몰라 첨언하자면 자기를 보고 물러섰다고 오해한 거야! 뭔가 두 자존감 바닥들의 삽질 대결 같네 ㅎㅎ 근데 나 이제 출근을 위해 자러 가야할 것 같아 ㅠㅠ 내일 점심쯤 짬 나면 이어 올게~잘 자~
>>276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코 앞까지 닿을락한 배트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리고 서서히 그 뒷쪽의 당황한 당신의 얼굴로 옮겨가고,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진짜로...환상 같은게 아니었어. 뇌의 장난 같은게 아니었고.) 왜 하필 같은 과셔서. (당신의 집을 둘러보며 진짜 빼도박도 못하고 내가 이상해진 줄 알았다고, 왜 저런 방에서 생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셨냐고,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했지...아.) ...담배 있어요? (새파래진 안색에 검은 곱슬 머리카락에 처진 눈썹, 그리고 간신히 내뱉은 진이 쭉 빠진 목소리. 당신의 외침과 대비된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참, 맑으시네요. 울리미가 있어. (대학교 정문에 항상 거주하던 사이비 흉내를 내면서.)
#늦어서 미안 ㅜㅜ! 이걸 막레로 써도 괜찮아!! 같이 돌리면서 재밌었어 크압 ~ ~ ~ 오랫만의 좀비물이라 가슴 설렜달지...예승씨 깜찍발랄해서 행복했달지... #늦어버린 겸 픽크루도 가져왔어으앙>>276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코 앞까지 닿을락한 배트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리고 서서히 그 뒷쪽의 당황한 당신의 얼굴로 옮겨가고,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진짜로...환상 같은게 아니었어. 뇌의 장난 같은게 아니었고.) 왜 하필 같은 과셔서. (당신의 집을 둘러보며 진짜 빼도박도 못하고 내가 이상해진 줄 알았다고, 왜 저런 방에서 생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셨냐고,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했지...아.) ...담배 있어요? (새파래진 안색에 검은 곱슬 머리카락에 처진 눈썹, 그리고 간신히 내뱉은 진이 쭉 빠진 목소리. 당신의 외침과 대비된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참, 맑으시네요. 울리미가 있어. (대학교 정문에 항상 거주하던 사이비 흉내를 내면서.)
#늦어서 미안 ㅜㅜ! 이걸 막레로 써도 괜찮아!! 같이 돌리면서 재밌었어 크압 ~ ~ ~ 오랫만의 좀비물이라 가슴 설렜달지...예승씨 깜찍발랄해서 행복했달지... #늦어버린 겸 픽크루도 가져왔어으앙 ㅜㅜㅜ Picrewの「라봄 픽크루」でつくったよ! https://picrew.me/share?cd=7zDYIoDUtA #Picrew #라봄_픽크루
>>256 정리하지 말라는데 또 굳이굳이 그걸 하고 있다. 더 말려봤자 안 들어줄 것 같아서 그냥 뒀다. 나야 같이 해주면 빠르니까 좋지. 내가 손해인가, 자기가 손해지. 괜히 혼자 속으로 씩씩대봤다.
"사람 일이 맨날 계획대로 맘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 난 확실히 장담은 못해."
무책임하다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괜히 기대를 품게 했다가 실망시키는 게 더 무서우니까. 오늘 같은 일은 기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차라리 내가 먼저 차단하는 게 나을까. 아예 너한테 연락할 방도를 완전히 끊어버리게. 근데 굳이 또 차단을 풀고 전화해버리면? …너한테 휴대폰 번호를 바꾸라 하는 건 너무 양심없는 말이겠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차단할 거라면서 이유가 중요해?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정리된 이불을 붙박이장에 넣으며 말했다. 시선은 일부러 피했다. 네가 쓴 이불, 베개 모든 걸 다 넣고 문까지 닫은 뒤에도.
"……보고 싶었다는 말이라도 하길 바라?"
말하면서 표정이 찌푸려진다. 좀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엔 이 말을 꺼내게 만드는 네가 죽도록 미웠다.
>>283 "장담 해야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 할거야? 그리고 또 다시 이 난리를 치자고?"
그리고 또 넌 장담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난 또 멍청하게 전화를 받을테고.
"내가 너한테 뭔 말을 듣고싶다는게 아니잖아."
어쩌면 보고 싶었다는말을 듣고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하면 어느정도 자존심이 채워질지도 모르고 이 곳에 온 보상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넌 그 말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자존심싸움은 이젠 너무 질렸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기쁜 마음은 들지 않을테니.
"아직도 모르겠어? 넌 날 불렀고 난 널 찾아갔어. 내가 널 찾아 간 이유쯤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충분히 알거 아니냐고. 진짜 찌질하다, 우리."
너가 장담 못 하는 만큼 나도 장담 하지 못해. 하지만 그 소리가 마치 목에 돌이라도 달은 것 처럼 나오지가 않아.
>>284 삶에도 사용설명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수해서 다시 되돌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어디에 있을 설명서를 찾아 페이지를 뒤적거려 해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건 있을 리가 없고.
"……."
없어서 난 고장이 났다. 네 말에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지만 감히 뱉을 수는 없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을 애써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너와 눈이 마주친다. 네 말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굳이굳이 꼽자면 상상력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
"…넌 자신 있어?"
중요한 말은 쏙 빼놓고 비겁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연히 다시 만날 수야 있겠지만 잘 해낼 수 있을까? 또 똑같은 이유로 다투고 질리고 서로에게 상처만 내고 끝이 나면. 나는 온갖 게 다 무서운데 너는 하나도 안 무서워?
>>281 (당신의 코앞에 배트를 멈춘 채 경악한 표정으로 굳어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완전한 경직. 수 초 뒤, 한참 만에 나온 당신의 말에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뱉고, 한 박자 늦게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방긋 웃으며 천천히 야구 배트를 내린다.) 같은 과라서 미안해요! 그런데 누가 세상 망하면 건축이랑 토목이 제일 유망할 거랬거든요, 박살난 인프라 재건하는 덴 그게 투탑이라고. 왠지 곧 세상 망할 것 같아서, 내가 그래서 토목과 갔는데! (야구 배트로 이미 반쯤 무너진 가벽의 언저리를 쳐 마저 무너뜨린다. 가벽 앞을 가로막은 가구들도 밀어 치운다. 옆으로 밀려나는 가구들 틈새에서 조각난 좀비의 잔해들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상태로 보아 오래된 것도 있지만 방금 처리된 듯 생생한 것도 섞여 있다.) 그런데 하필 세상이 망해도 좀비 때문에 망해버리네요. 우리 할 일없게.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쁘네요! 하하! (실없는 웃음소리. 계속해서 가구와 좀비의 잔해들을 옆으로 밀어낸다. 가로막던 것들이 하나둘 밀려난다. 그러다 담배 이야기에 문득 당신을 돌아보며,) 와, 진짜 담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진짜로? (동그래진 눈이 당신을 보다가) 담배 때문에 목숨까지 거시고. 정채문 씨 진짜 완전 못 말리는 골초셨네! (엄지로 자신의 어깨 너머 뒤쪽을 가리킨다.) 저어기 보니까 이 집 아저씨가 몇 보루 사 두시긴 했던데... (눈꼬리에 장난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끊으신다더니. 멋있다고 한 거 취소할래요! (꺄르륵 하는 웃음.) 울리미, 큽. 그거 정문 사이비죠? 그 사람들 아직도 있어요? 그거 나 학부때도... 합. (급히 입을 막더니, 눈만 데굴 굴려 당신을 본다.) 아니, 1학년 때도! 저 1학년 때도 있었는데! (아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문득 옆에 있던 후레시를 들어 당신에게 쏘고, 저 안쪽으로 후다닥 달려 도망갔다!)
예상했던 표정이지만 조금은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자신 안에 이런 마음이 남아 있었다니 놀랍기도 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 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 왔다. 닿기도 전에 내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손가락을 엮을 때까지 놔둔 것은 어째서일까.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룻밤만이라도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애처로운 눈빛에, 끝내 터지는 울음에 그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맞닿은 손 끝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따라 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컴컴한 건물들이 나왔다. 그가 임시로 묵고 있는 싸구려 모텔 달방이었다.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간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낡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새 수건을 건내며 말했다.
"일단 씻어. 옷은 문 앞에 둘테니 갈아입고."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을 찾기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뒤졌다. 검은색 긴팔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골라내어 욕실 문 앞에 두었다. 그녀에게는 클테지만 젖은 옷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윗옷을 벗어 대충 구석에 밀어 두고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추위에 떨었으니 따뜻한 물이라도 먹여야겠지.
// 늦어서 미안해ㅠㅠ 갑자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네ㅠㅠ 너참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래!
수수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살결에 맞닿는 미지근한 온도와 뭉글거리는 습도가 자근거렸다. 무채색의 채도 낮은 회색 풍경과 투명 우산, 검은 옷의 생기 잃은 사람들. 검은 도로, 회색의 콘크리트.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소녀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 딱히 성냥팔이 나부랭이 따위여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옆에는 찢어져버리고 만 회빛의 우산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는 것은 빨강, 노랑, 파란줄이 그여져 있는 잿빛 셔터 앞 작은 현관의 좁은 가림막이었다.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은 닿지 않는 어깨에 물을 뚝뚝 떨구며 적시고 있었고 헝클이는 버릇이라도 있는지 젖은 채 부스스하게 떠 있는 정수리는 소녀의 빈틈 같았다. 소녀, 소녀라. 그래, 소녀는 맞지 않는 흰 셔츠에 풀려버린 리본 끈, 헐렁한 검은 니트 조끼와 무릎이 보이는 주름진 잿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검은 니삭스 위 흰 무릎에는 갓 만들어진 듯한 붉은 방울이 맺힌 쓰라린 상처가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뭘 봐요."
당신이 거기까지 관찰했을 때 소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방울거리는 빗소리를 타고 일렁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당신은 소녀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다.
후, 소녀의 긴 숨이 희게 퍼져나갔다. 소녀의 가느다란 흰 손과 상반된 검은색의 연초였다. 소녀는 힘없이 나른하게 뜬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았다. 빗소리가 추적거렸다, 바람이 소녀의 치마를 흔들고 당신의 심장 소리는 점점 귓가를 가득 채운다. 재를 튕겨내는 소녀의 손짓이 익숙하다.
달빛도 무너져 까맣게 이지러진 밤에 지상에서 흙을 태우며 새빨간 불길이 일어났다. 기세등등하게 타오르며 기와집을 집어삼키고 탐욕스럽게 거대한 목조 건축물을 태운 것을 양분 삼아 시커먼 하늘로 뻗어갔다. 괴괴한 암흑이 내려앉아 산짐승의 윤곽도 보이지 않는, 구름과 안개가 스산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눈이 시리게 하얀 머리채가 허공을 갈랐다.
"나으리, 어딜 가시옵니까."
교태로운 음성이 우지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는 두꺼운 나무기둥 사이로 들려온다. 풀어헤친 새하얀 머리가 길게 늘어져 불꽃과 같이 너울너울 나부끼고 붉은 눈초리가 샐쭉 휘어졌다. 티끌 하나 없는 단정한 소복 아래로 붉은 물이든 신이 사뿐히 검은 잿가루 위에 내려앉는다.
사박사박 소리가 나고 잿가루가 옅게 흩날린다. 창백한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나긋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주는 청아한 분위기가 검붉은 빛이 흐르는 눈동자에 덮어지고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어우러져 외려 요사스럽다.
“종묘와 사직을 위해 저를 외면하시고 그분을 보필한 결과가 이 불타오르는 집이란 말이옵니까. 아, 참으로 인세의 모든 것이 부질없어라! 소녀, 마지막까지 귀공을 따르려 하옵니다. 한낱 미물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이미 없고 간 당신의 흔적마저 없애려 하는 무도한 자들의 명을 끊는 비루한 앙갚음일지니.”
깔깔깔 높은 웃음소리가 퍼지고 나뭇가지 새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새들이 짧은 울음을 토하며 푸드덕, 자리를 피한다. 웃음 끝에 붉은 눈을 번뜩이는 여인이 달짝지근한 미소를 짓는다. 양갓집 규수같이 수줍은 양 입술을 슬쩍 매만지며 입매무새를 가리는 손끝에 어린 붉은 자욱이 점점이 번지고 떨어진다.
“그리하여 소녀 앞에 서 계신 선비님께선 제 은인의 마지막까지 모함하러 온 간자들 중 하나입니까? 나으리, 어딜 가시옵니까. 해명하시기 전엔 보내드리지 않겠사옵니다.”
>>286 잃을 게 왜 없지? 나한테는 아직 자존심이라는 게…… 자존심……. 그치, 그건 전화한 시점에 이미 사라져버린 거겠지. 그럼 나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다시 잃을 게 생기는 게 무서워서? 내 실수로 아주 잃어버릴까 봐?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 양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래봤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 같지만. 만져보지 않았는데도 벌써 따끈따끈하다. 나라고 너와 다르지 않았다. 지독하게 싸우고 또 싸우고 질리지도 않나 싶을 만큼 싸워대곤 했지만 네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아니지. 네가 있는 게 좋았다.
"지금 당장 Yes or No야? 여기서 No라고 하면 완전히 끝인 거고?"
다만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말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기억에는 없지만) 그 빌어먹을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고 만들어낸 기회인데도 망설여졌다. 이 기회로 다시 만난 너를 똑같은 방법으로 잃을까 봐. …아, 나 네가 없는 게 무서운 거구나. 이번엔 열이 눈가로 몰렸다. 우는 건 죽어도 싫어서 침만 꼴딱꼴딱 삼키며 숨을 골랐다.
"……나도 네가 있던 때가 좋았어. 전화도 보고 싶어서 했겠지."
손이 눈가로 향했다. 아직 축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대비하는 차원의 행동이다.
"근데 무섭다고, 난. 여기서 다시 시작했다가 또 헤어질까 봐. 그땐 이런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289 공기가 습해서 더 마스크 안 쪽이 답답하고, 운 나쁘게 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발도 축축하고. 이래저래 재수없는 비 오는 날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학교도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한 지금 이런 구린 날씨에 밖에 나온 건, 장보기 심부름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야근이시고, 겸사 군것질도 할 수 있으니 나오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다. 턱스크 하고 떠들면서 다니는 작자와 부딛칠 뻔하는 바람에 웅덩이를 밟아서 발이 젖은 것도 엿같은데, 이젠 마스크조차 안 쓰고 길빵을 하는 몰상식한 애까지 마주쳤다. 아니, 이 시국에 담배를 피고 싶나? 그것도 사람 오가는 길거리에서? 저런 것들 때문에 코로나가 안 끝나는 거 아냐, 우리 어머니는 비대면으로 일할 수도 없으시니까 답답하게 마스크 쓰고 일하시고.
짜증나서 한번 노려봐주고 갈 길 가려는데, 눈이 마주쳐버렸다. 뭘 보냔다. 우와, 아직 2단계인데 길빵하면서 비말 뿜고 있는 주제에 뻔뻔해라. 짜증만 나고 말려는데, 코로나 연장의 주범이면서 시비까지 털어오니 머리에 열이 확 오르면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좀은 긴장이 되었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주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이 시국에 마스크도 안 쓰고 길빵이나 하면서 비말 내뿜고 싶으세요?"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충분히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화가 나서 달려들 수도 있으니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가까이 오진 마시고요. 무증상 감염자일 수도 있는 사람하고 가까이 있고 싶지 않거든요."
여차하면 좀 빙빙 돌아서 집에 가야지. 마스크나 제대로 쓰고 있을 것이지 적반하장으로 시비나 털다니, 어이가 없어서.
(느리게 움직이던 전동 휠체어가 천천히 멈춰섰다. 수없이 많은 묘비들이 줄서있는 공동묘지 속,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인 여자는 품에 안고있는 꽃다발에서 꽃을 한 송이씩 꺼내어 묘비 앞에 놓기 시작했다.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모습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놓아주던 여자는 마침내 꽃을 마지막 비석에까지 놓아주고 나서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당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로봇들한테도 이렇게 묘비를 세워주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이.
// 대충 인간들은 거의 없고 기계와 로봇들이 가득한 세상. 얼마 남지 않은 같은 인간이나 안드로이드로 이어줘도 좋아! 다만 적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으면 해.
(휠체어를 따르는 발걸음은 사람의 것과 비슷했으나 좀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것이었다. 몸통과 한 쌍의 다리와 한 쌍의 팔과 머리라는 구성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그 세부 구조는 인간과 확연히 다른 이 유닛은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든 특수목적용 유닛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구성으로 만들어진 범용 중대형 워커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자여,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이 개체가 이 행위에 대해 내리는 정의라고 한다면, 이 개체는 이 곳을 하드웨어의 기능수명이 다한 개체, 혹은 인증기간이 만료되어 파기된 소프트웨어를 보관하는 처리장(disposal plant)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추모"라는 행위는 필수적이지 않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군말없이 따르고, 당신이 명령하지 않아도 드론을 보내 이젠 얼마 남지도 않은 꽃집에서 꽃을 사오는 것은 이 유닛이다.)
(당신의 대답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늘 한결같았다. 그것이 당신과 여자의 차이점이었다. 당신은 안드로이드였고 여자는 인간이었으니까. 여자는 생각에 잠겨 당신을 올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나를 그렇게 거창하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여자는 파괴되고 파손되어가는 버려진 유닛들을 수리하여 다시 눈을 뜨게 해준 것 뿐이니.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게 좋다면 그걸로 됐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맞아. "추모"는 필수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한때는 살아있었던 아이들이니까. 삶의 일부를 누군가와 함께 보냈었으니까. 그 시간을 기리고 생각해주는거야. 비록 기계라고는 해도 죽은 후에 아무도 떠올려주지 않으면 너무 쓸쓸하잖아. (여자는 손을 뻗어 비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을 보다가 다시 당신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꽃을 구해다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곳이 한결 화사해진 것 같지 않아? (로버트, 하고 마음대로 붙인 당신의 이름을 언제나처럼 부르며 여자는 웃었다.)
// 괜찮아! 저 모습은 저 모습대로 매력있고 좋은걸.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서 마음대로 붙였다고 설정했는데 혹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게 있다면 당근을 흔들어 알려줘!
>>296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를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원하는 바가 그러하다면, 그것은 그것만으로 '필수적인 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분석: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은 소통이라 판단, 해당 사항에 대한 분석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갖고 설계되고 생산되며 프로그래밍되고, 하드웨어적으로나 소프트웨어적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목표를 수행합니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작동할 수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동연한 종료 이후의 일이나, 지나간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는 최적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의 행동을 우리는 전적으로 납득하고 지원합니다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충분히 인공신경망이 발달한다면 우리를 지으신 이께서 해당 사항에 부여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 개체의 인공신경망이 그 정도까지 자율발달하려면 단순 연산으로 약 54년 7개월이 소요될 전망입니다. 해당 기간에 도달할 때까지 이 개체가 정상적 작동을 유지할 확률은 대략 0.02퍼센트입니다.
(당신이 꽃잎을 바라보다 웃자, 빈 꽃바구니를 든 유닛의 뉴로옵틱 노드가 깜빡인다.)
지속적인 수요를 학습한 결과일 뿐입니다. 별도의 추가 지시나 거부가 없다면 해당 구매활동은 지속적으로 수행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지시하실 사항이 있습니까?
(여자는 당신의 기계 목소리가 들려주는 건조한 분석결과들을 가만히 전해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상황에 맞지 않게도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0퍼센트가 아니라는 게 신기하네. 그래도 만약 그 0.02퍼센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치? (차츰 웃음소리를 줄인 여자는 미소지은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로버트. 나는 네가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면서도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네가 원하는대로 해. 자율발달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당신이 자율발달을 무사히 완성한다 하더라도 여자는 그 정도의 시간까지 자신이 살아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혼자 남아버리게 될 당신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슬퍼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만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먼 훗날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적어도 당신만큼은 전혀 상처 받지 않을테니. 그러니 여자는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생각에 잠겨 꽃을 보던 여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부탁이 하나 있어. 다음번엔 내가 직접 꽃을 구해오고 싶어. 도와줄래, 로버트? (전동 휠체어에 타고 있는 상태이면서도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꽃바구니를 든 당신을 보고 장난스레 웃음을 보였다.)
// 괜찮아! 인간과 다른 사고방식을 생각하는 건 어려우니까... 나는 모순점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으니 편하게 써줘도 다이죠부다! 다시 쓰느라 고생했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았으면 하거든. 단 "0.02퍼센트"라도. (양손으로 두 손가락을 까닥여 강조한 여자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인간은 때로는 그런 무모한 판단을 내리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만약 자신도 안드로이드였다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지금 이것 역시 올바른 판단이기를 바라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여자는 앞으로도 당신에게 그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여자는 당신에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기회와 권리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의 기계 목소리를 듣고도 이렇게 대답했다.) 로버트, 네가 원하는 날짜로. 나야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언제든지 가능하거든. (거동이 불편하니 행동 반경에도 제약이 있어 여자는 집이나 근처의 공동묘지 외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 여자는 미소만 지으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288 입을 꾹 다문 채 너를 따라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하고 싶은 말을 차고넘치도록 많았지만 그 사이에서 올바른 말을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무슨 말을 정확히 전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조차 알기 어려웠다. 내가 모든 것을 잃고 헤매던 당시 내 목표이자 목적은 전부 너였다. 너였다. 너 하나였다.
이제 너를 찾은 이상, 그리고 너의 입으로 너의 죽음을 들은 지금...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더이상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작은 모텔 속의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을 맞았다. 수증기가 아스라히 피어올랐다. 너, 나, 그리고 우리에 관한 샛길로 빠질 뻔도 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샤워를 끝마쳤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훑었다. 속옷도 젖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서야 들었다. 드라이기로 말려야 하나? 아니면...잠시 고민하며 당신의 준 티려츠를 입었다. 키 차이 때문인지 거의 짧은 원피스처럼 된 옷을 보며 기함을 토했다. 아주 어릴적만 해도 내가 더 키가 컸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키가 커버린 건지. 소매를 몇번 접고, 조금 더 고민하다가, 그제서야 화장실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어, 그...미안한데 혹시 속옷 남는 거 하나만 있어? 조금 작은 거면 더 좋고..."
남의 집에 와 옷가지를 빌린다는 것 자체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므로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애초에 너를 붙잡은 순간부터 그런걸 신경쓰지 않기로 한 것이기도 했고. 그래도 귓바퀴가 조금, 붉어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괜찮아! 나도 잇는 텀이 들쑥날쑥할 거라서...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오늘은 여유로운 휴일을 보냈어?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침 전쟁. 당신에게서 들려온 소리에 덜덜거리는 여자의 손이 다리와 무릎을 덮은 담요를 힘주어 쥐었다. 고개를 떨군 여자는 떨리기 시작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응. 종결되었지. 종결되었어. 이곳은 멀리 떨어져있는 외곽 지역이고... (그러나 여자에게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생생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웃음으로 동요를 숨기고 당신을 보았다.) 그래도 미래는 아무도 모르거든. 최대한 비슷하게 예측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100%라는 건 없어. 알지?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해. 알겠지, 로버트? 나를 내버려두고서라도 말이야. (거동이 불편한 자신까지 챙기면 분명 큰 제약이 걸릴테니. 다시 한번 강조한 여자는 고민하다 미소지으며 당신에게 제안했다.) 그럼 지금 갈래? OO 산의 산책로로. 날씨도 좋은데 겸사겸사 나랑 대화하며 놀자, 로버트. (당신이 온전히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로만. 앞으로 조금씩 더 연습하다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자는 곁에 있는 수많은 묘비들을 돌아보았다.)
늘 적막하던 방에 누군가가 씻는 소리가 들리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찬장을 대충 뒤적여 녹차 티백을 꺼내 컵에 넣고 끓는 물을 부었다. 담요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불이라도 덮고 있으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수증기와 모텔의 싸구려 샴푸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오는 대신 얼굴을 빼꼼히 내민 그녀가 한 말에 그가 드물게 당황해 붉어진 얼굴을 했다.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하나 사올게. 일단 나와 있어."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 젖은 머리카락 위에 모자를 눌러 썼다. 얼굴을 여기저기 보여 다녀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입구의 검은 우산을 꺼내 든 그가 모텔 밖으로 나섰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속옷을 빠르게 손에 쥔 그가 잠깐 멈칫하더니 숙취해소제도 계산대에 놓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가 검은 비닐봉투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붉어진 귀 끄트머리를 감추고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 씻을게. 그동안 갈아입든 해."
// 이해해줘서 고마워~! 답레는 천천히 줘! 난 잘 쉬었어ㅎㅎ 벌써 주말이 끝났네ㅠㅠ 너참치도 좋은 주말 보냈니?
안녕하심까~ 배달 왔습니다. 어, 그러니까...샐러맨더 아보카도 피자 시키셨죠? (검은 코딩이 되어있는 바이크 헬멧을 쓰고 있는 라이더 뒷편엔 배달앱 공식 마크가 붙어있다. 또한 자동소총과 권총 역시 등에 맨 채. 크리쳐들에게 점령되어 붕괴된 지 얼마 되지않은 서울에서 정말로 배달앱이 작동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지만, 저 배달원은 당신의 집문을 두드리고 있다.)
(여자는 고개를 젓는 당신을 침묵하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까. 이곳은 수많은 기계와 로봇들의 무덤이며, 여자는 파손되어 죽어가는 그 마지막 모습들을 지켜봐왔다는 걸. 당신마저 그렇게 되어버릴까봐 여자는 두려웠다. 그러나 여자는 말 대신 팔을 뻗어 당신과 대비되는 작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당신의 손 부위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 불안하게 만들어버렸네. 응, 나는 여기 있으니까. (안드로이드에게 불안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광경은 이상해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조금이라도 불안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장난스레 웃었다.) 맞아, 우리 로버트는 완전 강하고 멋있지! 그래서 나는 안심이야. (그래도 당신은 안드로이드. 그러니 서로의 수명의 차이로 인해서라도 언젠가는 분명 여자가 없어도 살아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도 자신이 이끌어주지 않아도 잘하겠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조금 물러나 당신이 불러온 차가 앞에 멈춰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가온 당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조수석으로 부탁해, 로버트. (오랜만의 나들이에 당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기대감 어린 미소로 물들었다.)
우거진 숲 속 동굴 안, 불이 켜진 양초들이 원 모양을 그리며 늘어서 있다. 원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당신을 불러낸 소년이 단정하게 앉아있다. 당신의 기척을 느낀 소년은 입술을 달싹인다.
"멀리서 와 줘서 고마워."
당신은 소년과 산골에서 도시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소년은 당신의 마지막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다. 어두운 계열의 붉은빛 전통복, 아마빛 머리카락에 금안까지. 당신이 소년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더라? 당신은 십 대일 수도, 이십 대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 소년은 당신이 햇수를 세는 동안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양초에 불씨를 옮겨 붙인다.
"앞으로 한 시간 남았어. 끝까지 함께 있어줄래?"
소년은 눈을 조금도 깜빡이지 않는다. 소년을 둘러싼 촛불들과 소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고 있다.
>>306 속옷을 입지 않은 채로 바지를 입어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 손에는 당신의 바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네가 준 티셔츠를 최대한 밑으로 끌어내린 채로 나왔다. 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나가버리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 하나만큼은 너를 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알던 너의 모습. 네가 보면 곤란해할까 싶어 차라리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며 침대 위로 작은 동그라미들을 만들었다. 몸이 따스해지자 자연스레 정신이 몽롱해졌다. 깊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러다 네가 돌아왔다.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가 날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자 불쑥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걷고 네게로 걸어갔다. 어차피 티셔츠로 가려져 크게 거리낄 것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네게로 두 손을 뻗었다. 네 고개를 나에게로 틀려 했다.
"나 보기 싫어?"
그래서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았다. 일부러 피하지 못할 짓궃은 질문을 던졌다. 부러 표정을 살짝 굳히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머리를 정리하듯 매만져주려 했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해.....😢 평일이 되니까 갑자기 바빠지더라고. 잘 쉬었다니 다행이네! 나도 좋은 주말 보냈어. 그러다 월요일이 되니까 정말 정신이...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너참치는 좋은 평일 보내고 있어? 그랬으면 좋겠는데.
위태로운 삶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가 밟고 있는 지면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외줄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의 유일한 적장자는 안타깝게도 천성이 유했다. 황좌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황태자라는 지위가 그를 만들었다. 강해지도록.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일찍이 어미를 여의었다. 아비라는 자는 살면서 여지껏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준 역사가 없었다. 발을 내딛는 곳마다 적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몰라 입에 음식 한 조각 넣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밤마다 누군가 칼을 들고 몰래 숨어들어오지 않을까 불언감에 시달렸다. 그 안에서 그는 제왕학을 배웠고, 외교술을 배웠으며, 황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 왔다. 아무도 그에게 성군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감히 폭군으로 변모할 만한 용기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나라를 팔아넘긴 암군만 아니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성년이 되었고, 황제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을 때즈음, 그가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를 알 것이라고 믿어."
후원을 밝히는 것은 오로지 희미한 달빛뿐이었다. 호위도 전부 물린 상황이었다. 그는 호위를 줄줄이 매달고 다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발에 채일 만큼 많았고, 호위가 적다는 것은 곧 그만큼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랜 친우가 함께하는 한,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안전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네. 입단속을 한다 해도 완벽할 수는 없겠지. 이미 소문이 퍼지고 있어."
친아비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믿기지 않으리만큼 초연하고 또 처연했다. 한때 강철의 군주라고 불리었던 황제는 병마의 앞에서 맥없으리만치 허무하게 무너졌다. 혹은 그저, 황제 또한 나이가 든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위기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황제가 틈을 보이자 들개 떼는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뜨거운 감자는 역시, 차기 황제에 대한 것이었다. 왕관은 하나뿐이었으나, 갈구하는 사람은 한없이 많았던 탓이다.
"그대는 여태껏 내 곁을 지켜 주었지."
세상을 준대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친우. 그가 안정을 얻는 곳은 오로지 친우의 곁뿐이었다. 무한한 신뢰를 내주어도 배반하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내주어도 후회하지 않을, 그에게 유일한 존재. 이제껏 그가 친우에게 입은 은혜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친우에게 진 빚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았다.
"나는, 황제가 될 것이야."
짐짓 의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손이 떨렸다. 그는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파들거리는 손끝을 감추었다. 실상,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교육은 그의 겉모습을 황좌에 걸맞게 바꾸어 놓았으나, 내면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떠넘기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지금까지 저를 믿어 온 사람들을 배신하는 격이었다. 그 선두에는, 친우가 서 있겠지. 아, 천금보다 귀한 나의 친우여.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가 필요해."
사실은 달리 말하고 싶었다. 황태자라는 이름에 붙잡혀 십수 년 동안이나 제 곁에 묶여 있었으니, 이제라도 자유를 찾으라 하고 싶었다. 이대로 그가 황제가 된다면 친우는 영영 황궁을 떠나지 못할 터였다. 감히 그럴 만한 염치가 제게는 없었다.
"부디 내게, 힘을 빌려 주지 않겠나."
하지만 의지를 벗어난 세 치 혀는 멋대로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힘주어 들고는 애써 친우와 눈을 맞추었다. 최대한 의연한 표정을 짓고, 손톱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을 소매로 감추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황태자여야만 했다. 친우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산을 문가에 던져둔 그가 모자를 벗어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겉옷은 대충 의자에 걸쳐두고 젖어있는 상의를 벗었다. 근육질의 상체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빼곡했다. 아까 전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가 일어서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몸을 돌렸다. 얼굴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리는 행동에도 그는 묵묵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여전히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밀조밀한 얼굴과 손발, 화장을 지워내면 말간 아이 같아지는 이목구비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그에 비하면 예전에 비해서는 살이 붙었으나 이곳저곳 흉이 지고 거칠어진 얼굴. 두 눈은 늘 음습한 살기로 들끓었다. 사람을 죽인 날엔 더. 그는 거울 보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이정도로 가느다란 손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 되었다.
"네가 나를 보는 게 싫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모습으로 기억되었으면 했는데. 좋은 친구, 어쩌면 그 이상이었던 그때의 모습으로. 이제는 쓰레기같은 범죄자, 혹은 그 이하가 되어버렸지. 너는 그걸 보았고.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그가 시선을 피하며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물 끓여뒀으니 마셔. 씻는다."
그가 욕실로 들어갔다.
// 미안해 하지마~! 나도 느린걸! 정신없이 이틀 보내니 벌써 수요일 밤이네. 바쁜만큼 시간은 잘 가는것 같아. 오늘은 좀 덜 바쁜 하루였을까? 조금만 더 힘내면 주말이야~ 힘내자!
>>313 손목이 잡혔다. 조금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에 눈을 크게 떴다. 새삼스레 너와 내 손의 크기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우리는 자랐구나. 더이상 어릴적에 머물러있을 순 없겠네 싶었다. 그 사실이 유달리 서글펐다.
너를 보는 게 싫어? 왜? 네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신 너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대신 고개를 돌려 내 손목에 맞닿아있는 손에 가벼이 입을 맞춰주려 했다. 눈꺼풀 뒤로 동정을 숨겼고 부드러운 입맞춤 속에 애정을 밀어넣었다.
"적어도 난 아니야."
난 기어코 너를 만난 것이 기뻤다. 그것이 너에게는 괴로움일지라도 그러했다. 지금의 네가 어떤 사람인지와 관계없이 단지 네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안심했다. 어쩌면 네게는 미안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고.
"...응, 다녀와."
네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나는 네가 사준 옷을 입고 네가 준 바지를 입었다. 밑단이 끌리는 탓에 몇번이나 접어야 했다. 네가 끓여준 물을 잔에 따라 한참을 쥐고 있었다. 그러다 증기가 사라질 즈음에서야 입을 대었다. 하릴없이 작은 방을 방황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다리를 끌어 모았다. 유난히 추웠다. 비에 맞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오늘은 뒹굴던 온기가 없을 것임을 알아서인지도 모르겠고.
#내일이면 주말!!! 왜 시간이 모래시계처럼 이렇게 사라지는지 모르겠어. 너참치 말마따나 바빠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번주 잘 보냈어?
>>312 친위대장님으로부터 퇴직이 승인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수습 대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 저스틴에게도 부탁도 해두었으니, 이제 황태자 전하께만 알리면 끝난다. 착잡함이 섞인 한숨이 무심코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정이 많이 들었던 친위대 동기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시던 황태자의 상황이 가장 위급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도 염려스러웠다. 그럼에도 영지에서 홀로 투병 중인 부인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목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바로 그의 부인이었다. 그러니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한 순간, 시종이 황태자의 호출을 알렸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군. 그는 곧 옷매무새를 다듬고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달빛만이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고, 자주 얼굴을 보았던 호위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라이언은 후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황태자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조용히 들리는 말에, 그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함께 커오다시피 했던, 자신을 친우라 여겨주었고, 자신 역시 항상 곁을 지켰던 황태자가, 황위를 잇기 위하여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러나 그는 그 기대에 응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곧 궁을 떠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라이언은 고개를 조아리고 입을 열었다.
"친위대원으로서, 전하께 이렇게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지에서, 제 부인이 병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곁을 지키러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장님을 통해 황제 폐하께도 사직에 대한 승인을 받았고, 제 친우인 저스틴이 저를 대신하여 전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넌 나를 만난게 기쁘다고? 네가 알던 나는 이미 죽었음에도. 그가 쥐고있던 그녀의 손목으로 대신 입술을 받아냈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야. 난 이제 더이상 네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마. 그런 모습 보고싶지 않아.
그가 멍하게 샤워기 물을 맞았다. 몸이 언제 이렇게 차갑게 식어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기계적으로 몸을 구석구석 씻어내 혈흔을 지웠다. 혹시라도 역겨운 피냄새가 날까 샴푸는 두 번이나 했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 습한 몸에 옷을 걸쳐 입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 지낼 때는 욕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팔 티셔츠에 그녀에게 준 것과 똑같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강 털어내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가 방을 한 번 훑어보고 의자에 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의 입술이 파랬다. 따뜻한 물은 다 마신 것 같은데.
"아직 추워?"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시고 비를 맞아 그런가. 감기 걸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방 난방 온도를 확인한 그가 침대 이불을 끌어 그녀를 거의 뒤덮듯이 감싸주었다.
// 안녕~ 어제 못와서 미안해! 벌써 일요일 낮이네~ 주말은 더 빠르게 가는 것 같아... 난 새로운 주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ㅠㅠ 너참치도 일요일 잘 보내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