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소장. 도미닉 에버즌. 당신들이 따르는 이 용병단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소장이 아르고를 들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냥 가끔씩 중요한 일이 있을때, 아니면 내킬때나 몇 번 들르는 정도이지 그 얼굴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매번 그렇듯 2층 로비에 모두를 소집해 불러모았다. 하지만 이번엔 어떠한 일감을 물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앞에 펼쳐진 과자와 음료수의 정렬로 미루어보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장은 곧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건 아니고 언제나 있는 친목도모회나 해보려고. 이 자리가 익숙한 사람도 있고, 처음인 사람도 있을텐데 그냥 인사하는 자리니까 편하게 앉아. 아, 아직 1년차 안된 애들은 빼고. 너네들은 그냥 한 명씩 자기소개하고 앉으면 돼. 뭐, 간단하지?"
말하자면 이것은 서로 그냥 안면트는 자리 인것이다. 아르고는 그렇게 큰 업체는 아니었지만 다들 사정이나 스케줄이 있는 법이고, 누가 언제 들어왔는지, 혹은 누가 사라졌는지. 이것은 상당히 신경쓰고 있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이미 3년 이상을 근무한 베테랑급 대원은 그렇다쳐도, 근래 새로 들어온 대원들에게는 그 얼굴과 성향을 하나하나 익히는데에는 의외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 마련이기에. 데스크에 적당히 몸을 기댄 소장은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부터 할까? 내 이름은 도미닉 에버즌이고 그냥 도미닉이라고 부르면 돼. 너희들의 의뢰브로커, 작전지휘, 광석병관리, 대원훈련... 아무튼 그런거 하고 있어. 아, 이 헬멧에 대해선 묻지마라, 지겨우니까. 그럼 다음은 찰리야. 자, 찰리?"
소장의 말에 유탄발사기를 무슨 인형처럼 품에 안고있는 여자아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찰리, 찰리! 찰리? 찰리찰리! 찰리이... 찰리!! 찰리찰리찰리!" "그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만나서 반갑데. 얘는 스나이퍼 포지션인 찰리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고화력을 담당하고 있지. 보다시피 찰리 밖에는 말하지 못하는 애야.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니까 살갑게 대해줘."
그 말을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그리고 찰리도 그것을 알아 주는건지 카프리니 소녀는 그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아니, 이미 과자를 뜯어먹고있다. 그 모습이 익숙한지 소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라므루 밀코. 코드명, 이젤. 이제 반년차 되는 그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기나긴 앞머리 때문에 그걸 눈치채주는 사람은 없었을 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면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이젤은 곧 자신의 커다란 뿔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까지 쓴 사람이 눈에 안 띌 거란 자신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고 생각했습니다만, 곧 정정했습니다. 여기 개성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고 이젤이 눈에 안 띈 다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이젤'입니다. 메딕이에요.... 기본적인 의료행위는 할 수 있지만... 많이 다치면... 네로 선생님한테 가주세요.."
사무소에 들어선 네로는 다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또 그 시기가 왔구나! 물론 이런 사실은 테이블에 차려진 온갖 다과와 음료수를 보면 알 수 있는 거긴 하지만 말이다. 2년동안 볼 수 없게 된 사람들도 많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네로는 시선을 돌려 뉴 페이스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과거가 어떻든 이곳에서 안식과 평온을 찾을 수 있길 네로는 한 명의 의사로서 바랄 뿐이었다. 소장 도미닉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찰리의 소개가 이어진다. 언제나 같은 단어의 반복. 그리고 그걸 능숙하게 번역(?)해주는 소장. 저런 모습은 언제나 봐도 신기했다.
자기소개라는 말에 도나의 얼굴이 굳어진다. 가뜩이나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별안간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소장과 찰리의 소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만다. 결국 차례는 다가왔고,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원망스런 눈빛으로 소장만 힐끔힐끔 쳐다본다.
"아, 저..."
몇 초의 침묵이 흐르고,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꼬리로 제 몸을 감싸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연다.
"저, 저는 돌로레스라고 해요. 편하게 도나라고 불러주세요..."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이름만 뱉어놓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어버린다.
쭈뼛대는 걸음으로 2층 로비에 도착한 리타는, 북적대며 모인 인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러 도시를 떠돌며, 아르고에 정착한지 일 년이 되어갔음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짝 긴장하는 버릇은 아직까지 고치질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길고 매끈한 낫대신 검은 치맛자락을 두 손 가득 쥐었다. 긴장이 되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리타가 당혹스러운 눈길로 소장을 바라보았다. 천조각을 가득 쥐어챈 손바닥 사이로 삐질대며 잔땀이 흘러내린다. 잠자코 소장님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신입 환영회 겸으로 각자 소개를 좀 해보라는 것 아닌가. 자기소개, 자기소개라니... 자신은 이제 막 일 년차를 채웠으니 열외이지 않을까 싶다가도, 얌체같이 저만 빠지기엔 분위기가 차마 그렇질 않다. 하는 수 없지. 리타가 느릿히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긴장하지 않고—
" 리타 무에르테, 입니다. 가드를 맡고 있고... "
리타가 잔뜩 위축된 자세로 말을 끊은 뒤, 주변을 살폈다.
" 잘, 부탁해요... "
점차 흐려지는 말끝이 땅바닥 아래로 하릴없이 떨어진다. 힘 없이 소심한 목소리가 참으로 인상적인 여자였다.